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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25화 (25/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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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공략

“넌 참 용감하구나, 신입……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렸는데…… 괴물이 된 신들과 싸워서 이기라니. 평범한 인간이라면 절대 못할 일이잖냐…….”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에요?”

“그래…… 말이 좋아서 여명의 투사지 저 여신들은 그저 목숨 바쳐 싸울 자살희망자가 필요할 뿐이야. 그런 게 아니고서야 한 때 세상을 지배했던 대신大神들을 처치하라는 얘긴 하지 않았을 거다.”

웃음기 가득하던 목소리는 점점 무거워졌다.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내심 공감했다.

계시 하나 받았다고 사람을 천재지변과 싸우게 하다니. 암만 생각해도 제 정신이 아니다.

헤베는 귀엽고 브릴린트 누님은 매력적이기 그지없지만 그녀들이 시키는 일이 옳은 일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고개를 가로저을 것이다.

그나마 강제성이 없어서 망정이지 강제로 재앙신과 싸우게 했다면 가디스 던전의 장르는 한국형 차원이동물 같은 판타지 스릴러가 됐으리라.

“그래도 뭐, 여신님들이 저희한테 억지로 싸우라 그러진 않잖아요? 이렇게 좋은 곳에서 지낼 수도 있게 해주고요.”

“불행 중 다행이지. 가뜩이나 계시 때문에 괴물들한테 쫓기게 됐는데 억지로 쫓겨났다면 난 분명 여신들을 저주했을 거다.”

이건 부가적인 설정인데 투사의 재목들은 계시의 영향으로 몬스터들에게 쉽게 노려진다. 그것이 플레이어가 성소로 온 이유이자 추방자 신분이 고향에서 쫓겨난 이유다.

리단 역시 여명의 계시 때문에 투사가 되지 않았음에도 성소에서 지내고 있는 것이다. 성소를 나가는 순간 괴물들과 싸우는 나날의 연속일 테니까. 반면 성소는 휑하긴 해도 헤베의 보살핌이 있어서 제법 살 만하다.

“어쨌든 너도 목숨이 아까운 줄 안다면 저 여신들 말에 휘둘리지 말고 일찌감치 포기해라. 성소 밖으로 자주 나가지만 않으면 계시를 받은 몸이라 해도 살만 할 거야. 던전에 들어가서 시체도 못 건지는 것보다야 훨씬 나아.”

리단은 날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성소 밖으로 나간 투사들은 전부 죽거나 실종됐으니까.

나만큼은 그렇게 되지 마라. 리단의 말에는 그러한 의도가 담겨 있었다.

“그래도 일단 해보려고요. 우리가 아니면 달리 막을 사람도 없잖아요.”

“뭘 모르는군. 우리 같은 놈들이 발악해봤자 세상은 바뀌지 않아. 계시니 투사니 하는 건 전부 개죽음을 숭고하게 포장하는 헛소리일 뿐이야. 결국엔 너나, 나나, 다른 놈들이나 전부 죽어도 상관없는 목숨인 거지. 계시는 그런 낙오자들에게 내려지는 저주고.”

“…….”

리단의 말에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누군가에겐 부정적인 푸념처럼 보이겠지만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묘한 동정심을 느꼈다. 눈앞에 있는 마음 꺾인 기사가 과거의 나와 겹쳐보였기 때문이다.

그의 대해서 좀 더 알고 싶었던 나는 슬쩍 옆자리에 앉았다. 리단은 별 말 않고 자리를 내주었다. 나는 잠시 단어들을 고르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암담하게 생각하세요? 재앙신과 싸우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절망할 것까지는 없잖아요?”

질문 받은 리단은 다시 한 번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는 꾹 눌러쓴 후드를 벗으면서 처음으로 내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후드 아래에 숨겨져 있던 얼굴은 30대 후반의 미중년이었다. 마치 외국 판타지 게임에 나오는 중년 주인공을 보는 것 같았다.

얼굴을 보여준 리단이 내게 되물었다.

“신입, 너 이름이 뭐냐?”

