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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9화 (9/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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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각

모처럼 얻은 미녀 여기사와의 인연을 생각지도 못한 이유로 날리고 말았다. 새삼 시청자들을 즐겁게 해주려고 추방자 신분을 선택한 것이 후회됐다.

추방자 외의 다른 신분을 골랐다면 정상적인 옷을 입고 있었을 거다. 그랬다면 지금처럼 발기한 육봉이 대놓고 드러나는 일도 없었을 테지. 여기사의 태도도 전혀 달랐으리라.

날 변태 취급하기는커녕 감탄을 금치 못했겠지. 그럴 만도 한 게 나는 그녀의 부대를 학살한 아크 데몬을 단신으로 처치했으니까.

어쩌면 내게 구해줘서 고맙다며 호감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이거야 말로 판타지물의 왕도 아닌가. 도움 받은 히로인이 주인공에게 호감을 품고 머지않아 호감이 연심으로 변하여 주인공의 첫 하렘 멤버가 되는 전개. 가디스 던전의 장르를 생각해보면 충분히 그럴 듯한 일이다.

나는 그런 일생일대의 기회를 빌어먹을 고인물 룩 때문에 날려버린 거다.

물론 내가 이 세계에서도 주인공이란 보장은 없고 여기사가 내게 호감을 품을 거란 것도 결국엔 모쏠 아다 씹덕인 나의 개인적인 망상일 뿐이지만 그래도 가능성은 있지 않았겠는가.

“하아…… 관두자…… 후회해서 뭐해…….”

찐따 같은 망상에 시달리던 나는 한참이 지나서야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래,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옷을 제대로 입고 있었다고 해서 딱히 내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다.

이곳은 가디스 던전과 비슷하지만 결국엔 살아 움직이는 현실 세계. 이 세계의 주민들은 프로그램에 의해서 행동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자아에 따라 행동한다. 게임 캐릭터처럼 생겼다고 해서 게임 캐릭터랑 똑같이 행동할 거란 보장은 없는 것이다.

물론 잘 차려입은 남자가 대악마를 쓰러뜨리고 뇌쇄적인 미소를 지으면 여자의 마음을 쉽게 뒤흔들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은가.

나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했다. 여기사는 나에게 개뿔 아무런 감정도 안 품었을 거다. 내 얼굴이 어떻게 생겼든 간에 말이다.

애초에 난 이런 찐따 같은 망상하는 버릇 좀 고쳐야 한다. 튜토리얼 보스 하나 잡았다고 세상이 내 뜻대로 굴러갈 거라고 생각하다니. 감다키 너 올해로 25살이다. 제발 중학교 2학년 때처럼 굴지 말자.

단념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덧 메인 홀은 창가에서 쏟아지는 밝은 빛으로 환해졌다. 비현실적인 어둠이 전부 사라진 것이었다. 먹구름은 아직 남아 있어서 그렇게까지 밝아지진 않았지만 적어도 육안으로 앞을 볼 수 있을 정도는 됐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사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린 나는 내가 처한 상황을 돌아보았다.

난데없이 떨어진 게임 세계.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며 당장 돌아갈 방법 또한 없다.

정황상 유다희가 날 이 세계로 보낸 것 같기는 한데, 워낙 판타지 소설 같은 일이라서 그 원리를 유추할 수조차 없었다.

난 어쩌면 이 세계에서 꽤나 오래 지내야 할지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 영영 원래 세계로 못 돌아갈 수도 있다.

“어어어…… 로그아웃! 게임 종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라노벨 주인공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해봤다. 당연하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긴, 이렇게 해서 보내줄 거였으면 애초에 끌고 오지도 않았겠지.”

앞길이 참 막막하다. 돌아갈 방법은 없고, 가지고 있는 거라곤 녹부검과 팬티 한 장뿐인 거지꼴이다.

