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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하는 자의 신전
눈앞에 표시된 데미지는 경악스럽기 그지없었다. 무려 2818. 명백한 오버킬이었다.
266의 공격력이 서리 칼조각의 효과로 20퍼센트 상승했고 빙결 약점으로 인해 50퍼센트의 추가 피해, 그 후 결정타 피해로 500퍼센트가 또 추가되면서 저런 흉악한 수치가 나온 것이다.
생명력이 1200인 소머리 가고일은 저항할 여지도 없이 죽을 수밖에 없다. 이런 흉악한 수치 앞에선 높은 방어력도 무의미하다.
[음머어어어어어!!]
A의 죽음에 분노한 건지 B가 괴성을 지르면서 달려들었다. 돌진하는 내내 할버드를 좌우로 휘둘러 대서 거센 풍압이 몰아쳤다.
마치 방금 전까지 비행하고 있던 헬기의 프로펠러가 내 쪽으로 날아오는 것 같았다. 지릴 것 같은 광경이었지만 나는 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할버드의 속도, 휘두르는 타이밍을 하나하나 계산했다. 최적의 타이밍이 보인 순간, 나는 오히려 놈에게 접근하여 숏소드를 휘둘렀다.
카아아아앙!
[……?!]
이번에도 패링에 성공했다. 할버드가 튕겨져 나가며 가고일의 팔이 뒤로 한껏 젖혀졌다.
“네 울음소리 지겹다, 이제 그만 가자.”
서걱!!
그 틈에 놈의 목을 있는 힘껏 베었다. 마찬가지로 2818의 피해가 떠오르면 소머리 가고일의 목이 저 멀리 날아갔다. 쿠우웅! 허공에서 수십 번이나 회전한 이형의 머리는 끝내 바닥에 떨어졌다.
“하아…… 하아…… 하아…….”
소머리 가고일들을 죽인 뒤 주위를 살펴보았다.
더 이상 덤벼드는 적은 없었다. 표범머리들 중 대부분은 대궁 함정에 맞아 죽은 듯했다. 대궁 함정도 발동 구간을 지나쳐서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 하하핫…… 하하하하하핫!!”
긴장이 풀린 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승리를 실감하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누가 보면 미친놈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차오르는 희열 때문에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겼다……! 이겼어, 이겼다고!!”
아크 데몬 때와 같다. 힘들게 얻은 승리가 나에게 쾌감을 안겨줬다.
싸우는 동안 몇 번이나 죽을 뻔했는데도 막상 이기고 나니까 그 모든 과정이 즐겁게 느껴졌다.
몇 초 전까지만 해도 할버드에 맞아 몸이 두 동강 날 뻔하고, 구덩이 아래로 떨어져서 낙사할 뻔했는데 즐거워할 수 있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정상은 아니었다. 이건 분명 그런 것이리라. 고인물들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특유의 변태성. 내 몸에선 그것이 피처럼 흐르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신날 수가 없다.
“진짜 겁나 재밌다…….”
웃다가 지친 나는 자리에 드러누웠다. 그러는 도중에도 내 입가에선 미소가 떨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즐거운 게 얼마만인가. 아마 가디스 던전을 처음 시작했을 때, 날밤이 새는지도 모르고 미친 듯이 플레이했던 그때 이후로는 처음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살면서 즐거웠던 적이 별로 없다. 매일 같이 부모님의 강요와 누나들의 멸시를 받고 살던 나날의 연속이었다.
“아 씨, 괜히 또 생각나려 하네…….”
짜릿했던 쾌감이 눈 깜짝할 사이에 우울함으로 바뀌었다.
가족들을 생각하면 늘 이렇다. 아무리 좋았던 기분도 순식간에 나락으로 처박힌다.
나를 보며 한숨을 쉬는 부모님, 왜 그렇게 사냐며 설교를 해대는 누나들.
그들과의 추억은 좋은 게 하나 없다.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항상 가족들을 실망시키는 존재였으니까.
그들이 내게 건 기대에 비해 나는 한없이 모자란 놈이었던 것이다.
