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18화 (18/217)

18====================

고행자의 가호

* * *

“아아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가슴을 부여잡고 몇 번인가 숨을 들이쉰 후에야 방금 전까지 있었던 일들이 전부 꿈이라는 걸 깨달았다.

꿈에서 깨어나자 통증도 서서히 사라져갔다. 허나 날붙이가 심장을 쑤시는 것 같은 감촉은 여전히 내 가슴에서 떠나가질 않았다.

기분이 너무 불쾌했다. 어제부터 먹은 게 없어서 망정이지 뱃속에 뭐라도 들어 있었다면 전부 게워냈을 거다. 지금도 위액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뭐야……?! 대체 왜 이렇게 아픈……!”

통증의 원인을 찾으려던 나는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발견했다.

[고행자의 가호의 페널티 발동.]

[기간 안에 게임을 클리어하지 못할 시 세이브 데이터 강제 삭제.]

[앞으로 남은 기간, 143:58:07.]

“아 맞다……!”

그 메시지가 모든 걸 설명했다.

왜 이제야 생각난 걸까. 내가 캐릭터 생성할 때 고른 은혜, 고행자의 가호가 어떤 페널티를 가지고 있는지 말이다.

고행자의 가호는 캐릭터의 공격력과 피로도 상한을 100퍼센트나 올려주는 사기적인 은혜다.

여기서 피로도란 캐릭터가 전투를 하거나 기력 또는 마력을 소비할수록 쌓이는 수치다.

일반 캐릭터의 경우 최대 상한이 8로 설정되어 있으며 게임 시간으로 1시간 숙면을 취할 때마다 1의 피로도가 감소된다.

최대 수치가 되면 피로를 견디지 못하고 탈진 상태에 빠지는데, 한 번 쓰러지면 피로도가 0이 될 때까지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 전투 중에 탈진 상태가 되면 사실상 죽는 거나 다름없어서 여관이나 성소, 야영지 등에서 주기적으로 휴식을 취해줘야 한다.

고행자의 가호는 그런 피로도 수치를 두 배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캐릭터를 쉬지 않고 싸울 수 있게 해준다. 거기에 더해 공격력까지 대폭 상승하니 초반부를 더욱 빨리 진행할 수 있게 되는 거다.

내가 이 은혜를 선택한 이유 또한 불필요한 휴식 시간을 줄이고 빠르게 중반부로 넘어가기 위해서였다.

이렇게만 놓고 보면 굉장히 유용한 은혜 같지만 이 은혜는 저주라고 봐도 무방할 만큼 무시무시한 페널티를 가지고 있다.

메시지가 설명한 대로 제한 시간 안에 게임을 클리어하지 못하면 세이브 데이터를 강제로 삭제해버리는 것이다.

캐릭터와 관련된 모든 세이브 데이터를 날려버리기 때문에 캐릭터를 삭제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페널티다. 사라진 캐릭터는 영영 돌아오지 않으며 복구시킬 수도 없다. 그야말로 스피드런에 최적화된 은혜인 것이다.

“세이브 데이터가 삭제되면 난 어떻게 되는 거지……?”

상황을 파악한 나는 아연실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일단 두 가지 추측을 할 수 있다.

첫 번째로 희망편, 세이브 데이터가 삭제되면서 내 정신이 원래 세계에 있는 내 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어떤 애니에서 본 적 있는 설정인데, 그 애니에선 이세계의 육체가 사망했을 때 정신이 원래 세계의 육체로 돌아간다.

이럴 때 애니 설정을 떠올리는 나도 참 답 없는 씹덕이지만 이 상황 자체가 씹덕이용가 라노벨과 다를 바 없으니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으리라.

그리고 두 번째로는 절망편인데, 이건 정말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세이브 데이터가 삭제되면 나라는 존재 역시 소멸하는 것.

가급적 전자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후자 쪽이 더 유력해보였다.

꼭 이런 추측은 안 좋은 쪽이 맞더라. 설령 전자가 맞다 해도 지금의 나로썬 그것을 확신할 증거가 없다. 마음 놓고 기다릴 수는 없는 거다.

“제한 시간은 분명 엿새였지…….”

추측을 반복하던 나는 암담한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게임 시간으로 6일. 이는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가디스 던전은 방대한 컨텐츠를 가진 게임임과 동시에 자유도가 무척 높은 오픈월드형 게임이기도 하다.

원한다면 자잘한 퀘스트나 전투 등을 모조리 스킵해버리고 필수 보스만 잡을 수 있다.

그렇게 쾌속 진행을 하다 보면 게임 시간으로 5일이 채 지나지 않은 날 최종 보스와 대면하게 된다. 현실 시간으로는 대충 5시간에서 6시간 정도다.

