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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오
다리가 부서지도록 달렸다. 내 속도가 빨라질수록 칼에서 뿜어져 나온 노을빛이 선명한 잔상을 남겼다.
파바바바박!!
그런 나를 멈춰 세우기 위해 세에레가 연이어 비수를 던졌다. 본래라면 저 비수들에 의해 벌집에 됐을 거다. 허나 보호막에 휩싸인 내 몸은 날아오는 비수들을 모조리 튕겨냈다.
[얼어라아아아앗!!]
기어이 빙결창과 5개의 얼음 칼날을 한꺼번에 발사하는 세에레. 어지간히도 날 죽이고 싶은 모양이다. 나는 그 행동이 헛짓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이미 공격이 안 통하는 걸 봤는데 멀뚱히 서서 원거리 공격만 날리다니. 상황 파악 능력이 바닥을 기는군.
“안 통한다고 병신아!”
콰차아아앙!!
날아오는 빙결창을 검으로 쳐냈다. 빙결창 속에서 터져 나온 냉기가 나를 에워쌌지만 나는 얼어붙기는커녕 춥지도 않았다.
새하얀 안개를 뚫고 나아간 나는 그대로 세에레를 베어 넘겼다.
“벽력일섬!!”
촤아아아악!!
소년만화의 주인공처럼 전력을 다했다. 지금 이 순간 난 젠이츠고 탄지로였다. 허나 내 일격은 허무하게 막혀버렸다.
[크흐으으윽!!]
“……!!”
발람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역전의 골키퍼처럼 오른팔을 뻗은 그는 숏소드를 방어함과 동시에 나의 이동 경로를 차단했다.
덕분에 놈의 이 길게 찢어졌으나 지금 상황에선 그 정도 상처쯤이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을 거다.
검격이 막히는 것과 동시에 나는 놈의 공격에 그대로 노출되고 말았으니까.
[끝이다 찬탈자여!]
화르르르르륵!!
발람의 손에서 화염이 뿜어져 나왔다. 때마침 내 몸을 감싸고 있던 새하얀 보호막이 사라졌다. 무적의 지속 시간이 끝난 것이었다.
이대로 있다간 꼼짝 없이 타 죽을 거다. 하지만 좌우 어디를 둘러봐도 피할 곳은 없다. 화염 방사의 범위가 넓어서 어디로 도망치든 공격에 맞게 될 거다.
절체절명의 상황. 원래라면 결코 모면할 수 없는 위기다.
하지만 나에겐 방법이 남아있다.
발람의 화염 공격을 무시하고 놈에게 극딜을 가할 방법이.
“그럴 줄 알았어!!”
[뭐라?!]
화르륵!
왼손에서 새하얀 불꽃이 일렁였다. 그것은 곧 발람의 화염으로부터 날 보호하는 방패가 되었다.
여기사가 남기고 간 장신구, 화염의 리본의 효과가 발동된 것이다.
화염의 리본 희귀
분류: 머리 장식
상승 스탯: 근력 3
내구도: 30/30
부가 효과: 하루에 한 번, 화염 피해를 받을 때 피해량을 0으로 하고 1초간 무적 상태가 된다. 효과가 발동되면 장비 내구도가 30퍼센트 감소한다. 내구도가 10 이하로 떨어지면 효과가 발동되지 않는다.
[섬세한 자수가 새겨진 하얀색 리본. 누군가를 위해 정성스레 만든 것으로 불꽃 모양의 자수는 화염으로부터 착용자를 보호하는 법술의 일종이다.]
[이게 무슨?!]
[발람 공!!]
방패에 막힌 불꽃은 모조리 상쇄되었다. 그것을 본 발람은 경악을 터뜨렸고 세에레는 서둘러 지원을 가했다.
허나 나와 세에레의 사이는 발람이 막고 있었다. 발람이 거체가 벽이 되어준 것이다. 방향을 바꿀 때까지 세에레는 날 공격하지 못한다.
이걸 노렸다.
발람이 내 돌진 베기를 막을 거란 건 당연히 예상했다.
내가 놈들을 공격하기 전에 무적 효과가 끝날 거란 것도, 날 가로막은 발람이 회피 불가능한 공격을 가할 거란 것도 말이다.
