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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19화 (19/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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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행자의 가호

* * *

“꺄아아아아악! 바보바보바보바보바보! 난 바보야아아앗!”

주방에 도착하자마자 식기를 개수대에 던져놓고 비명을 질렀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부끄러워서 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으며 벽에 머리라도 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비단 심정만 그런 게 아니라 헤베는 자신도 모르게 벽에 머리를 들이박고 있었다. 사자탈 때문에 아프지 않았지만 너무 세게 박은 탓인지 인형탈의 눈이 튀어나왔다.

“헤라클레스가 제일 좋아했던 걸 보여주면 기억이 조금은 돌아올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잖아으아앙!”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헤베는 스스로의 안일함 때문에 울상을 지었다.

그녀가 사자탈을 쓴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다키에게 전생의 기억을 되찾아주기 위해서다.

사자탈은 헤라클레스가 가장 좋아했던 장신구임과 동시에 그의 트레이드마크. 비록 그가 쓰던 물건은 아니지만 비슷한 걸 보여주면 뭔가 느끼는 바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런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결국 헤베 혼자 우스꽝스러운 꼴을 보여준 것이다.

“훌쩍…… 헤라클레스 너무해요…… 부끄러운 것도 꾹 참고 아침부터 쓰고 있었는데 아무 것도 기억해내지 못하고…….”

떨어진 인형 눈을 도로 붙이면서 볼을 부풀렸다.

자신이 안일하게 생각한 건 맞지만 이렇게까지 했는데 아무 것도 기억해내지 못하는 다키도 미웠다.

인형 탈을 쓰고 있는 내내 자신은 너무나 부끄러웠단 말이다. 엄격 진지 근엄한 표정으로 표정 관리를 하지 않았다면 진즉에 얼굴을 붉히고 비명을 질렀을 거다.

역시 남자들은 몸으로 유혹하는 수밖에 없는 걸까. 저승의 여신 바리는 중간에 건전한 방법을 조금씩 섞어주는 편이 좋다고 했는데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뭐니 뭐니 해도 자극적인 방법이 최고인 것 같아……! 기다려요 헤라클레스……! 다음에야 말로 뭔가 떠올리게 해줄게요!’

* * *

얼마 후 헤베는 아침 식사를 가지고 식당으로 돌아왔다.

스크램블 에그 같은 계란 요리랑 빵, 올리브 피클, 그 외에 토마토 같은 야채랑 망고처럼 생긴 과일 등이 식탁 위에 올라왔다.

판타지 세계라고 해도 가디스 던전 자체는 사람 머리에서 나온 터라 원래 세계의 메뉴와 별 차이가 없었다. 물론 한국 사람의 아침식사라기 보단 유럽 호텔 조식으로 나올 법한 메뉴들이었지만.

“많이 드세요 여행자님. 부족하시면 얼마든지 더 가져다드릴 테니까요.”

내게 식사를 권하면서 헤베가 청초하게 웃어보였다. 그녀의 웃는 모습은 정말 예쁘다.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

“감사합니다, 여신님. 잘 먹을게요.”

헤베의 미소에 화답하듯 나도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기분이 참 더러웠는데 그녀의 미소 덕분에 불쾌한 기분이 빗물에 씻겨나가듯 사라졌다.

매일 아침마다 저런 미소를 보면서 밥을 먹으면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분명 하루하루가 행복할 거다.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과 같이 먹었던 게 언제 적이더라.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 나에겐 헤베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자리 없잖아. 돈 줄 테니까 나가서 먹어.]

[애초에 이거 누나들 먹으라고 만든 건데 너까지 먹으면 모자라잖니. 누나들 오랜만에 왔는데 네가 좀 양보해.]

“…….”

문득 어젯밤에 꾼 악몽이 떠올랐다.

원래 세계에서의 아침 식사는 이렇게 발랄하지 않았다. 가정부 아주머니가 만들어놓은 밥을 방에서 혼자 꾸역꾸역 먹는 게 전부였다. 다른 누구랑 대화하는 일도, 누군가의 웃는 얼굴을 보는 일도 없이 말이다.