물론 그것은 원작 게임에서나 가능한 이야기. 어제 하루 동안 게임 세계를 경험해본 내가 판단하기에 일주일 안에 최종보스에게 다다르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원작 게임에선 10분도 안 걸리는 거리를 반나절 동안 걸었다. 아크 데몬을 잡는 시간도 게임 보다 훨씬 길었으며 아이템을 파밍하는 시간 역시 원작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피치 못할 상황이나 변수 같은 게 생길 수도 있어……. 급하게 뛰어간다고 해서 최종보스를 잡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미지수고…….”

진행 루트에 문제가 생겨서 멀리 돌아가야 한다거나, 예상치 못한 습격을 받아서 고전하게 된다거나 배나 마차가 끊겨서 며칠을 기다려야 하는 등, 게임 세계에선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변수가 존재할 거다.

그 변수들을 전부 감당하면서 일주일 안에 최종보스가 있는 지역까지 가는 건 불가능하다. 설령 제한 시간 안에 최종보스를 만나더라도 템파밍도 제대로 못한 캐릭터로는 상대조차 되지 않을 거다.

“역시 그 방법 밖에 없나……?”

한동안 머리를 싸매고 고민한 나는 최후의 수단을 강구했다.

은혜를 변경할 방법이 딱 하나 있긴 하다. 허나 이건 굉장히 위험한 방법이다. 기사나 전사 같은 1티어 신분으로도 클리어하기 어려운, 극악 난이도의 던전을 클리어 해야 되기 때문이다.

“들개들한테도 물려 죽을 뻔했는데 클리어할 수 있을까……?”

게임과 현실의 갭은 너무나 크다.

하물며 나는 스킬 하나 없는데다 능력치가 다른 신분의 절반가량 밖에 되지 않는 최약체 신분 추방자다.

원작 게임에서도 간신히 클리어했는데 익숙하지 않은 게임 세계에서 그 던전을 클리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 씨…… 능력치 올린 다음에 도전할 수도 없고……, 진짜 미치겠네……!”

내가 깨고자 하는 던전이 어려운 이유는 던전의 자체적인 난이도뿐만이 아니다.

가디스 던전의 개발진들이 참 악독한 게, 그 던전에 도전하는 조건을 성소에서 나가지 않는 것으로 설정해뒀다.

최초로 성소를 방문한 뒤 한 번이라도 성소 밖으로 나가면 던전의 입구는 굳게 닫히고 다음 회차까지 절대로 열리지 않는다.

즉, 캐릭터를 성장시켜서 도전하는 것도, 더 강한 장비를 구해서 도전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성소에선 위업을 올리지도, 돈을 벌지도 못 하니까.

이래서야 6일이라는 기간이 무의미해져버린다. 이게 라노벨이나 웹소설이었다면 혼자서 근력 트레이닝을 하거나 허수아비를 치는 것만으로도 강해질 수 있겠지만 가디스 던전에는 그딴 거 없다.

성장에 필요한 위업 포인트도 보스들만 주는 마당에 그런 사소한 노력으로 캐릭터가 성장할 리 있겠는가.

결국 시한부 인생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지금 이 상태로 던전에 도전하는 수밖에 없다.

“토 나올 것 같네…….”

생각만 해도 욕지기가 밀려왔다. 통증은 진즉에 사라졌는데 가슴이 욱신거렸다. 압박감이라는 이름의 무게추가 내 가슴을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살려면 할 수밖에 없어…….”

이런저런 생각이야 많이 했지만 결단을 내리는 건 빨랐다.

안 하면 죽는다. 그렇다면 답은 정해져 있다

일주일 후에 저주로 죽으나 던전에서 몬스터들에게 찢겨 죽으나 그게 그거일 거다. 방금 전에 느낀 통증을 생각하면 어느 한 쪽이 유별나게 고통스러울 것 같지도 않았다.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야. 매번 죽기 살기로 클리어하긴 했지만 그 던전도 세 자릿수가 넘게 클리어했잖아?”

할 수 있다.

아크 데몬도 간단히 농락했고 미친 듯이 달려드는 들개 떼도 처치했다.

난 가디스 던전만 6천 시간 플레이한 고인물이지 않은가.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나에게는 클리어할 가능성이 있다.

꼬르르르륵!

그렇게 각오를 굳힐 무렵 배에서 큰 소리가 났다.

그럴 만도 했다. 어제부터 아무 것도 안 먹었는데 배가 안 고프고 배길까.

“……일단 뭐 좀 먹고 준비해야겠어.”

상자에서 녹부검과 강화석을 챙긴 뒤 방을 나섰다. 지체할 시간 같은 건 없다.

* * *

클리어 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이려면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야 한다.

아래층으로 내려온 나는 우선 헤베를 찾았다. 그녀는 지금쯤 식당에 있을 거다. 성소의 지리는 전부 외워서 식당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여신님.”

식당에 들어서자 넓은 테이블과 함께 헤베가 보였다.

나는 그녀를 보자마자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헤베도 귀여운 앞치마를 걸친 채 반갑게 인사했다.

