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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37화 (37/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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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목표

“괜찮으세요, 여신님? 부축해드릴까요?”

기진맥진해 하는 헤베에게 슬쩍 손을 내밀었다. 당연히 순수한 의도는 아니었다. 이 기회에 신사적인 모습을 보여서 조금이라도 점수를 따둘 심산이었다. 헤베의 달콤한 향기도 지근거리에서 맡고 말이다.

음습한 자아에 지배당하는 것 같아 살짝 자괴감이 들었지만 나는 내 욕망에 솔직해지기로 했다. 앞으론 씹선비처럼 점잔 떨다가 주어진 기회를 날려먹지 않을 거다.

“고, 고맙습니다, 투사님…… 헤, 헤헷……! 헤헤헷……!”

내가 부축해주자 헤베가 음흉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뭐지? 이 와중에 또 못된 장난을 꾸미고 있는 건가? 순간 괜히 도와줬나 싶었지만 헤베의 가슴골을 보자 생각이 달라졌다.

우리 귀여운 여신님이 장난도 좀 칠 수 있지. 훤히 드러난 그녀의 옆가슴을 보면 어떤 장난을 쳐도 용서가 될 것 같았다.

헤베의 뽀얗고 봉긋한 가슴을 감상하면서 분수대로 향했다. 짐은 입구에 대충 던져뒀다. 달리 훔쳐갈 사람도 없으니까 아침까지 방치해도 괜찮을 거다.

“여기요 투사님. 지친 몸도 달랠 겸 넥타르 한 잔 씩 하면서 이야기를 나눠보아요.”

“아, 예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분수 난간에 걸터앉을 무렵 헤베가 넥타르를 건넸다. 그녀가 준 잔을 받아들자 온기가 느껴졌다. 병에 담긴 넥타르와 달리 따뜻했다. 이 잔에도 뭔가 능력이 있는 건가?

그런 의문을 품으며 차 대신 넥타르르 홀짝일 때 헤베가 문득 질문했다.

“투사님, 혹시 신들이 어떻게 강림했는지 아시나요?”

헤베의 질문에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어, 그러니까…… 대현자라는 사람이 다른 세계로부터 신들을 초대했다고 들었는데요.”

사실 좀 더 자세히 알고 있었지만 당장은 이렇게만 말해두기로 했다. NPC들 앞에서 아는 척 해봐야 좋을 거 없으니 말이다. 신들의 강림 경위 같은 건 평범한 사람들이 알 만한 지식도 아니다.

내가 애매하게 답변하자 헤베가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러면 우선 그것부터 알려드려야겠네요. 조금 긴 이야기가 될 텐데 괜찮으실까요?”

“물론이죠, 편하게 얘기하세요.”

내가 선뜻 고개를 끄덕이자 헤베는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들려줬다.

“……과거 이 땅은 끝없는 밤이 이어지는 극야의 세계였어요. 세상의 중심은 혼돈으로 뒤덮여 있었고 생물체라곤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죠.”

마치 어린아이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절로 편안한 기분이 들었지만 나긋나긋한 목소리에는 여느 때와 다른 진중함이 담겨 있었다.

“그토록 공허한 세상에 어느 날 생명의 빛이 나타났어요. 그 빛을 만든 존재는 빛의 신이자 이 세상 모든 생물을 빚어낸 창조주, 라이트 원이었죠.”

“창조주라면 헤베님 보다 더 높은 신인 건가요?”

“네. 저는 물론이고 신화의 주신들조차 범접할 수 없는 존재예요. 라이트 원에 비하면 이 세계에 강림한 신들은 그저 갓난아기에 불과할 정도인걸요.”

헤베의 목소리에는 경외심이 담겨 있었다. 하긴, 라이트 원의 모티브가 어떤 신인지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하다.

“그런 라이트원이 빛을 창조해내자 극야의 세상은 처음으로 아침을 맞이했어요. 그때 인간을 비롯한 수많은 생명들이 태어났죠. 이 순간을 최초의 여명이라고 부른답니다.”

여명. 가디스 던전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단어다.

신들처럼 초월적인 존재들은 이 세계의 시대를 시간대에 비유하곤 한다.