가급적 의식하지 않으려 했는데 자꾸 악몽에서 본 장면들이 떠올랐다. 헤베의 미소 덕분에 좋아졌던 기분은 금세 침울해졌다. 그런 내 태도를 살핀 헤베는 조심스럽게 질문을 건넸다.

“혹시 싫어하시는 요리라도 있나요……? 괜찮아요, 여행자님. 억지로 드실 필요 없으니까 싫어하시는 건 빼고 드셔도 돼요.”

그녀는 자신이 만든 요리에서 이유를 찾는 듯했다. 그런 헤베의 반응 때문에 괜히 미안해졌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얼른 포크를 들었다.

“아뇨, 아뇨! 싫어하는 요리는커녕 전부 맛있어 보여요. 그냥 잠이 덜 깼나 봐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그래도 뭔가 불편한 게 있으시면 저한테 꼭 말씀해주세요!”

헤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잡념을 떨쳐냈다. 불필요한 생각을 지워버린 나는 아침밥을 먹는데 집중했다.

“그런데 여신님.”

“네?”

“계속 거기 계실 건가요……?”

식사를 시작하려던 문득 헤베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는 어느덧 내 옆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서 턱을 괸 그녀는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중이다. 눈동자가 연신 반짝이는 게 마치 애완동물이 밥 먹는 걸 구경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여행자님 혼자 드시면 외로우실까 봐요. 혹시 괜한 참견이었나요……?”

“아,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여신님도 바쁘신데 괜히 저한테 신경 쓰시는 건 아닐까 했죠!”

“아아~ 그런 거라면 걱정 마세요. 성소 관리가 그렇게 빠듯한 건 아니거든요. 여행자님이랑 같이 있어드릴 시간은 얼마든지 있어요.”

미모의 여신님이 내가 외로울까봐 일부러 옆자리에 앉아 있어 주셨다. 본인은 진즉에 아침 식사를 끝냈는데도 말이다.

정말 행복하기 그지없는 경험이다. 매일 같이 혼밥을 해왔던 나로선 약간 부담스러운 면도 없잖아 있었으나 이렇게 좋은 기회를 내 손으로 날리고 싶지 않았다.

나는 헤베에게 감사하다고 말하며 음식을 입에 넣었다.

“와…….”

맛은 생각한 것 이상으로 괜찮았다. 아니, 괜찮은 정도를 넘어서 훌륭했다.

막 눈이 돌아갈 것 같은 맛은 아니었지만 여느 맛집에서 먹는 음식 이상으로 맛있었다. 메뉴는 별 거 없었는데 그 안에는 무척이나 풍부한 맛이 담겨 있는 것이었다.

“맛이 어떠세요? 입맛에 맞으시나요?”

나도 모르게 감탄하자 헤베가 기대감이 섞인 목소리로 질문했다. 똘망똘망한 눈으로 내 얼굴을 직시하는 게 너무 귀엽다. 나는 내가 느낀 감상을 그대로 이야기했다.

“정말 맛있네요……. 이렇게 부드럽고 풍부한 맛은 처음이에요. 여신님이 직접 만드신 건가요?”

라노벨 주인공들이 그러는 것처럼 ‘헤베는 나중에 좋은 신부가 되겠다.’ 라는 식으로 칭찬해볼까 했는데 아무리 게임과 비슷한 세계라고 해도 그런 말을 했다간 개씹 찐따 취급당할 것 같았기에 하지 않았다.

그런 과한 아부가 아니라도 헤베는 이미 충분히 기뻐했다. 그녀는 발그레해진 뺨을 트윈테일로 가리면서 수줍게 말했다.

“마, 맛있으셨다니 다행이에요. 제가 요리에는 별로 소질이 없어서 넥타르를 많이 넣는 편인데 여행자님 입맛에도 맞은 모양이네요.”

“네? 넥타르요?”

“네, 넥타르요.”

내가 어이없는 기색으로 묻자 헤베는 내 질문을 그대로 돌려줬다.

나는 잠시 멍한 눈빛으로 헤베를 바라보다가 접시 위에 담긴 음식들을 가리키며 다시 한 번 질문했다.

“여기 있는 음식에 전부 넥타르를 넣으신 거예요?”

