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33화 (33/217)

33====================

각오

[수정쐐기를 흡수함으로써 황혼의 힘을 손에 넣었다. 공격력이 150퍼센트 상승하고 적의 인내력을 무시한다.]

투기를 드러낸 내 앞에 그런 메시지가 떠올랐다.

바뀐 건 숏소드의 외관뿐만이 아니다. 주황색 비석이 품고 있던 황혼의 힘은 공격력과 저지력을 올려주는 형태로 내게 힘을 불어 넣어줬다.

이로써 내 공격력은 무려 565. 거기에 공격할 때마다 적을 무조건 경직시키는 능력까지 얻었다. 영구적으로 지속되는 능력은 아니지만 1페이즈를 넘기기엔 충분할 거다.

[어째서……! 어째서 네놈이 황혼의 힘을 다룰 수 있는 거냐?!]

[그 힘은 본래 종결자에게만 허락된 숭고한 힘이다! 사명을 저버린 찬탈자 따위가 쓸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황혼의 힘은 마신들이 신성 시 하는 초자연적인 힘이다.

위대한 자라 불리는 정체불명의 존재가 남겼다고 하며 본래는 황혼의 종결자만이 이 힘을 사용할 수 있다.

종결자가 되기 위해선 수정쐐기의 선택을 받아야하는데 그 과정에서 비석이 필요한 것이다. 나도 자세한 설정은 기억 안 나지만 대충 의식의 일종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나는 그 과정을 건너뛰고 내 몸에 직접 쐐기를 박아버렸다. 그것만으로 모자라 발람을 속여 비석을 박살내기까지 했으니 마신들 입장에선 내 행동이 도저히 용납되지 않으리라.

용서할 수 없다는 듯이 소리치는 마신들을 바라보며 나는 목청껏 소리쳤다.

“그건 너희들 생각이고!”

촤아아아악!!

그 말과 함께 숏소드를 힘껏 휘둘렀다. 2미터를 족히 넘기는 검강이 넓은 궤적을 그렸다.

초승달처럼 날카로운 궤적은 발람과 세에레를 집어삼켰고 다음 순간 놈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흐으으윽!?]

[아아아아아악!!]

충격을 버티지 못한 마신들이 고통에 몸부림쳤다. 갑옷과 같은 몸체에 선명한 절상이 새겨졌으며 붉은색 피가 왈칵 뿜어져 나왔다. 조금 전에 가한 상처와는 비교도 안 됐다.

검격에 맞은 놈들은 경직됨과 동시에 510의 데미지를 받았다. 방어력이 55나 되는 발람과 세에레였지만 공격력이 150퍼센트나 상승하니 그 높은 방어력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수정쐐기를 빼앗은 걸로도 모자라 황혼의 힘으로 우리를 베다니……!!]

[용서할 수 없다! 네놈은 절대 편히 죽이지 않겠다!!]

한 차례 공격을 허용한 발람과 세에레가 즉각 대응에 나섰다.

화염과 냉기로 에워싸인 팔이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근접한 적에게 기습적으로 사용하는 패턴, 화염의 손아귀와 빙결의 손아귀였다.

잡기 판정을 가진 공격이라는 점에선 발람의 파열과 비슷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다. 비교적 긴 선딜과 후딜을 가진 파열에 비해 이 패턴은 선딜이 거의 없다시피 해서 피하기 매우 힘든 것이다.

“으아악 딸잡이 손이다!!”

하지만 내가 더 빨랐다. 나는 비명을 지르면서 스탭을 밟았다. 황혼의 힘을 흡수한 후로 온몸에서 느껴지던 통증이 순식간에 멎었다. 수정쐐기로 인한 부작용이 사라진 것이었다.

물론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어서 방어와 패링 등은 여전히 사용하기 힘들다.

그래도 이동 속도, 회피 속도는 원래대로 돌아왔다. 정상적으로 돌아온 속도에 내 반사 신경까지 더해지니 놈들의 기습적인 잡기도 못 피할 만한 공격은 아니었다.

“정액 묻은 손 저리 치워!!”

[어디에 뭐가 묻었다는 거냐, 이 추잡한 놈!!]

[천박함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그 더러운 입부터 다물하게 해주……! 크하아아악!!]

몇 차례 스탭을 밟아 놈들의 뒤를 잡았다. 마신들이 뒤로 돌아설 때 나는 황혼으로 강화된 숏소드를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아다아다아다아다아다아다아다아아앗!!”

촤자자자자자작!!

주황색 검신이 연이어 사선을 그렸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허공에 노을빛 잔상이 남았다. 내 화려한 공격에 그대로 노출된 놈들은 연달아 피해를 받으며 고통스러워했다.

[네노오오오옴! 가만두지 않겠다아아아아악!]

“뭐래 샌드백마냥 처맞고 있는 주제에! 가만두지 못하겠으면 반격해보던가!”

노도 같은 검격 속에서 놈들은 시시각각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물론 놈들도 멀뚱히 서 있기만 한 건 아니었다.

