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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하는 자의 신전
“구와아아악…….”
건물을 보고 있자니 욕지기가 올라왔다.
두 눈으로 직접 본 던전의 외관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웅장했다.
게임에서나 등장할 법한 건물을 현실로 끄집어내니까 비현실적인 느낌이 특유의 휘황찬란한 디자인과 어우러져 유럽의 대성당을 보는 것보다도 깊은 감명을 주었다.
내가 저곳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면 연신 감탄만 했을 거다.
허나 난 저 멋들어진 건축물이 얼마나 지랄 맞은 적들과 함정들로 이루어져 있는지 알고 있다.
직접 당해본 내게 저 반짝거리는 신전은 구토를 유발하는 역겨움의 산물일 뿐이다. 저곳에서 겪었던 일들이 PTSD처럼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원작 게임을 플레이할 때도 저기만 들어가면 신물이 났는데 내 몸으로 직접 겪으면 어떨까. 벌써부터 걱정이 앞섰다.
진심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지만 가야만 한다. 저 안에서 무슨 일을 겪든 세이브 데이터 삭제로 소멸하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
“후우우…….”
깊은 한숨과 함께 신전으로 향했다.
신전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다리를 하나 건너야 한다.
길이 100미터, 넓이 30미터 정도의 대리석 다리는 중간 부분이 뚝 끊겨 있었다. 끊겨 있는 거리가 못 해도 70미터는 돼서 도약으로 건너는 건 무리다.
인위적으로 부순 다리 외에는 내부로 진입할 방법이 없다. 어딜 봐도 바닥없는 낭떠러지뿐이다.
초보 시절에는 여길 어떻게 들어가야 하나 많이도 고민했지.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점프하다가 낙사하고 스킬의 추진력으로 넘어가려다가 낙사하고, 별의 별 방법을 다 써봤다.
간신히 반대편 다리에 닿았다가 보이지 않는 벽에 몸이 튕겨져 나갈 때 느낀 허망함은 아직까지 잊을 수가 없다.
물론 지금은 여길 어떻게 지나가야 하는지 알고 있다. 나는 당황하지 않고 다리 끝자락까지 걸어갔다. 그곳에는 웬 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었는데 내가 다가가자 비석에 새겨진 글자들이 주황색으로 빛났다.
[다리를 건너고 싶다면 자격을 증명하라.]
기이하게 생긴 문자를 시스템이 자동으로 번역해줬다. 그것을 보자마자 게임 캐릭터가 그랬던 것처럼 가면을 벗어 높이 들어올렸다.
워록의 비밀 방에서 얻은 악마 형상의 가면 ‘계승의 증거.’ 이것이 바로 신전의 문을 여는 출입증이다.
“이렇게 하면 되나?”
어설프게 자세를 취한지 몇 초나 지났을까.
쿠구구구구구!!
“……?!”
갑작스레 다리가 요동쳤다. 무너질 것 같은 진동에 나는 그대로 나자빠질 뻔했다.
내가 가까스로 균형을 유지할 무렵, 낭떠러지 아래에서 수많은 석재들이 일제히 솟아올랐다.
그것들은 마치 블록을 끼워 맞추는 것처럼 다리와 하나가 됐으며 얼마 후 무너진 다리는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연출하고는…….”
쓸데없이 요란한 연출에 진땀을 뺀 나는 천천히 다리를 건넜다.
공중에 부유한 석재들은 내가 발을 디뎌도 꿈쩍하지 않았다. 자격을 증명했기에 신전이 나의 출입을 허락해주는 것이다.
비밀 던전, 인내하는 자의 신전.
통상 루트로만 진행하면 절대 올 일이 없는 곳이며 어쩌다가 발견하더라도 출입증이라고 볼 수 있는 계승의 증거가 없으면 입장할 수 없는 특수한 지역이다.
입장을 위해선 계승의 증거가 필수이기 때문에 오로지 추방자 신분을 선택한 캐릭터만이 진입할 수 있다.