“감다키…… 요…….”

“그래, 다키…… 처음 계시를 받았을 땐 나에게도 기회가 찾아온 줄 알았어, 가족도, 이상도 잃어버린 몸이지만 아직 회생할 기회가 남아 있을 거라 생각했지…….”

나를 보던 시선이 다시 아래로 향한다. 자신과 과거와 대면한 그는 참을 수 없는 수치심을 느끼는 듯했다. 내 시선은 물론 내 눈에 비치는 자신의 시선까지 감당할 수 없는 듯했다.

“그런 얄팍한 희망을 품고 성소까지 찾아왔는데 기다리고 있던 건 내 역량을 아득히 뛰어넘는 임무였어. 헤베께 임무를 듣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지. 나에게 새로운 기회 같은 건 없구나. 결국 다 헛된 희망이었다. 난 그저 낙오자에 머저리일 뿐이다…… 라고 말이야.”

리단의 말을 듣다 보니 기분이 점점 착잡해졌다.

그에게 계시가 두 번째 기회였던 것처럼 나에겐 방송이 두 번째 기회였다.

잘 하는 거 하나 없는 나라도, 항상 누나들과 비교만 당하는 나라도 방송을 통해서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열심히 노력해서 잘 나가는 스트리머가 되면 가족들도 날 다르게 볼 거라는 기대까지 품었다.

그러나 3년간의 활동 끝에 내가 느낀 것은 크나큰 좌절감이었다.

나는 역시 뭘 해도 안 되는 놈이구나. 그나마 잘할 수 있는 방송도 다른 스트리머들에 비하면 형편없는 수준이다. 그것을 깨닫고 나니 자존감이 바닥까지 떨어졌다.

누나의 강압적인 취업 제안을 받아들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누나의 말이라도 듣지 않으면 난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쓰레기가 될 것 같아서 덜컥 겁이 났다.

재앙신과 맞서 싸우기 두려워서 성소에 틀어박힌 리단, 한계에 부딪쳐 방송을 접고 일자리를 구하기로 한 나.

동일 선상에 두기엔 스케일부터가 다르지만 맥락 자체는 같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리단에게 동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를 보고 있는 것으로 나 자신을 돌아보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스스로가 낙오자라는 걸 깨닫고 나니 내 마음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꺾여버리고 말았다……. 너는 아직 신의 힘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직접 보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 거야.”

상념에 빠져있을 리단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것은 낡고 녹슨 열쇠였다. 내가 얼떨결에 열쇠를 받아들자 리단은 몇 마디 더 첨언했다.

“신이 얼마나 무서운 놈들인지 알고 싶다면 구 신전 안에 들어가 봐. 거기 새겨진 벽화가 아주 자세하게 설명해줄 테니까. 그걸 보고 네가 마음을 돌렸으면 좋겠다.”

“…….”

이것이 내가 리단과 대화를 나눈 이유였다. 이게 있어야 구 신전을 지나 숨겨진 던전으로 들어갈 수 있다.

본래의 목적을 달성한 나였지만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생각이 많아졌다. 어젯밤에 꾼 꿈과 브릴린트와 대화하며 느낀 감정까지 떠올라 내 머릿속은 무척이나 복잡해졌다.

그래도 할 일은 해야지. 여기서 계속 고민하고 있을 수는 없다. 그 사실을 되새기며 나는 리단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충고해주셔서 고마워요. 리단 씨가 해주신 말, 잘 새겨들을게요.”

인사를 건넨 나는 그대로 구 신전으로 향했다. 리단은 말없이 손만 흔들었다. 고개를 돌려 그 모습을 확인한 뒤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쯤에 있을 텐데…… 아 찾았다.”

구 신전으로 들어가기 전에 나는 폐허 주위를 샅샅이 살폈다. 한동안 잔해 사이를 둘러보자 웬 도자기로 된 병 하나가 보였다.

화염병

불의 기운을 품은 도자기 병. 깨뜨리기만 해도 거센 불길을 일으킨다. 최대 10미터 거리까지 투척할 수 있으며 피격된 대상에게 100의 화염 피해를 주고 90퍼센트의 확률로 30의 발화 수치를 부여한다. 발화는 5초 동안 지속된다.