평타의 특성상 몇 타 이상 때리면 후딜레이가 발생한다. 놈들은 그 틈을 노려서 반격을 가했다. 내 후딜을 귀신 같이 잡아내 연격의 지옥에서 벗어나려는 것이었다.

노력은 가상하나 절대 그렇게 둘 수 없다. 나는 회피로 후딜레이를 최대한 캔슬하며 놈들의 행동을 차단했다. 벗어나려고 하면 쫓아가서 때리고 반격하려 하면 한 번 피한 뒤 다시 때렸다.

때리고, 때리고, 또 때리고.

바닥이 검붉은 피로 흥건해지고 내 몸이 마신들의 피로 흠뻑 젖어도 나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역겨운 피비린내 때문에 토악질이 밀려왔지만 검을 쥔 손에는 더욱더 힘이 들어갔다.

말했듯이 황혼의 힘이 주는 강화 효과는 일시적이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1분도 채 안 될 거다. 내 체력이 바닥나는 한이 있더라도 최대한 극딜을 넣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1페이즈를 넘길 수 없다.

[더러운 찬탈자 놈! 봐주는 것도 끝이다!!]

[선별자의 저력을 몸소 깨닫게 해주마!!]

콰아아아앙!

파아아아앗!

얼마나 마신들을 썰어댔을까. 놈들의 몸에 이변이 일어났다.

발람의 몸에선 불꽃이 치솟았고 세에레의 몸에선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놈들도 버프 스킬을 발동한 것이다. 이를 감지한 나는 다급히 공격을 멈추고 뒤로 물러났다.

놈들이 사용한 스킬은 소머리 가고일의 그것과 상당히 유사했다. 각각 화염의 방벽과 빙결의 방벽이라는 이름이며 효과 자체는 소머리 가고일이 쓴 능력의 상위호환이다.

인내력과 방어력을 올려주는 소머리의 방벽과 다르게 놈들의 방벽은 능력이 지속되는 동안 슈퍼아머를 부여한다.

슈퍼아머를 얻은 캐릭터는 그 어떤 공격을 받아도 경직당하지 않으며 오로지 잡기 판정으로만 저지할 수 있다.

방금 전까진 인내력 무시 능력을 믿고 공격을 퍼부었는데 더 이상 그럴 수 없게 됐다.

그래도 걱정은 없다. 나에겐 또 다른 수단이 남아 있으니까.

“그런 게 있었으면 진즉에 쓰지 왜 맞고만 있었냐? 너네 사실 즐기고 있었던 거 아니야?”

[헛소리!!]

발람이 맹렬한 기세로 돌진했다. 그 뒤에선 세에레가 팔을 한껏 당기며 빙결창을 던지려 했다.

거기에 더해 놈들의 주위에선 커다란 화염구와 날카로운 얼음 칼날이 5개씩 나타났다. 놈들의 패턴 중 가장 성가신 투사체 발사 패턴이었다.

마신들 주위에 생성되는 투사체는 놈들이 원할 때마다 순차적으로 발사된다.

필요에 따라 5개의 투사체를 동시에 날릴 수도 있으며 투사체를 발사하는 동안 마신들은 자유롭게 다른 행동을 할 수 있다.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여도 매우 악랄한 패턴 중 하나다. 오죽하면 수많은 플레이어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을 정도로 까다로운 패턴인 것이다.

근접 공격을 간신히 피해도 화염구와 얼음 칼날이 연이어 날아와 공격해대니 피하는 의미가 없어진다.

그나마 놈들의 후방에 있으면 빗나갈 확률이 올라가지만 다른 놈이 같이 공격할 경우엔 답이 없다. 그저 투사체를 전부 소비할 때까지 거리를 벌리거나 기둥 뒤에서 잘 숨어 있는 수밖에 없다.

[얼어버려라!!]

쐐애애애액!!

내가 도망치고 있는 사이 빙결찰이 날아들었다. 다행히도 내 옆에는 기둥이 있었다. 급박한 상황 속에서 나는 기둥 너머로 몸을 던졌다.

콰차아아앙!!

그 순간 등 뒤에서 빙결창의 폭발음이 들려왔다. 기둥이 막아준 덕분에 직접적인 피해는 면했지만 살을 에는 한기가 전신을 덮쳤다.

마치 영하 30도 날씨에 팬티 한 장만 입고 한강에 입수한 것 같았다. 아니, 그렇게 추우면 강이 얼어서 입수가 안 되려나? 아무튼 말도 못하게 차가웠다.

“앗 차거!!”

비명을 지르며 기둥에서 벗어나려 할 때였다.

[흐아아아아압!!]

콰아아아아앙!!

발람의 딸근, 아니, 오른팔이 기둥을 박살냈다. 이미 기둥을 벗어나고 있었던 나였기에 여유롭게 피할 수 있었으나 또 다른 공격이 내 숨통을 노렸다.

파바바바박!!

