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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28화 (28/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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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하는 자의 신전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벽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날아온 그것은 내 키보다 큰 화살이었다.

이름 하여 대궁 함정. 가고일들과 더불어 이 구간이 끔찍한 이유 중 하나다.

본래는 특정 구간을 지나갈 때 발리스타가 저절로 움직여 플레이어를 저격하는 방식이지만 원거리 공격을 통해 먼저 타격할 경우 그 즉시 플레이어가 있는 방향으로 화살을 발사한다.

전봇대가 날아온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큰 화살이 내 머리 위를 지나쳤다. 날 노리고 쏜 만큼 간발의 차이로 직격당할 뻔했으나 추락하는 날 맞추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화살은 끝내 공중다리에 꽂혔고, 날 대신해서 다리 위에 있던 가고일들이 포격에 휘말리고 말았다.

콰과아아아앙!!

[카아아아악!!]

[커허어어엉!]

대화살의 위력은 대포에 필적했다. 다리 위에 있던 가고일들이 저 멀리 날아갔으며 몇몇은 직격당하여 형체도 남지 않을 정도로 박살났다.

그 틈을 타 나는 허리에 매고 있던 갈고리 밧줄을 꺼냈다. 원래는 비행하는 가고일들을 끌어오기 위해서 챙긴 거지만 벽이나 난간을 오를 때도 사용할 수 있다.

“제발!!”

촤라라라락!

카가악!

진심어린 목소리로 소리치자 갈고리가 화살 위에 걸렸다. 아래를 향해 떨어지던 내 몸은 급격히 멈췄다. 그 반동으로 팔이 빠질 뻔했다. 그래도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밧줄을 잡아당겼다.

[커허어어엉!]

[캬오오오오오!!]

밧줄을 타고 올라오는 내게 가고일들이 달라붙었다. 직격당한 놈들 외에는 별 다른 피해가 없는 것 같았다. 날개가 있으니 낙사할 일도 없었다.

“아 좀 오지 마! 올라가서 싸우자고 미친 새끼들아!!”

[캬아아아아아!!]

한 손으로 폭풍의 숏소드를 쥔 채 꼴사납게 저항해봤지만 소용없었다.

놈들은 이리저리 날아다니면서 날 집요하게 공격했다. 나름 대응해봤는데 역시 매달린 채로 싸우는 건 무리였다. 기어이 표범머리가 휘두른 팔시온이 내 등을 길게 찢었다.

촤아아아악!

“아아악!!”

엄청난 고통이 등을 뒤덮었다. 생전 느껴본 적 없는 날카로운 고통이었다. 여기사에게 명치를 맞았을 때도, 들개에게 물렸을 때도 지금처럼 아프진 않았다. 고통의 순위가 또다시 갱신된 것이었다. 순간 눈물이 핑 돌면서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느껴졌다.

“개새끼들이 진짜!!”

울분을 참지 못한 나는 허리춤에서 화염병을 꺼냈다. 하나 밖에 안 남은 거라 가급적 안 쓰려고 했는데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놈들이 최대한 가까이 오길 기다렸다가 온힘을 다해 화염병을 던졌다.

“쯔아아아아앗!!”

콰차앙!

내가 던진 화염병이 표범머리에게 명중했다. 한 놈도 아니고 세 마리가 동시에 맞은 것이다.

화르르르륵!!

곧 도자기병이 깨지면서 불길이 치솟았고 이는 표범머리의 몸을 빠르게 불태웠다. 새빨간 불길과 함께 표범머리들이 일제히 비명을 터뜨렸다.

[크허어어어어엉!!]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세 마리의 표범머리. 놈들은 몸에 붙은 불을 끄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했으나 불길은 쉽사리 꺼지지 않았다.

빙결 속성을 다루는 표범머리 가고일은 화염 속성에 매우 취약하다. 화염에 더 많은 피해를 받는 것은 물론 화염 피해를 받을 때 남은 인내력과 무관하게 경직을 받는다.

거기에 더해 발화 상태에 빠지면 다른 몬스터들 보다 더 오랫동안 지속 피해를 받는다.

발화는 지속 데미지를 주는 상태 이상 중 하난데, 자신에게 쌓인 발화 수치만큼 1초에 한 번씩 피해를 준다.

