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10화 (1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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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각

“으으윽…….”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지만 나는 녹부검을 들고 놈의 흉부를 휘저었다. 녹슨 칼로 한 시간가량 씨름한 끝에 나는 놈의 가슴에서 이코르를 꺼낼 수 있었다.

아크데몬의 이코르

아크 데몬의 체내에서 꺼낸 강대한 이코르. 푸른색으로 빛나는 내부는 마치 번개를 품고 있는 것 같다. 상점에 팔거나 무기 제작 또는 스킬 개방에 사용할 수 있다.

아크 데몬은 어떤 워록에 의해 소환된 강력한 대악마다. 그는 백여 마리의 악마 군단을 이끌고 자네스 영지에 발을 내딛었으며 그가 받은 지시는 무차별적인 학살이다. 소환자인 워록은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손에 쥔 이코르는 굉장히 특이한 감촉이었다. 물컹물컹한 것이 마치 젤리 같았으며 투명한 내부에선 푸른색 빛이 일렁거렸다.

언젠가 뉴튜브 영상에서 본 물방울떡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은근히 귀엽기도 한 그것을 손에 쥐며 아크 데몬에게서 떨어졌다.

“게임 세계 겁나 하드코어하네.”

피범벅이 된 몸을 내려다보며 질색했다. 이미 온몸에 피가 묻어 있었기에 더 더러워질 것도 없었지만 신선한 피가 몸에 묻는 감각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샤워 너무하고 싶다…….”

짤막하게 불평하면서 나는 정원을 벗어났다. 이곳에서 챙길 건 다 챙겼으니 이제 저택을 전반적으로 둘러볼 차례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쓸 만한 물건들을 찾아본 나였지만 괜찮은 건 별로 없었다.

깨진 식기와 망가진 가구들만 즐비하게 늘어져 있을 뿐, 귀금속이나 현금 같은 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몇몇 그림들은 꽤 돈이 될 법했지만 갑옷도 못 챙기는 마당에 저런 걸 들고 갈 수는 없었다.

“이건 게임하고 다를 게 없네.”

게임에서도 이랬다. 영주가 자기 물건을 다 가져갔다는 설정인 건지 돈이 될 만한 물건은 일절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는 멀쩡한 옷조차 없었다. 귀족들의 옷장은 텅텅 비어 있었고 하인들이 입던 옷은 갈기갈기 찢어지거나 불에 타서 입을 게 못됐다.

그래도 게임 세계는 원작 게임만큼 자비 없지 않았다. 위층을 돌아다니다 보니 제법 묵직한 돈주머니와 목걸이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돈주머니에는 2천 아웬 정도 들어 있고……, 이 목걸이는 그냥 사치품인가? 내가 본 적 없는 물건이네.”

2천 아웬은 원화로 따지면 20만 원 정도 가치다. 개발자 오피셜인데 가디스 던전의 화폐 가치는 원화에다가 0 두 개 덜 붙인 정도라고 한다.

1아웬이면 100원. 10아웬이면 1000원이라는 소리다. 정말 성의 없는 설정이지만 이게 무슨 경제 게임도 아니고 그러려니 했다.

돈주머니는 녹부검이 걸린 허리끈에, 목걸이는 내 목에 걸었다. 금과 보석으로 만들어진 목걸이인데 딱 봐도 비싼 값에 팔릴 것 같았다. 나중에 잡화점 같은데 팔면 여비 정도는 챙길 수 있으리라.

“이제 남은 건 지한가.”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바라보며 영주 방에서 챙긴 물건을 꺼냈다.

그것은 일종의 열쇠였다. 석판 같이 생긴 게 일반적인 열쇠라기 보단 카드 키와 비슷했다.

내가 위층을 뒤진 건 이것을 찾기 위해서였다.

계단을 내려가자 와인 저장고가 나왔다. 수많은 오크통들을 지난 나는 어느 진열장을 하나 발견했다.

