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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41화 (4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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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의 시작

“구 신전에서 던전을 하나 발견했는데 거기 있더라. 누나 주면 좋아할 것 같아서 가져왔어.”

“구 신전에 던전이 있었다고?! 그런 말도 안 되는……!”

내 설명에 브릴린트는 좀처럼 납득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폐허로 방치되어 있던 신전에 던전이 있었다는 것도 믿을 수 없는데, 그런 곳에서 자기 선조의 유물이 숨겨져 있었다니. 그녀 입장에선 허무맹랑하게만 들리리라.

그렇기에 나는 헤베에게 그랬던 것처럼 왼손의 문양을 보여주었다.

“이거면 믿을 수 있겠어?”

“……! 다키 너……!”

브릴린트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놀라운 일들이 연이어 일어나자 머리가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그런 브릴린트를 배려하여 나는 천천히 내가 겪은 일들을 들려주었다. 내 모험담에 브릴린트는 좀처럼 경악을 거두지 못했다.

자신의 작업도 까맣게 잊고 이야기에 경청하던 브릴린트는 이내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가…… 그러면 우리 선조님이 마신들에게 협력했었다는 거야……? 대체 왜…….”

인내하는 자의 신전은 마신들의 영역. 그곳에서 선조의 유물이 나왔다는 얘기는 최초의 퀴클롭스들이 마신들에게 협력했다는 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실제로 그곳에는 거인들이 사용했을 법한 대장간이 있었으니까.

“아니, 꼭 그렇지는 않겠지. 마신들이 어쩌다가 입수한 걸 수도 있잖아.”

“그, 그렇지? 맞아…… 이건 누구나 다룰 수 있는 물건이니까 꼭 선조님이 마신들한테 붙었으리란 보장은 없어…….”

진실을 알고 있는 나였으나 당장은 어물쩍 넘어가기로 했다. 그러는 편이 브릴린트에게도 더 좋으리라. 뭣보다 기껏 선물해준 망치를 받고 브릴린트가 심란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아무튼 진짜 고마워 다키야……. 이거 내가 정말 오랫동안 찾았던 거거든…… 우리 종족한테는 어떤 보물보다 소중한 건데 이렇게 쉽게 받아도 될지…….”

망치를 꼬옥 끌어안으며 브릴린트가 감사를 표했다. 혼란스러웠던 목소리는 점점 진정되어 갔고 그 위에는 감동이 덧칠되었다. 어느덧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던 물건을 수 세기만에 찾았으니 눈물을 흘려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 브릴린트를 보며 나는 멋쩍게 이야기했다.

“자꾸 받기만 하면 미안해서 나도 답례 좀 한 거야. 나한테는 필요 없는 물건이니까 누나가 잘 써.”

“진짜……? 정말로……?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이거 진짜로 귀한 거야. 상인한테 팔면 떼돈을 벌 텐데…….”

“누나네 선조님 거라며. 그러면 누나가 가지고 있는 게 맞지. 애초에 그렇게 굉장한 망치면 훌륭한 대장장이가 써야하지 않겠어?”

내 말에 브릴린트는 한동안 무어라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망치를 소중하게 쥔 채로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가 참 매력적이다.

“다키야…….”

“응? 엇……!”

다음 순간, 브릴린트가 날 감싸 안았다. 내 얼굴은 그녀의 웅장한 가슴에 파묻혔다. 브릴린트의 요야한 향기와 부드러운 촉감이 지근거리에서 느껴졌다.

“고마워……! 정말로 고마워……!”

그리 말하면서 브릴린트는 내 머리를 벅벅 쓰다듬었다. 말하는 내내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씩 갈라져갔다. 너무 감격한 나머지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기뻐할 거란 건 예상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원작 게임하곤 사뭇 다른 반응이다. 새삼 게임과 현실의 괴리감을 느끼면서 나는 브릴린트에게 말했다.

“으, 으흠……! 정 고마우면 앞으로 계속 친하게 진해줘. 누나 같은 명장이랑 알고 지내는 것만으로도 나한테는 큰 보상이니까.”

