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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목표
“이제 아이템 회수나 해볼까.”
뻥 뚫린 천장을 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슬슬 해가 지는 걸 보니 대충 오후 다섯 시에서 여섯 시 사이인 것 같았다. 곧 날이 저물 거다.
딱히 밤이 된다고 해서 더 위험해지는 건 아니지만 지체해서 좋은 건 없겠지. 가고일들의 시체를 뒤지는 것 외에도 할 일이 있으니까. 이를 상기하면서 나는 발걸음을 빨리 했다.
“으…… 돈 버는 건 좋은데 역시 괴물들 내장 뒤지는 건 기분 좋게 할 짓이 아니야…….”
약 두 시간에 걸쳐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가는 도중에 가고일들의 시체를 뒤져서 꽤 많은 전리품을 챙길 수 있었다.
가장 많이 얻은 건 대리석 가고일의 이코르였다. 가슴에 박혀 있는 걸 빼내느라 고생했지만 30개나 되는 이코르를 얻었다. 개당 50아웬 정도니까 다 합치면 1500아웬쯤 나올 거다.
1500아웬이면 한화로 15만원이다. 그리 큰돈은 아니지만 제법 짭짤한 수입이라고 할 수 있다. 밀빵 하나에 5에서 10아웬, 여관의 숙박비용은 300아웬부터니까 이 정도만 있어도 밖에서 사흘 정도는 버틸 수 있다.
더군다나 이코르를 뱉은 건 대리석 가고일들만이 아니다. 소머리 가고일과 표범머리 가고일도 착실하게 이코르를 뱉어줬다.
과연 상위 몬스터답게 놈들의 이코르는 크기부터가 달랐다.
대리석 가고일들의 이코르는 무슨 편의점에서 파는 천 원짜리 젤리 정도였는데 상위 가고일들의 이코르는 그보다 몇 배는 컸다.
보스 이코르만큼은 아니지만 이것들도 꽤나 값어치가 있는 물건이다. 각각 500, 300아웬의 가치를 가졌으며 소머리는 두 마리를 잡았고, 표범 머리는 여섯 마리를 잡았다. 그 중 세 마리를 낙사시켜서 각각 1000아웬, 1800아웬을 번 셈이다.
여기에 가고일들이 사용하던 무기까지 더하면 6000아웬 정도 들어올 것이다.
60만원이라.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벌었다. 물론 목숨 걸고 번 돈치곤 적었지만 돈 벌려고 온 던전도 아니니 그러려니 했다. 애당초 난 발람과 세에레는 쓰러뜨림으로써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강력한 힘을 얻지 않았는가.
“돈으로 못 사는 건 이것들도 마찬가지고 말이지.”
더군다나 상위 가고일들은 이코르와 장비 외에도 진귀한 아이템을 떨궜다.
놈들의 품은 뒤지다 보니 새빨갛게 빛나는 보석이 나왔다. 엄지손가락만한 보석의 이름은 신혈 결정. 결정화된 신혈이라고도 부르며 설정상 신의 피가 굳어서 보석처럼 변한 것이다.
이것의 용도는 다름 아닌 무기 강화다. 브릴린트에게 가져다주면 1강 당 무기 공격력을 20퍼센트 올릴 수 있으며 총 10단계까지 강화가 가능하다.
내가 구한 것은 신혈 결정 중에서도 최하위 등급인 신혈 결정 파편이다.
파편으로는 최대 3단계까지 강화할 수 있으며 한 단계 강화할 때마다 3개, 5개, 8개가 필요하다. 3강을 찍은 뒤에는 더 높은 등급인 신혈 결정 조각을 써야 된다.
신혈 결정은 하위 등급과 상위 등급을 가리지 않고 잘 나오지 않는 희귀 아이템. 이번에 얻은 건 신혈 파편 3개뿐이지만 원체 잘 안 나오는 아이템이다 보니까 수중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이걸로 폭풍의 숏소드를 1강 찍으면 내 공격력이 161까지 상승할 거다. 역시 RPG는 이런 맛으로 하는 거지.