진열장을 옆으로 밀자 특이하게 생긴 문이 하나 나타났다. 지금까지 봐온 문하곤 재질부터가 다른 게 최근에 만들어진 것 같았다.

찰칵!

드르르르륵!

문고리에 손을 가져간 순간 무기질적인 소리가 들리면서 문이 옆으로 열렸다. 나는 웃음을 흘리면서 활짝 열린 문을 넘어섰다.

“여기부터가 진짜지.”

문 너머 공간은 연구실이었다. 어린애들이 뛰어놀아도 될 정도로 넓었으며 수많은 책상과 책장들이 놓여 있었다.

책상 위에는 온갖 약초와 동물의 사체가 늘어져 있었는데 무엇 하나 건전해 보이는 게 없었다. 거기에 더해 방 중앙에 새겨진 마법진은 이곳이 사악한 마법사의 본거지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이 방이 바로 자네스 영지에 숨어든 워록의 비밀 연구실이다. 일반 튜토리얼을 진행했다면 이곳에서 워록과의 보스전이 치러졌을 거다.

허나 워록이 떠난 지금 이곳은 그저 보상방일 뿐이다. 나는 연구실 안쪽으로 들어가 책장 하나를 옆으로 밀었다. 이번에도 문이 하나 숨겨져 있었는데 조금 전과 달리 문고리가 없었다.

나는 그 문을 향해 영주 방에서 얻은 열쇠를 들이밀었다. 직후, 문에서 주황색 빛이 일렁거리더니 마치 퍼즐이 풀리는 것처럼 기이한 형태로 문이 열렸다.

철컥! 드르르륵! 철커억!

비밀 방 안에 숨겨진 비밀 방. 이곳이야 바로 튜토리얼 지역의 진짜 보상방이다.

내부는 무척 협소했다. 애당초 상자 하나와 가면을 보관해두기 위한 방이니 그럴 만도 했다.

방 안에 들어가자마자 눈에 들어온 건 벽에 걸려 있는 검은색 가면이었다.

검은색 바탕에 푸른색 무늬가 새겨져 있는 악마 얼굴 가면. 이마에는 한 쌍의 뿔이 길게 뻗어 있었으며 입가에는 우리나라의 도깨비 그림처럼 날카로운 이빨이 튀어나와 있었다.

이 아이템의 이름은 계승의 증거. 머리 방어구의 일종으로 방어 성능은 미미하지만 특별한 효과가 붙어 있는 아이템이다.

계승의 증거   희귀

분류: 투구

방어력: 5   인내력: 0

내구도: 30/30   무게: 0

요구 스탯: 없음

부가 효과: ◈ 최대 기력 200 증가

◈ 하루에 한 번, 공격 스킬을 시전할 때 비용 소모 없이 한 번 더 시전 가능. 추가 시전하는 스킬의 공격력 30퍼센트 증가

기력이란 스킬을 사용할 때 필요한 자원 중 하나다. 물리 계열 스킬을 사용할 때는 기력, 주문 계열 스킬을 사용할 때는 마력이 드는 식이다.

기력은 신체 스탯, 마력은 정신 스탯의 영향을 받으며 각 스탯 1당 최대 자원이 30씩 증가한다.

현재 내 신체 스탯은 5니까 5 곱하기 30을 해서 총 150 기력을 가지는 것이다. 거기에 이 가면을 쓰면 최대 기력이 200 상승해서 350의 기력을 갖게 된다.

척 보면 알겠지만 최대 기력을 올려주는 효과는 수많은 아이템 옵션 중에서도 최상위로 꼽힌다.

가디스 던전에선 기력이나 마력을 회복할 수단이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에 자원의 최대량을 늘리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스탯 분배로 기력을 200 이상 올리려면 위업 포인트를 7 정도는 투자해 줘야 되는데 아이템 하나 착용해서 200이 오르는 건 엄청난 상승치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하루에 한 번 공격 스킬을 비용 소모 없이 추가 시전해주는 효과까지 달려 있으니 이 아이템의 효율은 게임 내에 있는 모든 장비들을 통틀어도 단연 1티어라고 할 수 있다.

