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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35화 (35/217)

35====================

각오

파직! 파지지지직!!

촤자자자자자작!!

숏소드를 내리친 순간 거대한 폭풍이 일직선으로 뻗어나갔다.

번개를 품은 폭풍이 매섭게 몰아쳤다. 그러자 주위에 있는 기둥들이 일제히 박살났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리석 바닥이 성경 속의 기적처럼 두 쪽으로 갈라졌으며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전당 전체가 요동쳤다.

머릿속에서 브금이 자동 재생된다. 붉은 옷을 입은 반인반요의 주인공이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과 함께 적들을 해치울 때 나오던, 그 웅장한 브금이 말이다.

어렸을 때 내 꿈은 그 반인반요 주인공처럼 예쁜 히로인, 듬직한 동료들과 함께 모험을 떠나는 거였다. 그의 아이덴티티나 다름없는 기술 바람의 상처를 사용하면서 말이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어렸을 적의 꿈을 이루었다. 내가 날린 폭풍은 만화 속 주인공의 필살기처럼 적들을 휩쓸었다.

[마, 말도 안 돼! 저 힘은……!! 아아악! 으아아아아악!!]

[어떻게 네놈이 삼귀자의 힘을……!?! 크하아아아악!!]

구체를 준비하던 발람과 세에레가 폭풍에 직격 당했다. 안간 힘을 다해 버틴 마신들이었지만 곧 비명을 내지르며 벽에 처박혔다.

콰아아아앙!!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벽에 방사형 균열이 새겨졌다. 동시에 2871이라는 데미지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놈들의 생명력이 절반 이상 빠져나간 것이다.

[쿨럭!!]

[커헉……!]

시간차로 바닥에 쓰러지는 두 마신.

놈들의 투구 같은 얼굴에서 붉은색 피가 왈칵 터져 나왔다. 연신 피를 토한 놈들은 믿을 수 없다는 기색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한낱 필멸자가 황혼의 심판을 막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네놈은 대체 정체가 뭐란 말이냐……!!]

경악어린 질문에 나는 담담히 대답했다.

“그러게 쓸데없는 짓 말고 하던 대로 하지 그랬어. 평타만 계속 쳤어도 너희가 압승했을 텐데. 헛짓하다가 쳐발리게 생겼잖아.”

열공의 한 획은 가디스 던전의 모든 스킬을 통틀어도 최상위권에 속하는 강력한 스킬이다.

무려 공격력 +1000퍼센트의 전격 피해를 주며 범위도 말도 안 되게 넓다. 거기에 슈퍼 아머 파괴 및 인내력 300 감소 효과까지 있어서 어지간한 보스 몬스터도 한 방에 저지할 수 있다.

허나 단점 또한 명확하다. 스킬을 준비하는 동안 그 어떤 방어 효과도 제공하지 않아서 평타 한 대 만 맞아도 곧바로 캔슬된다.

3초라는 시간이 그리 짧은 것도 아니어서 일반적인 상황에선 좀처럼 사용하기 힘들다. 가고일들과 싸울 때 사용했더라면 그 즉시 샌드백으로 전락했으리라.

요컨대 발람과 세에레가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면 나는 스킬을 쓸 기회도 잡지 못하고 유린당했을 거다.

[자만하지 마라 찬탈자여……! 우리는 이 정도 공격으로 쓰러지지 않는다!]

[일개 인간이 폭풍신의 권능을 휘둘렀으니 몸에 엄청난 부담이 갔을 터! 네놈이 우리를 쓰러뜨리고자 했다면 방금 전의 일격으로 끝장을 봐야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발람과 세에레가 내 말을 부정했다. 만신창이가 된 놈들은 한층 더 투지를 불태웠지만 내 눈에는 허세로만 보였다.

황혼의 심판은 캔슬된 지 오래다. 인내력이 바닥나서 한동안은 내 공격에 곧이곧대로 경직당할 거다.

놈들은 더 이상 사형선고를 내리는 판관 같은 게 아니다. 나에게 압도적으로 유린당할 예정인 사냥감일 뿐이다.

“잔말 말고, 그냥 누워 있어라.”

[……!]

[……!]

마신들이 반격에 나서려 할 때 나는 다시 검을 들어올렸다.

