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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공략
“그게 있었죠, 참! 좋은 생각이네요!”
헤베가 손뼉을 치면서 대답했다.
“제가 투사님의 갑옷을 신의神衣로 만들어드릴게요. 그러면 아무 것도 안 입은 것처럼 보여도 갑옷의 성능을 온전히 얻으실 수 있을 거예요.”
가디스 던전에는 방어구를 직접 착용하지 않고도 효과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이것을 신의라고 하는데 다른 게임으로 치면 일종의 의상 슬롯 같은 시스템이다.
신의. 직역하면 신이 입는 옷이란 뜻이지만 가디스 던전 세계관에선 신의 권능을 통해 방어구가 보이지 않는 보호막으로 변한 것을 말한다.
“신의로 바꾼 보호막은 평소엔 눈에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아요. 하지만 투사님께서 필요하다고 여길 때, 혹은 외부의 피해를 방어해야할 때 보호막 형태로 발현되어 투사님을 지켜주죠. 움직일 때 불편하지도 않으니 무척 편리할 거예요.”
요컨대 신의로 변한 장비를 장착하면 겉보기엔 아무 것도 안 입은 것처럼 보여도 실상은 장비를 착용한 것과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얘기다.
신의에 관한 설명을 들으며 헤베에게 가죽 갑옷을 넘겨줬다.
방어구를 신의로 변환하는 능력은 모든 신들이 가지고 있다. 보통은 자신과 맹약을 맺은 신에게 부탁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특별히 맹약한 신이 없다면 헤베에게 부탁할 수 있다.
“제발 잘 됐으면 좋겠네요. 여신님 권능이 마지막 희망이에요.”
가죽 갑옷을 건네준 나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메시지가 원하는 건 내가 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를 보이는 거다.
그런데 고인물들이 팬티만 입고 다니는 이유는 스스로가 한 대도 안 맞을 거라 자신해서다.
그 말은 곧 고인물들에겐 방어력이 필요 없다는 뜻이 되고, 따라서 메시지가 말한 뚜렷한 증거란 옷을 안 입는 게 아니라 방어력을 올리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후자가 맞으면 가죽 갑옷을 신의로 변환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줄곧 방어력이 0인 채로 살아가야 하겠지. 던전도 방어구 하나 걸치지 않고 맨몸으로 깨야할 거다.
원작 게임에선 힘들어도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괜히 6천 시간 동안 가디스 던전을 붙잡고 있었던 게 아니니까.
허나 게임 세계에서 원작 게임처럼 할 수 있냐고 물어보면 나는 단호하게 부정할 것이다.
전에 이야기했듯이 시점의 변화, 몬스터들의 불규칙한 공격 등 여러 복합적인 이유로 실력을 온전하게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걱정 마세요 투사님. 그 저주는 투사님에게 수치심을 주기 위한 거니까 신의로 만든다면 문제없을 거예요.”
날 안심시키며 권능을 사용하는 헤베. 순간 그녀의 손에서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가죽 갑옷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파아아아앗!
빛에 휩싸인 갑옷이 점차 투명해졌다. 이제 저 물건은 더 이상 평범한 가죽 갑옷이 아니다. 여신의 힘으로 빚어낸 영적 보호막인 것이다.
잠시 후, 가죽 갑옷이 모습을 감췄다. 헤베의 손에서 흘러나오던 황금색 빛줄기도 사라졌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뭐야 내 갑옷 돌려줘요 라며 항의하겠지만 난 그것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었다. 빛이 꺼지는 것과 동시에 무언가가 내 몸을 지켜주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된 건가……?”
이질적인 기분을 느낀 나는 상체를 이곳저곳 만져보았다.
딱히 무언가가 만져지진 않았으나 존재감만은 확실히 느껴졌다.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날 지켜주는 보호막의 존재감이 말이다.
“갑옷은 투사님께 확실히 깃들었어요. 역시 저주의 영향은 받지 않는 모양이네요.”
헤베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보호막은 내 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몇 초가 지나도 이전과 같은 메시지는 떠오르지 않았으며 상태창을 확인해보니 방어력도 제대로 적용되어 있었다.
“다행이네요, 이걸로 한두 대 맞고 죽을 일은 없겠어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말했다. 진짜 이번에도 튕겨나가면 어쩌지 하고 오지게 걱정했는데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솔직히 아까 튕겨나갈 때 뼈가 박살나는 것 같아서 뒤지는 줄 알았다. 다시는 그런 경험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무렵 헤베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설명해줬다.
“벗고 싶으시거나 다른 장비로 교체할 일이 생기면 제게 다시 와주세요. 신의는 필멸자의 힘으로 벗겨낼 수 없거든요.”
