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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을 당신에게
전 스탯 5.
이건 굉장히 심각한 거다.
캐릭터 생성할 때도 얘기했지만 일반적인 캐릭터들은 스탯 총합이 80인 상태로 시작한다.
일부 스탯은 낮을 수도 있으나 주력으로 사용하는 스탯은 10을 훌쩍 넘어선다. 스탯이 높으니 초반부터 좋은 장비나 스킬을 습득한 채로 시작할 수도 있다.
내 스탯 총합은 그 절반가량인 45. 좋은 장비는커녕 그냥저냥 쓸 만한 장비도 착용하지 못한다. 아무리 요구치가 낮은 장비라고 해도 어떤 스탯이든 8이상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크으윽……!”
바닥에 부딪치자 통증이 밀려왔다. 나는 신음을 흘리며 힘겹게 일어났다. 그러던 도중 문득 내 차림새가 눈에 들어왔다.
떼 묻은 사각 팬티 한 장. 그것이 내가 입고 있는 옷의 전부였다.
악마들에게 도망칠 때는 미처 신경 쓰지 못했는데 정말 못 봐줄 몰골이었다. 나랑 같이 도망치던 사람들도 경황이 있었다면 나와는 말도 섞지 않았을 것이다.
수치스러운 속옷 일반
분류: 천옷
방어력: 0 인내력: 0
내구도: 20/20 무게: 0
요구 스탯: 없음
부가 효과: 없음
[추방자에게 입히는 볼품없는 속옷. 방어구로서의 기능은 전무하며 수치심을 안겨주는 것에만 의의를 둔 복장이다. 멀쩡한 사람이라면 이걸 옷이라고 입고 다니지 않을 것이다.]
팬티를 바라보자 아이템 옵션이 떠올랐다. 정말 있으나마나 한 장비였다. 여캐한테 입히면 꽤나 봐줄 만한 티팬티 형태의 속옷이 되지만 남캐한테 입히면 그냥 밋밋한 사각 팬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결국 난 이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방어구 하나 없는…… 방어구가 뭐야, 제대로 된 옷도 한 벌 없는 거지꼴인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기사 같은 거 고르는 건데…….”
방구석 폐인인 내가 갑옷과 방패를 가지고 있어봤자 얼마나 도움이 되겠냐만 적어도 팬티만 입고 돌아다니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을 거다.
그나마 비현실적인 날씨 때문에 날이 어두워서 망정이지 대낮처럼 환했다면 나는 참을 수 없는 수치심을 느껴야 했으리라.
쿵!
“응?”
그때, 갑작스레 건물이 요동쳤다.
뭐지……? 단두대 데몬인가? 포기하고 그냥 간 거 아니었어?
낌새가 불안하다. 나는 천천히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또 다시 쿵! 하는 굉음이 건물 전체에 울려 퍼졌다. 순간 바닥이 흔들려서 넘어질 뻔했다. 지진이 났다고 해도 믿을 만큼 엄청난 진동이었다.
천장과 벽 곳곳에 균열이 새겨지는 게 보였다. 생각해보면 이곳은 저택이지 요새가 아니다. 그런 거구의 괴물이 달려드는 걸 끝까지 막아줄 리 만무하다.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렸다. 도망쳐야 한다. 여긴 절대 안전하지 않다.
하지만 어디로? 이 앞으로 나아가면 메인 홀과 안뜰 정원이 나온다. 문제는 거기가 보스방이란 거다. 곰을 피하려다 호랑이굴로 들어가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짓이란 말이다.
허나 그 외의 선택지라곤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대문과 내가 들어온 하인 전용 통로 두 곳뿐이다. 혹시 다른 길이 더 없을까 고개를 돌려봤지만 헛수고였다.
세세한 차이가 있었지만 기본적인 구조는 게임과 같았다.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통로나 문은 전부 잔해로 막혀 있었다. 내가 도망칠 수 있는 안전한 퇴로는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콰아아아앙!!
“……!”
어떻게든 방법을 모색해 보려 했지만 내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나 짧았다.
정면의 벽이 대문과 함께 박살났다. 무너진 잔해들이 사방으로 튀고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크르르르르르르.]
벽을 부순 건 내 예상대로 단두대 데몬이었다. 놈은 자욱하게 피어오른 흙먼지를 뚫고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기괴하게 생긴 세 쌍의 눈동자가 나를 발견했다. 짐승과도 같은 울음소리는 곧 악마의 조소로 바뀌었다.
[크하하하하하하핫!!]
그것이 신호였다. 날 죽이겠다는 신호. 크게 웃어재낀 놈은 주저 없이 팔을 휘둘렀다. 지긋지긋한 식칼 모양 팔이 내 몸을 절단하기 위해 흉흉한 궤적을 그렸다.
“으아아아아아!!”