숏소드에 다시금 폭풍이 휘감겼다. 내 주위에서 뇌우가 내리쳤고 거센 강풍이 마신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를 본 마신들은 일제히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열공의 한 획을 사용할 때 필요한 자원은 기력 100과 마력 100.

최대 기력과 마력이 각각 150 밖에 되지 않는 나로선 한 번 사용하는 게 고작이다.

허나 계승의 증거가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 멋들어진 가면은 비단 의장용 아이템이 아닌 것이다.

계승의 증거.   희귀.

분류: 투구.

방어력: 5.   인내력: 0.

내구도: 30/30.   무게: 0.

요구 스탯: 없음.

부가 효과: ◈ 최대 기력 200 증가.

◈ 하루에 한 번, 공격 스킬을 시전할 때 비용 소모 없이 한 번 더 시전 가능. 추가 시전하는 스킬의 공격력 30퍼센트 증가.

폭풍의 권능석 못지않게 이 가면도 만만찮은 사기 아이템이었다. 과연 하드코어 튜토리얼을 클리어하고 얻은 보상답다.

[또 다시 폭풍의 권능을……!!]

[설마 계승의 힘을 이끌어낸 건가?!]

마신들이 아연실색한 채 소리쳤다. 놈들도 계승의 증거의 효과를 알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두지 않겠다!!]

[같은 공격에 두 번 당해줄 것 같으냐?!]

마신들에게서 여유가 사라졌다. 다급하게 공격하는 발람과 세에레였으나 놈들의 공격은 끝내 내게 닿지 않았다.

계승의 증거로 추가 발동되는 스킬은 선딜레이도, 캐스팅 시간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당연히 당해주겠지!!”

촤자자자작!!

우렁찬 외침과 함께 다시금 열공의 한 획을 발동했다.

다음 순간 번개를 품은 강풍이 마신들에게 몰아쳤다.

전당은 어느덧 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폐허가 되어버렸다. 멀쩡하던 천장이 완전히 뜯겨져 나갔으며 기둥 중에선 멀쩡한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폭풍이 향하는 곳은 벽도, 바닥도 온전치 못했다. 폭풍신의 권능은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무자비하게 파괴했다. 이에 휘말린 마신들 역시 멀쩡할 수 없었다.

이 공격으로 놈들은 최후를 맞이하리라.

[크하아아앗! 아아아아아아악!!]

[황혼이여어어어억!!]

발람과 세에레의 몸이 갈가리 찢겨나갔다. 2950이라는 피해를 받은 마신들은 끝까지 나를 향해 공격을 가했으나 날카로운 얼음 칼날도, 맹렬한 화염구도 폭풍의 기세를 뚫지 못했다.

그렇게 두 마신의 팔이 내 눈앞까지 다가온 순간, 놈들의 몸은 끝내 주황색 입자로 변하여 뿔뿔이 흩어졌다.

파아아아앗!!

“하아…… 하아……!”

마신들이 소멸하는 것을 보며 털썩 주저앉았다.

반딧불과 같은 빛의 입자들이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색은 다르지만 몬헌에 나오는 안내 벌레를 보는 것 같았다.

뻥 뚫린 천장 너머로 날아간 입자들. 한동안 반짝거리던 그것들은 끝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것을 기점으로 마신들의 기척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발람과 세에레는 죽었다. 마침내 마신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이다.

“이겼다아아아아아!!”

대자로 뻗으면서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겼다. 최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던전에게도, 연약한 자신에게도 말이다.

생전 느껴본 적 없는 후련함과 성취감이 차올랐다. 그와 동시에 스스로 세운 목표가 한층 더 확고해졌다.

여행을 떠날 것이다. 재앙신들도, 마신들도 전부 쓰러뜨린 뒤 모두에게 인정받는 지배자가 될 것이다. 원작 게임의 주인공이 그랬듯이 누구나 부러워할 해피엔딩을 맞이하고 말리라.

물론 쉬운 일은 아닐 거다. 하지만 나는 그 어렵다는 인내하는 자의 신전도 클리어 했다. 앞으로 어떤 역경이 닥쳐오던 뛰어넘을 자신이 생겼다.

가족들에 대한 고민도 사라졌다. 나를 가리던 누나들의 그림자도, 어깨를 짓누르던 부모님의 무거운 한숨도 더 이상 신경 쓰이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세상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겠다. 내 마음 속에는 오직 그런 생각만이 남아 있었다.

