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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46화 (46/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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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이 다니는 길

“와아안벽해. 깔끔하게 끝냈다.”

타들어가는 와호의 시체를 보며 땀을 닦았다.

공격이 하나하나 잘 들어가 준 덕분에 애먹지 않고 잡을 수 있었다. 원래 와호는 환영으로 플레이어를 혼란스럽게 한 뒤 공격하는 성가신 녀석이다. 열공의 한 획으로 선빵을 먹이지 않았다면 아마 가고일 때 못지않은 난전이 됐을 거다.

폭풍의 권능성이 제 값을 톡톡히 해줬다. 마신전 때 두 번, 방금 전에 한 번 써서 이제는 두 번 밖에 더 못 쓰지만 그래도 와호의 역겨운 환영 패턴을 보는 것보다야 낫다.

“그럼 템 파밍 좀 해보실까.”

쾌도를 납검하면서 와호의 시체로 다가갔다.

불이 붙은 시체는 몇 번인가 걷어차 주자 금세 진화됐다. 우리 헤베쟝을 모욕한 새끼는 죽어서도 능욕당해야 옳다. 그야말로 옳게 된 와호라고 할 수 있으리라.

“쯧, 이코르까지 타버렸네. 이건 못 써먹겠어.”

놈의 가슴을 갈라 이코르를 꺼냈는데, 새하얀 이코르가 불에 반쯤 녹아 있었다.

이렇게 되면 안에 담겨 있는 신력이 다 새어 나간다. 챙겨봤자 상점에 팔 때쯤엔 형체도 없이 사라져 있을 거다.

못해도 1000아웬은 할 텐데 아쉽게 됐다. 그래도 뭐 와호를 잡은 진짜 목적은 돈이 아니니까.

[당신은 와호를 토멸했다. 그의 죽음이 당신의 새로운 위업이 된다.]

[보상으로 5 위업 포인트를 얻었다.]

와호도 미니 보스로 취급되기 때문에 처치 시 위업 포인트를 준다.

놈이 준 위업은 무려 5포인트. 발람의 세에레가 준 위업과 같은 수치다.

마신들보다야 훨씬 약한 놈이지만 애초에 정규 루트로 가면 잡을 일이 없는 히든 보스여서 그런지 꽤 많이 줬다. 어느 게임이든 안 잡아도 되는 몹들이 잡기도 힘들고 보상도 좋은 걸로 주는 법이다.

“이번에는 또 뭘 찍을까.”

상태창을 열면서 즐거운 고민에 빠졌다.

가장 급한 건 역시 생명과 신체다. 각각 생명력, 기력을 담당하는 스탯이므로 지금의 나에겐 어느 쪽이든 중요하다. 생명력은 말할 것도 없고 기력은 스킬을 사용하기 위해 많이 투자해둘 필요가 있다.

이제부터 주력 스킬로 쓸 기교, 회피 스킬을 배울 때 필요한 민첩도 찍어둬서 나쁠 거 없지만 당장 필요한 스탯은 아니다. 나는 일단 5의 위업을 전부 신체에 투자했다.

“이걸로 신체 스탯이 17…… 무게에 맞추려면 한참 모자라네…….”

언제 한 번 설명했듯이 장비 중량이 신체 스탯보다 높으면 초과 수치만큼 스킬 비용이 증가한다.

현재 내 장비 중량은 29. 가죽 갑옷을 풀 세트로 입는 걸로 모조라 무기까지 두 개나 착용해서 상당한 무게가 나왔다.

그에 반해 신체 스탯이 17 밖에 안 된다. 중량이 신체 스탯을 12포인트나 오버한 것이다. 이 12의 초과 수치만큼 스킬을 사용할 때마다 기력이 추가로 소모될 거다.

“너무 기교에만 몰빵했나…… 아니면 근력을 아예 안 찍는 것도 좋았을 텐데…….”

부족한 기력을 보고 있자니 일전의 선택이 약간 후회됐다.

스킬을 비용이 증가하는 건 이 게임에선 꽤나 치명적인 페널티다. 마력이든 기력이든 자동 회복되지 않는데다 회복할 수단마저 한정되어 있어서 관리가 매우 까다로운 것이다.