비명을 지르며 회피를 시도했다. 말이 회피지 그냥 넘어진 것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고 거대한 칼날이 머리 위를 베고 지나갔다.
후우우우욱!!
“히에엑!”
풍압 때문에 얼굴 가죽이 뒤집히는 줄 알았다. 덩치에 걸맞게 느린 공격이었지만 놈은 한 번으로 끝내지 않았다.
[크워어어어어어억!!]
양팔을 들어 올린 단두대 데몬. 놈은 곧 바닥을 마구 내리찍으며 내게 달려들었다.
칼날에 맞은 샹들리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박살났다. 수많은 유리 파편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으며 샹들리에 본체 또한 나를 향해 떨어졌다.
콰차아아앙!!
쿠구구구궁!
“미친놈아 작작 좀 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 악물고 달리는 것밖에 없었다.
하인용 통로로 되돌아가려 했으나 하필이면 샹들리에가 그쪽으로 떨어졌다. 그렇다고 현관으로 돌진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현관에 도달하기도 전에 단두대 같은 팔이 내 몸을 토막내버릴 거다.
결국 퇴로를 빼앗긴 나는 눈물을 머금고 안뜰 정원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통로 자체는 좁아서 놈이 들어올 수 없었다.
또 박살내며 쫓아올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속도는 늦출 수 있으리라.
애당초 내가 걱정해야할 것은 더 이상 뒤에서 쫓아오는 단두대 데몬이 아니었다.
꽈르으으으응!!
“허억……!”
통로를 빠져나오자마자 천둥소리가 들렸다.
귀를 찢는 그 소리에 나는 겁먹은 동물마냥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순간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천둥소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앞에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투기가 나를 찍어 누른 것이었다.
“끄아악!!”
“꺄악!!”
천둥소리를 뒤따른 건 수많은 단말마였다. 나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메인 홀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극을 눈에 담았다.
붉은 망토를 두른 기사들이 무언가와 싸우고 있었다. 기사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돌격했지만 얼마 안 가 무력하게 쓰러졌다.
[흥.]
콰과아아아앙!!
“끄하아아아악!!”
푸른색 괴물이 코웃음 쳤다. 놈이 한 차례 팔을 휘두르자 하늘에서 번개가 내리쳤다.
그것은 달려드는 기사를 산 채로 구워버렸으며 번개에 직격당한 기사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시커멓게 타버린 몸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미친……!”
그 광경을 보니 절로 욕이 나왔다.
사람이 이렇게 쉽게 죽어도 되는 건가? 단두대 데몬 때도, 척살의 데몬 때도 사람들은 개미처럼 죽어나갔지만 이렇게까지 무력하게 죽지는 않았다. 적어도 그놈들은 도망자를 쫓는데 전력을 다했단 말이다.
허나 눈앞에 있는 녀석은 그렇지 않았다.
그냥 손 한 번 휘저으니 달려들던 기사들이 우후죽순으로 죽어나갔다. 마치 그들의 죽음이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나는 이윽고 그 거체를 눈에 담았고, 저도 모르게 놈의 이름을 불렀다.
“아크 데몬…….”
하드코어 튜토리얼에서만 등장하는 보스 몬스터. 단두대 데몬이나 척살의 데몬과는 격이 다른 상위 악마.
기다란 뿔이 돋아난 얼굴은 마치 짐승의 머리뼈 같았으며 등에 커다란 날개를 달고 있었다.
몸은 전반적으로 푸른색이었는데 피부색과 비슷한 진청색의 번갯불이 수시로 번뜩였다. 마치 번개에 대한 공포가 악마의 모습으로 구현된 것 같았다.
아크 데몬을 본 나는 차마 움직일 수 없었다.
저놈은 격이 다르다. 수많은 주민들을 학살한 단두대 데몬도 저놈에 비하면 그냥 잡몹일 뿐이다.
“롤랜드!!”
내가 겁먹어서 말도 못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소리쳤다. 젊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고개 돌려 확인하자 랜스와 방패로 무장한 붉은 머리 여성이 동료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망토가 유독 화려한 것으로 보아 그녀가 이 부대의 지휘관 같았다. 기사라고하기엔 너무 짤막한 것 같았지만 애당초 이곳은 게임 세계니까 키는 별 상관없으리라.
“네가 감히!!”
중요한 건 그녀의 체구가 아니라 그녀의 적이 아크 데몬이라는 점이다.
동료의 죽음에 분노한 여기사는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창을 내세운 채 돌진하는 그녀는 마치 미사일과도 같았다. 창에서 붉은색 빛이 뿜어져 나오는 걸 보니 스킬까지 사용한 듯했다.
하지만 아크 데몬 앞에선 전부 부질없는 짓이었다.
푸후욱!! 랜스가 아크 데몬을 꿰뚫었다. 그러나 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간지럽다는 듯이 여기사를 내려다보곤 가볍게 팔을 휘둘렀다.