“언제부터였더라……. 중학교 3학년쯤이었던 것 같은데…….”
가족들에 대해선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어째서인지 과거를 돌이키고 있었다.
우리 부모님은 오랫동안 아이를 가지지 못했다.
10살, 5살 차이나는 누나들은 사실 친누나가 아니며 아이를 가지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부모님이 입양해 온 자식들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태어났다. 엄마가 결혼 후 10년 만에 아들을 낳은 거다.
부모님은 내가 엘리트가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빠는 잘 나가는 종합병원의 원장이고 엄마는 의과대학의 교수다.
우리 같은 사람이 낳은 아들인데 엘리트가 아닐 리 없다. 아빠도, 엄마도 그런 마음으로 나에게 기대를 걸었던 것이리라.
그래서인지 부모님은 어렸을 때부터 내게 온갖 부담을 안겨줬다. 8살 어린애한테 살인적인 학업을 강요하며 우등생이 되라고 말한 것이다.
처음에는 칭찬받고 싶은 마음에 열심히 공부했다. 하지만 나는 선천적으로 공부에 소질이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 봐도 평균점 밖에 받지 못했으며 이는 절대 변하지 않았다.
반면 누나들은 항상 수석의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괜히 잘 나가는 변호사, 의사가 된 게 아니다. 누나들은 천성이 엘리트였고 나와는 완전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무슨 수를 써도 누나들처럼 잘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런 나를 보며 부모님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럴 만도 하다. 내 씨로 낳은 아들이 입양한 딸보다 못한데 어찌 상심하지 않겠는가.
그에 대한 여파인지 부모님은 항상 나를 누나들과 비교했다. 자그마한 실수에도 폭언과 욕설을 동반하여 심하게 혼냈고 허구한 날 누나들 좀 본받으라며 윽박질렀다. 심할 때는 날 실패작이라며 한탄하기도 했다.
누나들도 나를 낙오자 취급하며 무시하기 일쑤였다. 첫째 누나는 설교를 가장한 모욕으로 날 찍어 눌렀고 둘째 누나는 하루도 내 험담을 안 한 적이 없다.
부모님의 압박, 누나들의 멸시로 인해 나는 결국 스스로가 잘 하는 것 하나 없는 낙오자라고 생각하게 됐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공부를 못하는 애한테 공부만 하라고 강요했는데 어떻게 좋은 결과가 나오겠는가? 다른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는커녕 실패작 취급 하다니. 절대 정상적인 가족이 할 짓은 아니다.
결국 부모님과 누나가 날 망쳐놓은 거다. 남 탓하는 건 좋은 버릇이 아니지만 어쩌겠어. 내가 자존감 없는 병신 찐따가 된 건 진짜로 부모님이랑 누나들 때문인데.
어찌됐든 그 이후론 뭘 해도 의욕이 나지 않았다.
나는 결국 공부에서 손을 떼버렸다. 부모님과 심하게 다투며 열심히 다니던 학원도 전부 그만뒀다. 그게 중학교 3학년 때 일이다.
고등학교는 개나 소나 갈 수 있는 꼴통 고등학교로 갔고 그곳에서도 무엇 하나 열심히 하지 않았다. 이미 의욕이란 의욕은 전부 상실했기에 무언가를 열심히 해야 할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못한 것이다.
공허하기만 한 고교 시절과 스무 살을 보낸 뒤 군대를 다녀왔다. 1년 6개월 동안이나 집에 없었는데 반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나들은 노골적으로 내가 돌아온 것을 불쾌해했으며 부모님은 보자마자 한숨부터 쉬고 봤다. 나에게 제대로 된 인사를 건넨 건 가정부 아주머니뿐이었다.
짜증이 치솟았다. 훈련소 수료식 때도 얼굴 한 번 비추지 않더니, 면회는커녕 전화 한 번 하지 않더니 전역 후에도 이런 식이라니.
화가 나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분노도 분노였지만, 내가 그들 사이에 끼지 못한다는 소외감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날을 기점으로 나는 방구석에 틀어박히게 됐다.