화염병의 효과는 100의 화염 피해와 30의 발화 수치를 부여하는 것. 표범머리는 화염 속성에 50퍼센트 추가 피해를 받으니 놈들에게 가해지는 화염 피해와 지속 피해는 각각 150, 45로 상승할 거다.

초당 45의 피해를 받는 걸로도 모자라 연달아 경직까지 받으니 비행을 유지하기 힘들 거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부족하다. 놈들의 생명력은 무려 1천. 화염병 하나만으로는 죽이지 못한다.

그렇기에 나는 기름병을 꺼냈다. 코르크 마개를 입으로 따고 안에 있는 내용물을 활활 타고 있는 표범머리들에게 흩뿌렸다.

“핫하! 죽어라!!”

화아아아아악!

기름과 불이 만나자 불길이 한층 더 거세졌다. 기름병의 효과로 화염 데미지가 100퍼센트 증가한 것이었다.

[캬오오오오오오오오!!]

기어이 세 마리의 표범머리들은 비행을 유지하지 못하고 아래를 향해 수직 낙하했다. 깊고 거대한 구덩이 속에서 표범머리들의 비명이 메아리쳤다. 점점 멀어져 가는 그 소리를 들으니 조금이나마 안심이 됐다.

“흐읍! 하아! 흐으읍!”

표범머리들이 추락하는 걸 확인한 뒤 밧줄을 잡고 기어 올라왔다.

다리에 꽂힌 대화살을 손잡이 삼아 올라오는 건 무척 힘든 일이었다. 그래도 근력 10 덕분에 어떻게든 해낼 수 있었다.

[음모오오오오오!!]

진짜 문제는 올라오고 난 후였다. 내가 다리 위로 올라오자 소머리 가고일이 기다렸다는 듯이 횡공격을 가했다.

촤아아아악!!

공기를 찢으며 날아드는 할버드는 위협적이기 그지없었다. 나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옆으로 굴렀다. 날카로운 일격이 내 위를 지나가는 것과 동시에 내가 있던 자리에 또 다른 할버드가 내리꽂혔다.

콰과아아앙!!

[음머어어어어어!!]

또 다른 소머리 가고일이었다. 표범머리들 만큼은 아니지만 이 녀석들 역시 여럿이 몰려다닌다. 이 구간에선 딱 두 마리가 나오는데 방금 전에 뭣 모르고 패링을 시도했다면 뒤에서 나타난 놈에게 맞아서 그대로 낙사했을 거다.

“치졸한 새끼들이 진짜!”

바닥에서 일어난 나는 다시금 정면을 향해 달렸다.

이 앞에는 원형으로 이루어진 넓은 공간이 있다. 난간이 없어서 낙사 위험이 있는 건 매한가지지만 적어도 다리에서 싸우는 것보단 낫다.

그렇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린 끝에 나는 넓은 공간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렇게 보니까 마치 투기장을 연상케 하는 장소였다. 떨어지는 즉시 죽음을 면치 못하는 무자비한 투기장. 두 마리의 소머리들 역시 빠르게 쫓아와 나와 대치했다.

쿠웅! 쿠우웅!!

놈들이 발을 디딘 것만으로도 바닥이 흔들렸다. 오질라게도 무거운 놈들이다. 저놈들 때문에 바닥이 무너지는 건 아닐까 걱정될 지경이었다.

[음모오오오오오!!]

[음머어어어어어!]

원형 투기장에 도착하자마자 소머리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지금 상태론 저놈들과 맞설 수 없다. 표범머리에게 한 대 맞아서 생명력이 142까지 떨어졌다. 현재 내 생명력은 188. 공격력 200인 소머리들한테 압살당하기 딱 좋은 생명력이다.

벌컥! 벌컥!

나는 놈들과 거리를 벌리며 허리끈에 매어둔 넥타르를 급하게 들이켰다. 망고와 오렌지를 섞은 것 같은 맛이었는데 냉장고에 넣어둔 것처럼 시원했다. 이 또한 넥타르병의 기능 중 하나이리라.

“크하아!”