“그냥 넣으면 너무 달아져서 물에 조금 희석시켜서 넣었어요. 그러면 단맛은 중화되고 넥타르 특유의 향은 고스란히 스며들어서 맛이 더 풍부해진답니다. 저만의 비법이에요.”

그야 그렇겠지 세상천지에 넥타르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당신이랑 제우스한테 엉덩이 흔들던 보추 이렇게 둘 뿐이니까.

가슴을 두드리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 헤베. 눈썹을 한껏 치켜세우고 있는 것이 어지간히도 자랑스러운 모양이다.

허나 음식 맛에 감탄하던 나는 묘한 배신감을 느꼈다.

뭐라고 해야 할까. 고향의 맛이라고 소문난 맛집의 비법을 알아냈는데 그 비법이 사실은 MSG였다는 걸 깨달았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거기에 더해 회복 아이템을 요리에 썼다는 신선한 충격도 더해져서 여러모로 황당했다.

“필요하시면 넥타르만 따로 가져올까요? 빵이나 과일에 찍어먹으면 맛있어요.”

“괘, 괜찮아요. 지금도 충분히 맛있는걸요.”

헤베의 제안을 거절하면서 나는 묵묵히 포크를 움직였다. 맛은 조금 전과 똑같은데 음식을 통해 느끼는 감동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뒤, 나는 접시를 정리하려는 헤베에게 중요한 이야기를 꺼냈다.

“저 여신님.”

“왜 그러세요, 여행자님? 더 필요한 거라도 있으세요? 후식이라도 가져다드릴까요?”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어제 나눴던 이야기로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생각이 좀 바뀌었거든요.”

솜씨 좋게 식기를 정리하던 헤베가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얼굴은 곧 환희로 가득 차더니 들고 있던 접시들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생각이 바뀌셨다는 건 여명의 투사가 되시겠다는 건가요?!”

“어어…… 그렇죠……?”

“감사해요 여행자님! 아니, 투사님! 처음부터 그러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투사님은 지금까지 찾아온 그 어떤 방문객 보다 강인한 영혼을 지니고 계셨으니까요!”

내 손을 위아래로 마구 흔들며 헤베가 속사포처럼 말했다.

말로는 괜찮다고 했지만 내가 투사가 되지 않아 내심 아쉬웠던 모양이다. 토끼처럼 깡충깡충 뛰는 그녀의 얼굴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담겨 있었다.

헤베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허나 헤베의 환심을 사려고 투사가 되려는 건 아니다. 이 또한 던전을 클리어를 위한 준비 과정 중 하나인 것이다.

“그러면 지금 당장 의식을 치르도록 해요. 금방 준비하고 갈 테니까 분수대에서 기다려주시겠어요?”

“아, 네. 먼저 가 있을게요.”

헤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뒤 황금 분수대로 갔다. 분수대 근처에선 여전히 달콤한 향기가 났으며 아침 햇살을 받아 광장 전체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분수대 난간에 걸터앉아 기다리기를 몇 분. 헤베가 분수대 쪽으로 걸어왔다.

“죄송해요 물건 찾느라 시간이 좀 걸려서…… 많이 기다리셨죠?”

“괜찮아요,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으셨어요.”

분수대로 온 헤베는 도자기병 하나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리스 유물하면 떠오르는 검은색과 주황색으로 이루어진 병이었는데 크기는 대충 500밀리리터짜리 생수병 정도였다. 생긴 것도 고대 유물이라기 보단 일상생활에서 쓸 법한 보틀 같았다.

“의식은 그리 길지 않아요. 당장 투사의 자격을 부여해드린 뒤 이 물건에 대해서 설명해드릴게요.”

그렇게 말한 헤베는 도자기병을 난간 위에 놓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잠시 손 좀 빌려주시겠어요? 왼손이 좋을 것 같아요.”

“이, 이렇게요?”

“네, 그대로 잠시 가만히 계세요.”

작고 부드러운 손이 내 왼손을 꼬옥 감싸 쥐었다.

어제 치료받을 때도 느낀 거지만 헤베의 손은 너무나 부드러웠다. 따뜻한 온기와 함께 전해져 오는 살결의 보드라움이 등줄기를 오싹하게 만들었다. 이 손으로 핸드잡 받으면 거짓말 안 하고 다섯 발 연속으로 사정할 자신도 있었다.