“아, 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신님.”
감사 인사를 건네며 헤베의 말을 되짚었다.
신들의 도움 없이는 마음대로 벗을 수 없는 것. 그것이 신의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권능을 사용하지 않으면 벗겨낼 수 없으니 도둑질 당할 일도, 전투 도중에 벗겨질 일이 없다. 사실상 착용자에게 귀속되는 것과 다름없어서 안정성 자체는 크게 증가한다.
하지만 더 좋은 방어구가 나왔거나 수리가 필요해지면 이러한 특성이 오히려 불편하게 여겨진다.
보호막으로 변했더라도 장비의 능력치 자체는 변함없다. 맞을수록 내구도가 감소하고 내구도가 바닥난 상태에선 효과를 발휘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망가진 신의를 수리하기 위해선 꼭 헤베나 다른 신에게 장비 해제를 받아야 한다. 내구도 관리를 소홀히 하지 않으면 큰 문제는 없으나 피치 못하게 내구도가 전부 떨어지는 경우도 반드시 있다.
보호막 위에 다른 장비를 또 입으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가디스 던전의 무게는 아이템의 중량을 나타내는 것과 동시에 이 장비가 사용자에게 얼마나 무리를 주는가를 보여주는 수치다.
설정상 게임 내에 등장하는 모든 장비는 신력이 담긴 특수한 재료로 만들어졌다.
이렇게 만든 장비는 일반적인 무기나 방어구보다 탁월한 성능을 가졌으나 장비에 담긴 신력이 높을수록 착용자의 신체에 무리를 가한다.
그래서 장비 무게의 총합이 사용자의 신체 스탯(기력을 올려주는 그것)을 초과하면 초과 수치만큼 스킬을 사용에 필요한 자원 소비량이 증가한다. 쉽게 말해서 무게가 높으면 높을수록 MP 혹은 SP를 더 많이 소비하는 것이다.
이러한 제약 때문에 방어구를 신의로 바꿨다고 해서 여러 방어구를 겹겹이 입을 수는 없다.
뭐, 이런저런 불편함이 있긴 해도 결국 신의를 착용하는 게 신의가 아닌 장비를 착용하는 것보다 훨씬 낫긴 하다.
무거운 갑옷이나 불편한 로브 등을 그대로 입으면 회피 속도와 달리기 속도가 매우 느려지는 것에 반해 신의를 착용한 상태에선 이러한 속도 감소 페널티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신의 시스템을 사용하는 가장 큰 이유는 룩덕 때문이지만, 이 부분은 나랑 관계없는 얘기니까 넘어가기로 하고.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여신님도 수고하세요.”
볼 일을 마친 나는 헤베에게 인사를 하고 분수대를 떠나려 했다. 그런 내게 헤베가 아쉬운 듯 물었다.
“벌써 떠나시는 건가요……?”
“아뇨, 성소 밖으로 나가진 않을 거예요.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이곳저곳 둘러보고 싶어서요.”
“아, 그렇군요! 혼자 다니시면 헤매실 수도 있는데 제가 동행해드릴까요?”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며 동행 의사를 표하는 헤베. 그녀의 친절함에 잠깐 가슴이 뛰었으나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아요, 길 찾는 데에는 자신 있거든요. 멀리 가진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도 조심하셔야 돼요. 성소는 보기보다 많이 복잡하거든요. 혹시 무슨 일이 생기시면 큰 소리로 절 불러주세요!”
주먹을 부르쥐며 헤베가 말했다. 진짜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헤베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광장을 떠나 신전 외곽으로 향했다.
옛신의 성소는 커다란 신전 주위를 숲이나 들판 등이 둘러싸고 있는 구조다.
신전 주위에는 이렇다 할 구조물이 별로 없지만 중앙에서 북동쪽으로 나아가면 폐허가 하나 나온다. 과거에 사용됐다고 하는 구 신전으로 현재는 세월의 풍파로 형체만 간신히 남겼다.
들짐승들의 쉼터로 변모한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인기척이 느껴졌다. 헤베나 브릴린트가 그렇듯이 그 남자 역시 자신의 장소를 지키고 있는 듯했다.
무너진 구조 사이로 쏟아지는 햇볕을 지나가길 잠시, 건물 잔해를 의자 삼아 앉아 있는 한 남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아…….”
낡은 갑옷과 망토를 착용한 그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홀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차림새와 등에 맨 양손검을 보고 그가 검사 내지는 기사라고 추측할 수 있었지만 그의 얼굴에선 용맹함 같은 건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솔직히 나도 남들한테 너 참 어둡다, 음침하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 편인데 이 남자에 비하면 나는 방금 막 갈아 끼운 백열전구로 보일 지경이었다.