어쨌든 시원한 넥타르가 목구멍을 넘어가자 온몸에 활력이 돋았다. 동시에 등에서 느껴지던 통증도 말끔하게 사라졌다. 넥타르에 담긴 불사의 힘이 내 몸을 순식간에 치유한 것이었다.

한 모금 당 최대 생명력의 30퍼센트가 회복되므로 풀피까지 채우려면 두 모금은 마셔줘야 했다. 분수대에서 보충한 덕분에 아직 8모금이나 남았지만 아직 중반부인 걸 생각하면 최대한 아껴야 한다.

[음머어어어어어!!]

때마침 소머리 중 한 놈이 내게 육박해왔다. 보폭이 넓은 놈이 날개까지 달고 있으니까 내 속도로는 따돌리기 힘들었다.

촤아아아악!!

돌진과 동시에 할버드를 휘두르는 소머리 A. 나는 놈의 할버드를 노려보면서 방어 태세를 취했다.

“……!”

카아아아앙!!

놈의 전진 베기를 방어 패링으로 막아냈다. 새하얗게 빛나는 방어막이 날 보호해준 틈을 타 나는 소머리 A에게서 떨어졌다.

한 차례 자세가 무너진 소머리 A가 다시금 공격을 가하려는 순간, 나는 아껴두었던 아이템을 꺼내들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서리 칼조각이었다. 칼조각을 손에 쥐자 차가운 냉기가 느껴졌다. 나는 웃음을 흘리면서 그것을 숏소드에 그었다.

카가아아앙!!

스스스스스슷!!

직후 숏소드와 칼조각 사이에서 푸른색 불똥이 튀었다. 마치 서릿발과도 같은 그것이 숏소드에 녹아들자 검신을 휘감고 있던 전격이 차가운 냉기로 바뀌었다.

“실례지만 불타고 계십니다.”

[음머어어어어!!]

“내가 좀 꺼드리지!”

촤아아아악!!

할버드를 내리치는 소머리 A를 향해 나 또한 검을 휘둘렀다.

좌에서 우로 이동하며 횡베기를 가하자 할버드의 종격이 자연스레 피해졌다. PVP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히트 박스 농락이다.

모션을 최대한 활용하여 공격과 회피를 병행하는 기술.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감탄을 금치 못하지만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기술이다.

계산을 바탕으로 한 공방일체는 제대로 먹혀들었고 소머리 A의 옆구리에 기다란 절상이 새겨졌다.

[므으으으윽?!]

소머리 A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그뿐만이 아니다. 놈의 목소리에는 당혹성이 섞여 있었다.

당연히 그럴 거다. 방금 내 공격으로 놈의 몸을 감싸고 있던 화염 방벽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까. 덩달아 화염 방벽에 의한 반격도 발동하지 않았다. 전부 내가 사용한 서리 칼조각 덕분이었다.

“뭘 그렇게 놀라? 설마 몸에 불 좀 붙이면 무슨 공격을 받아도 멀쩡할 거라 생각했냐?”

[음머어어어어어!!]

콰아아아앙!

내가 도발하는 순간 소머리 B가 몸을 던졌다. 자신의 거체를 사용하여 날 압살해버릴 심산이었다.

이를 파악한 나는 앞쪽으로 굴러서 놈의 공격을 피해냈다. 뒤나 옆으로 굴렀다면 후속타가 이어져서 한 대 맞았을 거다. 초보와 숙련자를 가리지 않고 자주 당하는 패턴이지만 나에겐 통하지 않는다.

“빙결 속성만 가져오면 너희는 그냥 병신이야!”

푸후욱!!

앞으로 회피함으로써 놈의 뒤를 잡을 수 있었다. 나는 곧장 놈의 척추를 향해 찌르기를 가했고 냉기에 휘감긴 숏소드가 화염에 휩싸인 몸을 관통했다.

[음머어어어어억!!]

피가 터지는 효과음과 함께 데미지가 붉은색으로 표시되었다. 치명타가 발생한 것이었다.

약점인 빙결 속성으로 찔린 데다 크리티컬까지 터졌으니 오지게 아플 거다. 먼저 공격당한 놈처럼 화염 방벽 또한 사라졌다.

소머리 가고일.