혼돈으로 가득 차 있던 태고의 시대를 극야, 빛이 나타나 평화가 찾아온 시대를 여명, 이러한 평화가 지속되는 시대는 낮, 평화가 점차 흔들리고 다시 밤이 찾아올 기미가 보이는 시대를 황혼이라 여기는 것이다.

“아침이 밝으면서 혼돈의 힘은 약해졌고 세상엔 온기가 감돌았어요. 하지만 이는 오래 가지 않았죠. 창조주 라이트 원이 세상의 관리를 포기하고 어디론가 떠나버렸거든요.”

“기껏 만든 세계를 버리다니…… 좀 어처구니없네요.”

“그렇게 생각하실 만도 해요. 하지만 라이트 원은 신들에게도 신이라고 불리는 존재, 저희들로선 그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답니다. 그 이해할 수 없는 행동 때문에 세상은 다시금 끝나지 않는 밤을 맞이했지요.”

다 알고 있는 내용인데 헤베가 직접 들려주니까 나도 모르게 경청하게 됐다. 사실 이야기의 내용보다는 헤베의 청아한 목소리에 집중하는 거지만 말이다.

정말이지 맑고 귀여운 목소리였다. 부드러우면서도 앳된 게 살짝 갓구라 유이 성우님 느낌도 난다. 헤베 성우 분이 브릴린트 성우이기도 하다는데 어쩜 이렇게 목소리가 다를까. 새삼 감탄이 나왔다.

“그렇게 수많은 생명들이 극야 속에서 고통 받고 있을 때, 어느 지혜로운 청년이 라이트 원의 유산을 발견했어요. 그것이 바로 수많은 생명을 창조할 때 사용한 도구 중 하나, 빛나는 수정쐐기였죠.”

거기까지 이야기한 헤베는 내 왼손을 살포시 잡았다. 부드러운 손길이 내 손등을 어루만지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반쯤 감은 눈까지 더해져서 헤베가 무척 요염해보였다.

나대지 마라 쥬지야. 지금은 네가 나설 때가 아니다. 조금만 진정하고 있어.

“혹시 마신들을 쓰러뜨리는 과정에서 푸른색 수정쐐기를 손에 넣지 않으셨나요?”

“네, 네? 아, 아아 그거요? 그거라면 제가 가슴에 박아 넣었는데요…….”

“가슴에 박아 넣었다고요……? 수정쐐기를요……?”

얼떨결에 수정쐐기의 행방을 이야기하자 헤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도 내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 깨닫고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서, 설마 그걸로 투사님의 가슴을 찌른 건가요……?! 왜요?! 어쩌다가요?!”

“어어…… 그게 말이죠…….”

뭐라 대답해야할지 참 난감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쐐기를 자기 가슴에 박아 넣을 생각 같은 건 하지 않는다. 그게 평범한 쐐기든 창조주가 남긴 고대의 유물이든 말이다.

내가 한 행동은 일반인 기준에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행이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한동안 고민한 나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어투로 이야기를 지어냈다.

“놈들하고 격렬하게 싸우다 보니까 어느 순간 가슴에 박혀 있더라고요. 안 빼고 그대로 두니까 저절로 제 몸 안으로 들어갔어요.”

“정말로요……?”

헤베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그야 그렇겠지. 방금 전하곤 이야기가 다르니까. 그래도 내 행동을 설명할 방법이 이것 밖에 없어서 나는 강경하게 밀어 붙었다.

“그럼요! 어떤 사람이 그런 걸로 자기 가슴을 찌르겠어요? 죽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들이나 그러겠죠!”

“흐으음…….”

헤베의 눈이 점점 가늘어졌다. 내 변명이 그렇게 어설펐나? 나 사실 연기 존나게 못 하는 거 아니야?

허나 그런 고민도 잠시, 헤베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의심을 거뒀다. 그녀는 한 차례 숨을 고른 뒤 내 가슴을 어루만졌다.

“투사님이 무모한 행동을 하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그래도 큰일이었네요…… 가슴에 쐐기가 박히다니…… 얼마나 아프셨을까…….”