“아 어서 오세요, 여행자님. 어젯밤엔 편히 주무셨나요?”

테이블 위의 식기들을 정리하면서 헤베가 물었다. 나 역시 테이블 앞으로 다가가며 대답했다.

“여신님 덕분에 잘 쉬었습니다. 피로가 싹 풀린 기분이에요.”

아무래도 그녀는 내 비명 소리를 듣지 못한 듯했다. 숙소와 식당 간의 거리를 생각하면 못 들을 만하다. 괜히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태연한 기색으로 헤베에게 대답했다.

“그런 것치곤 목소리에 힘이 없으신데요……? 혹시 침구가 불편하셨나요? 필요하시면 침대 째로 바꿔드릴 수 있는데…….”

최대한 멀쩡한 척을 했는데 피곤에 찌든 목소리까진 감출 수 없는 모양이다. 헤베는 이를 금세 파악하곤 심려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어쩜 이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배려심이 가득할까. 그녀가 내 아내였으면 바랄 게 없겠다.

예쁜 여신님이 날 걱정해준다는 사실이 너무 기뻐서 2세는 물론 손주 계획까지 세워버렸다. 천성이 찐이라서 그런지 여자가 조금만 잘 해주면 이런 망상을 하곤 한다.

“아뇨, 아뇨! 진짜로 괜찮아요! 아직 졸음이 덜 깨서 그런 거예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아, 그보다 시장하시죠? 조금만 기다리세요.”

어느새 테이블 위의 식기를 전부 집어든 헤베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말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한 가지 의문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금 전부터 무척 신경 쓰였는데, 헤베의 머리에 무언가 이상한 게 씌워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요 여신님.”

“네? 왜 그러세요?”

“머리에 쓰고 있는 그건 뭔가요?”

헤베가 쓰고 있는 것은 사자 모양 탈이었다.

마치 놀이공원 알바들이 쓸 법한 귀여운 디자인이었는데, 입 부분이 뻥 뚫려 있어서 그쪽으로 헤베의 얼굴이 튀어나와 있었다. 여러모로 웃기면서도 깜찍한 모양새였다.

나는 저 아이템이 뭔지 알고 있다. 원작 게임에서도 등장하는 사자머리 인형 탈이다. 별 다른 효과는 없고 단순히 재미를 위해 착용하는 아이템인데, 문제는 헤베가 왜 이런 요상한 차림새를 하고 있느냐다.

“……! 호, 혹시 뭔가 기억나신 건가요?!”

내 질문에 헤베는 화들짝 놀라면서 고개를 내밀었다. 동글동글한 사자탈의 눈동자도 나를 직시했다.

이 여신님 아침부터 왜 이러는 거지.

내가 사자탈을 보고 기억해낼 만한 게 있나?

한참이나 생각해봤지만 그런 건 전혀 없었다. 반면 헤베의 눈동자엔 묘한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얼굴도 방금 전보다 훨씬 붉어진 것 같았다. 그녀의 의도를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장단을 맞춰주고 싶었지만 내 입에선 질문만 되풀이될 뿐이었다.

“기억이라 하시면……?”

“엄청나게 큰 뱀하고 싸웠던 기억이라거나! 사자를 맨몸으로 쓰러뜨렸던 기억이라거나!”

당연히 없다.

“죄송합니다. 전 그런 일을 해낼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어서요. 여신님이 말씀하신 일을 해낸 기억은 없네요.”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침착한 목소리로 부정했다. 게임 세계에 들어온 지는 하루, 그전에는 방구석 폐인이었던 나하고는 거리가 먼 업적들이었다.

가만, 그러고 보니 이런 얘기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런가요!!”

“……?!”

내가 기억을 더듬을 무렵 헤베가 우렁찬 목소리로 수긍했다. 목소리가 너무 커서 깜짝 놀랐다. 놀란 심장을 진정시키며 헤베의 얼굴을 바라보니 그녀는 엄격 진지 근엄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 때문에 굉장히 어색해졌다. 뭔가 화제를 바꿀 만한 것이 없을까. 잠시 고민한 나는 그녀가 든 식기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무거워 보이시는데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아뇨! 괜찮아요! 이 정도는 혼자서도 들 수 있는걸요! 금방 아침을 가져올 테니 여행자님은 편히 기다려주세요! 그럼 이만!”

당당하게 대답한 뒤 주방으로 가버린 헤베. 나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멀뚱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왜 저러는 거지? 화난 건가? 나도 모르게 뭔가 잘못한 거 아니야?

허구한 날 누나들에게 치여 살아서 무슨 일이 생기면 먼저 나한테서 원인을 찾는 버릇이 생겼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건 없는 것 같다. 그냥 헤베의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했을 뿐이지 않은가.

그러면 헤베는 왜 저렇게 언성을 높여서 말한 걸까.

나로선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고민을 거듭하면서 멀뚱히 주방 쪽을 바라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