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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의 시작
“어우 털 봐…….”
털 알레르기 환자가 보면 당장이라도 발작을 일으킬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아름답게 반짝거리는 게 짐승의 털이라기 보단 비단실 같았다. 그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이야 말로 저 털이 소름 돋는 진짜 이유이리라.
“털갈이 할 거면 다른 데 가서 했어야지. 이래서야 여기 나 있다 하고 광고하는 꼴이잖아.”
터널 안으로 들어가며 중얼거렸다. 결코 무서워서 이러는 건 아니다. 놈이 내 목소리를 들어도 전혀 상관없으니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것뿐이다. 일종의 도발이라고 볼 수 있다.
터널 안에는 과거에 사용했던 건축 자재들이 너저분하게 쌓여 있었다. 터널을 만들려고 했지만 모종의 이유로 끝내 완공시키진 못한 모양이다. 앞을 막고 있는 자재들을 대충 치우면서 나는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여기 어디쯤 랜턴이…… 아 찾았다.”
주위가 완전히 어둠에 휩싸일 무렵 랜턴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저기 깨지고 망가져서 오래 쓸 수는 없을 것처럼 보였다. 다행히 기름은 많아 남아있어 당장은 눈앞을 밝혀줄 수 있었다.
칙! 칙!
치이익…….
부싯돌을 사용해서 불을 붙이자 주황색 불꽃이 어두운 터널 안을 환하게 비춰줬다. 덕분에 새하얀 털들이 눈에 확 띄었으며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들도 보였다.
“헤에엑…….”
게임 캐릭터에 빙의해서 정신력이 높아진 나지만 역시 시체를 보는 건 그리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 시체들 중 대부분은 죽은 지 얼마 안 된 것들이다.
신선한 것들은 대부분 동물 시체였지만 핏기 묻은 털가죽이 내장과 함께 굴러다니는 광경은 척 보기에도 불쾌했다. 그나마 사람들 시체는 거의 다 백골이어서 다행이었다.
“더러운 새끼, 자기 집 관리를 아주 개판으로 해놨구만.”
시체들을 피하면서 터널을 걸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역겨운 냄새가 풍겨왔다.
이제 슬슬 사용해야겠지. 왼손으로 랜턴을 든 채 다른 한 손으로 헤베가 준 방울을 꺼냈다. 그것을 벽에 부딪치자 아무 소리도 안 나던 방울에서 맑은 소리가 났다.
딸랑!
소리가 나는 것과 동시에 방울에서 흘러나오는 빛도 한층 더 강해졌다.
랜턴만큼은 아니지만 이 또한 광원으로 쓸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랜턴과 방울을 동시에 들고 오른손은 칼자루 위에 올려뒀다.
그렇게 내가 만반의 준비를 갖출 무렵이었다.
[꺄아아아아아악!!]
“……!”
터널 안쪽에서 여성의 비명이 들려왔다. 찢어지는 것 같은 그 소리에 나는 등을 빳빳하게 폈다. 부끄럽지만 진짜 오줌 지릴 뻔했다. 다시 말하는데 나는 갑툭튀에 약하다.
[살려주세요!! 괴물이! 괴물이 절 잡아먹으려 해요!! 아, 안 돼! 오지 마! 오지 마아아아앗!!]
[크허어어엉! 커허어어엉!!]
내가 놀란 가슴을 추스르고 있을 때 다시금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급한 목소리를 따르는 것은 짐승의 포효였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당장이라도 이 터널의 주인에게 잡아먹힐 것 같았다. 목소리로 유추해보건대 대충 20대 초반의 여성 같았다.
하지만,
“안 통해, 병신아.”
나는 담담히 터널 안쪽을 노려보았다. 다른 모험가였다면 여성을 구하기 위해 무기를 뽑아들고 달려갔을 거다.
허나 나는 저것이 놈의 개수작이라는 걸 알고 있다. 여성의 다급한 비명 소리도, 괴물의 성난 포효도 전부 놈이 꾸민 자작극인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시무시한 짐승. 놈의 능력은 비단 모습을 감추는 것뿐만이 아니다. 사람과 동물의 목소리를 흉내 내서 사냥감을 현혹하는 것이야 말로 놈의 진가라고 할 수 있으리라.
“어디 혼자 열심히 떠들어봐라. 내가 그쪽으로 가나.”
