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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의 시작
헤베의 말에 나는 무어라 대답할 수가 없었다. 과연 씹덕겜 히로인 아니랄까봐 애니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를 눈 하나 깜짝 않고 했다.
그렇게 오글거리는 대사조차 지금의 나에겐 무척 달콤했다. 로맨스를 동경하던 소녀가 첫 사랑에 빠지면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가슴이 쉴 새 없이 두근거렸다. 나도 모르게 가슴을 부여잡았다. 점점 커지는 심장 소리를 어떻게든 숨기고 싶었다.
“가, 감사합니다 여신님……. 더, 덕분에 기운이 나네요…….”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형식적인 인사를 건넬 수 있었다.
사실 뭐라 더 말하고 싶었지만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사고가 마비됐으며 심장박동만 갈수록 커져갔다. 이런 상황에서 멋있는 대답을 생각해낼 수 있을 리 없다.
“후후훗. 이걸로 여행하는 내내 절 잊지 못하시겠죠?”
당황스러워하는 내게 헤베가 장난기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귀여우면서 요망한 장난이었다. 이런 짓을 당했는데 당연히 못 잊지. 광주리를 볼 때마다 입 맞추는 헤베의 모습이 조건반사적으로 떠오를 거다.
“제가 여신님을 어떻게 잊겠어요. 여행하는 동안 계속 생각날 거예요.”
“정말요~?”
“정말요! 진짜 다 걸고요!”
헤베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진다. 나는 부담감을 느끼면서 한 발자국씩 물러났다.
그런 내게 헤베가 손을 뻗었다. 어젯밤 일 때문인지 그녀의 손이 몸에 닿자 절로 흥분되었다.
그렇게 내 목에 양팔을 건 헤베가 서서히 입술을…….
“쪽…….”
“어어?!”
다시금 입 맞추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근원지는 내 이마였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이마 전체에 퍼져 나갔다.
기습적인 키스에 나는 다시 한 번 얼어붙었다. 광주리에 뽀뽀할 때도 진짜 가슴이 두근거려서 미치는 줄 알았는데 지금은 정신이 나가버릴 지경이었다.
부끄럽다 못해 머리가 화산처럼 폭발할 것 같다. 이 두근거림을 대체 어떻게 해야 되지? 라노벨 주인공들은 이럴 때 어떻게 하더라?
“기왕 안 잊으시는 거, 절 생각할 때마다 두근거리셨으면 좋겠어요. 이 정도면 충분하겠죠?”
“네, 네…… 그렇긴 한데…….”
까치발을 선 채 헤베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나는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어렵사리 대답했다. 그런 내 모습이 재밌기라도 한지 헤베는 쿡쿡 웃었다. 그녀가 내게 떨어질 때까진 몇 초나 시간이 걸렸다.
“부담스러우셨다면 죄송해요 투사님. 지금 헤어지면 당분간 못 만날 테니까 장난 좀 쳐봤어요. 화나신 건 아니죠……?”
이제 와서 그런 걸 묻다니. 여러 의미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마음 같아선 ‘여신님은 자지를 화나게 하는 천재예욧!!’ 이라 외치며 팬티를 벗어던지고 싶었으나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아서 차마 그러지 못했다.
사실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도 욕정이라기 보단 설렘이었다. 원색적인 욕망이 아닌 순수한 사랑이 날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화나긴요! 이런 장난이면 언제든 환영이죠! 매일매일 해주셔도 돼요!”
“어머, 진짜요? 그러면 이제부터 만날 때마다 키스해도 되는 거죠?”
“네, 네……?”
요염한 눈빛으로 질문하는 헤베. 그녀의 왼손이 고양이처럼 구부러졌다. 그것은 마치 날 잡아먹겠다는 의사표현처럼 보였다.
이쯤 되면 익숙해졌다 싶었는데 역시 아니었다. 나는 머리라도 맞은 것처럼 멍청하게 되물었고, 헤베는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자신이 한 말을 주워 담았다.
“농담이에요~ 그보다 바깥은 산세가 험해서 길이 별로 없을 텐데, 마을 쪽으로 가시나요?”
헤베가 화제를 바꾸고서야 나도 침착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나는 한 차례 헛기침을 한 뒤 그녀에게 대답했다.
“어흠…… 아뇨, 마을은 악마들이 습격해서 초토화됐거든요. 이젠 산길 외엔 갈 곳이 없어서 그쪽으로 내려가려고요”
“세상에…… 그거 큰일이네요…… 거기는 가급적 안 가는 편이 좋을 텐데…….”
헤베의 얼굴에 걱정스러움이 번졌다. 나 또한 썩 유쾌하지 않은 기색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자네스 영지가 악마들에게 점령당한 시점에서 산 아래로 내려갈 길은 단 하나 밖에 없다.
다른 길은 사람이 다닐 수 없을 만큼 험하거나 산사태 등으로 다 막혀있다. 직접 가서 본 건 아니지만 이 세계가 원작 게임의 영향을 받는다는 걸 고려하면 굳이 확인할 필요는 없으리라.