다른 신분들은 계승의 증거가 있는 비밀 방에 들어가기는커녕 그곳의 열쇠조차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추방자 신분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나는 영락없이 가호의 페널티로 소멸했을 거다. 다행이라면 참 다행이다. 가장 좋은 선택지는 추방자 신분도, 고행자의 가호도 선택하지 않는 거였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봤자지…….”
한탄하듯이 중얼거리길 잠시, 신전 부지로 들어온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여기서부터는 놈들의 영역이다. 한 시라도 긴장을 늦춰서 안 된다. 들개들을 상대할 때보다 더욱더 신중을 기울여야 한다.
“…….”
숨을 죽인 채 주위를 훑었다. 지금 내가 있는 위치는 신전의 앞마당이라고 볼 수 있는 장소다. 무성하게 핀 잡초 위에 수많은 대리석 석상이 놓여 있었다.
석상들은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처럼 생동감이 넘쳤다. 날개 달린 괴물을 표현한 석상이었는데 크기는 나보다 조금 작았다. 비단 지상에만 있는 게 아니라 건물 위에도 상당수가 늘어서 있었다.
“흐읍!”
그렇게 몇 걸음인가 나아가던 나는 짧은 기합과 함께 검을 내질렀다.
노린 것은 내 옆에 놓인 석상의 후미. 첨예하게 꽂힌 검격이 놈의 등을 꿰뚫었다.
푸후우우욱!
[키하아아아악!!]
직후, 내게 등을 찔린 석상이 비명을 터뜨렸다.
괴로워하며 몸부림치는 놈의 몸에서 거칠게 칼을 뽑았다. 그러자 생물의 것 같지 않은 주황색 피가 뿜어져 나오며 석상이 바닥에 쓰러졌다.
이쯤 되면 다들 눈치 챘겠지.
여기 있는 석상 중 대부분은 이놈과 같은 몬스터다.
이름은 대리석 가고일. 골렘이나 리빙 아머 같은 물질형 몬스터로 평소에는 석상처럼 굳어 있다가 플레이어가 등을 보이는 순간 기습을 가한다.
[카아아아악! 카아아아악!!]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한 건지 가고일이 다급하게 울부짖었다.
놈은 날개를 펄럭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저항하기엔 이미 늦었다. 발악하는 놈의 흉부에 내 숏소드가 박힌 것이었다.
푸후욱!
[커흐어어어억?!]
다시 한 번 몸을 꿰뚫자 가고일이 주황색 피를 토해냈다. 한순간 경직된 놈을 내려다보며 나는 온 힘을 다해 올려 베기를 시도했다.
“쯔아아아앗!!”
촤아아아악!!
가고일의 가슴에 박힌 숏소드가 이윽고 놈의 몸을 찢어버렸다.
가슴 윗부분이 두 동강난 가고일은 기계장치처럼 생긴 내장을 쏟아내며 죽음을 맞이했다. 그 후 1566이라는 숫자가 선하게 떠올랐다. 내가 놈에게 가한 데미지였다.
‘할 만하다……!’
가고일을 처치한 나는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드드득!]
[드드드드드득!!]
곳곳에서 돌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위에 있는 가고일들이 하나둘 씩 깨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내 기합 소리 때문에 깨어난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아니다.
놈들은 주위에 있는 아군이 하나라도 공격당하면 즉시 전투태세를 갖춘다. 어차피 첫 가고일을 처치한 시점에서 놈들과의 전면전은 예정된 것이었다.
“지긋지긋한 새끼들, 너희들을 여기서도 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카아아아악!]
[키아아아아앗!!]
날개를 펼친 가고일들이 일제히 포효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괴성이 나를 향해 쏟아져 내린다. 놈들의 살의가 느껴진다. 이 자리에서 날 죽여 버리겠다는 명백한 의지가 온몸을 물어뜯었다.
그런 놈들을 보며 나 또한 자세를 잡았다.
대리석 가고일들은 그렇게까지 강한 몬스터가 아니다.
생명력은 550, 공격력은 120으로 공격력이 높으면 혼자서도 두세 마리 정도는 어떻게든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다.
문제는 이놈들이 대여섯 마리씩 한꺼번에 덤벼든다는 거다. 공격력이 50 밖에 안 되는 들개도 여섯 마리가 뭉치면 지옥도가 열리는데 생명력까지 높은 놈들이 한꺼번에 덤벼들었을 땐 정말 답이 없다.