이런 꼴로 마을에는 들어갈 수 있으려나? 가디스 던전의 세계관은 꽤 험난해서 마을에 들어가지 않으면 도처에서 위험이 도사린다. 당장 이 영지를 벗어나는 순간 피에 굶주린 괴물들과 무장한 살인강도들이 죽자고 달려들 거다.

“가만, 그러고 보니 이거 하드코어 튜토리얼이잖아?”

고민하던 내게 좋은 해결책이 떠올랐다.

본래 가디스 던전의 튜토리얼은 이런 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여신의 계시를 받고 산악 영지 자네스로 온 플레이어가 성기사단과 만나는 것이 정상적인 튜토리얼의 시작이다.

성기사단의 목적은 마을에 숨어든 워록을 찾는 것. 불의를 두고 볼 수 없는 주인공 역시 그들을 도와 워록의 흔적을 쫓는다. 그렇게 해서 저택 지하에 숨어 있는 워록을 찾아내고 마을을 악마 소환 의식으로부터 구원하는 게 튜토리얼의 전반적인 내용이다.

이렇게 무난한 튜토리얼은 추방자 신분을 선택하는 것으로 급변한다.

추방자는 다른 캐릭터들과 다르게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창고에 갇힌다. 팬티 한 장만 입은 꼴을 본 나쁜 상인들이 노예로 써먹자며 창고에 가둔 것이다.

플레이어가 갇혀 있는 사이 워록은 악마 소환 의식을 완성한다. 성기사단은 끝내 워록을 막지 못했고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은 마계에서 소환된 대악마 아크 데몬이다.

아크 데몬의 강력한 힘 앞에 무릎 꿇은 성기사단은 전멸. 대악마가 이끌고 온 악마 군단이 영지를 점거하고 사람들을 학살한다.

당연히 기존 튜토리얼에서 이용할 수 있었던 상점, 초반 퀘스트, 성기사단의 지원 같은 건 일절 사용하지 못하며 맨몸으로 악마 군단을 뚫고 아크 데몬과 맞서 싸워야 한다.

나는 그런 끔찍하기 그지없는 튜토리얼을 클리어한 거다. 게임에서도, 현실에서도 참 지랄맞은 난이도였지만 본래 높은 난이도에는 그에 걸맞는 보상이 있기 마련이다.

“몬스터들도 게임하고 똑같이 나왔는데 보상도 그러지 말란 법은 없지.”

가장 큰 위협인 아크 데몬이 죽었으니 이제부터 저택을 마음대로 뒤질 수 있다. 저택 안에는 온갖 보상 아이템이 준비되어 있으며 그 중 대부분은 앞으로의 여정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다.

이를 상기해낸 나는 저택을 조사해보기로 했다. 죽으란 법은 없구나, 그리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기려 할 때 문득 무언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저건…….”

붉은색 머리카락 한 뭉치와 새하얀 리본이 보였다.

여기사가 떨어뜨리고 간 것이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리본을 집어 들었다. 그녀에게 어울리는 예쁜 리본이었다. 얼핏 보기엔 그냥 머리 장식 같지만 난 이게 뭔지 안다. 이 또한 가디스 던전에 등장하는 장비인 것이다.

화염의 리본   희귀

분류: 머리 장식

상승 스탯: 근력 3

내구도: 30/30

부가 효과: 하루에 한 번, 화염 피해를 받을 때 피해량을 0으로 하고 1초간 무적 상태가 된다. 효과가 발동되면 장비 내구도가 30퍼센트 감소한다. 내구도가 10 이하로 떨어지면 효과가 발동되지 않는다.

[섬세한 자수가 새겨진 하얀색 리본. 누군가를 위해 정성스레 만든 것으로 불꽃 모양의 자수는 화염으로부터 착용자를 보호하는 법술의 일종이다.]

“와우…….”

리본의 옵션을 떠올린 나는 그 절륜한 효과에 감탄했다.

이걸 원래 어디서 얻더라? 내 기억이 맞으면 중반부 지역에서 랜덤으로 드랍되는 아이템이었을 거다. 랜덤 드랍인 만큼 꽤나 희귀한 아이템으로 통하는데 그런 걸 머리 장식으로 달고 있었을 줄이야.

