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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6화 (6/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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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각

당황스러운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내 당황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혼란스러웠던 마음은 금세 호수처럼 잔잔해졌고 마음이 차분해지자 이게 어떻게 되먹은 일인지 스스로 설명할 수 있었다.

방금 일어난 현상은 공격 패링이란 거다.

가디스 던전에는 두 종류의 패링 시스템이 존재하는데, 그 중 공격 패링은 정확한 타이밍에 반격하여 적의 공격을 튕겨내는 기술이다.

나와 아크 데몬 사이에서 번쩍인 불빛, 그건 틀림없이 공격 패링을 성공했을 때 발생하는 광원 이펙트였다.

수천, 수만 번을 봐왔기에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나는 지금 가디스 던전의 패링 시스템을 사용하여 아크 데몬의 공격을 튕겨낸 것이다.

[네놈!! 인간 주제에 지금 무슨 짓을 한 거냐?!]

아크 데몬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놈의 얼굴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만면에 분노가 드러난 것이다.

놈은 나에게 반격 당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한 듯했다. 그런 예상외의 사태가 놈에게 상당한 모욕감을 안겨줬으리라. 이윽고 아크 데몬은 두 눈을 번뜩이며 살의를 뿜어냈다.

[가지고 노는 건 관두겠다!! 네놈은 이 자리에서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주마!]

파지지지직!!

놈의 손에 번개가 맺혔다.

푸른색 번갯불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벼락을 떨어뜨리려 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속수무책으로 당해야했던 낙뢰 공격이었다.

조금 전이라면 기겁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느려…….”

느리다. 놈의 공격은 느려도 너무 느리다.

대체 번개 하나 떨구는데 몇 초나 걸리는 거냐?

나는 놈이 번개를 조준하는 사이 앞으로 몸을 던졌다. 뻥 뚫린 아크 데몬의 고간을 슬라이딩으로 지나갈 무렵 뒤에서 우렁찬 소리가 들려왔다.

꽈르으으응!!

뒤늦게 번개가 떨어진 것이었다. 나는 이미 등 뒤로 이동했는데 번개는 한참이 지나서야 내가 있던 장소를 타격했다.

당연히 나에겐 아무런 피해도 없었다.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눈부신 낙뢰를 감상할 수 있었다.

왜 저걸 피하지 못할 거라 생각한 걸까?

선딜도 엄청 긴데다가 떨어뜨리는 도중 방향 전환도 못 한다. 타이밍만 잘 읽으면 쉽게 피할 수 있는 패턴에 겁을 먹다니.

무엇보다 난 저 패턴을 수도 없이 봐왔지 않은가?

“그래…….”

번개를 피한 나는 비로소 자각했다.

왠지 모르겠지만 이 세계는 가디스 던전과 같다.

내가 서 있는 이곳도, 사람들을 죽이던 몬스터도, 그리고 눈앞에 있는 아크 데몬도 전부 게임에서 나왔던 것이다.

모든 것이 게임과 같다면 시스템의 법칙 또한 통용되리라. 이곳은 평범한 판타지 세계가 아니라 가디스 던전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게임 세계인 거다.

그리고 난 가디스 던전만 6천 시간 동안 플레이했다.

그 중 아크 데몬을 잡은 횟수는 세 자리가 아득히 넘어선다. 나는 수많은 경험 끝에 놈의 패턴을 전부 파악했다.

어떻게 해야 놈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지, 어떤 타이밍에 공격해야 되는지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다.

그 말은 즉 난 이 세계에서도 고인물이라는 거다. 6천 시간의 플레이 경험은 내 몸에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지금의 난 비단 팬티 한 장만 입은 모쏠 아다가 아니다.

튜토리얼 보스 같은 건 수 백번도 넘게 없이 죽여 온 고인물 중의 고인물이란 말이다!

[성가신 놈! 가만히 있어라!!]

아크 데몬이 내게 팔을 휘두른다. 굴삭기가 내 쪽으로 날아온다면 이런 기분 아닐까? 정신이 아찔해지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저 거대한 팔에 맞아 걸레짝이 되어버리는 내 모습도 실감나게 상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 입가에는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놈의 공격이 전부 보였기 때문이다.