의혹은 점점 연민으로 바뀌어갔다. 날 가엾게 여긴 헤베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내 가슴을 재차 확인했다. 상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안심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아……, 가슴이 녹아내릴 것 같다……. 우리 여신님은 왜 이렇게 착한 거지? 사실 헤베가 관장하는 영역은 청춘이 아니라 자애가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나 자비로울 수가 없다.

여신님 진짜 너무 좋아 씨바.

“걱정 마세요. 여신님이 주신 넥타르 덕분에 상처는 다 나았어요. 넥타르 한 병 들이키니까 별로 아프지도 않던데요 뭘.”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사실 수십 번은 뒤질 정도로 아팠지만 난 애써 허세를 부렸다. 그걸로 헤베가 안심할 수 있다면 그 끔찍한 고통 정도야 얼마든지 웃어넘길 수 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닌가. 몸 안에서 수백, 수천 번 폭발이 일어나는 것 같았는데 역시 웃어넘기기엔 무리가 있다. 내가 게임 캐릭터에 빙의해서 멀쩡할 수 있는 건지 원래 내 몸이었다면 진즉에 불구가 됐을 거다.

“아무튼…… 투사님이 흡수하신 그 쐐기는 정황상 라이트 원이 남긴 빛나는 수정쐐기일 거예요. 훗날 대현자 솔레이온이라 불리는 지혜로운 청년은 그걸 이용해서 빛의 문을 열었죠. 그 문을 통해 저희 신들이 이 세계에 강림한 거랍니다.”

내가 몇 차례 안심시켜주자 그제야 헤베는 본제로 돌아왔다.

“솔레이온은 신들을 설득하여 이 세상에 다시 한 번 빛을 가져와달라고 부탁했어요. 신들은 청년의 뜻에 따랐으며 수많은 신들이 힘을 모아 두 번째 여명을 불러왔죠. 그에 대한 공로로 솔레이온은 여명의 지배자가 되어 세상을 통치하게 됐답니다.”

여명의 지배자란 신과 인간을 포함한 이 세상 모든 존재를 지배하고 빛의 세계를 수호하는 위대한 왕의 칭호다.

이를 되새긴 나는 문득 궁금한 게 떠올라 헤베에게 질문했다.

“그…… 여신님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신들께선 독선적인 성향이 없잖아 있다고 들었는데요. 그런 분들이 어떻게 평범한 인간의 뜻을 따르게 된 거죠?”

“좋은 질문이에요 투사님. 신들은 본래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상의 존재, 그런 신들이 이 세상에서 존속하려면 솔레이온의 허락을 받아야했죠. 그런 이유로 모든 신들이 솔레이온에게 충성을 맹세한 거예요.”

그런 설정이 있었구나. 이제야 납득이 갔다.

솔레이온이 소환한 신들 중에는 제우스나 오딘 같은 거물들도 있었다.

그런 신들이 어쩌다가 한낱 인간에게 고개를 조아리게 됐는지 늘 궁금했었는데 이 세계에 입주하기 위해선 솔레이온의 허락이 필요했던 거였구나. 그런 거라면 아무리 자존심 높은 신이라 해도 한 수 접어줄 만했다.

“그렇게 여러 신들이 두 번째 여명을 가져오면서 세상은 지상낙원이 됐답니다. 누구도 굶주리지 않아도 되고, 누구도 고통 받지 않아도 되는 평화로운 세상이었죠.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헤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녀는 가슴 아픈 과거를 떠올리듯이 서글픈 눈빛이 되었다. 나는 그런 헤베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반란이 있었어요……. 솔레이온의 최측근이었던 72명의 신하들이 왕을 시해하고 크나큰 혼돈을 가져왔죠. 그들을 현혹한 건 레메게톤이라는 아주 사악한 인간이었고요…….”

발람과 세에레의 이코르에도 나와 있던 내용이다.

72명의 마신들은 본래 솔레이온의 충직한 신하들이었다. 그들은 누구보다 솔레이온을 위했으나 레메게톤이란 자에게 타락하여 마신으로 변모했다.

“인간 신하인 레메게톤에 의해 72명의 신들이 타락하고, 솔레이온은 수많은 백성과 신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살해당하고 말았어요. 그렇게 솔레이온이 숨을 거두자, 레메게톤은 신들을 향해 소리쳤죠.”