“역시 있을 줄 알았어. 게임처럼 빛나지 않아서 애먹었네.”

눈앞에 뜬 정보창을 확인하며 나는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여느 RPG 게임이 그렇듯이 가디스 던전도 맵을 둘러보다 보면 각종 아이템들을 발견할 수 있다. 원작 게임에선 그런 아이템들이 새하얀 빛을 뿜어내서 쉽게 찾을 수 있었는데 게임 세계에선 그런 게 없어 찾기 힘들었다.

이렇게 떨어져 있는 아이템들은 대부분 포션이나 인챈트 아이템 같은 소모품들이지만 일회성 아이템이라고 안 찾고 넘어갈 수는 없다.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여도 이런 소모품들을 일일이 파밍하고 다녀야 게임을 그나마 편하게 진행할 수 있다.

당장 생명력 회복 포션만 해도 상점에서 사려면 1000아웬이나 한다. 물약 한 병에 10만 원을 호가하는 것이다.

포션 정도로 비싸진 않지만 지금 내가 찾은 화염병도 상점에선 200아웬, 원화로 2만 원 정도를 주고 구매해야 한다. 당장 내 수중에 있는 돈이 800아웬 밖에 안 되는 걸 생각하면 꽤나 비싸다.

무엇보다 지옥 같은 비밀 던전을 클리어하려면 화염 속성과 빙결 속성은 필수다. 둘 중 하나라도 챙겨가지 않으면 중반부에서 피를 보게 될 거다. 이를 알고 있는 나였기에 눈에 불을 켜고 아이템 회수에 나섰다.

얼마나 찾아다녔을까. 나는 화염병 2개와 기름병 2개, 갈고리 밧줄 1개, 그리고 얼음처럼 차가운 칼조각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기름병

투명한 기름이 들어 있는 도자기 병. 적에게 던질 수 있으며 맞은 적은 20초 동안 화염 속성으로 받는 피해가 100퍼센트 증가한다. 기름이 몸에 묻은 채로 불을 다루면 자신에게 불이 옮겨 붙는다.

갈고리 밧줄

사냥감을 옳아 매기 위한 도구. 튼튼한 밧줄 끝에 날카로운 갈고리가 달려 있다. 적에게 던지면 남은 인내력과 무관하게 경직당하고 사용자의 앞으로 끌려온다. 인내력이 50 이상인 적에겐 효과가 발동하지 않는다. 벽을 오르거나 거대한 적에게 매달릴 때도 사용할 수 있다.

서리 칼조각

한 때 신이 사용했던 무기에서 떨어져 나온 작은 조각. 빙결의 힘을 품고 있다.

칼조각을 무기에 그으면 1분 동안 빙결 속성을 부여하고 무기 공격력을 20퍼센트 상승시킨다. 이미 마법 속성이 부여된 무기라면 지속 시간 동안 기존의 속성이 봉인된다.

단 날카로운 쇳조각으로 무기를 긋는 행위는 내구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사용 즉시 무기 내구도가 20퍼센트 감소한다.

칼조각이라고 해서 무조건 칼의 파편인 것은 아니다. 칼처럼 날카롭기에 그렇게 불릴 뿐, 본래 이것이 어떤 형태였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날 부분이 매우 날카롭기 때문에 사용할 때 주의가 필요하다.

화염병과 마찬가지로 이 아이템들 역시 던전 공략에 필요한 물건들이다. 진행하다 보면 정말 욕지거리가 나올 정도로 끔찍한 던전이지만 이것들만 들고 가도 꽤 할 만해진다.

그렇게 파밍을 마친 나는 물건들을 허리끈에 묶었다. 조금 위태롭기는 해도 끈이 튼튼해서 떨어질 일은 없어보였다.

“그러고 보니 가방이 없네……, 나중에 가방 하나 구하던가 해야지 원…….”

