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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42화 (4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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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의 시작

“여신님? 여기서 뭐하세요?”

마중 나온 헤베를 보며 나는 반사적으로 질문했다.

설마 날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평소라면 왜 마중 나왔나 의아해했겠지만 어제 그렇고 그런 일이 있다 보니 이렇게 마중 나오는 게 그렇게 이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제 일을 계기로 헤베와 더 가까워진 게 실감돼서 마냥 기쁠 뿐이었다.

“별 건 아니고요! 투사님이 바로 안 오시기에 무슨 일이 있나 해서 나와 있었던 거예요! 어, 어디 들렀다 오셨나 봐요?”

이야기하는 내내 헤베는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평소와 같은 상냥한 모습도, 종종 보여주었던 요망한 모습도 지금은 모두 수줍음에 가려졌다.

그녀도 어젯밤 일을 의식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내 쪽에서도 주저할 이유는 없지. 나는 최대한 태연함을 가장하면서 이야기했다.

“식사하기 전에 브릴린트 누나 좀 보고 왔어요. 그나저나 어젯밤엔 잘 주무셨나요? 제가 너무 대충 데려다드린 건 아닌지…….”

“아, 아뇨! 그럴 리가요! 오히려 도중에 잠들어버린 제가 죄송하죠!”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헤베가 고개를 마구 가로저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큰 나머지 나도 흠칫 놀랐다.

이건 단순히 의식하고 있는 수준이 아니라 엄청 긴장한 거 아닌가? 자세히 보니까 그녀의 몸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시선도 자꾸 피하는 게 여러모로 안절부절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그런 의미에서 말인데요…… 혹시 오늘 다른 일정이 없으시면 어제 하던 걸 마저 이어서 하는 게 어떨까 하는데…… 어떠세요……?”

한동안 머뭇거리던 헤베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계속 긴장했던 이유는 아무래도 이것 때문인 모양이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게 날 유혹했던 헤베였으나 막상 나랑 한 번 섹스한 뒤에는 선뜻 권하기가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그런 세세한 변화가 너무나 귀여웠다. 마음 같아선 당장 오케이하고 그녀와 침대에서 제대로 뒹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난 그녀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헤베와 몸을 섞으며 쾌락을 향유하는 것도 좋지만 그렇다고 성소에 틀어박혀 있을 수만도 없다. 성소에 눌러앉아 쾌락만 쫓다 보면 금세 어느새 목표 같은 건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리라.

“죄송해요, 여신님. 오늘은 힘들 것 같아요. 당장 오전부터 떠날 생각이거든요.”

“떠나신다고요……?! 성소를요?! 영원히요?!”

내 말을 들은 헤베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불안해하는 그녀를 진정시키며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부정했다.

“아뇨, 아뇨. 영영 떠나는 게 아니라 여행을 떠나는 거예요. 투사의 임무를 수행하러 가야죠.”

“아…… 그, 그러네요! 아하핫……! 저도 참 아직 잠이 덜 깼나 봐요……!”

뭔가 어젯밤 이후로 헤베가 좀 의존적으로 변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귀여운 여신님이 내가 없으면 못 사는 몸이 되다니. 솔직히 겁나게 꼴렸다.

“그보다 시장하시죠……?! 아침상은 제가 미리 차려놨어요. 어서 와서 드세요……!”

“마침 배고프던 참이었는데 잘 됐네요. 오늘도 잘 먹을게요.”

내 설명에 헤베는 겸연쩍게 웃었고 언제 불안해했냐는 듯이 날 식당 안으로 이끌었다. 마침 나도 배가 고프던 참이라 그녀와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헤베가 준비해준 자리는 주방과 가장 가까운 자리였다. 그렇게 자리에 앉아 식기를 들려할 때, 문득 아침상이 어제와 많이 다르단 걸 깨달았다.

“……오늘은 메뉴가 더 화려하네요?”

어제 먹었던 아침은 전형적인 서양식 브런치였다. 그에 반해 오늘은 뭔가 이것저것 많았다.