“아주 좋아.”
가고일들의 전리품들을 챙기다 보니 어느덧 출구에 가까워졌다. 이대로 돌아갈 수도 있지만 나는 또 다른 목적을 위해 벽면을 조사했다.
이끼 낀 벽이 노을빛을 받아 불게 물들어 있었다. 겉보기에는 아무 것도 없는 평범한 벽이었으나 이곳에도 비밀이 숨겨져 있다.
한동안 벽을 짚고 걷던 나는 이내 익숙한 장소를 발견했고 숏소드를 휘둘렀다.
촤아악!
이번에도 벽은 안개처럼 사라졌다. 던전의 입구처럼 환영벽이 쳐져 있었던 것이다.
원작 게임이었다면 굳이 벽을 짚고 걷지 않아도 바로 찾아냈었지만 3인칭이 아니다 보니까 찾는데 오래 걸렸다.
어쨌든 나는 환영벽이 있던 장소를 지나 비밀 통로로 들어섰다. 한동안 복도를 걸어가니 웬 공방 같은 장소가 나왔다.
먼지 쌓인 모루와 재 밖에 남지 않은 용광로. 만들다 만 병장기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으며 작업 도구 또한 부러지거나 마모되어 어지럽게 늘어져 있었다.
한 때 대장간으로서 기능한 것 같은 공간에는 일말의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형 전시회장처럼 어마어마한 규모로 보아 과거엔 수많은 장인들이 이곳에서 쇠를 두드린 듯했으나 지금은 정적만 감돌뿐이었다.
“휑하기도 해라.”
거인들이 사용했을 법한 초대형 대장간은 그 자체만으로도 웅장했다. 그 커다란 공간에 나 혼자만 있으니까 유난히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관광지 구경하는 느낌으로 이곳저곳 둘러보면서 이곳에 온 목적을 찾았다.
겸사겸사 쓸 만한 물건이 있나 둘러봤는데 이곳도 자네스 영주의 저택처럼 특별히 유용한 물건은 없었다. 병장기는 죄다 망가져 있었으며 재료들 또한 세월의 풍파로 못 써먹게 됐다.
그 중에서 유일하게 쓸모 있는 아이템은 붉은색으로 빛나는 망치 한 자루뿐이었다. 적과 싸우기 위한 무기라기 보단 대장장이들이 쇠를 두드릴 때 사용하는 작업용 망치였다.
마치 타오르는 불꽃처럼 밝은 빛을 뿜어냈으며 손에 쥐자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것을 던졌다 받았다 하면서 나는 흡족하게 웃었다. 이것이 내가 숨겨진 대장간을 찾아온 이유다.
이걸 받은 브릴린트 누님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너무 좋아서 막 안아주고 그러는 거 아니야? 비단 포옹만 하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 의미로 말이다.
어찌됐든 이걸로 인내하는 자의 신전에서 얻을 아이템은 다 챙겼다. 물건이 워낙 많아서 이걸 다 어떻게 들고 가나 싶었는데 다행히 대장간 한 구석에 괜찮은 가죽이 있었다. 그걸 그나마 멀쩡한 밧줄로 동여매자 훌륭한 보따리가 되었다.
보따리를 등에 매자 등이 무거워서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았다. 보따리 안에는 소머리의 할버드, 표범머리의 팔시온 등도 들어가 있어서 무게가 많이 나갔다.
현역병 시절 무거운 군장을 짊어지고 행군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참 끔찍한 시절이었지.
“진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불편하네. 왜 다른 건 다 구현해놨으면서 인벤토리랑 세이브 기능은 구현 안 해둔 거야? 나 엿 먹으라고?”
본래 가디스 던전에는 무게 제한도, 공간 제한도 없는 편리한 인벤토리 시스템이 존재했다.