내 플레이 타임만 6천 시간인데, 이와 같은 상황을 겪어보지 않았을 리 없잖은가?
“유감이다, 오른딸잡이!!”
타아앗!
다리에 온힘을 실어 점프했다. 발람과 눈높이가 같아질 만큼 높이 뛰어오른 나는 그대로 숏소드를 내질렀다. 그러자 노을빛의 검신이 중력에 이끌려 발람의 안면을 꿰뚫었다.
빠가아아아악!!
[커허어어억……!!]
투구처럼 생긴 안면이 숏소드에 관통 당했다. 놈의 뒤통수로 숏소드의 칼날이 튀어나왔다. 나는 그것을 거칠게 뽑으면서 물 흐르듯이 연격을 펼쳤다.
위치를 바꾸려던 세에레를 크게 내려 벤 것이었다.
촤아아아악!
[크오오오오오옷!!]
왼쪽 어깨부터 오른쪽 허리까지 크게 베어 넘기자 세에레는 고통어린 비명을 질렀다.
뱃가죽이 찢어지면서 내장이 쏟아져 내렸다. 동시에 피가 터지는 효과음이 들리며 3335라는 데미지가 떠올랐다. 과연 내장이 튀어나올 만하다.
쿵!
털썩!
깔끔한 연계에 놈들이 차례대로 쓰러졌다. 마신들이 쓰러지기 무섭게 숏소드에 부여된 황혼의 힘도 수많은 빛 덩어리가 되어 사라졌다.
“허억……! 허억……!”
거친 숨을 토해내면서 자세를 바로잡았다.
내가 마신들에게 가한 데미지는 얼추 5000 안팎. 어지간한 몬스터라면 오버킬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데미지다.
허나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마신들의 생명력은 1만이나 된다. 5천이면 이제 겨우 절반을 깎은 셈이다.
[크르르르르르…….]
[하아아…….]
그것을 증명하듯 발람과 세에레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놈들의 몸에 변화가 일어났다.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염과 냉기가 한층 더 강렬해졌고 팔과 머리도 조금 전보다 위협적인 형태로 변했다.
2페이즈가 시작된 것이다. 이로써 놈들은 공격력이 100씩 상승하고 모든 패턴이 강화될 거다. 아크 데몬 때와 마찬가지로 온갖 무시무시한 패턴들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거다.
[아무래도 우리가 네놈을 너무 얕잡아본 것 같군…….]
오른손을 움켜쥐면서 발람이 말했다. 그 말을 받아들 듯이 세에레 역시 왼팔을 움켜쥐며 입을 열었다.
[비록 낙오자지만 네놈은 우리에게 견줄 정도로 강하다. 그러니 우리도 전력을 다하겠다.]
[주신들조차 두려워한 72 마신의 진정한 힘. 네놈에게도 보여주겠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발람과 세에레가 공격을 퍼부었다.
콰앙! 쾅! 쾅! 콰앙! 콰아앙!!
“……!!”
발람이 땅을 마구 내려치면서 내 몸을 뭉개 버리려 했다. 화염에 휩싸인 주먹이 바닥을 강타할 때마다 지면이 흔들리고 수많은 파편들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미친 새끼가……!”
잇따라 새겨지는 방사형 균열을 피하며 연신 몸을 던졌다. 그렇게 바닥을 구르는 내게 세에레의 손톱 공격이 날아들었다.
카가가가각!!
날카로운 손톱이 쟁기처럼 바닥을 긁었다. 그것만으론 피하기가 어렵지 않았으나 놈이 긁은 장소에는 얼음 안개가 형성되었다.
빙결창이 만들어내는 것보다 범위는 좁았지만 효과는 동일하다. 저기에 스치면 아까 그랬던 것처럼 몸이 얼어붙어 공격에 노출되고 말거다.
콰과과과광!!
발람의 공격 역시 후속타를 가지고 있었다. 놈이 내리친 지면에선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마치 대전차 지뢰라도 터진 것처럼 불길이 치솟았다.
저게 바로 발람이 타격한 지점에서 벗어나야 되는 이유다. 뭣 모르고 놈이 때린 장소를 얼쩡거리면 폭발에 휘말리게 되는 것이다.
[피하는 것 하나는 잘 하는구나! 하지만 언제까지 피할 수 있을까!!]