“다키 너…… 너어어어는 진짜아!!”

“어엇?!”

브릴린트가 내 얼굴을 들어올렸다. 나와 브릴린트의 시선이 맞닿았다. 활짝 웃는 그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 순간, 브릴린트는 자신의 애정을 모조리 발산하듯이 내 얼굴에 마구 입을 맞췄다.

쪽쪽쪽쪽쪽!!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정수리와 목, 가슴 등 부끄러운 부분에도 거리낌 없이 뽀뽀를 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입맞춤에 나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쥬지가 발딱 설 때와는 다른 종류의 흥분이었다.

“누, 누나 이게 무슨…….”

“넌 왜 하나서부터 열까지 다 예쁜 거야! 말하는 것도 예쁘고! 하는 짓도 예쁘고! 아 진짜 못 참겠어! 다키 너 너무 좋아아아앗!”

“……!”

급기야 브릴린트는 나를 끌어안은 채 바닥에 데굴데굴 굴렀다. 돌바닥의 차가움은 그녀의 체온 때문에 금방 잊혀졌다. 졸지에 곰 인형이 된 것 같은 기분 느끼면서 나는 이 순간을 만끽했다.

연상의 미녀에게 곰 인형 취급 받으면서 마구 껴안아지다니. 최고의 포상이다. 설마 던전에서 주운 망치 하나로 이 정도 포상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

그렇게 한참을 구르고 나서야 브릴린트는 간신히 멈췄다. 그리곤 연신 내 머리를 쓰다듬고 뺨을 비벼댔다. 애정결핍에 시달려왔던 나에겐 너무나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좋아?”

계속 말없이 있기도 무안해서 은근슬쩍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기 무섭게 브릴린트는 나와 시선을 맞추면서 열렬히 긍정했다.

“물론이지! 선조님의 유물을 찾은 것도 기쁘지만 다키가 날 위해서 선뜻 준 게 너무 기쁜걸! 남들 같았으면 절대 안 그랬을 거라고!”

확실히 척 봐도 고가인 물건을 아무런 보상도 없이 넘겨주는 건 정상적인 일이 아니다. 누군가는 나를 호구라고 비웃으리라.

하지만 불을 품은 망치는 처음부터 브릴린트에게 주라고 있는 선물용 아이템이다. 이런 종류의 아이템들은 상점에 팔수도 있으나 NPC에게 선물해줬을 때 그 진가를 발휘한다.

당장 불을 품은 망치만 해도 브릴린트에게 선물하면 그녀가 만드는 모든 장비에 추가 효과를 붙여준다.

게다가 이 망치는 보스 이코르 무기를 제작하기 위한 준비 과정 중 하나. 다른 사람에게 파는 순간 보스 이코르로 만든 무기는 영영 구경도 못하게 될 거다.

결과적으론 브릴린트한테 선물해야 나에게도 이득이 오는 것이다. 그런 물건을 아까워할 필요는 전혀 없다. 대가를 요구했다면 이렇게 예쁨 받지도 못했을 거다.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하지.

“히히힛, 그나저나 우리 다키 뭐 필요한 거 없어? 누나가 뭐든 만들어줄 테니까 말만 해! 마침 가죽 갑옷 세트도 다 만들어놨다고!”

한참이나 날 쓰다듬어주던 브릴린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눈가에선 더 이상 피로감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보다 몇 배는 더 쾌활해져서 주위까지 밝아지는 것 같았다.

“아, 그럼 장비 값은 이걸로 지불하고 싶은데.”

진열대 한 편에 놓인 가죽 갑옷 세트를 확인하며 나 또한 전리품들을 보여주었다.

“세상에, 이게 다 뭐야?”

전리품을 바닥에 늘어놓자 브릴린트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가고일들의 이코르와 상위종 가고일들이 휘두르던 무기들.

