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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27화 (27/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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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하는 자의 신전

* * *

“쯔아아아앗!!”

[키하아아아악!]

날개를 펼친 가고일을 향해 내려 베기를 가했다. 비행 준비를 하던 가고일은 내 공격을 받자마자 바닥에 드러누웠다.

대리석 가고일은 비행하기 전에 준비 자세를 취하는데 이때 공격을 가하면 남은 인내력과 무관하게 다운된다. 그 점을 노려서 기회를 잡은 것이다.

“조용히 하세욧!!”

콰하아아악!!

쓰러진 가고일의 머리를 장작이라도 패듯이 힘껏 쪼개버렸다.

머리통이 박살나는 소리와 함께 기계 장치 같은 뇌가 튀어나왔다. 주황색 피도 함께였다.

이놈들은 보면 볼수록 생물체인지 기계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표시되는 종족이 ‘물질’이니 자연계에 속하는 존재는 아니겠지만 리얼하게 생긴 내장들과 벨 때 느껴지는 손맛 때문에 생물을 죽이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기분이 들었다.

[드드드드드득!!]

내가 결정타로 한 놈을 처치할 때 다른 놈이 돌 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방금 전에 때리다 만 녀석이었다. 놈이 제 자리에서 돌처럼 굳었다는 건 특수 능력을 사용했다는 얘기다.

[드드득!]

[드드드드드득!!]

이어서 다른 가고일들까지 내 주위에서 몸을 굳혔다. 대리석 가고일들이 특수 능력, 자가 석화였다.

자가 석화에 들어갈 경우 방어력이 50 증가하고 슈퍼 아머 상태가 된다. 동시에 움직일 수도 없게 되지만 처치하기가 매우 곤란해진다. 안 그래도 30의 방어력을 가진 놈들이어서 특수 능력 발동하면 방어력이 80까지 치솟는 것이다.

266인 피해가 186까지 줄어들면 몇 번이나 더 때려야 잡을 수 있다.

게다가 이놈들이 자가 석화를 사용한 이유는 날 포위하기 위해서다. 어느덧 좌우와 정면이 가고일들로 가득 찼다.

뒤에선 다른 가고일들이 하나둘씩 다가오고 있었다. 이로써 퇴로도 차단됐다. 나는 이를 악물며 놈들의 공격에 대비했다.

다음 순간, 선두에 있던 놈이 나를 향해 양팔을 내리그었다.

[키아아아악!!]

카아아아앙!

맑은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공격 패링의 성공을 알리는 효과음이었다. 허나 여유롭게 결정타를 먹일 틈은 없었다. 연이어 다른 두 놈이 공격을 가한 것이다.

카아앙! 카아아아앙!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내쉬며 연달아 공격을 튕겨냈다. 그제야 나는 반격할 틈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패링한 놈에게 다가간 나는 놈의 명치에 칼을 박아 넣고 그대로 위로 들어 올렸다.

푸화아아악!!

대리석 가고일의 상반신이 반으로 갈라졌다. 비처럼 쏟아지는 주황색 피를 맞으며 나는 정면으로 돌진했다. 한 놈을 잡은 덕분에 도망칠 틈이 생겼다.

[카악! 카아악!!]

내가 포위에서 벗어나려 하자 주위에 있던 놈들이 하나둘 씩 석화를 풀었다. 본인들의 몸으로 만든 감옥이 그다지 효과가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리라.

그렇게 뒤쫓아 오는 가고일들을 확인하며 앞으로 달려갔다. 이제 목적지까지 얼마 안 남았다. 내가 달려가는 동안 가고일들은 갈수록 늘어났다. 처음엔 세 마리였던 놈들이 어느 샌가 열 마리까지 늘어났다.

최악의 상황처럼 보이겠지만 그렇지도 않다. 이 모든 게 예상 범위 내였다.

마침 내 목적지인 넓은 복도가 보였다. 복도에 접어든 순간부터 나는 연신 방향을 틀었다. 바닥에서 솟아나는 가시 함정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파바바바바바박!!

[키하아아아악!!]

[키헤에에엑?!]

무수히 뻗어 나온 가시 함정이 가고일들의 몸을 꿰뚫었다. 날 쫓는 데 정신이 팔려 있던 가고일 무리는 함정을 피할 새도 없이 벌집이 되어버렸다.

“크하하하핫! 멍청한 놈들! 너희는 자기 집에 함정 있는 것도 모르고 살았냐?!”

관통당해 죽는 가고일들을 비웃으며 유난히 튀어 나와 있는 타일을 밟았다.

이 또한 함정을 이용한 전략 중 하나다. 가시 함정은 날아오는 놈들까지 잡아주지 않는다. 그렇기에 또 다른 함정을 발동시킬 필요가 있었다.