“네임드 NPC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참 귀한 걸 가지고 계셨네.”

어깨에 걸치고 있던 망토를 생각하면 그녀는 이 성기사 부대의 부대장쯤 되는 위치일 거다.

네임드 NPC인 대장과 다르게 부대장은 매 회차마다 각기 다른 인물이 맡는데, 이 세계의 부대장은 그 빨간 트윈테일의 여기사인 모양이다.

어찌됐든 나는 하얀색 리본을 내 손목에 감았다. 근력을 3이나 올려줄 뿐만 아니라 화염에 대한 무적 효과까지 부여해주는 훌륭한 아이템이다. 남의 물건을 멋대로 쓰는 건 좀 미안하지만 앞으로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필히 착용할 필요가 있다.

“나중에 만나면 돌려줘야지.”

다시 만난다고 해서 멀쩡히 대화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리본을 회수한 뒤 나는 메인 홀을 스윽 둘러보았다.

“대참사가 따로 없네…….”

곳곳에서 성기사들의 시체가 보였다. 누군가는 새카맣게 타버렸고 누군가는 상체와 하체가 분리됐다. 그 수는 족히 서른이 넘는 것 같았다.

“이 사람들이 아니었으면 나도 무사하지 못했을 거야.”

공격력 10짜리 녹부검으로 생명력 3000의 아크 데몬을 상대하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게임에서도 하루 종일 걸리는 일인데 현실에서라면 오죽 하겠는가. 성기사단이 어느 정도 생명력을 깎아주지 않았다면 싸우는 도중에 지쳐서 당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더라도 마을을 지키기 위해 희생한 사람들을 이렇게 방치해두는 건 도리에 어긋나는 것 같았다. 한 때 이들을 버리고 도망치려 한 나였지만 지금은 최대한 예우를 갖춰주기로 했다.

“다들 좋은 곳으로 가세요. 이 세계관에도 천국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저기 널브러진 시체들을 한 곳에 모았다. 피와 내장이 낭자한 현장인데 의외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원래 세계의 나였다면 보자마자 기절했을 광경인데 어떻게 이리 담담할 수 있는 거지?

“몸만 게임 캐릭터처럼 변한 게 아니라 정신에도 영향이 미친 건가?”

그럴 듯한 추측이었다. 지금 내 상태를 보면 나는 비단 게임 세계로 차원 이동을 한 게 아니라 게임 캐릭터에게 빙의한 것 같았다.

가디스 던전의 주인공은 옆에서 사람이 죽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강심장이다. 그런 캐릭터에게 빙의한 나 또한 시체를 봐도 아무렇지 않은 강철 멘탈이 된 듯했다.

뭔가 본래의 나와는 멀어진 것 같아 기분이 묘했지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시체 보고 끼아아아앙! 시체 너무 무서운데스!! 하면서 패닉에 빠지는 것보다야 나으니까.

“하아…… 다 됐다. 다들 한 몸무게 하시네.”

대략 30분 정도 시간을 들여서 시체를 모은 나는 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이 자리에 죽은 성기사들은 다 합해서 35명. 정말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그 중 15명이 여성이었으며 대장으로 보이는 아저씨를 제외하면 전부 20대 초중반의 젊은이들이었다.

이렇게 젊은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학살당하다니. 생판 모르는 남이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들에게도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을 텐데 아크 데몬에게 전부 죽임당하고 말다니.

“이 사람들 장비는…… 역시 안 건드리는 게 좋겠지.”

시체들 얼굴에 망토를 덮어주면서 나는 그들의 장비를 둘러보았다.

하나 같이 근력 요구치가 높은 장비들이었다. 성기사들이 사용하는 장비여서 그런지 비단 근력뿐만 아니라 신념 또한 상당히 요구했다.