[그대는 공포왕 발람과 기원의 귀공자 세에레를 토멸했다. 그들의 죽음이 당신의 새로운 위업이 된다.]

[보상으로 5 위업 포인트를 얻었다.]

[발람과 세에레를 쓰러뜨림으로써 잠재되어 있던 힘이 개방됐다. 추가로 40의 위업 포인트를 얻었다. 단, 이렇게 얻은 위업 포인트는 한 능력치 당 최대 20까지만 투자할 수 있다.]

때마침 메시지가 떠올랐다. 발람과 세에레를 죽었다는 증거였다. 더불어 내가 얻을 보상도 설명해줬다.

상태창을 열자 잔여 위업이 45나 쌓여 있었다.

이중 40포인트는 다른 신분을 선택했더라면 당연히 얻었을 포인트지만 그래도 잔뜩 쌓여 있는 위업 포인트를 보니까 기분이 좋아졌다.

“일단 스탯 먼저 찍어야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면서 스탯 분배에 들어갔다.

우선 기교 스탯에 18 위업을 투자했다.

기교는 도나 단검 같은 가벼운 무기를 사용할 때 필요한 스탯으로 근력과 함께 근접 캐릭터들의 주요 스탯이다.

주로 검객이나 암살자 등이 많이 찍으며 기교가 높으면 빠르게 연격을 가하는 연속기나 반격 계열의 스킬을 배울 수 있다. 스킬들의 난이도가 상대적으로 높다 보니 초보자 보단 숙련자들이 많이 사용한다.

나 역시 오랫동안 기교 빌드를 애용해왔다. 성기사나 마검사 같은 빌드도 훌륭하지만 아무래도 내가 가장 오래 사용해온 빌드다 보니까 가장 먼저 손이 갔다.

역시 사람은 익숙한 일을 해야 한다. 앞으로 어떤 빌드를 짤지 결정한 나는 근력에 5, 신체에 7의 위업을 투자한 뒤 남은 15 위업은 스킬 습득을 위해 남겨뒀다.

기교 계열의 핵심 스킬을 배우려면 최소 15의 위업이 필요하다.

스킬은 헤베를 통해서 배울 수 있으며 일반 스킬은 3 위업, 보스의 이코르로 해금하는 스킬은 5 위업을 투자해야 한다. 당장은 보스 스킬을 만들어주는 NPC가 없으니 일반 스킬 5개를 배울 예정이다.

스탯 분배를 마친 나는 상태창을 전반적으로 확인했다.

이름: 감다키

성별: 남성

나이: 25세

종족: 인간

맹약: 없음

은혜: 없음

위업: 15

능력치: [생명 6(+16)] [정신 5] [신체 12]

[근력 13(+3)] [기교 23] [정밀 5] [민첩 5] [지성 5(+6)] [신념 5]

생명력: 660

마력: 150

기력: 150(+200)

오른손 공격력: 140

왼손 공격력: 20

방어력: [머리 5] [상체 38] [하체 0] [팔 0] [다리 0]

가드 게이지: 100

저지력: 10

인내력: 7

치명타 피해: +50퍼센트

치명타 확률: 5퍼센트

피로도: 5 / 8

스킬 목록: [열공의 한 획] [적출]

투자한 스탯은 정상적으로 잘 적용됐으며 고행자의 가호도 사라졌다.

가호가 사라지면서 두 배로 상승한 공격력과 피로도 상한이 원래대로 돌아왔으나 아쉽지는 않았다. 공격력이야 이제부터 계속 오를 거고 피로도는 적절히 휴식하면 문제되지 않으니까.

진짜로 아쉬운 건 은혜 부분이었다.

세 번째 선택지의 유일한 단점인데, 여명의 지배자 루트를 타면 기존의 은혜가 그냥 지워져 버린다. 원하는 은혜를 선택하게 해주거나 전용 은혜를 내려주는 다른 선택지와는 차별되는 부분이다.

나야 고행자의 가호의 페널티를 지워서 좋기야 하지만 다른 은혜를 골랐다면 멀쩡한 은혜를 날리는 꼴이 됐을 거다.

뭐 은혜도 나중에 새로 얻을 수 있으니까 이 역시 엄청난 문제는 아니다. 당장은 고행자의 가호를 해제한 것만으로 만족해야지.