철컹! 철컹!!

촤아악! 촤악! 촤아아아악!!

[케헤엑……!]

날갯짓하던 가고일들이 단말마를 내질렀다. 천장에서 떨어진 무언가가 놈들의 상체와 하체를 분리시켰다. 내가 타일을 밟음으로써 칼날 함정이 발동된 것이었다.

사슬에 매달린 커다란 칼날이 위아래로 왕복했다. 단두대를 연상케 하는 그것은 가고일들이 올 때마다 번개처럼 떨어졌다.

이래서야 내가 함정을 준비해놓은 것 같잖아. 왜 저 멍청이들은 여기에 함정이 있다는 걸 모르는 거지?

그런 의문을 품으며 나는 여유롭게 함정 구간을 벗어났다.

칼날 함정 같은 건 앞으로 살짝만 굴러줘도 쉽게 피할 수 있다. 무작정 달려오는 도중이었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난 함정들을 다 염두에 두고 움직였기에 가고일들처럼 당하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열 마리 중 아홉 마리에 달하는 가고일들이 함정으로 죽었다. 마지막 남은 한 마리를 잡는 건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웰컴!”

[키헤에에엑!!]

모퉁이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놈의 등에 강공격 풀차지를 먹였다. 비행 중이었던 놈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고 나는 결정타로 놈의 삶을 마감해줬다.

“쓰레기 같은 놈들. 비겁하게 덤비니까 비겁하게 죽는 거다.”

죽인 가고일의 시체는 다시 함정 구간으로 던져서 능욕해줬다. 바닥에서 솟아난 강철 가시로 인해 가고일의 몸은 곧장 걸레짝이 되어버렸다.

아주 보기 좋은 광경이다. 원작 게임에선 저렇게 통쾌한 연출이 없었다. 폭력 수위가 낮아서 몸이 넝마가 된다거나 팔다리가 잘려나가는 등의 효과는 전부 배제됐던 것이다.

원작 게임에 이어 게임 세계에서도 날 힘들게 한 놈들이 처참하게 죽는 모습은 꽤나 즐겁게 감상할 수 있었다. 내 피 빨아 마신 모기를 전기 파리채로 지져 죽일 때 딱 이런 기분이었다.

“그보다 벌써 이 구간인가……. 생각보다 진행이 빠르네.”

복도를 지난 나는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지나온 길은 복도와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대부분의 전투는 방에서 치러졌고 복도에선 소수의 적이 나오는 정도였다.

그런데 새롭게 나타난 장소는 지금까지 지나온 곳과는 사뭇 달랐다.

끝이 안 보이는 거대한 구멍과 그 위에 놓여 있는 수많은 다리들. 위층으로 올라가는 나선형 계단은 내가 서 있은 장소 반대편에 있었다.

다리의 폭은 3미터도 채 되지 않았다. 가끔 넓은 공간도 있었지만 난간이 없는 구조라 위험한 건 마찬가지였다.

실제로도 낙사가 잦은 구간이다. 여기에서 몇 번이나 낙사했는지 떠올리면 머리가 아득해진다.

던전에 들어온 후로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문득 궁금해져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곳의 천장은 뻥 뚫려 있어서 하늘이 보였다. 태양이 머리 위에 있는 걸 보면 정오인 듯했다. 솔직히 여기까지 오려면 몇 시간은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왔다.

아무래도 무기 덕분이겠지. 폭풍의 숏소드가 이렇게 유용할 줄은 몰랐다. 하기야 원작 게임에서도 이거 하나만 있으면 극초반 지역은 사실상 프리 패스였으니 시간이 단축된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후우…….”

무서우리만큼 협소한 다리들을 보며 나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낙사도 큰 걱정이지만 이 구간이 무서운 이유는 험한 길뿐만 아니다.

이곳은 이 던전에서 가장 위험한 잡몹들이 나오는 장소임과 동시에 악랄한 함정이 설치되어 있는 장소다.

도전하기 위해선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몇 번인가 심호흡을 한 나는 좁디좁은 다리에 발을 내딛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진짜 존나 무섭네…….”

가급적 고운 말을 쓰고자 하는 나지만 바닥을 내려다보니까 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100층짜리 건물 사이를 나무판자 하나만 놓고 건너면 지금 내가 느끼는 공포를 맛볼 수 있을 거다. 정말이지 무시무시한 높이가 아닐 수 없다. 아래를 슬쩍 내려다보면 끝없는 나락이 날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그렇게 좁은 길을 조심스럽게 걸아 가던 도중이었다.

쿵!!

육중한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그것이 내 앞에 떨어지자 바닥에 방사형 균열이 새겨지고 다리가 흔들렸다.

순간 넘어질 뻔한 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재빨리 몸을 추슬렀다. 식겁한 내 앞에 나타난 그것은 지금까지 나타난 놈들과는 사뭇 다른 생김새의 가고일이었다.