지금의 나로선 착용은커녕 들고 다니기도 힘든 물건들이다. 문득 라울도린의 직검을 휘두르다가 추하게 넘어졌던 게 떠올랐다. 게임에서 그랬듯이 이 세계에서도 요구치 보다 높은 장비는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듯했다.

“인벤토리가 있었으면 염치 불구하고 하나 정도는 챙겼겠지만…….”

고인에 대한 예우도 중요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인벤토리의 유무였다.

시체들을 옮기면서 한 번 확인해봤는데 게임 세계에는 인벤토리가 존재하지 않았다. 상태창은 내가 말하는 즉시 나타났지만 인벤토리는 아무리 목청껏 소리치고 별의별 짓을 다 해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다.

장비를 얻는 건 중요하다. 당장은 사용할 수 없어도 능력치를 올린 다음에 쓸 수도 있고 뭣하면 상점에 팔아버리면 된다.

하지만 이 앞에 있는 위험들을 생각하면 쓸데없이 무게를 늘리는 건 결코 현명한 선택이 아니다. 무거운 갑옷이나 쓰지도 못하는 무기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다니다가 습격이라도 당하면 일방적으로 당하게 될 거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나는 성기사들에게 목례를 했다. 부디 악마들이 소환 후유증에서 벗어나기 전에 누군가가 그들을 발견해줬으면 좋겠다. 다들 젊은 나이에 전사했는데 시체 능욕까지 당하는 건 아니지 않는가.

“그럼 이제 저놈을 뒤져볼 차례군.”

고개를 돌려 아크 데몬이 있는 정원을 바라보았다.

머리가 쪼개져 죽은 아크 데몬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새삼 이렇게 많은 인원이 저놈 하나 잡지 못한 게 의아했으나 곧 의문이 해결됐다.

가디스 던전에는 내성과 약점, 그리고 속성 시스템이 존재한다.

내성은 말 그대로 피해를 덜 받는 것이고 약점은 그 반대다.

대부분의 몬스터들은 내성과 약점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으며 특정 속성으로 주는 데미지를 몇 퍼센트씩 덜 받기도 하고, 더 받기도 한다.

아크 데몬의 내성은 전격 70퍼센트와 화염 50퍼센트. 약점은 신성 10퍼센트다.

그리고 저놈과 맞서 싸운 ‘성화 교단’의 성기사들은 주로 화염 속성을 사용한다. 화염 공격을 가할 때마다 피해량이 50퍼센트씩 감소했으니 상대하기가 훨씬 어려웠을 거다.

간혹 신성 속성으로 공격한다고 해도 데미지가 10퍼센트 밖에 안 올라서 큰 도움은 되지 않았으리라.

거기에 더해 아크 데몬 특유의 극악무도한 패턴까지 고려하면 30명이 넘는 대인원이 이놈 하나에게 학살당한 것도 어느 정도 납득이 갔다.

“그나저나 게임에선 죽이자마자 바로 아이템이 드랍됐는데…… 설마 내가 직접 꺼내야 하나?”

아크 데몬에게 다가간 나는 불길함을 느끼며 놈의 시체를 살폈다.

주위에 떨어진 물건은 딱히 없다. 원래 보스들을 처치하면 ‘이코르’라고 하는 아이템이 자동 드랍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걸 보면 내가 직접 놈의 몸 안에서 이코르를 뽑아야 되는 듯했다.

“시체 보고 담담할 수 있다곤 해도 안쪽을 뒤지는 건 좀…….”

거부감이 밀려온 나였지만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코르는 몬스터들의 혈액이 체내에 있는 신력과 결합하여 만들어진 일종의 장기다.

세계관 설정에 따르면 가디스 던전의 세계는 이코르를 자원으로 사용함으로써 고도의 발전을 이룩했고 현대 문명의 정수인 이코르는 매우 비싼 값에 거래된다.

즉, 이코르는 가디스 던전 세계의 석유 같은 것이다.

또한 보스들의 이코르로는 강력한 무기나 스킬을 만들 수 있다. 이런 귀중한 아이템을 비단 거부감이 든다는 이유만으로 포기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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