그나마 석화를 풀 때 등 뒤를 노리면 확정적으로 다운시켜서 결정타를 먹일 수 있지만 그 방법도 한 번 밖에 쓰지 못한다. 말했듯이 놈들은 동료가 하나라도 당하면 일제히 전투태세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카아아아아아!!]
머리 위의 괴성이 점점 가까워졌다. 건물 벽에 매달려 있던 가고일이 낙하 공격을 시도한 것이다.
기습적으로 급강하한 대리석 가고일. 놈의 강하가 너무 빠른 나머지 눈으로 쫓을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놈이 떨어질 위치는 이미 파악해뒀다. 나는 한 발작 뒤로 물러나서 놈이 떨어지는 것을 기다렸다.
콰아아아앙!!
지면을 강타하며 착지한 대리석 가고일. 놈이 타격한 장소에서 돌무더기가 튀어 올랐다. 맞는 즉시 120의 피해와 함께 대상을 다운시키는 위험한 공격이다.
그러나 내게는 닿지 않았다. 놈들이 떨어지는 장소는 입구로부터 약 30미터 거리. 아치형 기둥이 있는 장소 바로 앞이다.
그 말은 즉 기둥 주위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놈의 공격을 맞지 않고 도리어 반격의 기회를 노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럴 줄 알았지!”
촤아아아악!
[키하아아악?!]
모아둔 힘을 검 끝에 실어 휘둘렀다. 일직선을 그린 종공격이 가고일의 머리를 보기 좋게 강타했다. 안면이 함몰된 놈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면서 주춤거렸다. 차지 강공격을 맞아 인내력이 바닥난 것이다.
강공격은 최대 2초까지 차지할 수 있으며 풀차지 시 공격력, 저지력이 두 배로 증가한다.
현재 내 저지력은 10, 놈의 인내력은 13이다. 본래라면 두 대를 때려야 인내력이 바닥나지만 풀차지 강공격이 효과로 저지력이 20이 되어 13의 인내력을 단번에 깎은 것이다.
“죽어!!”
푸화아아악!!
내려친 검을 다시금 위로 휘둘렀다. 깔끔한 사선이 가고일의 목을 베고 지나갔으며 놈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머리를 떨어뜨렸다. 나는 그 기세를 몰아 다가오는 가고일들에게도 공격을 가했다.
촤아악!
[카아악!]
[카하아아아!!]
공격은 제대로 들어갔지만 경직되지는 않았다. 내 표준 저지력이 10 밖에 안 돼서 한 대만으론 놈들에게 경직을 줄 수 없다. 나는 놈들이 팔을 들어 올리는 것과 동시에 뒤로 물러났다.
“……!”
후우우우웅!!
불과 몇 센티미터 앞에서 가고일들의 손톱이 지나갔다. 조금만 늦었다면 내 가슴에 놈들의 손톱자국이 선명하게 그어졌을 거다. 식은땀을 흘리며 나는 곧장 반격에 들어갔다.
“아다아다아다아다아다아아아앗!!”
[키히이이이익?!]
촤자자자작!
가고일들의 움직임은 그렇게 빠르지 않다. 공격 속도도 느린데다가 후딜레이 역시 어마어마하다. 들개나 아크 데몬에 비하면 진짜로 석상을 상대하는 것 같았다.
후딜레이를 노려 연격을 펼치면 놈들은 대응할 생각도 못하고 곧이곧대로 맞아준다. 내게 달려든 두 마리의 가고일들이 시시각각 썰려나갔다. 놈들의 생명력이 바닥날 때까지 연격을 펼친 나는 이윽고 마무리 일격을 가했다.
“쯔아아아아앗!!”
푸화아아악!!
기합을 세게 넣어준 덕분일까. 피가 터지는 효과음과 함께 데미지를 알려주는 숫자가 붉게 물들었다. 치명타가 발생한 것이었다.
치명타는 강공격 풀차지처럼 저지력을 올려주진 않지만 공격력을 50퍼센트 증가시킨다.