공격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사납게 소리친 세에레가 난도질을 시작했다. 비단 팔만 휘두르는 게 아니었다. 놈이 찢어발긴 허공에선 혹한의 비수가 생성됐는데 그것들은 자아를 가진 것처럼 나를 쫓아왔다.
“뭘 언제까지 피해, 너희 죽일 때까지 한 대도 안 맞아줄 거거든?!”
[오만하구나, 찬탈자여!!]
콰아아아앙!!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을 때 발람이 크게 발을 굴렀다. 어디서 많이 본 동작이었다. 철권에 나오는 빨간 도복 아저씨의 자세와 상당히 유사했다.
그것을 보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놈은 지금 내게 붕권을 날리려는 것이다.
[으오오오오오!!]
푸화아아악!!
미친 새끼가 기합 소리도 판박이다. 발람이 붕권을 내지르자 놈의 주먹에서 거대한 불길이 치솟았다. 그것은 주먹의 형태로 나에게 날아왔다.
젠장 하필이면 비수를 피하고 있을 때 붕권이 날아오다니. 최악의 상황이다. 단순 회피로는 전부 피할 수 없다. 어떻게든 한 대는 맞게 될 거다.
“맞아 그게 있었지!”
불현 듯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나는 허리춤에 매고 있던 갈고리 밧줄을 꺼내들었다.
다른 아이템들과 다르게 갈고리 밧줄은 끊어지지만 않으면 몇 번이고 사용할 수 있다. 하물며 지금 내 주위에는 갈고리를 걸 만한 기둥들이 아주 많이 있다.
“쯔아아아앗!”
갈고리를 기둥에 건 뒤 힘차게 잡아당겼다. 그 반동으로 내 몸이 한 차례 붕 떴고 빠르게 기둥 쪽으로 날아갔다. 그런 내 뒤에서 화염의 주먹이 지나갔고 집요하게 쫓아온 비수가 밧줄을 끊었다.
퍼억! 퍼어억!
“커흑! 악! 아악!”
기둥을 향해 날아가던 내 몸이 바닥에 처박혔다. 비수와 붕권 모두 피할 수 있었지만 말도 못하게 아팠다. 아니나 다를까 낙하 피해로 생명력이 50이나 빠져 나갔다.
[우오오오오오옷!!]
[크하아아아아!!]
“……!”
그런 나를 향해 마신들이 일제히 뛰어올랐다. 팔을 내리찍어서 날 압살하려는 심산인 것이다.
“으아아아악!!”
그 광경을 본 나는 추하게 바닥을 굴렀다.
제 3자 입장에서 보면 굉장히 꼴불견이겠지만 생존본능 앞에선 무슨 짓이라도 가능하다. 벌레처럼 바닥을 구르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다.
콰아아아앙!!
파아아아앗!
화염과 냉기가 뒤엉켜 하늘 높이 치솟았다. 마치 불과 얼음의 춤을 보는 것 같다. 내가 가디스 던전 외에 재밌게 한 얼마 안 되는 게임이어서 갑자기 생각났다.
폭풍 같은 연격에서 살아남은 나는 숨을 헐떡이며 놈들의 행동을 주시했다.
거짓말 안 하고 수명이 10년은 줄어든 것 같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으며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달려오는 지하철을 간신히 피하면 이런 기분이 아닐까? 어찌됐든 존나게 무서웠다.
[생각보다 훨씬 성가신 놈이군. 우리들의 연격을 전부 피하다니.]
[안 되겠군요 발람 공. 그걸 하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나와 대치한 마신들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눴다.
연격이 끝났으니 놈들은 슬슬 마지막 패턴을 사용할 것이다.
무의미하게 소모전만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놈들도 가급적 한 번에 끝내고 싶어 할 거다. 그것을 위해선 마지막 패턴, 필살기를 쓸 수밖에 없을 거다.
필살기라는 이름에 걸맞게 무척이나 위험한 패턴이지만 그게 내가 이길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회다.
내가 각오를 다지고 있을 때 놈들도 행동하기 시작했다. 역시 내 생각은 조금도 빗나가지 않았다.
[신성한 전당에서 이것까진 쓰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군.]
[영광으로 알거라 찬탈자여. 네놈이 무분별하게 휘두른 힘과는 차원이 다른, 진정한 황혼의 힘으로 최후를 맞이하게 될 테니.]