돼지고기로 만든 것 같은 꼬치구이와 각종 해산물들은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웠다. 과일과 야채들도 한층 더 예쁘게 장식되어 있었으며 토마토소스를 베이스로 한 스튜에선 그윽한 향이 풍겨왔다.

이 정도면 호텔에서 먹는 뷔페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메뉴의 가짓수도 그렇고 퀄리티도 그렇고 어쩌다가 가본 5성급 호텔 뷔페와 맞먹는 수준이었다.

“오늘 아침은 제가 실력 좀 발휘해봤어요! 투사님이 지배자의 자격을 얻고 맞이하는 첫 아침인데 그저 그런 음식을 대접해드릴 순 없으니까요!”

메뉴에 압도당한 나에게 헤베가 자신 있게 설명해줬다. 그렇다면 이 많은 요리를 헤베가 혼자서 준비했단 말인가? 대체 몇 시부터 일어나서 준비한 거지? 해산물 같은 건 또 어디서 구한 거고?

온갖 의문이 피어올랐으나 굳이 질문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나는 원래 밥을 잘 안 먹는 편이어서 배고픔을 별로 못 느끼는데, 화려하게 차려진 산해진미들을 보니까 위장이 비명을 질러댔다.

생각해보니 어젯밤에도 넥타르 차 한 잔 마신 거 외에는 아무 것도 안 먹었다. 그것까지 떠올리니까 당장이라도 음식들을 우겨넣고 싶어졌다.

몇 시부터 준비했든, 재료를 어떻게 조달했든 그런 게 무슨 상관인가. 헤베가 정성스럽게 준비해줬다면 나 또한 맛있게 먹어주면 된다.

나는 곧장 포크와 나이프를 들면서 이야기했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여신님.”

“네, 투사님. 맛있게 많이 드세요.”

내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자 헤베도 활짝 웃었다. 그녀도 아침을 아직 안 먹은 건지 내 앞자리에 살포시 앉아서 식기를 들었다.

“오늘은 먼저 안 드셨나 봐요?”

“헤헤헤……, 투사님만 혼자 드시면 쓸쓸할 것 같아서 저도 안 먹고 있었어요. 같이 먹어도 될까요?”

“그럼요 물론이죠.”

사이좋게 마주보며 아침 식사를 하다니. 이래서야 완전 부부 같잖아.

우리는 만난 지 3일 밖에 안 된 사이고 어쩌다가 분위기를 타서 섹스 한 번 했을 뿐이지만 내 머릿속에서 헤베는 이미 내 여친이나 다름없었다.

누가 보면 구와악 소리를 내면서 욕지거리를 내뱉을 생각이었으나 내 개인적인 망상은 아닌 듯했다. 맞은 편 자리에서 날 바라보는 헤베의 눈빛에는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녀에게 마주 웃어준 뒤 식탁 위의 요리를 하나하나 맛봤다.

가장 먼저 맛본 건 새우와 홍합을 함께 볶은 요리였는데, 살짝 매콤하면서도 새우 특유의 통통한 식감이 잘 살아있었다. 끝에 느껴지는 불맛은 요리의 풍미를 한층 더 더해주고 있었다.

실력 발휘 했다더니 어제 먹었던 요리들 보다 훨씬 맛있었다. 설마 어제 요리가 실력을 숨긴 채로 만든 거였을 줄이야. 새삼 헤베의 요리 실력에 경이를 느꼈다.

“이것도 드셔 보세요, 투사님. 성소 근처에 사는 멧돼지를 잡아서 만든 수블라킨데 간이 아주 잘 됐어요!”

내가 해산물 요리를 먹으면서 감탄하고 있을 때 헤베가 꼬치구이를 먹기 좋게 썰어줬다.

자신의 식사는 뒤로 하고 내가 먹을 걸 먼저 챙겨주는 것이었다. 정말 행동거지 하나하나에서 배려심이 넘쳐흘렀다.