카아아아앙!!

[……!!]

놈의 팔을 향해 녹부검을 휘둘렀다. 폐품이나 마찬가지인 무기지만 시스템의 법칙 아래에선 이 또한 훌륭한 무기가 될 수 있다.

녹부검은 공격 속도가 매우 빠르다. 그 말은 보다 수월하게 적의 공격을 튕겨낼 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 이번에도 공격 패링을 성공시켰고 아크 데몬는 또 다시 무릎 꿇었다. 놈의 얼굴이 망연자실하게 일그러졌다.

[말도 안 돼!!]

“안 되긴 뭐가 안 돼!!”

아크 데몬이 무방비 상태가 되자마자 나는 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날카롭게 곤두선 칼끝이 놈의 복부를 노렸다. 재빨리 돌진한 나는 이내 놈의 지근거리까지 다다랐고 있는 힘껏 녹부검을 찔러 넣었다.

푸후우우욱!!

[끄하아아아악!!]

아크 데몬의 복부에 녹부검이 꽂혔다. 날카로운 칼끝이 놈의 살가죽을 꿰뚫고 내장을 헤집었다. 그 후 선명하게 떠오르는 120이라는 숫자. 내가 놈에게 준 데미지다. 적이 무방비 상태일 때만 가할 수 있는 특수 공격, 결정타를 사용한 것이다.

결정타는 무려 공격력 +500퍼센트의 피해를 입히는 강력한 기술이다.

막대한 피해를 주는 만큼 사용할 기회는 많지 않다. 결정타의 발동 조건은 공격 패링에 성공해서 적을 무방비 상태로 만드는 건데 이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격 패링은 무작정 반격한다고 발동되는 기술이 아니다.

정확한 타이밍에 반격할 때만 패링이 발동되며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어떤 공격을 하느냐에 따라 그 타이밍이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어떤 적은 곧바로 반격해야하는 반면 어떤 적은 한 박자 또는 두 박자 정도 쉰 다음에 반격해야 하는 것이다.

일부 공격은 패링이 아예 통하지 않기도 해서 무작정 반격했다간 오히려 공격에 노출되어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이런 까다로운 사용법으로 인해 공격 패링은 고인물들의 전유물로만 여겨져 왔다.

초보자는 물론 게임에 익숙해진 유저들에게도 봉인기 취급받을 정도로 고난이도 기술이지만 나는 간단하게 성공했다.

당연한 일이다. 나는 6천 시간 동안 이 짓을 수도 없이 반복해왔다. 아크 데몬의 패링 타이밍 같은 건 진즉에 다 외웠다.

[크하아아아!! 인간 주제에! 인간 주제에에에에에!!]

복부를 감싸며 노성을 터뜨리는 아크 데몬. 놈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는지 날개를 펼쳐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저공비행을 시도한 놈은 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단번에 파악했다.

고속 접근 패턴, 비행 돌진을 사용하려는 것이다.

[죽어라아아아아아아아!!]]

콰아아아앙!!

공기가 요동쳤다. 소닉붐이 일어나면서 한순간 아크 데몬의 모습이 사라졌다.

단 한 번의 날갯짓으로 놈은 가공할 정도의 추진력을 냈다. 그렇게 돌진해오는 아크 데몬은 가히 포탄과도 같았다. 놈과 부딪치는 순간 나는 달리는 열차 앞에 맨몸으로 뛰어든 것보다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리라.

저건 못 피한다. 돌진 속도가 너무 빠른데다가 공격 판정도 좋아서 피해봤자 충격파에 휘말릴 거다.

하물며 놈의 공격력은 130, 반면 내 생명력은 150 밖에 안 된다. 한 대만 맞아도 빈사를 면할 수 없으며 치명타라도 뜨는 순간 그 즉시 사망이다.

허나 상관없다. 놈이 저 패턴을 쓸 거란 건 이미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흐읍!”

아크 데몬과 충돌하기 직전, 나는 양팔을 교차하여 방어 태세를 취했다. 부질없는 발버둥처럼 보이겠지. 그러나 게임 시스템 속에선 이야기가 달라진다.

