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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23화 (23/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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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공략

숏소드를 받아들며 가볍게 자세를 잡았다. 검끝을 위로 세우며 칼날 표면에 얼굴을 비추자 눈앞에 아이템에 관한 정보가 떠올랐다.

전반적인 성능은 숏소드와 비슷했으나 공격력이 20퍼센트 상승했고 전격 속성이 추가되었다. 이제 전격 속성이 약점인 적들을 상대할 때 추가 피해를 입힐 수 있게 됐다.

하물며 권능석의 진가라고 할 수 있는 부가 효과까지 생겼다.

전용 스킬 열공의 한 획. 하늘을 찢어 가르는 한 획이라는 뜻이다. 이 이름만 들어도 멋있는 이 스킬이 던전 클리어의 열쇠가 될 것이다.

“진짜 겁나 멋있어…….”

효과를 확인한 나는 다시 한 번 탄성을 흘렸다. 그래봤자 본질은 초반에나 쓰는 저급 무기지만 녹부검 같은 걸 휘두르던 내게는 이마저도 선녀로 보였다.

“퀴클롭스가 뛰어난 대장장이란 얘기는 들었지만 이건 상상 이상이다…… 칼날에서 번갯불 일렁이는 거 실화야? 진짜 세계관 최강자의 명작이다…….”

나는 아연실색한 얼굴로 숏소드를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원작 게임을 플레이한 내게 권능석 강화 같은 건 별 거 아닌 컨텐츠였으나 막상 실물을 보니까 감회가 새로웠다. 브릴린트가 성공할 거란 걸 알고 있었음에도 감탄이 절로 나왔다.

“얘, 얘가 또 쓸데없이 아부하기는…… 그냥 칼에다가 보석 좀 바른 게 뭐 그리 대수라고 호들갑이야…….”

내 아낌없는 칭찬에 브릴린트가 얼굴을 붉혔다. 말은 그렇게 해도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아 기분이 좋은 듯했다.

그녀 말대로 무기에 권능석을 바르는 건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허나 그건 어디까지나 게임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의 이야기지 스토리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야기가 다르다.

내가 알기로 가디스 던전 세계관에서 권능석의 힘을 장비에 부여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브릴린트 뿐이다.

그녀의 유일무이한 능력으로 평범한 숏소드가 던전 보스와 맞설 수 있는 결전 병기가 됐다. 지금 브릴린트는 올림포스 3주신의 무기를 만든 자신의 선조들, 토르와 오딘의 무기를 만들어낸 난쟁이 형제들만큼이나 굉장한 물건을 만들어낸 것이다.

물론 성능 자체는 앞서 말한 신들의 무기보다 떨어질지 모르나 권능석 자체가 신의 권능이 담긴 물건이니 결과적으론 폭풍의 숏소드 또한 신화적인 장비라고 볼 수 있다. 전용 스킬인 열공의 한 획의 효과는 신들의 무기 못지않으니 말이다.

“으, 으흠! 아무튼 권능석 부여는 잘 끝났어. 잘만 다루면 어지간한 괴물들은 가뿐히 쓸어버릴 수 있을 거야. 그만큼 무기 수명도 줄어들겠지만 평범한 무기에 신의 권능을 억지로 부여한 거니까 어쩔 수 없지.”

한 차례 헛기침을 한 브릴린트가 전용 스킬, 열공의 한 획에 대해 언급했다.

열공의 한 획은 무척이나 강력한 스킬이지만 사용할 때마다 최대 내구도를 영구적으로 20퍼센트 감소시킨다. 어떤 무기에 바르든 5번 사용하면 무기 자체가 못 쓰게 되기 때문에 사실상 일회용 장비로 봐야하는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아껴 쓴다면 새 무기를 구할 때까지는 충분히 쓸 수 있으니까. 당장은 던전 보스를 처치할 때 외엔 쓸 예정이 없기도 하다. 그 보스도 가급적 안 잡는 취지로 갈 거고 말이다.

“최대한 아껴서 쓸게. 누나가 힘들게 만들어줬는데 헛짓 하다가 부숴먹을 수는 없지.”

“말은 참 잘 한다니까~ 그보다 마음에 드는 갑옷은 골랐어? 골랐으면 한꺼번에 계산할까 하는데.”

진열대를 둘러보며 말하는 브릴린트. 그녀의 질문에 나는 가죽 갑옷을 슬쩍 바라보았다.

역시 이것까지 거저 달라고 하는 건 조금 그렇겠지.

지금 내 전재산을 털어도 가죽 갑옷 가격의 절반조차 안 된다. 그녀 쪽에서 먼저 이야기 하긴 했지만 대뜸 78퍼센트를 할인해달라고 하면 아무리 브릴린트라 해도 난처해질 거다.