다 합치면 6천 아웬 정도의 값어치를 가진 물건들이다. 이를 본 브릴린트는 곧 전리품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이야, 마침 이코르 부족하던 참이었는데 잘 됐네! 할버드랑 팔시온도 녹이면 좋은 재료가 되겠어. 숨겨진 던전의 괴물들이라더니 좋은 걸 쓰고 있었잖아~”

브릴린트는 전리품이 꽤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판타지 세계의 석유나 다름없는 이코르는 특히 대장간에서 많이 사용된다. 이코르로 용광로 불을 피우지 않으면 신력이 담긴 무기를 제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시의 대장장이들은 매일 모험가 길드나 상회에서 이코르를 납품 받겠지만 브릴린트는 바깥세상과 단절된 성소에서 지내니 이코르가 반가울 수밖에 없으리라.

“이 정도면 갑옷 값으론 충분하지? 아 그리고 여기 있는 거 전부 처분해서 무기도 새로 맞추고 싶은데…….”

내가 희망사항을 하나하나 얘기하자 브릴린트의 시선이 묘해졌다. 그녀는 곧 한숨을 푸욱 쉬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아…… 다키 너도 참 받아먹을 줄 모른다니까.”

“응? 갑자기 그게 뭔 소리야?”

“말했잖아, 네가 준 망치 엄청 귀중한 거라고. 이런 걸 공짜로 받았는데 갑옷 하나 못 주겠냐? 갑옷뿐만이 아니야.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만들어줄게. 당연히 돈 한 푼 안 받고!”

“뭐? 정말?”

“그러면 거짓말이게? 됐으니까 필요한 거나 말해, 말하자마자 바로 만들어줄 테니까~”

찡긋 윙크하면서 말하는 브릴린트. 다시 한 번 현실과 원작 게임 사이에서 괴리감이 느껴졌다.

원작 게임에서도 선물을 받고 고마워하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파격적인 보답은 하지 않았다. 평생 무료 이용권 뭐 이런 건 아니겠지만 갑옷이랑 무기를 하나씩만 만들어줘도 내게는 엄청난 보상이다.

“그러면 일단 무기로 도 하나만 만들어줄 수 있을까?”

폭풍의 숏소드가 있기는 하지만 이걸 주무기로 사용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열공의 한 획을 사용하려면 내구도를 최대한 아껴둬야 하고 아무리 아껴 쓴다 해도 언젠가는 내구도가 다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는 이제부터 근력이 아닌 기교를 주력으로 사용할 거다. 그렇기에 기교 보정을 받는 무기를 하나 장만해둘 필요가 있다. 도는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애용해온 무기다.

단검에 버금갈 정도로 빠른 공속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전 무기를 통틀어서 유일무이하게 자체적으로 치명타 확률, 치명타 공격력 상승효과를 가진 무기.

공격력이 낮다는 단점이 있지만 뛰어난 공속과 치명타 효과를 잘 활용하면 그렇게 큰 단점은 아니다. 게다가 도의 전용 스킬은 기교 계열 공통 스킬처럼 반격에 특화되어 있어서 나와 아주 잘 맞는다.

“도? 뭐 만들어줄 수는 있지만 괜찮겠어……? 네가 쓰기엔 아직 이른 거 같은데…….”

내 요구에 브릴린트가 걱정스러운 어투로 물었다.

당장 어제까지만 해도 숏소드를 간신히 들던 녀석이 다루기 힘든 도를 만들어달라고 하니 걱정스러울 만도 하다. 브릴린트의 눈에는 내가 자만심에 빠져서 과분한 무기를 사용하려는 것처럼 보일 거다.

“괜찮아, 못 믿겠으면 누나가 직접 확인해보면 되잖아?”

“얘도 참, 고작 하루 지났는데 달라지면 얼마나 달라졌다…… 고…… 어, 어라……?”

이코르를 던졌다 받았다 하던 브릴린트가 내 몸을 이곳저곳 더듬었다. 그녀의 얼굴은 점점 당혹감에 휩싸였다. 그야 그렇겠지. 내 능력치는 어제보다 두 배 이상 상승했으니까.

“뭐, 뭐야…… 힘도 유연성도 이전하곤 비교도 안 되잖아……? 설마 던전 하나 클리어했다고 이렇게 된 거야?!”