내가 너희를 옭아매던 족쇄를 끊었다. 너희는 이제 자유롭다. 본능이 이끄는 대로, 너희의 권세를 위하여 싸우고 죽여라.

레메게톤의 말을 되새긴 헤베는 주먹을 꽉 부르쥐었다. 그 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 것이리라.

“그게 화근이었어요……. 솔레이온을 위해 일하던 신들은 목줄 풀린 야수처럼 서로를 향해 이빨을 내밀었죠. 솔레이온이 죽었으니 다음 세상의 주인은 내가 될지도 모른다……. 여기 있는 경쟁자들을 모두 죽이고 새로운 지배자가 되겠다……. 그런 일념으로 말이에요.”

신들은 누구나 추앙받고 싶어 한다. 그런 본성을 가진 자들이 수십 년간 다른 누군가에게 부려졌다면 엄청난 욕구불만에 시달렸을 거다.

그러한 욕구는 솔레이온의 죽음으로 끝내 폭발하고 만 것이다.

“지옥과도 같은 살육전이 벌어지는 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어요……. 신들은 필멸자들까지 끌어들이면서 끊임없이 혈투를 벌였고, 이것이 세계의 근간을 뒤흔든 두 차례 대전 중 첫 번째 전쟁, 기원전쟁으로 이어졌죠.”

기원전쟁.

가디스 던전 스토리에서 수도 없이 언급될 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건이다.

이 사건을 통해 수많은 신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세계의 질서가 몇 번이나 무너지고 다시 잡혔다. 헤베가 올림포스가 아닌 성소에서 지내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전부 기원전쟁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마신들이 전쟁을 일으킨 이유는 혼돈을 키우기 위해서였어요. 혼돈이 커질수록 멸망을 알리는 징조인 황혼도 더욱 가까워지죠……. 끝내 황혼이 찾아오면 이 세상은 다시금 끝없이 밤이 이어지는 극야의 세계가 되고 만답니다…….”

“결국 마신들의 목적은 빛의 세계를 끝내고 극야의 세계를 불러오는 거로군요…….”

“맞아요. 그리고 그들의 계획은 성공적이었어요. 수많은 신들이 재앙신이 되면서 황혼이 무척 가까워졌으니까요.”

이쯤 되면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길 것이다.

솔레이온이 살아있을 때는 권능을 사용해도 멀쩡했는데 왜 그가 죽고 난 후엔 권능 남용으로 재앙신이 되는가?

이 또한 혼돈에 의해서라고 볼 수 있다. 혼돈은 이 세상이 원초적으로 품고 있는 부정적인 기운인데, 솔레이온이 통치하던 여명의 시대에는 혼돈의 힘이 매우 미약했다.

허나 솔레이온이 죽으면서 여명의 시대 또한 막을 내렸고, 약해졌던 혼돈이 다시금 그 크기를 키워나갔다.

그렇게 수면 위로 올라온 혼돈은 권능에 반응하여 신들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신들은 점차 이성 잃은 괴물이 되었고 재앙신과 던전이 만연하게 된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 여명의 투사가 있는 거랍니다. 여명의 투사의 진정한 사명은 황혼의 도래를 가속시키는 재앙신들을 토벌함으로써 여명의 세계를 지키는 것이죠.”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않겠네요.”

“네…… 72명의 마신들이, 아니, 어쩌면 그들을 타락시킨 레메게톤까지 아직 살아있을지 모르니까요. 황혼을 막기 위해선 재앙신 뿐만 아니라 그들 또한 저지할 필요가 있어요.”

고개 숙이며 말하던 헤베가 문득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곧 내 왼손을 양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투사님은 수정쐐기를 얻음으로써 마신들을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어요. 72명의 마신들은 주신들에게 버금가는 힘을 가진 존재, 그런 무시무시한 적을 처치할 수 있는 건 오직 지배자의 자격을 가진 투사님뿐이에요……!”

한 차례 숨을 고른 뒤, 헤베는 간절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이 이상 부탁하는 게 투사님에게 큰 부담이란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달리 방도가 없어요……. 부탁드려요 투사님. 부디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재앙신을 퇴치하고 마신들을 지배해서 황혼의 도래를 막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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