밖에 나가봤자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나는 무슨 수를 써도 가족들에게 인정받지 못할 거다.
그 사실이 너무 괴로워서 점점 가상 세계에 빠져들었다. 가디스 던전을 지나치게 오래한 것도 전부 현실을 잊고 싶어서 그런 거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방구석 생활을 통해 내가 잘할 수 있는 걸 발견하게 됐다.
게임과 방송이야 말로 내 적성이었던 것이다.
비록 가디스 던전으로 한정되기는 했지만 이것만큼은 누구보다 잘할 수 있었다. 난생 처음으로 즐겁게 할 수 있는 특기를 발견해낸 거다.
“스으읍…….”
생각하다 보니까 눈물이 났다.
염병, 이런 거 가지고 울고 싶지 않은데.
아무리 부모형제가 좆같아도 그런 거 가지고 질질 짜기는 싫었다. 하지만 먼 타지에 와서 되새겨 보니까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들이 그리워서가 아니라, 이런 곳에 왔는데도 가족이 그립지 않다는 사실이 너무 슬펐다.
“……꼭 돌아가야 되나?”
과거를 돌아보던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친구도 없고, 가족한테도 무시당하고, 잘 하는 것 하나 없다. 그런 내가 원래 세계로 돌아가 봤자 우울한 하루하루만 기다리고 있을 거다.
그런 삶으로 돌아갈 바에야, 차라리 내가 좋아하는 게임 속에서 사는 게 훨씬…….
[카아아아앗!!]
[키아앗! 카아아아앗!!]
“……!”
상념에 빠져 있던 나는 갑작스러운 괴성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소리가 난 곳을 확인해보니 십여 마리의 가고일들이 내 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대부분 대리석 가고일이었지만 표범머리 가고일도 한두 마리 보였다.
어떻게 된 거지? 아직 저 조합이 나올 구간은 아닌데. 설마 소리를 듣고 날아온 건가?
“씹새들아 나도 좀 쉬자……!!”
자세를 잡으며 공격에 대비했다. 다음 순간 내 앞으로 날아든 표범 머리 한 마리가 칼춤을 추듯 검을 휘둘렀다. 현란하게 움직이는 팔시온을 눈으로 쫓으며 나는 신속히 패링을 시도했다.
카아아아앙!
촤아아아악!!
놈을 무방비 상태로 만들어버린 뒤 곧장 결정타를 먹였다. 야구 배트 휘두르듯 풀 스윙을 가하자 놈의 머리가 산산조각 났다.
[카아아아앗!]
[키아아아아아!!]
순식간에 한 놈을 처리하자 다른 놈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덤벼들었다. 연이은 전투에 피로감이 느껴졌지만 어쩐지 기분은 좋아졌다.
나쁜 기억과 고민이 흐르는 땀과 함께 씻겨나갔다. 달려드는 가고일들을 하나씩 썰어버릴 때마다 내 입에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제 와선 위기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내가 느낄 수 있는 건 오로지 전투로 인한 희열뿐이었다.
“하하핫……! 하하핫!! 으하하하핫!!”
* * *
얼마나 많은 사투를 벌였을까.
나는 끝내 던전 끝자락에 다다랐다.
“마참내…….”
그곳에는 신전 정문과 비견될 정도로 커다란 문이 있었다.
문 옆에는 반쯤 무너진 여신상이 있었는데 이 여신상이 바로 가디스 던전의 세이브 포인트다.
온전한 여신상은 세이브와 더불어 다른 여신상이 있는 곳으로 빠른 이동을 할 수 있지만 부서진 여신상은 빠른 이동 기능을 이용할 수 없다.
여신상이 멀쩡했다면 성소로 돌아가서 재정비 할 수 있었겠으나 지금의 내겐 꿈같은 일이다.