인벤토리가 없어서 너무 불편하다. 하다못해 등에 매고 다닐 백팩이나 주머니가 달린 벨트 같은 거라도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방금 얻은 기름병이나 화염병은 요령 좋게 묶으면 어떻게든 휴대할 수 있는데 다른 아이템들은 이런 식으로 가지고 다니지 못할 거다.

병들 역시 충격에 노출된 상태여서 잘못하다간 곧장 깨질 것이다. 꺼내 쓸 때도 많이 불편하다.

인벤토리의 필요성을 느끼며 나는 이윽고 구 신전의 철창문 앞에 다다랐다.

리단이 준 열쇠만큼이나 철창문 또한 많이 녹슬어 있었다. 잘 들어가지도 않는 홈에 열쇠를 끼워 넣자 철컥 소리가 나며 문고리가 열렸다. 동시에 녹슨 열쇠도 보기 좋게 부러져 버렸다.

“어디 보자…….”

신전 안으로 들어선 나는 벽을 짚으며 천천히 걸어갔다.

리단의 말대로 신전 벽에는 신들의 무시무시함을 묘사한 벽화들이 가득했다.

벼락으로 파괴되는 건물들, 해일에 뒤덮여 침몰하는 도시, 말라죽어가는 대지가 눈에 들어왔다.

권능을 남용하는 신들로 인해 필멸자들은 벌레처럼 죽어나갔으며 신들 역시 파멸의 길을 걸었다. 오래 전 이 세상을 근간을 뒤흔든 신들의 전쟁, 기원전쟁에 관한 벽화였다.

저런 괴물들과 싸우란 소리를 들으면 누구나 마음이 꺾일 것이다. 리단이 저리 암담하게 말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내 눈에는 그냥 게임 컨셉 아트 정도로 보이지만 이 세계의 주민인 리단에게 이 벽화는 이토 선생님의 공포 만화 못지않았으리라.

그렇게 얼마나 벽을 따라 걸었을까. 나는 유독 벽화가 흐릿한 부분을 발견했다. 이것이 내가 찾는 장소임을 직감하곤 숏소드를 꺼내들었다.

파지지지직!!

칼집에서 나온 숏소드가 청록색 스파크를 뿜어냈다. 말도 안 나오게 멋있었다. 화려한 이펙트에 감탄하면서 나는 벽을 향해 숏소드를 휘둘렀다.

촤아악!

벽을 내려쳤는데도 둔탁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마치 허공을 베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흐릿한 부분이 서서히 사라져갔다. 사실 이 벽은 마법으로 만들어진 환영벽이었던 것이다.

환영벽은 만지거나 눈으로 봤을 때는 평범한 벽이지만 타격하면 안개처럼 사라져버린다. 그런 환영벽 뒤편에는 대체로 숨겨진 길이나 방이 존재한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사라진 벽 너머로 어두운 길이 보였다. 이 앞으로 쭈욱 나아가면 비밀 던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순간 머뭇거린 나였지만 이내 각오를 다잡고 걸음을 옮겼다.

터벅, 터벅, 터벅.

어둠 속에서 내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공허하게 울리는 발소리 때문에 긴장감이 더 커졌다. 허나 두렵지는 않았다. 이 어두운 복도는 그저 길목일 뿐, 이곳에선 적도 함정도 나오지 않는다.

한동안 걸어가자 밝은 빛이 보였다. 복도를 벗어날수록 그 빛은 더욱더 강렬해졌고 이내 휘황찬란한 광채가 사방에서 쏟아져 내렸다.

“헤엑…….”

복도에서 벗어난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성소에서 봤던 신전보다 몇 배나 더 호화로운 건물이 보였다. 생김새 자체는 성소의 신전과 비슷했지만 새하얀 표면 곳곳이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게 본래 게임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저것들은 죄다 순금일 거다.

황금으로 치장된 새하얀 거성. 이곳 역시 신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생김새였다.

“인내하는 자의 신전…….”

그것이 이 던전의 이름이자, 지금부터 내게 끔찍한 고통을 선사해줄 생지옥의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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