동굴 안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무시하며 다른 길을 찾았다.
이 맵의 기믹은 간단하다. 놈의 속임수에 넘어가 정규 루트로 가면 기습을 당한다. 기습할 때 놈은 모습을 감춘 채로 공격해 와서 투명화를 해제할 방법이 없다면 일방적으로 당하게 된다.
그렇기에 놈의 현혹을 무시하고 다른 길을 찾을 필요가 있다. 한동안 동굴 벽을 조사하던 나는 어둠 속에서 이끼 낀 문을 하나 발견했다. 유심히 찾아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무수한 이끼가 문을 뒤덮고 있었다.
“어우 씨…… 곰팡내 오지네…….”
매캐한 냄새에 눈살을 찌푸리면서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여성의 비명소리도, 괴물의 포효소리도 뚝 끊겼다. 모든 것이 처음부터 없었던 일이라는 것처럼 말이다.
아마 놈은 내가 그냥 도망쳤다고 생각하리라. 지금쯤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며 다음을 기약하겠지.
이제 기습하는 건 놈이 아니다. 내 쪽에서 성대하게 선빵을 먹여주마.
문을 지나자 낡은 가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 정도 생활공간이 확보되어 있는 것이 인부들의 휴식처로 보였다. 터널이 완공됐다면 비상구 정도로 쓰였겠지.
다 무너져가는 침대들을 지나며 나는 또 다른 문을 하나 열었다. 그러자 비교적 밝은 공간이 나왔다. 천장에 구멍이 뚫려 있어서 빛이 닿는 것이었다.
그 한 가운데에 놓여 있는 것은 자그마한 신당. 알록달록한 천이 잔뜩 깔려 있는 게 우리나라 무속 신앙이 반영된 건축물 같았다.
갑자기 분위기 한국 신화라니. 가디스 던전 개발진들도 참 별나다. 메인 캐릭터들은 그리스 신화를 차용했으면서 배경은 한국 신화를 토대로 만들어놓았으니 말이다.
어쨌든 신당을 발견하자마자 나는 검을 뽑아들었다. 지금쯤 놈은 저 안으로 들어가 있을 거다. 저곳이 놈의 집임과 동시에 힘의 근원이니 저것만 파괴해도 우위를 점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뽑아든 검은 당연히 폭풍의 숏소드였다.
“바람의!”
휘이이이잉!
“상처어어어어엇!!”
콰아아아아아아!!
맹렬한 폭풍이 일직선으로 몰아쳤다. 마치 미국 중부 대륙에서 불어 닥치는 토네이도를 연상케 했다.
비바람과 함께 생성된 번개 폭풍은 동굴 전체를 뒤흔들었으며 직선 선상에 있는 모든 것을 무자비하게 파괴했다.
콰과과과곽!!
당연히 그 끝에 있는 신당도 무사하지 못했다. 폭풍은 신당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나무로 지어진 자그마한 건축물 같은 게 토네이도를 버틸 수 있을 리 없다. 신당은 말 그대로 산산조각 났고 그 안에 있던 짐승 또한 비명을 내질렀다.
[끼기아아아아아악!!]
쇠를 긁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폭풍의 굉음 속에서도 들릴 정도로 굉장히 높고 불쾌한 톤이었다. 내가 반사적으로 귀를 가로막을 때 거세게 몰아치던 폭풍도 모습을 감추었다.
[끼기이이이이익! 컹! 컹컹컹! 컹! 아아악! 으아악!! 꺄아아아악! 커흐으으으응!]
새하얀 털에 뒤덮인 호랑이 정도의 거체. 눈동자는 붉은색이었고 얼핏 보면 사자춤에 쓰는 탈과 비슷했다. 환상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그 괴생물은 온갖 생물의 비명 소리를 흉내 내면서 고통을 호소했다.
놈의 통증을 증명하듯 새하얀 털 곳곳이 피로 물들었으며 오른쪽 뒷다리는 아예 기형적으로 꺾여 있었다.
저것이 목소리의 정체이자 이 터널에 사는 무시무시한 짐승의 정체다.
“와호, 넌 진짜 게임에서나 현실에서나 좆 같이 운단 말이야.”