허나 근력을 찍는 것도 무의미한 투자는 아니었다. 기교 보정을 받는 무기라 해도 근력을 요구할 때가 있다. 등급이 높은 무기일수록 이런 성향이 두드러져서 근력도 일정 수치 이상은 찍어두는 게 좋다.

“그래 뭐, 위업이야 계속 벌 수 있으니까.”

가디스 던전에는 수많은 보스와 미니 보스들이 존재한다. 나중엔 보스 하나 잡는 걸로 10 위업을 넘게 벌수도 있으니 굳이 아까워할 필요는 없다. 꼭 보스를 처치해야만 위업 포인트를 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상태창을 시야에서 치우며 무너진 신당으로 다가갔다.

열공의 한 획에 직격당해 형체도 남지 않은 신당이었으나 무너진 잔해 속에는 내가 원하는 물건이 남아 있었다. 흙먼지를 털어내며 그것을 손에 쥐자 아이템 설명이 나타났다.

하얀 짐승의 부적

와호의 털을 엮어 만든 기이한 부적. 와호를 숭배했던 어떤 주술사가 만들었다. 소지하고 있을 시 정신 계열 상태이상을 무조건 저항한다. 단, 혼령형 적에게 받는 피해가 방어력을 관통하며 빙의에 저항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이 내가 와호를 잡으려 한 진짜 이유다.

정신 계열 상태이상 중에는 위험한 것들이 많다.

스킬을 사용을 할 수 없게 만드는 망각, 캐릭터의 통제권을 완전히 빼앗는 뇌쇄, 스스로가 가진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 자해하게 만드는 절망 등, 하나하나가 플레이어 개인은 물론 파티 전체를 초토화시킬 정도인 것이다.

이 하얀 짐승의 부적은 그토록 짜증나는 정신 계열 상태이상을 일정 확률도 아니고 완벽히 저항한다. 그 가치가 얼마나 높은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더군다나 부적은 장신구가 아니다. 즉 장비 슬롯을 차지하지 않는다는 소리다. 인벤토리에 보관하고만 있어도 그 효과가 발동되니 효율이 좋을 수밖에 없다. 숨겨진 맵에 걸맞는 훌륭한 보상이었다.

물론 강력한 효과인 만큼 페널티도 만만찮다.

이 부적을 가지고 있는 한 혼령형 적에게 공격당할 때 방어력이 적용되지 않는다. 갑옷을 아무리 잘 챙겨 입어도 방어 관통 효과로 데미지가 그대로 들어오는 것이다. 게다가 뇌쇄와 절망을 합친 최악의 상태이상, 빙의에 절대 저항할 수 없게 된다.

일반적인 장비였다면 혼령형 적이 나타났을 때 잠시 벗어두면 그만이지만 이 부적은 장비가 아니라서 그런 꼼수도 사용할 수 없다. 빙의에 걸리고 싶지 않다면 버리던 부수던 부적을 포기해야만 하는 것이다.

“뭐 혼령형 적이 언제 나타날지는 다 알고 있으니까.”

애당초 내가 공격에 쉽게 맞아주는 사람도 아니고 혼령형 적의 출현 장소도 다 외워둬서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달리 맡길 곳을 찾지 못하면 꽤나 곤란해지겠지만, 그때 가면 다 방법이 있겠지.

“이제 슬슬 가볼까.”

부적을 벨트 주머니에 잘 넣어놓고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온길 맞은편에는 바깥으로 나가는 출구가 있었다. 낡고 녹슨 철문이 가로막고 있었는데 잠겨 있긴 했어도 여는 게 그리 어렵진 않아 보였다.

“뻥발!”

콰아아아앙!!

기합과 함께 철문을 힘껏 걷어찼다. 그러자 문이 활짝 열리면서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강한 근력으로 문을 열어젖히는데 성공했다.]

본래 이 철문은 근력이 15 이상이 아니면 열지 못하는 문이다.

나는 화염의 리본의 근력 상승효과까지 더해서 총 16의 근력을 가지고 있기에 무리 없이 열 수 있었다. 만약 마신들을 처치한 뒤 근력을 투자하지 않았다면 왔던 길로 돌아가야 했겠지.

“이래서 근력이 꼭 필요하다니까.”

가디스 던전에는 이렇게 특정 스탯, 혹은 특정 스킬을 가지고 있어야 해쳐나갈 수 있는 기믹들이 상당히 많다. 이는 파티 플레이를 해야 하는 이유로 이어지기도 한다.