그게 있었다면 이런 군장 같은 보따리를 매고 힘겹게 걸어갈 필요가 없었을 거다. 이 세상을 만든 게 누구든 가디스 던전 제작진만큼 악의적인 존재인 게 틀림없다.
불만을 토로하면서 던전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가뜩이나 연이은 전투로 피곤한 마당에 최소 50킬로그램은 될 법한 짐짝을 메고 이동하려니 죽을 맛이었다. 몇 개 버리고 갈까 싶었지만 아까워서 그럴 수도 없었다.
클리어된 인내하는 자의 신전은 플레이어가 나가자마자 바로 닫혀버린다. 한 번 닫힌 입구는 절대 다시 열리지 않으며 다음 회차까지 들어올 수 없다.
안에 두고 온 템들도 영영 되찾을 수 없기에 한 푼이라도 더 벌고 싶으면 이 악물고 걸어야만 한다. 이게 다 생계를 위한 일이다.
얼마나 걸었을까. 나는 간신히 처음 지나온 다리를 건너서 리단과 만난 폐허로 돌아왔다.
시간은 이미 늦은 저녁이었다. 미약하게 남은 붉은색 잔조 위에 진청색 밤하늘이 깔려 있었다. 하늘에 떠있는 별은 비현실적으로 많아 눈이 부실 정도였다.
“이야…….”
밤하늘을 본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나는 이렇게 예쁜 밤하늘을 본 적이 없다. 자대 배치도 수도 쪽으로 받아서 별이 가득한 밤하늘과는 거리가 멀었다.
설령 산속 깊은 곳에 배치됐더라도 이토록 눈부신 별빛은 보지 못했을 거다.
우윳빛으로 빛나는 은하수와 쏟아져 내릴 것처럼 빛나는 별들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한 가운데에 있는 두 개의 달은 이곳이 지구가 아니라는 것을 거듭 증명하고 있었다.
힘든 일을 끝내고 와서인지, 아니면 각오를 다져서인지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감회가 새로웠다.
부디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저 예쁜 별들과 은하수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곳이야 말로 내가 진정으로 원해왔던 세계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사라진지 오래다.
아름다운 광경을 보니까 괜히 감성적인 기분이 됐다.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미약하게 남은 노을의 잔조가 끝내 자취를 감추고 밤이 드리웠지만 나는 밤하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조금만 더 있다가 이동해야지. 마침 다리도 아픈 참이었다. 앞으로 몇 분 정도 지나면 달빛에 의지한 채 신전까지 걸어갈 수 있을 거다.
그렇게 혼자 감성에 젖어 있을 무렵이었다.
도도도도도!
“응?”
저 멀리서 불빛이 하나 나타났다. 밝은 노란색의 등불은 나를 발견하자마자 속도를 높였고 곧 내 앞까지 달려왔다.
“투사님……! 이런 곳에 계셨군요……!”
“여신님?”
등불의 주인은 다름 아닌 헤베였다. 허겁지겁 달려온 그녀는 내 앞에서 몇 차례나 숨을 골랐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게 여기저기 뛰어다닌 모양이다.
예상치 못한 마중에 나는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후하아! 하고 숨을 크게 들이쉰 뒤 내게 말했다.
“늦게까지 안 돌아오셔서 걱정했어요……! 리단 씨에게 폐허 안으로 들어갔단 이야기를 듣고 주위를 샅샅이 뒤졌는데 대체 어디 계셨던 건가요?”
“아…… 그게 말이죠…….”
헤베의 질문에 나는 적잖게 당황했다.
원작 게임의 헤베는 플레이어가 없어지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플레이어의 목적이 세계 곳곳을 여행하면서 재앙신들을 쓰러뜨리는 거니 굳이 어디로 갔나 궁금해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헤베는 무척이나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촉촉하게 젖은 눈가를 보니 죄책감마저 들 정도였다.