아쉬운 대로 누비 갑옷이나 사자. 깔깔이처럼 생겨서 별로 입고 싶지는 않지만 지금으로선 저게 최선의 선택이다.

“이게 마음에 들어?”

“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때 브릴린트가 내 시선을 눈치 챘다. 내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는 마네킹에게서 갑옷을 벗겼다. 그리곤 내게 갑옷을 가져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다키 너 보는 눈 좀 있다. 지금 네가 입을 수 있는 갑옷 중에선 이게 제일 좋은 거거든. 보통 초짜들은 화려한 갑옷에만 관심 가지던데, 한두 번 골라본 게 아닌가봐?”

그리 말하며 브릴린트는 내게 가죽 갑옷을 입혀주었다. 착용까지 도와주는 그녀의 친절함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나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그녀에게 말했다.

“누나 나 이런 거 살 돈 없어. 그러니까 당장은 저기 있는 천 갑옷이나…….”

“됐어, 됐어~ 없으면 나중에 천천히 갚아. 한두 번 보고 말 것도 아니고 앞으로 쭉 동고동락할 사인데 뭘 그렇게 어렵게 생각해?”

천산가?

브릴린트의 넓은 아량에 나는 말문이 막힌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성에게 이 정도 호의를 받아본 적은 난생 처음이다. 내가 만나온 여자들은 나에게 호의를 베풀기는커녕 거들떠도 안 봤다. 엄마랑 누나들도 날 그렇게 냉담하게 대했는데 누가 나를 친절하게 대해주겠는가.

헤베에 이어서 브릴린트까지 날 이렇게까지 잘 대해주니까 점점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싫어졌다. 꿈 때문인지는 몰라도 원래 세계 보다 게임 세계가 훨씬 나은 것 같았다.

이곳이 아무리 위험천만하더라도 현실에서 무시당하며 사는 것만큼 괴롭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이 당연한 것 마냥 머릿속을 채워갔다.

아니, 어쩌면 나는 아크 데몬을 처치한 순간부터 그렇게 생각해왔던 걸지도 모른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것과 안전한 도모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내가 오늘 아침부터는 여신들과 좋은 관계를 형성하고자 했다.

단순한 변심 같은 게 아니었다. 오히려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내가 스스로에게 한 거짓말일지도 모르겠다.

가족들에게 받은 압박 때문에 게임 세계에서 사는 걸 터무니없다 여기고 원래 세계로 돌아가 취업할 생각이나 하게 된 것이다.

“자, 다 됐다. 바지나 신발도 있으면 좋았을 텐데 당장은 마땅한 게 없네. 오늘 중으로 다 만들어놓을 테니까 시간나면 또 들러. 돈 걱정은 하지 말고.”

내가 심오한 고민에 빠져있을 무렵 어느새 브릴린트가 갑옷을 다 입혀주었다.

처음 입어보는 옷이라 그런지 나로선 입는 법을 전혀 몰랐다. 6천 시간 동안 플레이하면서 캐릭터가 옷 갈아입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브릴린트는 그런 나에게 갑옷 착용하는 방법을 하나하나 다 알려주었다. 딴 생각하느라 제대로 듣지는 못했지만 다음에 입을 때는 혼자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금 브릴린트에게 고마움을 느낀 나는 멋쩍은 어조로 이야기했다.

“고마워 누나 옷 입혀준 것도 그렇고, 이것저것 전부 다…….”

“너는 무슨 애가 시종일관 고맙다는 말밖에 못 하냐? 누가 보면 내가 목숨이라도 구해준 줄 알겠다.”

“아, 아니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맙다고 해야지. 칼이랑 강화 비용도 할인해줬는데.”

“그런 마음가짐은 좋은데, 별 거 아닌 일에는 그냥 고맙다고 하고 말아. 어떻게 은혜를 갚아야 될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말하지 말고.”

“내가 그랬어……?”

“그렇다니까? 평생 도움 한 번 안 받아본 애처럼 말이야.”

브릴린트의 지적에 나는 머리라도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살면서 도움 받아 본 적 없는 게 이렇게나 티가 날 줄은 몰랐다. 아니, 생각해보면 티가 안 나는 게 더 이상하다.

친구도 없고 가족들에게도 무시 받던 나에게 누군가의 호의와 도움은 무척 생소한 것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일에 대응할 때는 미숙함이 드러나는 게 당연하다.

“아무튼 네가 투사인 이상 나도 네 시종인 거나 마찬가지니까 자잘한 일에 일일이 감사할 필요는 없어. 그러니까 항상 편한 마음으로…….”

파직, 파지지지직!

브릴린트가 상냥한 목소리로 이야기해줄 때였다.

“어?”

가죽 갑옷이 요란한 광채를 뿜어냈다. 스파크라도 튀기는 것 같았으며 푸른색 빛은 갈수록 더 커져갔다.