하나의 맵에만 해도 근력을 요구하는 구간, 지성을 요구하는 구간, 민첩을 요구하는 구간 등이 다양하게 섞여 있다. 이런 장해물들을 하나의 캐릭터로 전부 돌파하는 건 불가능하다.

대체로 이렇게 스탯을 요구하는 구간들은 필수적으로 가야하는 루트가 아니지만 지름길을 제공하거나 값진 보상이 숨겨져 있다. 그 보상 중에는 하얀 짐승의 부적처럼 강력한 효과를 가진 것도 많다. 안 챙기면 손해인 것이다.

“마을에 도착하면 파티도 구해야 할 텐데…….”

가디스 던전은 1인용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콘솔 게임이지만 동료 NPC를 영입하는 것으로 파티를 꾸릴 수 있다. 조악하게나마 멀티 플레이 기능도 있어서 유저와 NPC를 동시에 파티원으로 영입하는 것도 가능하다.

원작 게임에선 파티가 없어도 어지간한 맵들은 춤추면서도 클리어했지만 게임 세계에 오니까 파티가 절실해졌다.

그도 그럴 게 이 세계에선 한 번 죽으면 끝장이다.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동료를 구해야 한다. 혼자 다니다간 찰나의 실수만으로 죽을 수 있으니까.

“일단 힐러 하나에 원딜 하나 정도 있으면 마음이 놓이겠는데…….”

넥타르가 아무리 고성능이라도 힐러 한 명 동행하는 것보단 못하다. 넥타르는 마시는 동안 빈틈이 생길 뿐 아니라 진짜 위험할 때는 마실 엄두도 안 난다. 게임 세계에선 다급히 마시다가 죄다 흘릴 수도 있다.

반면 힐러는 내가 어그로만 잘 끌어주면 안정적으로 회복 주문을 사용해준다. 그뿐이랴, 적을 기절시켜서 공격 기회를 마련해주거나 보호막을 씌워서 생존력을 높여주기도 한다.

게다가 언데드나 악마들 한정으로 담당 일진급의 파워를 자랑하니 한 명쯤 데리고 다니면 내 험난한 여정이 한결 더 편해지리라.

원딜의 경우 내게 가장 부족한 부분인 원거리 견제력을 채워줄 수 있다. 내가 근거리에서 위험한 적들을 처치하고 원딜이 원거리형 적들을 견제, 힐러가 후방에서 보조해주면 웬만한 적들을 상대론 끄떡없을 거다.

황금 밸런스를 위해선 탱커와 근딜 한 명씩은 더 필요하지만 너무 많은 걸 바랄 수는 없겠지.

“그나저나 이제야 길이 좀 환해졌구만.”

파티에 대해서 고심하던 나는 밝게 물든 숲을 보며 숨을 돌렸다.

어두컴컴하고 음침했던 산길 초입과는 다르게 동굴 밖에선 밝은 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무성한 풀숲 곳곳에는 각양각색의 꽃들이 피어 있었고 나무들도 싱그러운 초록색으로 빛났다. 꽃 사이에선 비현실적인 색을 가진 나비들이 유유자적 날아다녔고 종종 다람쥐 같은 소형 동물들도 보였다.

마치 산길 초입이 공포 게임 도입부였다면 이곳은 힐링 게임에서 등장하는 휴식처 같은 느낌이었다. 어디선가 물소리도 들리는 게 가까운 곳에 개울도 있는 모양이다. 시원한 바람이 와호 때문에 더러워진 내 기분을 말끔히 씻어줬다.

확실히 이 근처에 강가가 있긴 했지. 그쪽을 따라 쭈욱 내려가면 카민이라 하는 강변 마을이 나올 거다. 나중에 가게 될 곳이지만 당장은 볼 일이 없으니 무시하고 다른 방향을 잡았다.

“율리아나로 가려면 이쪽이었지 아마?”

세 갈래로 나눠진 길 중에서 오른쪽을 바라보았다. 왼쪽은 방금 전에 말한 카민으로 가는 길이고 가운데 길은 페이크다.

딸랑, 딸랑딸랑.

길 한 복판에 서자 헤베가 준 방울이 맑은 소리를 냈다. 신령들이 깔아둔 환영에 반응한 것이다.