그럼 하나 남은 길을 쓰면 되지 않겠냐고 할 텐데, 문제는 그 길이 가디스 던전에서도 가장 복잡하기로 악명 높은 길이라는 거다.
길 자체도 복잡할뿐더러 맵 자체에 성가신 기믹이 있다. 그곳에 사는 신령이란 존재들이 수시로 환영을 깔아둬서 같은 길을 맴돌거나 이상한 곳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어쩔 수 없죠 뭐. 악마들이 버젓이 있는 마을을 뚫고 갈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도 맨몸으로 산길에 들어서면 분명 길을 잃을 거예요. 그곳의 신령들은 장난기가 심해서 여행자를 헤매게 하거든요.”
심려어린 기색으로 말하던 헤베가 도구 꾸러미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자그마한 방울이었는데 흔들어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것을 양손으로 쥔 채 주문 같은 것을 외우자 방울에서 하늘색 빛이 흘러나왔다. 은은한 그 빛은 마치 작은 불꽃이 일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이윽고 헤베가 방울을 내게 넘겨주면서 설명했다.
“제 축복을 담은 방울이에요. 산길을 지나실 때 사용하면 신령들의 장난을 피할 수 있을 거예요. 당장은 소리가 안 나지만 강한 충격을 주면 하루 동안 효과가 지속되죠.”
여신의 축복이 담긴 방울
청춘의 여신 헤베가 축복한 작은 방울. 자그마한 금색 방울에 붉은색 끈이 묶여 있다. 강한 충격을 주면 활성화되며 하루 동안 플레이어에게 환각 저항 효과를 부여한다. 방울을 잃어버리면 그 즉시 효과가 사라진다.
내가 방울 효과를 상기하고 있을 때 헤베가 덧붙였다.
“방울을 쓰면 신령들의 장난은 면할 수 있겠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않아요. 신령들이 없어도 산길은 충분히 위험한 곳이거든요. 특히 큰길 쪽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시무시한 짐승이 살아서 더 위험해요…….”
헤베의 말이 맞다. 신령들의 장난은 플레이어를 성가시게 만드는 기믹 중 하나일 뿐, 산길이 위험한 이유는 따로 있다.
그 위험을 만들어내는 존재가 바로 헤베가 언급한 무시무시한 짐승이다. 그놈이 있는 한 가는 길이 꽤 험난해질 거다.
적어도 놈의 이동 경로인 큰길 쪽으론 못 가겠지. 함부로 발을 들였다간 보이지 않는 공격에 맞고 눈 깜짝할 사이에 찢겨죽을 거다.
“그러니까 멀리 돌아가더라도 큰길 쪽은 꼭 피하세요. 알겠죠?”
“명심할게요, 여신님.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헤베에게 대답하면서 나는 물건들을 챙겼다. 헤베는 그런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나는 헤베의 걱정을 최대한 덜어주고자 활발하게 손을 흔들었다.
“그럼 다녀올게요! 건강히 잘 있으세요!”
“투사님도요……! 돌아오실 때까지 줄곧 기다리고 있을게요!”
분수대를 지나 성소 초입에 있는 여신상으로 향했다. 여신상에 손을 가져가자 이동할 수 있는 다른 여신상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은 성소로 올 때 썼던 폐허의 여신상뿐이었다.
“지금 가면 며칠은 지나야 돌아올 수 있겠지?”
여신상을 이용하기 전에 성소의 전경을 눈에 담았다.
온전한 여신상을 발견하면 언제든지 성소로 돌아올 수 있다. 지역 이동 기능을 통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순식간에 올 수 있기 때문이다.
허나 온전한 여신상도 어디에나 있는 건 아니다. 적어도 다음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는 다시 돌아올 수 없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아쉬움이 밀려왔다. 여기서 지낸 건 고작 이틀뿐인데 벌써부터 집을 떠나는 기분이었다.
아니, 사실상 이제부턴 성소가 내 집이라고 볼 수 있겠지. 나는 원래 세계로 돌아갈 생각이 없으니까. 원작 게임에서도 성소가 하우징 기능을 겸했고.
“잘 있어라, 옛신의 성소. 조만간 다시 올게.”
정 붙은 장소에게 재회를 기약하며 여신상을 사용했다. 밝은 빛이 온몸을 감쌌고 나는 어느덧 폐허에 와 있었다.
“살풍경한 건 여전하구만.”
건물 내부를 잠식한 초목들도, 흉하게 무너진 석상들도 그대로였다. 이틀 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당연한 얘기겠지.
아침 햇살이 내리쬐는 신전 폐허를 벗어나 산길로 접어들었다. 저 멀리선 악마들에게 점령당한 자네스 영지가 보였다. 불길은 모두 꺼졌지만 처참한 광경인 건 변함없었다.
지금쯤 악마들도 소환 부작용에서 벗어났을 테니 본격적인 지옥도가 펼쳐지고 있으리라. 아마 마을 어디서도 생존자는 찾아볼 수 없을 거다.