갑작스러운 현상에 나도, 브릴린트도 당황을 금치 못했다. 나는 이 상황에 대한 해답을 요구하듯 브릴린트에게 질문했다.

“누나 혹시 갑옷에도 권능석 발랐어……?”

“아, 아니……! 애초에 네가 준 건 무기에만 바르는 거라고……!”

브릴린트의 말을 듣고 내 질문 얼마나 멍청했는지 깨달았다.

폭풍의 권능석은 무기에만 적용할 수 있는 아이템이다. 하물며 그것은 이미 숏소드에 발려 있고 권능석을 적용하는 동안 브릴린트는 가죽 갑옷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번뜩이는 스파크는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 걸까. 의구심을 느끼고 있을 때, 내 눈앞에 푸른색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상의를 입는 것은 약속을 배반하는 행위입니다. 팬티, 혹은 그와 비슷한 의복 외에는 어떤 의복도 착용하지 마십시오.

“이게 무슨…… 으아아아악!!”

콰아아아앙!!

내가 어처구니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릴 때 강렬한 충격이 내 몸을 덮쳤다. 갑옷과 내 몸 사이에서 터져 나온 충격파는 나를 원래 있던 자리에서 몇 미터나 날려 보냈다.

“다키야?!”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브릴린트는 화들짝 놀라며 내게 달려왔다. 벽에 처박힌 나는 몇 번인가 기침을 하며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쿨럭! 쿨럭! 쿨럭……!”

날아가는 충격 때문에 온몸이 아팠다. 생명력을 확인해봤는데 무려 절반이나 날아가 있었다. 얼마나 세게 날려 보냈으면 165나 되는 생명력이 한 번에 빠져나가는 거야?

통증도 통증이었지만 황당함 때문에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그런 나를 다급히 뛰어온 브릴린트가 부축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갑자기 튕겨져 나가고!”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브릴린트에게 몸을 기대며 나는 저 멀리 떨어진 가죽 갑옷을 바라보았다.

파직! 파지직!

갑옷에는 여전히 푸른색 전류가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봐왔던 그 어떤 이펙트와도 달랐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이건 시스템에 의한 것도, 버그에 의한 것도 아닌 듯했다.

-고인물로서 한 약속을 지키십시오. 상하의를 입는 것은 뉴비들이나 하는 행동입니다. 당신이 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를 보이십시오.

그 순간 다시 한 번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 역시 내가 본 적 없는 생소한 형태였다. 가디스 던전의 메시지는 플레이어에게 존댓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폰트도 미세하게 다른 게 무언가가 가디스 던전의 텍스트를 따라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유다희…… 대체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 * *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브릴린트와의 용무를 마친 뒤 나는 황금 분수대가 있는 광장으로 돌아왔다.

그곳은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헤베가 지키고 있었다. 멍투성이가 된 몸을 본 그녀는 경악하며 내게 자초지종을 물었고 나는 브릴린트와 있었을 때 겪은 일을 대강 설명해주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후, 헤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녀는 엄격 근엄 진지한 얼굴로 주먹을 부르쥐면서 내게 말했다.

“아무래도 이건 누군가의 저주 같아요!”

“저주요?”

“네……! 아는 여신님께 들은 건데 저주 중에는 대상에게 고통이나 불운이 아닌 수치심을 안겨주기 위한 것도 있다고 해요. 갑옷이 몸에서 튕겨져 나간 건 그런 종류의 저주 때문일 거예요!”

헤베는 내가 겪은 일에 대해 진중하게 받아들인 듯했다. 날 걱정하는 것과 더불어 나에게 저주를 내린 누군가에게 분노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럴 듯한 추측이었지만 내가 본 메시지를 고려하면 이건 저주 같은 게 아니다.

분명 게임 세계 주민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겠지. 게임 시스템의 일부인 저주와도 거리가 멀 것이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추방당할 때 그런 저주를 받은 걸지도 모르겠어요.”

헤베의 진지한 추론에 나는 넥타르를 마시며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었다.

그녀의 의견을 부정하려면 내가 원래 세계에서 왔다는 것부터 설명해야하는데, 그런 이야기를 하면 헤베는 날 분명 미친 사람으로 볼 거다. 그녀랑 열심히 머리를 맞댄다고 해서 해결될 것 같지도 않아 지금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어찌되었든 큰일이네요…… 이런 종류의 저주는 무척 희귀해서 마법에 능통한 분이 아니라면 해주할 수도 없을 텐데…….”

뺨을 어루만지며 고심하는 헤베. 탱탱한 볼을 몇 번인가 문지르는 그녀에게 나는 태연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당장 풀 방법이 없는데 어쩔 수 없죠. 목숨에는 지장 없으니 불편해도 이렇게 지내는 수밖에요. 그리고 여신님의 권능을 사용하면 방어력 부분은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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