“가, 감사합니다. 그래도 이렇게 챙겨주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애도 아니고, 여신님도 식사하셔야죠.”

“괜찮아요~ 투사님을 보필하는 게 시녀의 의무인 걸요. 이것도 제 업무 중 하나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자아, 아앙~ 해보세요.”

“……!”

꼬치구이를 먹기 좋게 썰어서 내미는 헤베. 그걸 보자마자 내 심장은 크게 요동쳤다.

순간 내가 라노벨 주인공이 된 줄 알았다. 예쁘게 생긴 히로인이 나한테 음식을 먹여주는 상황. 어떻게 봐도 라노벨, 애니에서나 나올 법한 이벤트이지 않은가.

현실의 연인들도 이런 걸 하나? 연인은커녕 친구도 안 사귀어봐서 모르겠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러는 와중에도 헤베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음식을 내밀고 있었다.

자아, 아앙 소리를 들었을 때는 참을 수 없이 부끄럽지만 헤베의 미소를 보고 있자니 입을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면서도 조심스럽게 입을 가져갔다.

“아, 아앙…….”

덥석. 포크에 찍힌 고기를 입에 머금었다. 풍부한 육즙이 진한 향기와 함께 입 안 가득 퍼진다.

고기의 잡냄새 같은 건 전혀 나지 않았다. 레몬의 상큼함과 숯불의 풍미 같은 것만 느껴질 뿐이었다. 이 꼬치구이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한 입만으로 알 수 있었다.

허나 그런 훌륭한 맛도 지금의 내게는 부수적인 것에 불과할 뿐이었다. 나는 헤베의 얼굴을 보는 데 온 신경이 쏠려 있었다.

“맛이 어떠세요……?”

내가 한참 동안 말이 없자 헤베가 조심스레 물었다. 당황한 나는 다급히 칭찬을 퍼부었다.

“어, 엄청 맛있네요! 제가 먹어본 꼬치 중에서 제일 맛있어요! 최고예요!”

“그,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제일 자신 있는 요리였는데 투사님이 맛있게 드셔주셔서 기뻐요!”

내 호평에 헤베도 기쁜 듯이 이야기했다. 우리는 한동안 어색한 분위기를 유지하면서 식사를 재개했다.

헤베 쪽도 별 말이 없었다. 분명 의식하고 있는 걸 거다. 본인 입으론 시녀의 업무라고 했지만 오붓하게 음식을 먹여주는 상황에 그녀도 꽤나 부끄러움을 느꼈으리라.

우물우물우물, 우물우물우물!

슬쩍 고개를 들자 헤베가 열심히 음식을 먹고 있었다. 볼이 빵빵하게 부푼 게 햄스터를 보는 것 같았다. 귀가 살짝 빨개진 걸로 보아 내 예상은 틀림없는 듯했다.

자기가 시작해놓고 정작 스스로 더 부끄러워하다니. 귀여워 미치겠다. 내가 자존감이 높았다면 지금 당장 그녀를 끌어안고 아구아구 귀여워! 하면서 주책을 떨었을 거다.

이대로 헤베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감상하는 것도 좋겠지만 막상 침묵이 이어지자 조금씩 불편해졌다. 뭔가 이야깃거리가 없을까 생각하다가 헤베에게 부탁하려던 것을 떠올렸다.

“저 여신님. 식사 끝나고 뭐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네, 네?! 부, 부탁이요? 얼마든지요!”

먹는데 집중하던 헤베가 벌떡 일어나며 대답했다. 어지간히도 놀란 모양이다. 그녀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도록 나는 최대한 자연스레 이야기를 이었다.

“어디서 주워들은 얘긴데, 여신님들 중에선 사람의 잠재력을 일깨워주실 수 있는 분도 있다더라고요. 혹시 여신님도 그런 능력이 있으시면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아아~ 운명 인도 말씀이시군요? 마침 저도 이야기해드릴까 했는데 잘 됐네요. 잠시 옆에 앉아도 괜찮을까요?”