원래 세계에서는 확 김에 가출했을 때도 아무도 날 찾지 않았는데. 누가 날 이렇게 걱정해준 건 태어나서 처음이다.
헤베의 마음 씀씀이에 감격하면서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폐허에서 환영벽을 발견한 것부터 시작해서 인내하는 자의 신전으로 들어간 것,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마신들과 맞서 싸운 것까지 전부 말이다.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하지만 숨겨진 신전과 마신들이라니……. 이 얘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내 이야기를 들은 헤베는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잇따라 눈썹을 찡그렸다. 내가 거짓말을 하진 않을 거라 생각하는 그녀였으나 내 얘기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듯했다.
그래서 나는 푸른 태양이 새겨진 왼손을 보여주었다. 여명의 힘을 흡수하여 더욱 화려해진 문양을 말이다.
“이걸 보고도 못 믿으시겠어요?”
“……! 그건……!!”
문양을 본 헤베가 화들짝 놀란다. 의심스럽게 빛나던 눈동자가 크게 확대됐다.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한 헤베는 몇 차례나 말을 더듬으며 내게 물었다.
“서, 서, 설마 지배자의 자격을 계승하신 건가요?! 그러면 그 마신들은 솔레이온의 신하였다고 하는 72명의……! 와아…! 와아아…!”
헤베는 내가 말한 마신을 상위급 악마 정도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긴 72명의 마신들은 신들 사이에서도 전설적인 존재로 통하니 내가 그런 거물들과 만났을 거라곤 생각조차 못했을 거다.
감탄을 반복하던 헤베는 사뭇 진지한 표정이 됐다. 그녀는 내 짐을 양손으로 받쳐주면서 엄격, 진지, 근엄하게 이야기했다.
“어서 빨리 돌아가야겠어요! 투사님과 나눌 이야기가 아주 많아요!”
“그, 그럴까요?”
눈썹을 치켜세우며 손에 힘을 주는 헤베. 그녀의 가녀린 팔이 내 보따리를 있는 힘껏 받쳤다.
“으그으으응……!!”
나름 노력하는 헤베였으나 솔직히 별 도움은 안 됐다.
그녀는 청춘의 신이지 무신이 아니다. 권능을 사용하면 이런 짐짝 같은 건 얼마든지 옮길 수 있겠지만 권능을 사용하지 않으면 그녀의 신체 능력은 평범한 여성들과 별 차이가 없다.
“괜찮아요 여신님 저 혼자 들 수 있어요.”
“아, 아니에요 투사님! 한 시라도 빨리 돌아가야 하니까요! 끄이이이잉!!”
기합 소리가 점점 이상해진다. 진짜 젖 먹던 힘까지 다하는 모양이다.
이대로 두면 헤베가 지쳐 쓰러질 것 같았기에 나는 서둘러 신전으로 향했다. 물론 나도 헤베 못지않게 겁나 힘들었다.
* * *
헤베의 도움을 받아 나는 빠르게 신전까지 올 수 있었다. 솔직히 도움을 받았다고 말하긴 뭐하지만 그녀 덕분에 속도가 붙은 건 사실이었다.
체력이 두 배로 소모되긴 했으나 헤베의 귀여운, 어떤 의미로는 야하기도 한 신음 소리를 들어서 나름 즐거웠다.
끄이이이잉! 하던 신음이 어느 순간부터 응기이이잇! 이나 므흐으으응! 같은 망가에서나 나올 법한 신음 소리로 변했던 것이다. 진심 너무 귀여웠다.
“헤엑……! 헤엑……! 도차악……!”
신전에 다다르자마자 헤베는 숨을 헐떡이면서 주저앉았다.
별 도움은 되지 않았으나 그녀도 나름대로 힘을 쓴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응기잇이나 므흐응 같은 신음이 나오지 않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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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감다키의 일러스트가 나왔습니다. 62화부터 바뀔 모습이지만 미리 올려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공지에 올려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