빙결창에 이어서 혹한의 비수가 날아온 것이었다. 발람에게 집중하고 있던 나였기에 차마 그것까진 피하지 못했다.

푸후욱!

“아아악!!”

결국 비수 하나가 허벅지를 꿰뚫었다. 날카로운 격통이 내 신경계를 무자비하게 폭행했다.

[발람 공! 내 비수에 맞았으니 멀리 가지 못할 겁니다!]

[마무리는 내게 맡겨라!!]

“아 진짜 양심 빻은 새끼들아!!”

욕지거리를 날리며 마지막 남은 넥타르를 들이켰다. 그러자 다리에 박힌 비수가 저절로 빠져나가며 상처가 아물었다.

덕분에 발람에게 따라잡히지 않았지만 이걸로 회복도 못하게 됐다.

내 남은 생명력은 고작 219. 놈들의 평타 공격력이 210이니까 평타 두 대만 맞으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 생명 스탯을 찍어두지 않았다면 한 대만 맞고도 죽었겠지.

과거의 나를 칭찬하며 전속력으로 달렸다. 그런 날 붙잡기 위해 마신들은 미리 만들어놓은 투사체를 발사했다.

콰과과과광!! 쐐애애애액!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날아드는 10개의 투사체. 마치 유탄 발사기를 난사하는 것 같았다. 이것들 역시 혹한의 비수 보단 느렸지만 유도 능력이 있어서 피하기는 더 어렵다.

“조금만……! 앞으로 조금만 더!!”

기둥 사이를 지그재그로 달리며 하얀색 비석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는 도중에도 세에레는 연이어 비수를 날렸고 발람은 기둥들을 박살내며 바싹 쫓아왔다. 거기에 드론처럼 쫓아오는 투사체들까지 더해져서 내 상황은 아비규환으로 치달았다.

그렇게 투사체들이 날 바싹 쫓을 무렵이었다.

“쯔아아아아앗!!”

가까스로 하얀색 비석에 도달했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가오 부리지 말고 미리 부숴두는 건데. 후회가 막심했으나 결과적으로 잘 됐으니 상관없다. 나는 온힘을 다해 숏소드를 휘둘렀다.

카아아아앙!!

노을빛 검신이 하얀색 비석을 두 동강 냈다. 새하얀 비석은 진흙처럼 깔끔하게 잘려나갔고 곧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와 내 몸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발람과 세에레의 보스전은 순전히 컨트롤을 통해 이기는 싸움이 아니다. 지형지물과 아이템 등을 활용하여 이기는 기믹 전투인 것이다.

주황색 비석으로 얻은 황혼의 힘이 첫 번째 기믹이고, 두 번째 기믹이 바로 하얀색 비석에 깃든 환생의 힘이다.

정상적으로 얻을 경우 능력치를 초기화해주는 이 힘은 비석을 부숴서 얻을 때 효과가 달라진다.

그 효과는 무려 일정 시간 동안 캐릭터를 무적 상태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촤자자자자작!

콰아아아아앙!!

뒤따라온 투사체들이 내게 빗발쳤다. 하지만 나는 피하지 않았다.

[수정쐐기를 흡수함으로써 환생의 힘을 손에 넣었다. 일정 시간 동안 무적 상태가 된다.]

눈앞에 익숙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것을 읽는 동안 화염구가 폭발하고 얼음 칼날이 내 몸을 찢으려 했다.

하지만 피해는 전혀 없었다. 내 몸을 감싼 하얀색 보호막이 공격들을 모조리 튕겨낸 것이었다.

팅! 티딩! 팅팅! 티딩! 팅팅팅! 티이이이잉!!

[찬탈자 놈, 기어이 우리 선별자들이 준비한 힘까지!]

[네놈은 어디까지 우리를 모욕해야 직성이 풀리는 게냐!!]

무적 상태에 돌입한 나를 보며 발람과 세에레가 원망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런 마신들의 목소리는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갈라져 있었다.

무리도 아니다. 하얀 비석에 담겨 있는 환생의 힘은 발람과 세에레 뿐 아니라 72명의 마신들이 힘을 모아 만든 것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친구들과 함께 준비한 생일 케이크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저놈들 입장에서 내가 한 짓은 열심히 준비해서 선물한 생일 케이크를 본인이 먹지 않고 여친과의 이색 섹스에 사용한 것과 같다. 배신감 때문에라도 오열하지 않겠는가. 적어도 나라면 그럴 것 같다.

“그렇게 소중한 거였으면 잘 간수했어야지! 너희가 부주의한 탓이야!!”

마신들에게 반박하면서 지면을 박찼다.

무적 상태의 지속 시간은 단 15초. 덩달아 황혼의 힘의 지속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무적 상태와 비슷하게 끝나거나 그보다 조금 더 늦게 끝나겠지.

15초 안에 1페이지를 끝내야 한다. 나는 집념어린 움직임으로 놈들을 향해 가속했다.

“하아아아아앗!!”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