차마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은 음울함. 그의 얼굴에 남아 있는 것이라곤 절망 밖에 없었으며 말 한마디라도 걸면 내게도 부정적인 기운이 뻗칠 것만 같았다.
“저어…… 안녕하세요. 리단 씨 맞으시죠?”
조심스럽게 다가간 나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건넸다.
그의 이름은 방랑기사 리단. 어느 안대 쓴 악마 사냥꾼이 떠오른다면 기분 탓이 아니다.
개발진이 일부러 노리고 지은 이름으로, 그가 플레이어의 경쟁자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남성향 게임에선 흔하지 않은 레귤러 남캐.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캐릭터를 보고 경계심을 느낄 것이다. 하렘 게임에서 남캐가 나오는 것을 반길 사람은 별로 없으니까.
꼭 경쟁자가 아니라고 해도 괜히 NTR 떡밥이 나올 우려가 있기 때문에 남성향 게임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레귤러 남캐의 등장을 지양할 거다.
하지만 여러분 안심하셔도 됩니다.
이 사람은 모티브가 된 악마 사냥꾼과 마찬가지로 한 평생을 동정으로 살아온 순정남인데다 다른 여성에게는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 유사 고자입니다.
수석 디렉터의 오피셜이기 때문에 믿어도 좋다. 이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리단의 과거사를 짤막하게 공개했는데, 그의 과거가 너무 안습한 나머지 유저들은 그를 경계하기는커녕 동정하게 됐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지……? 아, 헤베께서 가르쳐주신 건가…….”
인사를 받은 리단이 내게 고개를 돌렸다.
후드를 꾹 눌러쓰고 있어서 그런지 눈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내 쪽에만 햇빛이 비치고 리단이 있는 곳은 그림자에 뒤덮여 있어서 그의 인상이 더욱 어둡게 보였다.
“특이한 차림새군…… 어디 서쪽의 이방인이라도 되나……? 아니,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지. 누가 됐든 나 같은 머저리한텐 무슨 볼 일이냐……?”
그림자에 몸을 맡긴 채 질문하는 리단. 정말 그가 한 마디 할 때마다 나까지 기운이 쭉쭉 빠졌다. 자기혐오로 똘똘 뭉친 어투와 우울한 목소리가 그의 자존감이 얼마나 낮은지 표면적으로 보여줬다.
“별 거는 아니고요, 저 외에 다른 투사 분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거든요. 그래서 인사나 좀 할까 하고…….”
플레이어가 할 법한 대답을 입에 담으며 천천히 거리를 좁혔다. 내가 다가가도 리단은 반응하지 않았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만 흘길 뿐이었다.
“투사라…… 헤베께서 내 소개를 잘못했나 보군. 난 그렇게 대단한 그릇이 아니야. 겁먹어서 폐허에 처박힌 병신일 뿐이지…….”
“그, 그러세요……?”
뭐지, 게임에서도 이렇게 말했었나?
갈수록 세지는 언어 수위에 나는 잠시 당황했다. 원작 게임의 리단도 자기혐오가 강하긴 했지만 게임 세계의 리단은 그보다 훨씬 더 심한 것 같았다.
뭔가 그의 아픈 부분을 찌르는 것 같아 대화하기가 꺼려졌지만 나는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내가 아무 이유 없이 그에게 찾아온 건 아니기 때문이다.
“성소에 오셨다는 건 리단 씨도 계시를 받았다는 거 얘기 아닌가요? 그런데 왜 여기서 혼자 계세요?”
“방금 말한 대로야. 나는 재앙신들과 싸우는 게 무서워서 여기 틀어박혔다……. 일개 인간의 몸으로 살아있는 재앙들과 싸우라니…… 미쳐도 단단히 미쳤어…….”
질문에 대답하며 리단이 큭큭큭 웃음을 흘렸다. 자괴감과 무력감으로 똘똘 뭉친 힘없는 웃음이었다. 그 말을 통해 그에겐 재앙신을 토벌할 생각은커녕 성소를 나갈 생각조차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신입…… 넌 어떻더냐?”
“뭐가요……?”
“재앙신들과 싸우란 소리를 들었을 때 말이야. 그때 어떤 생각이 들었지?”
리단의 질문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게임에선 어떻게 말하더라? 나 역시 재앙신들과 싸우라는 얘기에 암담함을 느꼈지만 지금은 형식적으로 대답하기로 했다.
“그냥 뭐……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잘 할 수 있을까 걱정되기는 하지만 세상을 위한 일이잖아요. 힘닿는 데까진 해봐야죠.”
어색한 어조로 말하며 리단을 살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것이 보였다.
비웃음에 가까운 미소였지만 그의 조소는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를 향한 자조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