파아아아앗!!

절묘한 순간에 방어하자 나와 아크 데몬 사이에서 새하얀 빛이 터져 나왔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빛의 장막에 아크 데몬의 돌진은 허무히 가로막혔고 놈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튕겨나갔다.

콰아아아앙!!

[크허어어억?!]

아크 데몬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날개를 퍼덕이며 굴러다니는 모습이 추하기 그지없다.

패링은 비단 공격으로만 발동하는 게 아니다. 방어를 통해서도 적의 공격을 튕겨낼 수 있는 것이다.

방금 전에 사용한 것이 바로 또 다른 패링 시스템, 방어 패링이다.

공격 패링과 다르게 적을 무방비 상태로 만들진 않지만 한 번에 한하여 받는 데미지를 0으로 만들고 패링당한 적의 자세를 무너뜨린다.

이러한 효과 덕분에 아크 데몬은 나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하고 나가떨어진 것이다.

“뭔 말이 그렇게 많아? 팔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인간 주제에, 인간 주제에. 잼민이마냥 떠들지 않으면 몸이 안 움직이기라도 하냐?”

[뭐라……?]

놈을 내려다보면서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크 데몬은 자리에 주저앉은 채 아연실색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지금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럴 만도 하다. 놈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수십 명이 넘는 기사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하고 있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웬 팬티 한 장 입은 변태한테 영혼까지 털리고 있다.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런 아크 데몬 덕분에 내 자신감은 수직상승했다.

할 수 있다.

나라면 이 괴물을 쓰러뜨릴 수 있다. 수많은 기사들도 해내지 못한 일을 내가 해낼 수 있는 거다.

“입만 털지 말고 제대로 덤비라고 잼민이 새끼야. 넌 싸움을 입으로 하냐?”

참을 수 없는 희열을 느끼며 놈을 도발했다. 까딱, 까딱. 내 왼손 검지가 앞뒤로 왕복한다.

온몸에 전율이 내달렸다. 입 꼬리가 절로 올라갔고 맥박이 빨라졌다.

더 이상 저놈을 보고 겁먹을 이유도, 물러설 필요도 없다.

나를 짓누르던 압박감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에겐 공포도, 불안도 남아 있지 않다. 무언가를 할 수 있으리란 확고한 자신감만이 한계를 모르고 치솟았다.

그야 내가 더 세니까.

난 튜토리얼 보스 따위 얼마든지 가지고 놀 수 있는 6천 시간짜리 고인물이니까!!

[네노오오오오옴!!]

파지지지직!

벌떡 일어난 아크 데몬이 양손을 머리 위로 뻗었다. 다음 순간 천장에 드리운 먹구름 속에서 번갯불이 번뜩였다. 나를 끝장내기 위해서 번개 구름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콰과아아앙!

“……!!”

푸른색 낙뢰가 작렬했다. 나는 방금 전에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 구르며 벼락을 피했다.

아크 데몬의 뇌우 패턴은 확실히 위험하다. 공격력 +150퍼센트의 전격 피해를 주기 때문에 한 대만 맞아도 무려 325라는 데미지가 들어온다. 생명력이 150밖에 안 되는 나에겐 치명적이기 그지없다.

물론 내가 번개에 맞을 일은 없을 거다. 놈의 번개는 지나치게 정직하기 때문이다.

콰르응! 꽈르으으응!!

콰앙! 콰아앙! 콰과과과광!!

내 뒤에서 번개가 내리쳤다. 아니, 비단 뒤에서만 그러는 게 아니라 사방에서 빗발쳤다. 연신 울려 퍼지는 굉음 때문에 귀가 멀어버릴 것 같았다.

“후우! 후우우!”

뇌우의 소나기 속에서 나는 아크 데몬을 향해 질주했다.

구르며 회피할 필요도 없었다. 놈의 낙뢰는 파지직 소리가 들린 후부터 정확히 하나 둘 셋 할 때 떨어진다.

그것만 잘 기억하면 걸어 다니면서도 번개를 피할 수 있다. 무엇보다 번개가 떨어지기 전에 지면이 번쩍이는 효과가 있어서 그것만 보고도 대충 피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놈의 뇌우 패턴은 눈 감고도 피할 수 있는 호구 패턴인 것이다.