헤베의 방울은 환영이 가까워지면 이렇게 소리를 낸다. 소리가 커질수록 환영이 가깝다는 뜻이니 이걸 이용해서 어떤 게 환영이고 어떤 게 진짜인지 쉽게 구분할 수 있다.

헤베 덕분에 쓸데없이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른쪽 길로 나아갔다.

그렇게 한동안 길을 걷자 장승처럼 생긴 토템들이 날 반겨줬다. 아니, 장승처럼 생긴 게 아니라 그냥 장승이었다. 한자만 안 쓰여 있을 뿐이지 디자인이 딱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었던 것이다.

저게 보인다는 건 슬슬 위험한 지역에 들어섰다는 뜻이다. 이곳 ‘신령이 다니는 길’의 위험은 비단 와호 뿐만이 아니다.

“끼요오오오오오오옷!!”

“……!!”

그때였다.

푸드드드득!!

어디선가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산길 전체에 울려 퍼졌으며 깜짝 놀란 새들이 일제히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이번에도 여성의 목소리였다. 허나 어딘가 좀 이상했다. 평범한 여성의 것이라기엔 너무나 기괴한 비명이었던 것이다.

“뭐지……?”

반사적으로 칼자루에 손을 올리며 상황 파악에 들어갔다.

와호는 이미 죽였으니 괴물의 성대모사는 아닐 거다. 그렇다면 정말로 누군가가 위험에 처한 걸까?

“끼에에에에에에에에엑!!”

“……!”

내가 소리에 집중하고 있을 때 다시 한 번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전의 것보다 더 흉한 울음소리였다. 밴시의 것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근데 여기선 밴시 안 나오잖아…….”

의문이 가중되었다. 대체 어떤 여자가 이런 기괴한 비명소리를 낼 수 있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차라리 게임 세계의 변수로 이 맵에 밴시가 스폰됐다고 하는 게 더 신빙성 있을 것 같았다.

“살려주세요오오오오오옷!!”

당황스러워하길 잠시, 우렁찬 목소리가 귓가에서 쩌렁쩌렁 울렸다. 이번에는 그나마 사람의 것에 가까웠다. 어떻게 봐도 위기에 처한 여성이 구조요청을 하는 것으로 들렸다.

설마하니 정말 사람 목에서 나오는 소리였다니.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 나는 숲길을 가로질렀다.

내게 남을 도와줄 의리 같은 건 없다. 하지만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사람을 쿨하게 무시하고 지나갈 만큼 냉정하지도 않다. 여기서 무시하고 지나가면 매일 밤마다 저 기괴한 비명소리가 떠오를 것 같았다.

[컹! 컹! 컹!]

[크르르! 커허어어엉!!]

목소리의 근원지로 달려가자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들개 떼에서 쫓기고 있는 게 틀림없다.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서서히 들개 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놈들은 내 접근을 눈치 채지 못했다. 나는 상황을 살피기 위해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으헤에에에엥!! 싫어어어엇! 저리 꺼지란 말이야 미친 새끼들아아!!”

[커허엉! 커허어어엉!!]

[컹! 컹컹컹! 컹컹컹!]

나무 너머로 확인하자 웬 금발의 여성이 무너진 마차에 올라타고 있었다. 천막이 처져 있는 마차였는데, 들개들이 올라가기엔 높이가 좀 높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못 올라갈 정도는 아니었다.

간신히 마차 위에 올라탄 여성은 들개들이 올라오는 것을 막기 위해 지팡이를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지팡이만 천막 밖으로 내민 걸 보니 어지간히도 무서운 모양이다. 그런 여성의 저항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들개들은 침을 튀겨대며 게걸스러운 입을 들이밀었다.

여성의 얼굴은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어떻게 봐도 함정은 아닌 듯 했다. 이대로 두면 저 마차 안의 여성은 들개들에게 산 채로 잡아먹히고 말리라.

“야! 거기 똥개 새끼들!”

[크르르르르르……!]

거기까지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소리치고 말았다. 도발 섞인 내 외침에 들개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곧 놈들과 내 시선이 맞닿았다. 나는 오른손을 칼자루 위에 올린 채 왼손으로 놈들에게 손짓했다.

“다리 짧아서 올라가지도 못할 텐데 그냥 나한테 덤비지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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