[음머어어어.]

“…….”

굉장히 깨는 소 울음소리가 놈의 정체를 알려줬다.

놈의 이름은 소머리 가고일. 이름 그대로 머리가 소의 두개골처럼 생긴 비대한 가고일이다. 이름과 다소 멍청한 AI 때문에 한국 유저들 한정으로 흑우라 불리곤 했다.

몸집이 어찌나 큰지 대리석 가고일과는 비교도 안 됐으며 나와도 머리 하나 정도 차이가 났다.

그 크기에 걸맞게 던전 내에선 탱커 포지션을 맡고 있다. 생명력은 대리석 가고일의 두 배 가까이 되는 1200이며 방어력과 인내력도 각각 60이나 된다. 지금의 나로서는 경직시키는 게 거의 불가능한 놈이다.

인내력은 3초 안에 0으로 만들지 않으면 순식간에 원래 수치로 회복된다. 내 저지력이 10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3초 안에 여섯 대를 때려야한다는 건데, 놈이 버그라도 걸려주지 않는 이상 꿈도 꾸지 못할 거다.

“흐읍!”

놈과 대치한 나는 재빨리 지면을 박찼다.

이렇게 좁은 길에서 싸우는 건 미친 짓이다. 하물며 놈은 다른 가고일들처럼 비행할 수 있으며 무기도 거대한 할버드다.

기동성 면에서도, 사거리 면에서도 날 압도한다. 넓은 평지에서 싸워도 분리한데 좁은 다리 위에선 오죽 하겠는가.

[음머어어어어어!!]

내가 달려들자 소머리 가고일 또한 울부짖었다. 놈은 내 앞길을 가로막듯이 박쥐처럼 생긴 날개를 크게 펼쳤다. 그 순간 놈의 전신에서 시뻘건 불길이 피어올랐다. 소머리 가고일의 특수 능력, 화염 방벽이 발동된 것이다.

화염 방벽이 발동되면 소머리 가고일의 방어력과 인내력이 30씩 상승한다. 원래 60이었으니까 현재 방어력과 인내력은 각각 90. 가뜩이나 상대하기 힘든 놈이 걸어 다니는 방벽이 되어버렸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상태에서 근접 공격을 가하면 소머리 가고일이 자신의 공격력만큼 플레이어에게 화염 피해를 준다. 참고로 놈의 공격력은 200. 지금의 나는 두 대만 맞아도 죽는다.

“좀 지나가자 흑우 새끼야!”

놈에게 근접할 무렵 나는 몸을 기울여서 슬라이딩 자세를 취했다. 아크 데몬에게 그랬던 것처럼 고간 사이를 지나가려 한 것이었다.

[음모오오오오오!]

부우우우웅!!

당연히 소머리 역시 가만있지 않았다. 놈은 내가 몸을 기울이려 하자 하단을 향해 횡베기를 가했다.

공기를 찢으며 날아오는 할버드가 흉흉하기 그지없다. 등골이 식은땀으로 흥건해지는 것과 동시에 내 머리카락이 몇 가닥이나 잘려나갔다.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해낸 것이다.

“허억! 허억!!”

무서워서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질겁한 나는 거친 숨을 내쉬면서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소머리와 거리를 벌리는 내내 할버드에 맞은 내 모습이 머릿속에서 아른거렸다.

인내력이 0이 된 상태에서 최대치만큼 또 인내력이 감소되면 공격 방향에 따라 다운, 넉백, 에어본 중 한 가지 현상이 발생한다.

현재 내 인내력은 7, 적의 저지력이 14가 넘을 경우 제압당한다.

소머리 가고일의 저지력이 30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방금 전 공격에 맞자마자 인내력 오버로 넉백 당했을 거다. 그 후엔 두말 할 것도 없이 다리 아래로 떨어져 명을 달리 했으리라.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 나는 머리가 아찔해지는 것을 참으며 최대한 빨리 달렸다. 헛쳤다는 것을 알아차린 소머리 역시 날개를 퍼덕거리며 육중한 몸체를 공중에 띄웠다.

펄럭! 펄럭!

거친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소머리 가고일 혼자서 내는 게 아니었다. 놈이 공중에 떠오른 순간 멀리서부터 한 무리의 가고일들이 일제히 날아오는 것이었다.

“비둘기 새끼들 겁나 빨리 오네!!”

나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가고일 무리를 직시했다.

[캬오오오오오!]

[커흐으으응!!]

날카로운 포효를 내지르는 예닐곱 마리의 가고일들. 놈들의 울음소리는 마치 고양잇과 맹수와도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놈들의 머리는 표범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이를 반영한 건지 대리석 가고일 보다는 크지만 전체적으로 날렵하게 생겼으며 비행 속도도 다른 가고일들과는 비교가 안 됐다. 날개는 여태껏 나온 가고일과 다르게 박쥐보다 조류에 가까웠다.