[어쩌서냐!! 어째서 하나도 안 맞는 거냐?!]

“그야 네가 조준을 더럽게 못 하니까 그렇지!”

촤아아아악!

대답과 동시에 놈의 복부를 베었다. 살을 찢는 소리와 함께 20의 데미지가 들어갔다.

역시 녹부검. 정말 형편없는 데미지다. 놈의 최대 생명력이 3000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내가 준 피해는 개미 오줌만도 못하다.

심지어 이 데미지는 내가 받은 은혜로 강화된 데미지다. 원래 녹부검의 피해량은 단 10. 거기에 공격력을 100퍼센트 증가시켜주는 고행자의 가호 효과가 붙어서 20이 된 거다.

그래도 데미지는 들어갔다. 데미지가 들어간다는 건 어떻게든 놈을 죽일 수 있다는 소리다.

나는 계속해서 녹부검을 휘둘렀다. 녹슨 칼날이 연이어 허공을 갈랐으며 아크 데몬의 푸른 피부 또한 조금씩 저며졌다. 20의 데미지도 꾸준히 들어갔다.

촤악! 촤악! 촤자자자작!

[이 모기 같은 놈이!!]

콰아아아앙!!

물론 아크 데몬도 얌전히 맞아주진 않았다.

번개가 안 통한다는 걸 깨닫자 놈은 나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번개에 감싸인 주먹이 지면을 강타했다. 대리석 조각들이 폭발하듯 튀어나왔고 놈이 타격한 장소엔 작은 크레이터가 생겨났다.

거듭 느끼는 건데 놈의 근접 공격은 정말 무시무시하다. 맞으면 상당히 아플 거다. 한 번 주먹을 내지를 때마다 대포 같은 소리가 나는데 어찌 아프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역시 스치기만 해도 빈사. 그럼에도 난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아크 데몬은 거리를 벌릴수록 상대하기 힘든 보스다. 연속 공격에 겁먹고 뒤로 물러나면 비행 돌진이나 뇌우 같은 원거리 견제 패턴들이 끊임없이 나와서 접근도 못 해보고 죽게 된다.

근접 공격도 무시할 수 없긴 하지만 다 피하는 법이 있다.

[네놈네놈네놈네놈네놈네놈네놈! 네 노오옴!!]

콰앙! 콰아앙! 콰앙! 쾅! 쾅! 콰아아아앙!!

묵직한 주먹이 쉴 새 없이 바닥을 내리찍었다. 어느새 주위에는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공격이 전부 보인다. 기관총 같은 주먹질은 빠짐없이 내 시야에 포착됐다. 주먹을 여유롭게 피한 나는 이윽고 놈의 지근거리까지 다다랐다.

이제부터 전투의 주도권을 쥐는 건 나다. 나는 놈의 주위를 반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지속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녹부검을 한 번 휘두른 뒤 반시계 방향으로 빠르게 스텝을 밟아서 옆구리에 원투쓰리! 그리고 옆으로 한 번 굴러준 다음 원투! 두 대까지만!”

[뭣……!]

“그러면 슬슬 빡친 아크 데몬이 속도를 올리려 하겠지! 이럴수록 쫄지 말고 때려야한다! 과감하게 정면으로 돌아간 다음에 하나 둘 셋! 때리고 다시 반시계 방향으로 돌아서 원투쓰리! 총 여섯 대까지!”

[그, 그만! 그마아아안!!]

“네가 무슨 아즈모단이냐 그만그만 거리게! 여섯 대 때린 뒤엔 다시 정면으로 돌아와서 하나둘! 두 대 때린 뒤에 놈이 내려찍기 사용하면 뒤로 한 번 구른 다음에 아래쪽으로 내려온 머리를 향해서 원투쓰리! 포! 파이브! 다섯 대!”

[크하아아아악! 이 빌어먹을 벌레 놈이이이이이이!!]

“그러면 놈이 정면에 있는 나를 횡공격으로 추적하려할 테니 다시 반시계 방향으로 구르기! 이번에는 완전히 후방으로 이동한 다음에 마음 놓고 일곱 대까지! 아다아다아다아다아다아다아다앗!!”