디자인도 굉장히 멋있어서 추방자로 시작한 유저들에게 매우 인기 있는 아이템이다. 오죽 하면 이 가면을 얻겠다고 하드코어 모드에 도전한 사람들이 수두룩할 정도다.

“이걸로 끔살 당할 일은 없겠지.”

가면을 비껴쓰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기력은 캐릭터의 스태미너를 표시하는 수치이기도 하다. 스탯이 캐릭터의 신체 능력에 그대로 적용된다면 기력이 높을수록 쉽게 지치지 않고 전투나 달리기도 더 오래할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아크 데몬과 싸울 때는 많이 아슬아슬했다. 놈이 풀피였거나 조금만 더 오래 버텼다면 내 쪽이 먼저 지쳐서 쓰러졌을 거다. 고로 기력이 200이나 오른 것은 내 생존력이 한층 더 강화됐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쯤에 상자가 하나 있을 텐데…… 어?”

책 무더기와 먼지들을 털어내며 다음 보상을 찾았다.

그렇게 상자를 찾던 도중, 나는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뭔…….”

분명 보상방에서 제공되는 상자는 한 개다. 그 안에는 무기의 성능을 대폭 강화해주는 희귀 재료가 들어 있으며 보상방에서 획득할 수 있는 아이템은 계승의 증거와 강화 재료, 이렇게 두 개뿐이다.

그런데 지금 내 눈앞엔 본래 있어선 안 될, 또 다른 상자가 떡하니 놓여 있었다.

“와! 상자가 두 개!”

본의 아니게 시답잖은 드립을 쳐버렸지만 지금의 난 굉장히 진지하다.

난생 처음 보는 상자가 있다.

하드코어 튜토리얼만 수백 번 클리어한 내가 처음 보는 상자 같은 건 있을 수 없다.

물론 원작 게임과 게임 세계 사이에는 자잘한 차이점이 존재하지만 그렇기에 더 방심해선 안 된다. 이 상자가 플레이어를 위협하기 위한 함정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설마 미믹인가……?”

오랜 버릇이다. 수상쩍은 상자를 보면 일단 미믹이라고 의심하게 됐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가디스 던전의 개발자들은 매 회차마다 각기 다른 장소에 미믹을 배치하여 플레이어가 빅엿을 먹게끔 했다. 이전 회차에서 보물 상자였던 상자도 이번 회차에선 미믹일 수 있는 것이다.

“아니, 보스 잡은 지 얼마나 됐다고…….”

나는 긴장한 기색으로 녹부검을 손에 쥐었다.

미믹. 여느 게임에선 그냥 잡몹으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가디스 던전에선 상당히 위험한 몬스터다.

다른 게임의 미믹처럼 평소에는 상자로 위장한 채 사냥감이 오길 기다리는데, 이때 함부로 접근하면 안쪽에서 튀어나온 미믹의 본체가 플레이어의 머리를 씹어 먹어서 남아 있는 생명력과 무관하게 즉사한다.

미믹인 걸 간파하고 먼저 공격해도 결과는 크게 바뀌지 않는다. 놈의 전투력은 초중반을 통틀어서 가히 최상급. 생명력도 데미지도 무식할 정도로 높은데다 패턴까지 까다로워서 초반부 캐릭터 따위는 압살해버린다.

더군다나 이렇게 좁은 장소에서 미믹과 맞선다면 대응도 제대로 못 해보고 죽을 수 있다. 어쩌면 아크 데몬과 싸울 때보다 지금이 더 위험한 상황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나머지 보상까지 포기하긴 너무 아까운데…….”