브릴린트의 질문에 나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혼란스러워하던 브릴린트는 이내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넌 다른 투사들하곤 다르구나……. 아니…… 지배자의 자격까지 계승했을 정도니까 다른 게 당연하겠지…….”

그녀의 어조에는 경외심이 담겨 있었다. 무언가 두려운 존재를 보는 것처럼 날 바라본 브릴린트였으나 그것은 곧 열정으로 바뀌었다.

“좋아! 마신들도 때려잡는 괴물한테는 그에 걸맞는 무기가 필요하겠지! 기대해! 폭풍의 숏소드 못지않게 훌륭한 도를 만들어줄 테니까!”

팔을 풀면서 작업 준비에 들어가는 브릴린트. 나는 그녀에게 신혈 결정을 넘기면서 첨언했다.

“하는 김에 이것도 같이 발라줄 수 있을까?”

“오오, 신혈 결정이잖아? 이것도 괴물들이 떨군 거야?”

“좀 센 놈들이 하나씩 뱉더라고. 듣기론 이걸로 무기 성능을 더 높일 수 있다는데.”

눈을 반짝이면서 신혈 결정을 받아든 브릴린트. 그녀는 그것들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이내 믿음직스럽게 말했다.

“이 정도야 얼마든지 발라줄 수 있지. 맡겨만 둬!”

“아 혹시 오전 중으로 가능할까? 당장 오늘부터 출발할까 해서.”

“오전은 무슨! 한 시간이면 충분해!”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면서 브릴린트는 내게 구매한 이코르들을 용광로에 던져 넣었다. 그러자 안 그래도 활활 타오르던 불길이 거세게 치솟았다.

그걸 보며 흡족하게 웃기를 잠시, 브릴린트가 가죽 주머니 하나를 건네줬다.

“참, 깜빡할 뻔했네. 여기 전리품 값. 다 계산 해보니까 6천 아웬 정도 되더라. 그리고 저쪽 선반 위에 쓸 만한 가방 있으니까 가지고 가. 너도 일단 모험간데 가방 하나 안 들고 다니면 불편하잖아?”

브릴린트가 가리킨 곳에는 갈색 가죽 가방이 있었다. 크기도 적당하고 주머니도 많이 달린 게 모험 용품으로 딱이었다. 나는 돈주머니를 받아들면서 브릴린트에게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 누나 유용하게 잘 쓸게”

“그래, 그래~ 그러면 한 시간 뒤에 보자~ 아침 안 먹었으면 가서 밥이나 먹고 와!”

브릴린트에게 손을 흔들어준 뒤 나는 식당으로 향했다.

마침 배가 고프던 참이었다. 식사하면서 진행 루트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한 시간 정도는 금방 지나가리라.

식당으로 가는 내내 돈주머니 안에 든 동전을 셌다. 500아웬짜리 동전이 6개와 100아웬짜리 30개가 들어 있었다. 다 합쳐서 딱 6천 아웬이다.

황금색 동전들이 짤랑거릴 때마다 기분이 좋아졌다. 원래라면 갑옷 값으로 빠져나가고, 무기 값으로 빠져나가서 1천 아웬도 안 남았을 텐데 이렇게나 여윳돈이 많이 남을 줄이야.

당분간 여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 당장 성소 밖을 나가도 며칠은 버틸 수 있으리라.

“물론 마을에 도착한 뒤의 얘기지만…….”

성소를 지나 다음 마을까지 가려면 꽤 먼 길을 가야 한다. 그때까지는 사람을 일절 만나지 못하며 당연히 여관이나 상점 같은 시설도 사용할 수 없다.

가방도 생겼겠다, 성소에서 최소한의 도구들은 챙겨가야겠다. 헤베한테 말하면 담요나 부싯돌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거다. 식량이야 가는 길에도 많으니까 이것저것 싸갈 필요 없겠지.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저어…… 헤라클… 아니, 투사님…….”

식당 앞에서 기다리던 헤베가 조심스럽게 날 불렀다.

============================ 작품 후기 ============================

제가 착각하고 동전 갯수를 잘못 적었었네요. 지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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