촤자자자자자작!

내가 수차례 공격해도 아크 데몬은 헛손질만 반복했다. 가차 없는 연격 속에서 놈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함을 지르면서 발악하는 것밖에 없었다.

이게 아크 데몬 공략의 핵심이다.

원거리 견제 패턴을 쓰지 못하도록 최대한 가까이 붙으면서 반시계 방향으로 돈다. 그러면 아크 데몬은 근접 공격을 가하며 플레이어를 쫓을 거다.

얼핏 보면 위험한 전략이지만 아크 데몬의 공격 모션은 반시계 방향으로 도는 적을 절대 맞추지 못한다.

이 상황이 유지되는 동안 아크 데몬은 빙글빙글 도는 샌드백에 지나지 않는다.

[크오오오오오오옷!!]

콰과아아아앙!!

그때였다. 놈이 괴성을 내지르며 갑작스레 몸을 돌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뒤로 돌아선 아크 데몬은 두 손 모아 바닥을 내리쳤다. 순간 몸이 허공에 뜰 만큼 강렬한 충격이 원을 그리며 뻗어나갔다.

멀뚱히 있었다면 충격파에 당해 큰 피해를 입었겠지만 난 이미 충격파 범위에서 벗어나 있었다.

난데없는 뒤돌기. 마구잡이로 공격하는 것처럼 보여도 이 또한 정해진 패턴이다.

놈은 플레이어가 자신의 꼬리를 지난 뒤 2초 이상 제 자리를 유지하면 지금처럼 뒤돌아 내려찍기 패턴을 사용한다.

꼬리를 지난 다음 2초 동안 후방을 때려주고 바로 회피하면 갑작스러운 내려찍기 공격도 가뿐히 피할 수 있다.

그 후 내게 주어지는 것은 프리 딜 타임이다.

바닥을 내리찍은 아크 데몬은 후딜레이로 인해 잠시 동안 움직이지 못한다.

이때를 노렸다. 돌려 깎기로 꽤 많은 피해를 줬지만 평타만으론 결정적인 피해를 주지 못한다. 강공격, 일명 모으기 공격이라고도 하는 특수 공격을 사용할 필요가 있었다.

“유린당하지는 않겠다!!”

촤아아아악!!

미리 자세를 취해둔 나는 전력을 다해 횡베기를 가했다.

강공격은 2초 동안 힘을 모으는 것으로 두 배에 달하는 피해를 입힌다. 그래봤자 녹부검으로 주는 피해는 미미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커허억!!]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무릎 꿇는 아크 데몬. 머리통을 제대로 맞은 놈은 괴로워하면서 균형을 잡지 못했다. 그로기(groggy)가 터진 것이다.

가디스 던전의 몬스터들은 취약 부위를 피격당할 때마다 그로기 스택이라는 것이 쌓인다.

스택이 최대치까지 쌓이면 그로기 상태가 되어 짧은 시간 동안 아무런 행동도 못하게 되는데, 이때는 공격 패링에 성공했을 때처럼 무방비 상태가 된 것으로 취급한다.

한 마디로 결정타를 먹일 수 있다는 소리다.

“아무리 잘 났어도……!”

[허어억……!]

아크 데몬의 머리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번개처럼 일렁거리는 놈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직후, 나는 놈의 안구에 녹부검을 쑤셔 박았다.

“사람을 벌레 취급하면 안 되지!!”

푸후우우욱!!

[끄아아아아아아아악!!]

아크 데몬이 목청껏 비명을 질렀다.

뇌까지 망가뜨릴 심산으로 나는 더욱더 깊이 팔을 박아 넣었다. 그렇게 한참을 쑤셔준 뒤 거칠게 녹부검을 뽑았다. 검은색 피가 안와에서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전황은 이미 내게 기울었다. 적의 패턴을 모조리 파악하고 있는 내가 패배할 가능성 따위는 없다.

6천 시간 동안 쌓아온 경험과 지식, 그리고 실력은 아크 데몬을 압도하고 있었다.

이것이 나의 6천 시간이다.

이것이, 내가 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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