“아, 네. 물론이죠.”

냅킨으로 입을 톡톡 닦은 헤베가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녀의 뺨 한쪽에는 여전히 소스가 묻어 있었다. 이야기해줄까 하다가 괜히 부끄러워할 것 같아서 모른 척했다.

“투사님이 말씀하신 그 힘은 본래 운명의 여신들께서 가지고 계셨던 힘이에요. 저는 성소의 시녀가 되면서 그 힘을 양도 받았죠.”

그렇게 말하며 헤베가 양손을 모았다. 마치 기도하듯이 눈을 감기를 잠시, 그녀가 눈을 뜨며 손을 펼치자 그 사이에서 홀로그램 같은 푸른색 화면이 떠올랐다.

파앗!

“이 힘을 사용하면 투사님 내면에 잠들어 잠재 능력을 끌어낼 수 있어요. 훗날 사용하게 될 능력을 미리 개방한다고 보시면 된답니다.”

“그거 참 굉장하네요…….”

“물론 하고 싶다고 해서 짠하고 되는 건 아니에요. 투사님이 적을 쓰러뜨리면서 쌓은 위업을 투자해야만 능력을 개방할 수 있죠.”

가디스 던전에서 스킬을 습득하는 방법은 여러 가진데, 가장 대표적인 게 헤베의 운명 인도다.

운명 인도를 이용하면 여러 스킬들이 표시된 ‘운명 항목’이 나오며 이곳에서 가디스 던전 내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스킬을 습득할 수 있다.

물론 아무 스킬이나 막 배울 수 있는 건 아니다.

운명 항목 내에선 수많은 스킬 카테고리가 존재하며 상위 등급의 스킬을 배우기 위해선 같은 카테고리의 스킬을 일정 개수 이상 습득할 필요가 있다.

요구 스탯이 20이상인 스킬을 배우려면 동일한 카테고리의 스킬 3개를 배워야 된다, 뭐 이런 식이다.

하물며 같은 전투기술이라고 해도 그 안에서 직검 전용 전투기술, 창 전용 근접 전투기술 등으로 세부 카테고리가 나눠진다.

무턱대고 아무 스킬이나 찍으면 이도저도 아닌 캐릭터가 되므로 원하는 카테고리를 한두 가지 정해서 거기에만 정진할 필요가 있다.

“항목에 있는 능력 중 원하는 걸 고르셔서 위업을 투자하시면 돼요. 그러면 그 힘은 온전히 투사님의 것이 될 거예요.”

스킬 카테고리를 가리키며 헤베가 설명해줬다.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기교 전투기술을 선택했다.

기교 전투기술은 기교 스탯을 다루는 캐릭터들의 기초 스킬 같은 것이다.

‘도 전투기술’이나 ‘단검 전투기술’ 같은 무기 전용 스킬들은 대체로 높은 스탯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런 스킬을 배우기 전에 거쳐 가는 선행 스킬군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거기서 가장 효율 좋은 스킬 5개를 선택했다. 대부분 반격에 특화된 스킬이었으면 다수의 적을 타격할 수 있는 스킬도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까지는 맨몸으로만 싸워야 해서 들개들에게도 고전했지만 이 스킬들을 배운 후에는 사정이 많이 달라질 거다.

“결정하셨나요?”

“네, 처음이어서 그런지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요.”

“후훗, 금방 익숙해지실 거예요. 개방할 능력을 선택하셨다면 제 손을 잡아주세요.”

헤베가 시키는 대로 그녀와 손을 맞잡았다.

그러자 나와 헤베 사이에서 하늘색 빛이 반짝였고 그것은 이윽고 내 안으로 스며들었다. 무언가가 달라진 게 느껴지면서 두 눈이 번쩍 뜨였다.

“……!”

[잠재능력을 개방하여 새로운 스킬을 손에 넣었다.]

[파고들기, 사영격, 격변, 바닥 쓸기, 섬격 스킬을 습득했다.]

[위업 포인트를 15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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