소머리 가고일과 마찬가지로 이놈들도 참 직관적인 이름을 가졌다. 다름 아닌 표범머리 가고일. 가고일의 상위 버전 몬스터 중 하나로 인내하는 자의 신전에서 근접 딜러 겸 디버퍼를 맡고 있다.

얼굴과 날개 때문에 일부 유저들에겐 냥둘기라고 불리는데 나는 이 마귀 새끼들을 그런 귀여운 이름으로 부를 생각 없다.

이놈들이야 말로 던전의 난이도를 기하급수적으로 높이는 원흉이다. 사실상 보스만큼이나 까다로운 적들인 것이다. 보스들은 선택에 따라 안 잡을 수라도 있지 이놈들은 집요하게 따라와서 플레이어에게 고통을 선사한다.

[캬오오오오오!!]

“큭?!”

순식간에 날아와 입을 쩍 벌리는 표범머리들. 직후 차가운 냉기가 나를 덮쳤다. 놈들이 냉기 브레스를 뿜은 것이다. 그 광경을 본 나는 재빨리 옆으로 굴렀고 내가 달리던 장소는 겨울철의 호수처럼 꽁꽁 얼어붙었다.

위험했다. 제때 안 굴렀으면 그대로 발이 묶일 뻔했어.

놈들의 냉기 브레스는 무척이나 강력한 상태이상 스킬이다. 살짝만 스쳐도 즉시 동결 상태에 빠지고 동결 상태에 빠지는 순간 5초 동안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가고일들한테 둘러싸인 상황에서 동결에 걸리는 건 사실상 죽는 거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 많은 가고일들이 5초 동안 나를 가만히 둘 리 없을 테니까.

“아 진짜 매너 안 하냐!! 싸울 거면 넓은 데서 싸우자 이 치졸한 새……! 어억!?”

분통을 터뜨리며 표범머리들에게 소리칠 때였다.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너무 미끄러워서 균형을 잡을 수가 없었다. 쓰러지는 도중 나는 다급히 바닥을 살폈다. 내 이동경로에도 빙판이 깔려 있었다. 내가 피하느라 못 본 사이에 다시 한 번 브레스를 뿜은 게 분명하다.

“이런 씨……!”

욕지거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말을 끝까지 내뱉을 틈은 없었다.

쿵!

“아아악!”

기어이 빙판 위에 넘어지고 말았다. 어깨부터 닿은 탓에 뼈마디가 심하게 아팠다. 그것만으로 끝나면 좋겠지만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바닥에 쓰러진 내 몸이 다리 밖으로 미끄러지는 것이었다.

“……!”

끝이 보이지 않는 나락이 나를 집어삼키려 했다. 어떻게든 멈춰 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바닥이 너무 미끄러운 데다가 방해까지 있었다.

[캬아아아아아!!]

“아니 씨발 놈이, 진짜!!”

표범머리 중 한 놈이 나를 발로 걷어찼다. 마찰력을 잃은 내 몸은 데굴데굴 구르면서 가장자리로 튕겨져 나갔다.

설마 이대로 끝인 건가? 여기까지 와놓고 허무하게 낙사라고?

죽음을 직감해서일까. 눈앞에서 수많은 기억이 아른거렸다.

당연하게도 가족들의 모습은 떠오르지 않았다. 나에게 친절을 베풀어준 헤베와 브릴린트, 그리고 그녀들의 육감적인 몸매가 강 위에 뜬 종이배처럼 지나갔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분위기 타서 헤베랑 한 번 해보는 건데. 브릴린트도 내가 계속 들이댔으면 딱히 거절하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런 미련을 품으며 끝내 다리 밖으로 떨어져 나갈 때였다.

“……!”

내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죽음을 직감한 몸이 저거라면 살 수 있을 거라고 소리쳤다.

“흐으읍!!”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나는 내가 발견한 물체를 향해서 있는 힘껏 화염병을 집어던졌다. 그러는 도중에도 내 몸은 떨어지고 있었지만 상관없다. 저게 날아오는 속도는 내가 떨어지는 속도보다 더 빠를 테니까!

그렇게 화염병이 구조물에 명중했고, 다음 순간 굉음이 울려 퍼졌다.

콰아아아아앙!!

============================ 작품 후기 ============================

고행자의 가호 카운트 다운은 여전히 6일 남았습니다. 아직 하루는커녕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어요. NPC들과의 대화로 진행이 느려지다 보니 본의 아니게 시간 감각까지 희미하게 만들어드렸군요. 다시 한 번 제 역량 부족을 돌아보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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