놈의 이름은 와호. 알 사람들은 다 아는 장산범 설화를 모티브로 만든 몬스터다. 와호가 장산범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하니 사실상 장산범 자체를 게임에 등장시킨 거라고 봐도 무방하리라.
[투사니이이임!! 아파요!! 너무 아파요오오옷!!]
“……!”
그때 와호가 익숙한 목소리를 내며 내게 소리쳤다. 순간 귀를 의심했지만 그건 틀림없이 헤베의 목소리였다. 여신님의 고통어린 목소리로 날 현혹하려는 것이다.
허나 소용없다.
딸랑, 딸랑!
놈의 목소리에 맞춰 나도 방울을 흔들었다.
그러자 방울에서 흘러나온 푸른빛이 내 몸을 감쌌다. 나를 현혹하려던 사악한 목소리는 빛에 가로막혔고 나는 멀쩡히 놈을 향해 소리칠 수 있었다.
“좆같은 새끼가 우리 여신님 목소리를 흉내 내?! 넌 절대 편히 안 죽인다!!”
딸랑, 딸랑, 딸랑!!
방울을 팔에 묶은 채 놈을 향해 달려갔다.
생전 느껴본 적 없는 분노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마치 한창 렘이란 캐릭터에 푹 빠져있을 무렵, 어떤 새끼가 우리 렘을 꽈배기라며 비웃었을 때 느꼈던 그 감정과 비슷했다.
가장 좋아하는 것을 모욕당했을 때의 그 기분. 씹덕들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큰 분노로 이어지는지 잘 알 거다. 저 새끼는 지금 절대 건드려선 안 될 부분을 건드린 것이다.
원래는 이렇게까지 할 생각 없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네놈에게 똑똑히 보여주마. 씹덕의 최애캐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말이야!!
“벽력일섬!!”
쾌도를 뽑으면서 번개처럼 달려 나갔다. 쾌도의 효과로 무기 교체의 딜레이가 사라졌다. 지금 내 모습을 다른 사람이 보면 손에 들려 있던 폭풍의 숏소드가 갑작스레 쾌도로 바뀐 것처럼 보일 거다.
그렇게 쾌도를 뽑으며 달려간 직후, 내 검이 와호의 코앞까지 다다랐다. 횡베기 자세를 취하고 있던 나는 그대로 놈의 왼쪽 눈을 길게 찢었다.
촤아아아악!
[끼기이아아아아악!!]
붉은색 피가 뿜어져 나온다. 반으로 잘려나간 눈동자가 안와에서 튀어나왔다. 좋은 감촉이다. 공격이 제대로 들어갔다.
“이제 시작이다, 씹새끼야. 네가 뭐하는 새끼든 내 최애캐를 건드리면 안 됐어!!”
씹덕들 중에선 최애캐가 모욕당하면 칼을 뽑아들 수 있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평범한 사람이 보면 그냥 존나 미친 새끼처럼 보이겠지만 이는 꼭 그 씹덕만의 문제가 아니다.
애초부터 남이 좋아하는 건 무시하거나 모욕해선 안 된다. 누구나 소중한 게 있기 마련이고, 함부로 건드려선 안 되는 게 있는 법이다. 씹덕들에겐 그것이 바로 자신이 사랑하는 최애캐인 것이다.
그걸 욕보이는 순간, 씹덕들은 자신의 하나 남은 안식처마저 짓밟히는 기분을 느낀다.
솔직히 칼 뽑아드는 건 내가 생각해도 개오바 같지만 폭력적인 성향이 드러나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아무튼 이 새끼는 나의 사랑스러운 여신님을 모욕했다. 모습을 감춘 채 그랬다면 모를까, 그 소름끼치게 생긴 면전을 그대로 드러내놓고 헤베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이건 대놓고 날 엿 먹이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내가 벌을 내려줄 거다.
“네가! 사과할 때까지!! 베는 걸 멈추지 않겠어!!”
촤자자자자자작!!
[끼기아아아아악! 꺄아아아아아악!!]
와호의 비명소리가 터널 전체에 울려 퍼졌다.
열공의 한 획에 직격당한 놈의 인내력은 0.
바닥난 인내력이 회복되기까지는 5초의 시간이 걸린다. 앞으로 5초 동안 놈은 내게 맞고만 있어야 하는 것이다.
[죄, 죄송…… 죄송합……!!]