266인 기본 피해가 399까지 치솟았다. 대리석 가고일의 방어력이 30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상당한 데미지다. 이를 증명하듯 치명타에 맞은 가고일들은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되어 죽음을 맞이했다.
후우우우웅!
[키하아아악!!]
두 놈을 죽이자마자 뒤에 있던 놈이 내게 손톱을 휘둘렀다. 허공에 수놓아진 주황색 피를 날카로운 손톱이 갈랐다. 그것을 본 나는 타이밍을 가늠하여 공격 패링을 시도했다.
카아아아앙!
패링은 성공적이었다. 손톱이 날아오는 궤도에 맞춰 검을 휘두르자 가고일의 팔은 반대 방향으로 꺾이고 말았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놈의 목을 향해 숏소드를 내질렀고 목에 박힌 칼날을 옆으로 비틀면서 빼냈다.
“흡!!”
푸훅!
푸화아아악!!
너덜너덜하게 찢긴 목에서 주황색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목이 반쯤 찢어진 가고일은 처절한 신음을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이걸로 다섯……!”
킬 카운트를 하면서 주위를 경계했다. 더 이상 움직이는 가고일은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의심 가는 석상들을 한 대씩 쳐봤으나 움직이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여긴 게임이랑 똑같나 보네…….”
칼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숨을 골랐다. 격렬히 움직인 탓인지 온몸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그래도 계승의 증거의 효과로 기력이 200이나 올라서 생각보다 힘들지는 않았다.
첫 전투를 수월하게 마친 나는 폭풍의 숏소드를 내려다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공격력이 10 밖에 안 되는 녹부검을 쓰다가 공격력 108짜리 숏소드를 사용하니까 전투에 속도감이 붙었다.
비록 대리석 가고일들의 생명력이 높아서 한 방 컷은 못 냈지만 녹부검을 들고 싸웠다면 한 마리 잡을 때마다 최소 몇 십 분씩 걸렸을 거다.
거기에 더해 숏소드는 녹부검과 달리 근력 보정을 받는 무기다. 각 무기에는 보정 스탯이라는 것이 있는데, 보정 받는 스탯 곱하기 2.5의 수치를 무기 공격력에 추가하는 시스템이다.
현재 내 근력은 10. 여기에 2.5를 곱하면 25가 되니까 108 + 25를 하여 폭풍의 숏소드의 총 공격력은 133인 것이다.
나는 고행자의 가호까지 받았으니 공격력이 100퍼센트 상승해서 266의 공격력을 갖게 됐다. 그리하여 생명력 550, 방어력 30인 대리석 가고일도 쉽게 처치할 수 있었다.
역시 실력도 중요하지만 장비빨 또한 실력 못지않게 중요하다.
문득 들개 한 마리조차 잡지 못해서 죽기 살기로 도망쳤던 어제의 내가 떠올랐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의 나는 용과 같다. 장비 하나의 차이가 그 정도로 크다.
“그래도 아직 방심하긴 이르지……. 신전 안에는 들어가지도 않았으니까.”
가고일들의 시체를 훑어본 나는 신전 입구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내 방문을 환영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방금 전의 전투로 높아진 자심감도 문 너머를 바라보니 다시금 낮아졌다.
아냐, 방심하지 않는 건 좋지만 그렇다고 쫄 필요는 없다. 가고일들도 고전하지 않고 잡았잖아. 정신만 차리면 이후에 나오는 놈들도 얼마든지 잡을 수 있다.
압박감을 털어내며 문을 넘었다. 가고일들의 시체는 일단 방치하기로 했다.
놈들의 몸을 뒤지면 아크 데몬 때처럼 이코르를 찾을 수 있겠지만 지금은 마땅히 넣어둘 데가 없어서 들고 다니기 불편할 거다.
이 앞에서 나타날 적들은 생각하면 불필요한 짐들은 그냥 두고 가는 편이 낫다. 가고일들의 이코르는 아크 데몬의 이코르처럼 귀하지도 않은데다가 이곳에선 누가 주워가지도 않을 거다. 던전을 클리어한 뒤에 여유가 남으면 그때 회수하는 편이 좋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