파아앗!

“읏……!”

나도 모르게 추잡한 생각을 할 무렵 내 손등이 푸른색으로 빛났다. 여름날의 직사광선과도 같은 밝은 빛에 나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헤베는 그런 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 손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헤베가 손을 놓아주었다. 그녀는 눈웃음을 지으면서 내게 설명했다.

“다 됐어요. 이제 투사님은 여명의 의지를 계승한 영웅이세요. 손을 확인해보시겠어요?”

헤베의 요구에 나는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손등에 푸른색 문양이 새겨져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마치 밝게 빛나는 태양을 그려놓은 것 같았다.

“이게 투사가 됐다는 증거인가요?”

“맞아요, 그 문양이 있으면 세계 각지에 있는 여신상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답니다. 투사에게 허락된 신주, 넥타르를 복용할 수도 있게 되고요.”

내가 성소로 올 때 사용한 여신상은 필드 전역에 배치되어 있다.

일정 구간마다 하나씩은 있으며 던전 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여신상 근처로는 몹들이 접근할 수 없기에 휴식 장소로 이용할 수 있고 원작 게임에선 세이브 기능까지 담당했다.

문양에 대해 설명한 헤베는 난간 위에 올려뒀던 도자기병을 내밀었다.

“이건 넥타르를 담을 수 있는 성물이랍니다. 오래 전 인간에게 넥타르를 하사할 때 사용한 물건이죠. 오직 이 병과 황금 분수대에만 넥타르를 담을 수 있고, 자격을 가진 자만이 넥타르의 힘을 얻을 수 있어요. 넥타르도, 이 병도 지금 이 순간부터 투사님의 것이에요.”

도자기병을 받아든 나는 그것에 대한 정보를 되새겼다.

황금 마개로 막혀 있는 진귀한 유물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넥타르는 오직 이 병과 황금 분수대에만 담을 수 있다. 다른 곳에 담아두면 머지않아 증발해버리며 증발하기 전에 복용해도 자격이 없는 자가 마시면 그냥 달달한 음료수일 뿐이다.

또한 이 병에도 특별한 힘이 담겨 있어서 부서지면 곧바로 복구되고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면 저절로 원래 소유자인 투사에게 돌아온다. 회차 진행에 있어서 필수 아이템인 만큼 절대 잃어버리지 않도록 제작진이 배려를 해준 것이다.

“병 안에는 암브로시아라는 특별한 열매가 여러 약재들과 함께 들어 있어요. 여행 도중에 넥타르를 전부 사용했다면 여신상을 찾아보세요. 제단 위에 병을 올려두면 암브로시아가 신주의 기적을 일으켜 다시 넥타르를 채워줄 거예요.”

넥타르는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최대 생명력의 30퍼센트에 해당하는 생명력을 즉시 회복시켜준다.

초기에는 세 모금만 마실 수 있는데, 이는 병 안에 들어가 있는 암브로시아가 세 개 밖에 없기 때문이다.

암브로시아는 맵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최대 10개까지 병 안에 넣어둘 수 있다. 병 안에 들어가 있는 암브로시아 하나 당 충전되는 넥타르의 용량이 1모금씩 늘어난다.

진행 도중에 넥타르가 소진되면 여신상 앞에 놓인 제단을 통해 보충할 수 있는데, 이때 보충되는 용량은 병 안에 넣어둔 암브로시아의 개수를 따른다. 암브로시아가 다섯 개 들어가 있으면 다섯 모금, 열 개 들어가 있으면 열 모금 분량이 충전되는 것이다.

예외로 성소에 있는 황금 분수대에선 암브로시아의 소지수와 상관없이 최대 충전 용량인 10회까지 넥타르를 보충할 수 있다.

설정상 황금 분수대에는 자체적으로 신주의 기적이 걸려 있어 암브로시아가 없어도 넥타르를 무한히 생성할 수 있다고 한다.

“저 청춘의 여신 헤베 역시 투사님의 충실한 시종이 되었답니다. 이제부터 저는 투사님만을 위한 여신, 곁에서 성심껏 보필해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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