그렇게 수차례 쾌도를 휘두르자 놈의 입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린아이의 목소리를 흉내 낸 와호는 고통으로 점철된 사과를 건네려 했다.
하지만 나는 받아주지 않을 거다.
“사과해봤자 늦었어!!”
[끼에에에에에엑!!]
사과해서 해결될 일이었으면 이 세상에 법 같은 건 없었을 거다.
최애캐를 모욕한 건 중대 사항이다. 설령 사과를 받았다 해도 내 기억 속에선 저 좆같은 새끼가 여신님 목소리를 흉내 내는 광경이 영원토록 남을 거다.
잘 때도 생각나고, 밥 먹을 때도 생각나고, 심지어는 헤베와 섹스할 때도 생각날지 모른다.
그런데 이제 와서 사과? 사과라고?
죄송하다며 위기를 모면하려는 것부터가 놈의 심성이 글러먹었다는 증거다. 놈은 절대 나와 헤베에게 미안해하지 않을 거다. 오로지 칼에 베이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안함을 가장하는 것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욱더 용서가 안 됐다. 나는 있는 힘껏 놈의 입을 향해 쾌도를 박아 넣었다.
푸후우우욱!
“이 입이냐?! 우리 여신님의 고운 목소리를 흉내 낸 게 이 입이야?!”
[끼케에에에에엑!!]
피눈물까지 흘리며 괴로워하는 와호. 그야 그렇겠지. 내 쾌도가 놈의 혀를 찢으며 식도를 꿰뚫었으니까.
슬슬 5초가 지나서 와호도 내게 공격을 가할 수 있었으나 방금 전의 일격으로 놈은 그로기 상태가 됐다. 나에게 다시 딜 타임이 주어진 것이다.
“우리! 여신님은! 너 같은! 새끼가! 흉내 내도! 되는 분이! 아니라고!!”
퍽! 퍽! 퍽! 퍽! 퍽! 퍽! 퍼어억!!
[케헥! 케엑! 컥! 끄악! 아악! 끄하아아악!!]
전술 조준경을 쓴 군인 아저씨처럼 놈의 안면을 강타했다. 주로 멀쩡한 오른쪽 눈을 노리고 말이다.
내 연달은 주먹질에 놈의 눈동자는 끝내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짓이겨졌다. 뭉개진 눈알이 피와 한 데 섞여서 주르륵 흘러내렸다. 방어력이 0인 놈이라 신체의 내구도도 약한 것이었다.
[끼기이이이익……!!]
결국 장님이 된 와호는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이리저리 비틀거렸다. 놈이 비명을 지를 때마다 입에서 피가 왈칵 뿜어져 나왔다.
열공의 한 획으로 들어간 데미지만 1036이다. 그에 반해 놈의 생명력은 3천. 내가 칼로 수차례 베어 넘겼으니 사실상 빈사 상태라고 봐도 좋을 거다.
지금 상태에선 한 대만 툭 쳐도 죽을 것 같았지만 난 이대로 끝낼 생각 없다.
“넌 너무 무례했어.”
촤악!
하나 남은 기름병을 와호에게 뿌렸다. 그 후, 벨트에 걸어뒀던 랜턴을 꺼내들어 놈에게 집어던졌다.
“다시는 씹덕을 무시하지 마라.”
화르르르르르륵!!
[끼아아아아아아아아악!!]
불길이 치솟았다. 와호의 새하얀 털이 불에 그으려 새카맣게 타들어간다.
빈사 상태에 빠져 있던 와호는 바닥을 미친 듯이 구르면서 괴로워했다. 놈은 불타 죽는 그 순간까지 자신이 한 행동을 후회하리라.
여신님을 모욕한 잡몹에게 어울리는 최후였다.
============================ 작품 후기 ============================
아직 투표가 끝나지 않았으면 외형 설정은 1화부터 바꾸기로 했습니다. 리메이크가 아닌 편수를 유지한 채 수정하는 형식으로 갈 것이며 외형 관련 묘사 외엔 크게 바뀌는 부분이 없는 터라 계속 보고 계시던 독자 여러분들은 굳이 다시 보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예외로 헤베가 다키의 맨 얼굴을 보고 기절하는 장면은 헤베와의 첫 야스씬으로 바꿀 예정입니다. 수정이 끝나면 따로 공지해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