발람과 세에레가 하늘 높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마신들의 손에서 주황색 빛이 뿜어져 나왔고 그것은 어느덧 거대한 구체가 되었다.
저녁놀처럼 빛나는 구체는 점점 커져갔다. 그것은 끝내 자그마한 태양처럼 천장을 가득 채웠으며 전당 전체를 밝게 비췄다.
저것이 놈들의 마지막 패턴이자 필살기나 다름없는 능력, 황혼의 심판이다.
7초 동안 기를 모은 뒤 구체를 폭발시켜 맵 전체에 5000의 피해를 입히는 무지막지한 공격이다.
이 피해는 플레이어의 방어력을 무시할 뿐더러 물리 공격으로도, 마법 공격으로도 분류되지 않아 저항할 수도 없다. 무슨 수를 써도 5천의 데미지를 곧이곧대로 맞게 되는 거다.
유일한 파훼 방법은 구체가 완성되기 전에 놈들을 죽이거나 맵 곳곳에 나타나는 안전지대에 들어가는 것뿐이다.
파앗! 파아앗!
[여명의 힘이 그대를 돕는다. 서둘러 보호진 안으로 이동하라.]
마침 안전지대에 관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저 멀리 푸른색으로 빛나는 원이 나타났다. 저게 바로 황혼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안전지대다.
7초 만에 놈들을 죽이는 건 지금 내 스펙으론 절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안전지대로 들어가는 게 쉬운 것도 아니다.
안전지대는 무조건 플레이어와 가장 먼 지점에 생성되기 때문에 도달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전당의 규모를 생각하면 7초는 정말 아슬아슬한 시간인 거다.
[보아라, 찬탈자여! 이것이 진정한 황혼의 힘이다!! 위대한 자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초월적인 힘인 것이다!!]
[본래라면 이 힘 역시 그대의 것이 됐겠지! 허나 지금은 오만한 찬탈자를 처단하기 위한 철퇴로 쓰겠다! 스스로의 만행을 후회하며 처참히 죽어라!]
엄숙하게 구체를 만드는 발람과 세에레는 마치 사형선고를 내리는 판관과 같았다. 그에 비해 나는 무력하게 판결을 기다리는 사형수에 지나지 않는다. 저 거대한 노을빛 구체 앞에서 나라는 존재는 벌레와 다름없다.
그러나 나는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누가 쉽게 죽어준대?”
[뭐라고?]
발람과 세에레가 고개를 돌렸다. 놈들은 내 죽음을 확신하고 있겠지.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놈들은 황혼의 심판을 준비한 시점에서 패배한 거나 다름없다.
“뭔가 거창하게 준비한 건 좋은데, 지금 너희는 맞추기 쉬운 과녁일 뿐이야 빡대가리 새끼들아.”
마신들을 똑바로 노려보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직후 양손으로 숏소드를 움켜쥔 채 상단 자세를 취했다.
초보자라면 우왕좌왕하며 안전지대를 찾았을 것이다. 나 역시 대응 수단이 없었다면 초보자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이 행동했으리라.
허나 지금의 나에겐 브릴린트 누님이 만들어준 폭풍의 숏소드가 있다.
마신들조차 찢어발기는 강력한 스킬, 열공의 한 획을 쓸 수 있는 무기가 지금 내 손에 들려있는 것이다!
열공의 한 획
액티브
요구 스탯: 없음
비용: 기력 100, 마력 100
사용 조건: 폭풍의 권능석으로 강화된 무기 착용
습득 방법: 폭풍의 권능석으로 무기를 강화하면 자동 습득
효과: 3초 동안 기를 모은 뒤 무기를 양손으로 내려쳐 하늘마저 찢어 가르는 강력한 폭풍을 일으킨다. 전방 20미터, 폭 3미터 이내에 있는 모든 적들에게 공격력 +1000퍼센트의 전격 피해를 주며 인내력을 300감소시킨다. 슈퍼아머 상태라면 슈퍼아머를 파괴한다. 이 스킬을 사용하면 무기 내구도가 영구적으로 20퍼센트 감소한다.
3초간의 준비 끝에 나는 전력으로 숏소드를 내리쳤다.
어렸을 적 나의 우상이었던 만화 주인공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바람의 상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