내 발로 직접 돌아가는 것도 불가능하다. 인내하는 자의 신전은 던전을 클리어하지 않는 한 잡몹들이 끊임없이 리스폰되기 때문이다. 이 던전을 얼마나 악의적으로 설계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세이브 같은 게 발동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딴 거 없었다. 부서진 여신상은 내가 무슨 짓을 해봐도 묵묵부답이었다. 이걸로 세이브도, 부활도 없다는 게 확실해졌다.
“니미.”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여신상 앞으로 다가갔다.
여신상 앞에는 직육면체의 제단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에 넥타르 병을 올려두자 넥타르가 세 모금만큼 보충됐다. 병 안에 들어있는 암브로시아가 여신상의 힘을 받아 신주의 기적을 일으킨 것이다.
넥타르를 보충한 뒤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저 문을 넘어서면 고행자의 가호를 해제할 수 있다. 고행자의 가호만 해제하면 구태여 이런 위험한 곳을 드나들 필요도 없어진다. 리단처럼 성소에 틀어박힌 채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거다.
이를 되새기면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문 너머에선 커다란 전당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곳곳에 장식된 황금 조각상은 아름답게 빛을 냈으며 새하얀 대리석과 어우러져 이 방 자체가 하나의 예술품 같았다. 내가 방 안에 들어서는 것과 동시에 어디선가 꽃잎이 날아오고 천장에 매달린 붉은색 깃발들이 흩날려 웅장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가던이 맵 하나는 진짜 잘 만든단 말이지…….”
버그 픽스에도 이 정도로 공을 들였다면 스티임 평점이 복합적까지 내려가는 일은 없었을 텐데. 참 아쉬운 일이다.
아름다운 배경에 다시 한 번 감탄하면서 나는 좀 더 안쪽으로 걸어갔다.
홀 곳곳에는 커다란 기둥이 있었는데 천장을 떠받치기 위한 용도는 아니었다. 화려하게 꾸며놓은 것으로 보아 장식의 일종처럼 보였다.
기둥들을 지나며 나아가자 넓은 연못이 나타났다. 인공적으로 만든 연못이었으며 이 역시 이곳의 예술성을 위한 구조물 중 하나로 보였다.
그렇게 연못 앞에 다다른 순간이었다.
[잘 왔다, 자격을 증명한 자여.]
[그대는 우리가 준비한 시험을 통과했다. 그 노력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명 다 남자 목소리였으며 한 사람은 중년에 가까웠고 다른 한 사람은 비교적 젊었다.
모습을 드러내진 않았으나 그들의 목소리에는 호의가 가득했다. 나를 환영하고 내 노력을 치하하는 것부터가 그들이 적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당신들은 누구죠?”
이미 다 알고 있지만 대화의 매끄러움을 위해 물어봤다. 그러자 두 사람은 서로가 하나인 것처럼 동시에 이야기했다.
[우리는 황혼의 의지를 잇기 위해 인내하는 자.]
[위대한 자를 섬기는 신하이며 그의 후계를 가리는 선별자다.]
파아아아앗!!
선별자들이 거기까지 말하자 연못 앞에서 주황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
저녁놀 같은 빛과 함께 두 개의 비석이 나타났고 그 사이에선 푸른색으로 빛나는 수정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대는 시험을 통과함으로써 계승자가 될 자격을 얻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대에게 기회를 주고자 한다.]
[용맹한 영웅이여, 그대는 신들의 시대를 종식시키고 이 세계에 진정한 자유를 가져다줄 구원자의 재목이다. 탐욕스러운 신들로부터 세상을 구하고자 한다면, 숭고한 사명을 받아들여 황혼의 종결자가 되어라.]
============================ 작품 후기 ============================
주인공은 6일 후에 죽는 페널티를 없애기 위해 던전을 돌고 있습니다. 던전을 클리어 하면 페널티도 자연스레 사라집니다.
표지에 있는 금발 여캐는 추후에 등장할 메인 히로인입니다. 신전 파트가 끝난 뒤에 만나게 될 거예요.
여담으로 가디스 던전에는 뒤잡이 없습니다. 대신 뒤잡과 비슷한 암습이라는 스킬이 있습니다. 이는 나중에 본편 진행 도중에 다룰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