“이제 딸잡이 놈들 좀 털어볼까.”

발람과 세에레의 시체는 입자가 되어 사라졌지만 그들의 이코르는 온전하게 남았다. 놈들이 죽은 자리로 가자 물방울떡 같이 생긴 물체가 허공에 떠 있었다.

붉은색과 푸른색이 태극 문양처럼 뒤섞여 있었는데 열기와 냉기가 동시에 느껴졌다. 두 마신의 이코르가 하나로 합쳐진 것이다.

발람과 세에레의 이코르

발람과 세에레가 남긴 강대한 이코르. 내부에선 화염과 냉기가 함께 일렁이고 있다. 상점에 팔거나 무기 제작 또는 스킬 개방에 사용할 수 있다.

72명의 마신들은 과거 이 세계에 신들을 소환한 대현자, 솔레이온의 신하들이었다. 충직했던 그들은 어느 날 레메게톤이라는 인간 신하에게 넘어가 주군을 배반하고 기원전쟁의 시작을 알렸다.

이코르를 손에 쥐자 왼손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지배자의 힘이 마신들의 권능을 흡수한다.]

[새로운 스킬군, 마신화가 해금됐다. 현재는 스킬 발동 조건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기본 스킬만 사용할 수 있다.]

[마신화 스킬, 적출을 습득했다.]

전투 기술, 궁술, 마법 등 가디스 던전에는 다양한 스킬군 존재한다.

그 중에서 마신화는 발람과 세에레를 처치하여 해금하는 숨겨진 스킬군이다.

무려 발람의 파열이나 세에레의 빙결창 등 마신들이 사용하던 능력을 그대로 가져와 스킬로 만든 것이다. 여타 스킬들과 다르게 오직 여명의 지배자 루트를 탔을 때만 해금할 수 있다.

성능으로만 따지면 마신들이 지원해주는 스킬, 장비 보다 훨씬 강력하다. 다른 스킬들과의 밸런스 붕괴가 심각하여 PVP에선 들고 나오는 것 자체가 비매너일 정도다.

물론 가디스 던전 개발자들도 생각은 있어서 그렇게 강력한 스킬들을 초반부터 습득하게 두진 않았다.

마신화 스킬을 사용하기 위해선 전용 자원을 해금할 필요가 있다.

전용 자원은 스킬이나 포션을 만들어주는 조력자 NPC를 만나야 얻을 수 있는데 그녀는 초반부 끝자락에서야 나온다. 그동안은 전용 자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기본 스킬 ‘적출’만 사용할 수 있다.

적출

패시브

요구 스탯: 없음

비용: 없음

사용 조건: 지배자의 자격 습득

습득 방법: 인내하는 자의 신전 클리어

효과: 마신의 힘으로 결정타가 강화된다. 결정타 공격력이 50퍼센트 증가하며 결정타 사용 도중 무적 시간이 증가한다. 아직 개방되지 않은 효과가 존재한다.

기존의 결정타는 내가 적에게 공격을 가한 순간부터 공격이 끝날 때까지 무적 상태가 적용됐다.

적출을 배우고 나서부턴 무방비 상태인 적에게 다가가자마자 무적 효과를 얻을 수 있도록 변경된다.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여러 명의 적을 상대할 때 무척이나 유용한 효과다.

들개들을 상대할 때도, 가고일 무리를 상대할 때도 빈틈을 보일까봐 종종 결정타 먹일 기회를 놓치곤 했는데 이젠 그럴 일이 없어진 것이다.

거기에 더해 결정타의 공격력도 50퍼센트나 증가하고 결정타의 애니메이션도 더 멋있게 바뀐다. 무려 왼손이 악마의 팔처럼 변해서 적의 내장을 쑤셔버리는 연출이 나오는 것이다.

물론 이건 원작 게임에서 그랬던 거라 게임 세계에서도 그럴지는 모르겠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시험해봐야지.

“고맙다 딸잡이들아.”

한층 더 강해진 것을 느끼며 전당을 나섰다. 마신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는 것도 있지 않았다.

재수 없는 놈들이지만 마신들 덕분에 내 목표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 여러 의미로 뜻깊은 적수였다.

============================ 작품 후기 ============================

적출이 배우기 전부터 스킬 목록에 적혀 있던 부분을 수정했습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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