생명력 1200에 공격력 200. 방어력과 인내력은 화염 방벽의 효과로 90까지 올라가며 공격하는 상대에게 반격 피해도 주는 성가시기 그지없는 몬스터.

뉴비는 물론 어지간한 고인물들도 맨몸으로 상대하기 힘든 몬스터지만 이러한 수식어는 전부 빙결 속성을 준비하지 않았을 때에만 적용된다.

표범머리 가고일들이 화염 속성에 유난히 취약했듯이 소머리 또한 빙결 속성에 매우 약하다. 빙결 속성 피해를 입으면 데미지를 50퍼센트 더 받고 무조건 경직당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소머리 가고일의 경우 자가 버프인 화염 방벽까지 강제 취소돼서 체감상 더욱 약해진다. 성소 여기저기 뿌려져 있던 소모성 아이템들은 전부 이놈들을 쉽게 잡으라는 개발진의 배려였던 것이다.

[음모오오오오오!]

공격을 이어가려는 순간 다른 소머리 A가 날 방해했다. 화염 방벽이 사라져도 호전적인 건 여전했다. 물론 피할 공간이 넉넉해진 시점에서 놈들의 눈 먼 공격은 나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응 안 맞아~ 종공격만 계속하면 눈 감고도 피해~”

[음머어어어어어!]

“그렇다고 바로 횡공격 쓰면 누가 못 피하냐? 우리 할머니도 너희 보단 다채롭게 공격하겠다!”

[음머어어어어어어어억!!]

“얼씨구 화났어? 못 맞춰서 짜증나? 그런데 어쩌냐 난 또 피해버렸는데!”

공격이 날아올 때마다 여유롭게 피해냈다.

이놈들의 공격 속도도 대리석 가고일 못지않게 느리다. 더군다나 두 마리 밖에 없어서 피하는 게 무척 수월했다. 다리 위에서 싸울 때는 거의 공포 게임 수준으로 무서웠는데 넓은 공간이 확보되니까 아크 데몬보다 가지고 놀기 쉬웠다.

분노에 휩싸인 포효를 들으면서 나는 몇 번인가 공격을 흘려보냈다. 그러는 와중 짬짬이 반격을 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히트 박스 농락으로 공격과 회피를 함께 하니 놈들의 생명력도 서서히 떨어져갔다.

[음오오오오오오!!]

그때 소머리 B가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두 손으로 할버드를 쥔 그놈은 곧 나를 향해 급강하했다. 소머리 A도 내 움직임을 막기 위함인지 마구잡이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촤좌좌좌좌작!!

매서운 연격과 날 두 동강내기 위해서 강하하는 도끼날. 확실히 지금까지의 단조로운 공격들 보다는 피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 패턴 역시 내가 알고 있는 패턴이다.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 또한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다.

“아 종공격 안 통한다고~!”

콰과아아앙!!

소머리 B의 낙하 공격을 스텝으로 가볍게 피했다. 위협적이긴 했지만 공중에 떴을 때부터 어딜 공격할지 다 보여서 구를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넌 휘두를 거면 대각선만 했어야지 횡공격은 왜 해! 패링하기 존나 쉽다고!”

카아아아앙!!

소머리 A의 연격은 공격 패링으로 대처했다. 당연하게도 패링은 성공했다. 내 숏소드가 소머리의 할버드를 보기 좋게 튕겨낸 것이었다.

[므오오오옥?!]

날 베어 넘기려던 할버드가 소머리 A의 머리 위로 튕겨져 나갔다. 격렬히 움직이던 놈은 그 순간 완전히 균형을 잃어버렸다. 무방비 상태가 된 것이다.

“유감이다!”

푸후우우욱!!

그것을 본 나는 주저 없이 숏소드를 꽂아 넣었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서리 칼날이 가고일의 몸속에 박혔다. 냉기어린 칼날로 놈의 몸을 관통한 나는 재빨리 검을 뽑았다.

푸화아아악!!

[음모오오오오……!!]

양손으로 거칠게 잡아당기자 피와 내장이 칼날에 엉겨 붙어서 따라 나왔다. 주황색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고 소머리 A는 그대로 목숨을 잃었다.

============================ 작품 후기 ============================

넥타르 횟수 관련해서 내용 수정했습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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