두 개의 상자를 보며 나는 내적 갈등에 빠졌다.

미믹과 보물 상자를 구분하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미믹이 위장한 상자는 일반 상자와는 다르게 표면에 그어진 빗금이 58개다. 일반 상자에 새겨진 빗금은 61개여서 한 눈에 알아보기는 어렵지만 가까이서 확인해보면 미믹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또 다른 상자가 미믹이라면 한 대 때린 뒤 문 밖으로 도망치면 된다. 본모습으로 변신한 미믹은 상당히 커서 저 좁은 문을 통과하지 못할 거다. 그때 히트 앤 런 전법으로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면 못 잡을 거 없다.

문제는 빗금을 세다가 놈이 깨어날 수도 있다는 건데, 그러면 영락없이 머리를 씹히게 된다. 깨어나는 타이밍은 순전히 랜덤이어서 나 같은 고인물도 쉽게 회피할 수 없다.

역시 최선의 방법은 그냥 무시하는 거지만 다른 상자에 들어있는 강화 재료는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먹을 가치가 있다. 내가 강력한 적들과 조우한다고 가정했을 때 그 아이템의 소지 유무가 나의 승패 여부를 가릴 것이다. 팔아도 큰돈이 되고 말이다.

한동안 고민한 나는 조심스럽게 상자 쪽으로 다가갔다.

자만할 생각은 없지만 내가 미믹한테 당한 횟수는 셀 수 없을 정도다. 그 수많은 죽음 속에서 나는 미믹의 급습에 어느 정도 대처할 수 있게 됐다. 살짝 위험하기는 하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초심자처럼 머리부터 먹혀 죽지는 않을 거다.

나는 스스로의 반사 신경을 믿으며 상자 위에 새겨진 빗금을 셌다.

‘56, 57, 58!’

동체 시력을 최대까지 끌어올려 재빨리 눈알을 굴렸다. 그러는 도중에도 미믹이 깨어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단 몇 초 만에 빗금을 샌 나는 곧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59, 60, 61…… 휴우, 미믹은 아니네.”

다행히 상자는 미믹이 아니었다. 빗금이 정확하게 61개였던 것이다. 혹시 모르니 녹부검으로 상자 표현을 툭툭 쳐봤지만 반응은 없었다. 그냥 물건을 보관하기 위한 상자였다.

그 점은 무척 다행이었지만 이는 더 큰 의문으로 이어졌다.

“그럼 이 안에는 대체 뭐가 들어 있는 거지?”

미믹이 아니라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다. 가디스 던전에는 저주라거나, 맹독 안개라거나, 폭발 장치 같은 질 나쁜 함정들이 수두룩하게 있다.

물론 미믹보다는 대처하기 쉬운 것들이어서 겁먹을 필요는 없다. 뚜껑을 연 다음에 즉시 회피하면 어지간한 함정은 전부 피해진다.

“이렇게 노심초사했는데 아무 것도 안 들어 있지는 않겠지…….”

미심쩍은 눈빛으로 상자를 훑어본 뒤 천천히 뚜껑을 열었다. 뚜껑은 쉽게 열렸으며 곧 안에 있는 내용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함정은 아니네?”

안에는 웬 장신구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척 봐도 내가 모르는 아이템이었다.

위층에서 주운 목걸이처럼 아무런 효과도 없는 사치품이 아닐까 싶었는데, 직접 손에 쥐어보니 그렇지 않았다.

“크으읏……!”

순간 머리가 지끈거렸다.

내가 알고 있는 아이템을 확인할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지만 어딘가 달랐다. 녹부검이나 기사의 한손검을 확인할 때는 내 기억 속의 정보를 끄집어내는 것 같았는데, 이 장신구를 확인할 때는 내가 모르는 정보를 억지로 머릿속에 집어넣는 것 같았다.

이윽고 내 눈앞에 나타난 정보는 경악스럽기 그지없었다.

“이, 이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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