“…….”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괜히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추방자 신분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주민들도 멀쩡히 살아남았을까? 하드코어 튜토리얼이 아닌 일반 튜토리얼로 시작했다면 아크 데몬의 소환도, 악마들의 침공도 전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들의 죽음은 내 선택에 의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마음이 편치 않았다. 덩달아 내 앞에서 죽어가던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역시 트라우마가 안 남은 건 아니구나…….”
원래 세계의 나였다면 이 시점에서 토 하고 실성하고 난리도 아니었을 거다. 게임 세계의 나는 그보단 강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는 건지 PTSD 수준으로 괴롭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감흥이 없는 건 아니다. 죽은 이들을 향한 연민, 내 선택에 의한 후회가 날 끊임없이 괴롭혔다.
“기회가 되면 명복이라도 빌어드려야지.”
자네스 영지엔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지금보다 더 강해진 후에 영지에 소환된 악마들을 토벌하러 갈 거다. 놈들을 전부 처치하고 시체를 매장하면 자네스 영지의 주민들도 편히 눈 감을 수 있으리라.
마침 그와 관련된 의뢰도 있다. 운 좋으면 그것을 계기로 여기사와 재회할 수 있겠지.
“그러고 보니 그 친구는 잘 도망쳤으려나?”
문득 여기사가 걱정됐다. 인사불성이 돼서 뛰쳐나갔는데 과연 무사히 영지를 빠져나갔을지 의문이다.
당시엔 악마들이 소환 후유증 때문에 떡이 되어 있던 상태여서 무사 탈출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여기사 역시 비무장 상태였다.
그녀의 발이 어지간히 빠르지 않으면 쉽게 빠져나갈 수 없었을 거다. 아무리 떡이 됐더라도 악마들의 수가 워낙 많으니까.
“제발 탈출했으면 좋겠다……. 탈출 못했으면 나 때문에 죽은 것 같잖아.”
비록 나한테 온갖 욕을 하며 도망쳤지만 내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다. 그녀의 도움이 없었다면 난 번개에 맞고 겉바속촉이 됐겠지.
부디 허무하게 죽진 않았으면 한다. 그래야 화염의 리본도 돌려줄 수 있을 테니까.
불안한 심정을 뒤로 하며 산길을 나아갔다. 자네스 영지 쪽에서 고개를 돌리자 우거진 나무들이 날 반겨줬다. 나무가 어찌나 울창한지 하늘이 안 보일 지경이었다. 덕분에 숲으로 몇 발자국만 들어가도 주위가 저녁처럼 어두워졌다.
“모니터 너머로 볼 땐 몰랐는데 완전 공포 게임이 따로 없네…….”
다행히 길은 명확하게 나 있어서 걷는데 불편함은 없었다. 이곳이 바로 헤베가 말한 큰길이다. 안전하게 가려면 이곳을 벗어나 숲 쪽으로 걸어야하지만 나는 구태여 큰길을 택했다.
이유는 두 말할 것도 없다. 이곳에서 등장하는 그 무시무시한 짐승을 잡기 위해서였다.
“이제 와서 초반부 미니 보스한테 쫄 필요는 없지.”
위험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위험을 내 손으로 제거하는 것이다.
헤베는 위험하다고 거듭 강조했지만 결국 짐승도 가디스 던전의 몬스터 중 하나일 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특성은 성가시기 그지없지만 헤베에게 축복받은 방울을 받아온 지금은 그조차도 문제가 되지 않는…….
까악! 까악! 까아악!
“으악 씨발아!!”
자신만만하게 길을 걷던 도중 난데없이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숲의 어둠을 뚫고 들려온 소름끼치는 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그래, 솔직히 분위기가 너무 음산해서 살짝 무섭기는 하다. 게임에선 3인칭으로 봤지만 지금은 1인칭이지 않은가. 어둡고 조용한 숲을 혼자서 걷고 있는데 무섭지 않은 게 더 이상하다.
“후우…… 까마귀 새끼가 진짜…….”
숨을 가다듬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긴장해서 그런지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스산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젖은 머리를 스쳐지나가서 음산함이 더해졌다.
휘이잉, 휘이이이잉.
산 위여서 그런지 바람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나뭇잎과 까마귀 깃털을 보며 나는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원래 이 맵에 까마귀가 있던가? 원작 게임에선 딱히 까마귀가 등장하는 연출은 없었던 것 같은데. 이것도 게임 세계의 변수라고 봐야 되나.
살짝 불안해져서 칼자루에 손을 얹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한동안 걷다 보니 샛길이 하나 보였다. 복잡한 길의 연속이었지만 내 기억은 짐승의 거처를 무리 없이 찾아낼 수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나는 어느 으슥한 동굴을 하나 발견해냈다. 자연적인 동굴이라기 보단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터널 같았다.
물론 지금은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은 음침한 공간일 뿐이다. 터널 입구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피어있었고 곳곳엔 이끼가 붙어 있었다. 기분 탓인지 터널 앞에 도달하자마자 끊임없이 불러오던 바람이 뚝 끊겼다.
“반은 귀신 아니랄까봐 참 지 같은 데를 좋아하네.”
그렇게 터널 앞으로 다가선 나는 눈에 띄는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입구 근처에 새하얀 털이 잔뜩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