콰아아아앙!!
“커헉……!”
어마어마한 굉음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도저히 가벼운 공격에서 나올 법한 소리가 아니었다.
무심히 팔을 휘둘렀을 뿐인데 대포 같은 소리가 나며 여기사가 벽을 향해 날아갔다. 다시 한 번 굉음이 울려 퍼졌고 여기사와 부딪친 벽에 방사형 균열이 새겨졌다.
그걸 보며 확신했다.
기사들은 아크 데몬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애초에 살아남은 기사는 방금 전에 나가떨어진 여기사뿐이다. 그들은 이미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으며 전멸이 목전까지 다가왔다.
[이곳의 인간들은 나약하기 짝이 없군! 벌레만도 못 해!! 고작 이런 놈들을 상대하라고 이 몸을 소환한 거냐!!]
쓰러진 여기사를 보며 아크 데몬이 노성을 터뜨렸다. 놈의 시선은 여기사에게 꽂혀 있다. 그것을 확인한 내 머리에 몹쓸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지금 당장 도망쳐야 한다. 이기적이지만 이 상황은 내게 절호의 기회다.
아크 데몬이 여기사를 끝장내는 틈을 타 안뜰 정원으로 달리는 거다. 그곳에 출구가 있다. 게임에서도 그쪽을 통해 다음 맵으로 갔으니까 변동 사항이 없다면 확실히 탈출할 수 있을 거다.
허나 내 계획은 끝내 순탄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도리를 저버리려고 했기 때문일까. 천벌과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슬금슬금 이동하던 도중 누군가의 머리를 밟아버리고 만 것이다.
“아아악!!”
“이런 씨……!”
머리를 밟힌 기사가 비명을 질렀다. 번개에 맞았는데도 그는 살아 있었다.
왜 안 죽은 거야, 너 때문에 들켰잖아! 순간 천인공노할 생각을 해버렸지만 그를 원망할 새도 없었다.
[크르르르르르…….]
아크 데몬이 내 존재를 눈치채버렸다.
[이 벌레는 또 뭐냐?]
으르렁거리며 다가오는 아크 데몬. 놈은 대자로 뻗은 여기사 보단 내 쪽에 더 흥미가 생긴 모양이다.
흥미? 아니, 그저 거슬려할 뿐이다. 저놈에게 있어서 나의 등장은 히토미를 켜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는 와중에 난데없이 파리 한 마리가 날아든 것과 같다.
쓰러뜨린 여기사로 재미 좀 보려는 와중에 웬 팬티 한 장만 입은 변태가 장내에 끼어들었으니 신경 쓰일 수밖에 없다. 동시에 굉장히 불쾌하겠지. 나 같아도 눈살이 찌푸려질 상황이다.
놈은 두개골처럼 생긴 얼굴을 잘도 찌푸리면서 내게 다가왔다. 놈과 거리가 좁혀질수록 내 죽음도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나는 천천히 물러났지만 도망칠 곳은 없었다. 통로는 이미 멀어질 만큼 멀어졌으며 내 뒤에는 벽 밖에 없다. 완전히 포위됐다.
아크 데몬에게 압도되어 고개도 제대로 못 들고 있는 내게 놈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징그럽게 생긴 벌레가 용케 여기까지 기어들어왔군. 죽어라.]
파지지지직!!
그리고 녀석의 손에 맺힌 푸른색 번개.
그것은 사형수의 목을 치기 위한 단두대와도 같았다. 피할 수 없으며 맞는 순간 즉사. 나 같은 일반인이 어찌해볼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다.
번뜩이는 번갯불을 보고 끝내 절망했다.
이렇게 죽는구나. 웃기게도 마지막 순간에 떠오른 건 가족들 얼굴이나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 같은 게 아니었다.
내가 25살 동안 모쏠 아다였다는 사실만이 뇌리에 강하게 박혔다.
야스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진짜 연애를 해보고 싶었는데.
“이런 염병…….”
퍼어억!!
“위험해!!”
“……?!”
죽음을 기다리던 내 복부를 무언가가 강타했다.
“커허억!!”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폐 안에 차 있던 공기가 전부 튀어나왔고 아찔한 고통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이렇게 아파본 적은 처음이다. 내가 겪어본 고통 중 이것과 비유할 수 있을만한 건 초등학교 축구 시간 때 반 친구가 실수로 공 대신 내 고환을 걷어찼을 때뿐이다. 그때와는 부위부터 달랐지만 어찌되었든 내가 겪었던 그 어떤 고통보다 극심했다.
쾅!
“크하아아악……!!”
복부를 얻어맞은 나는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복부 다음에는 등짝이었다. 척추가 부러질 것 같았다. 그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어디 한 군데는 분명 부러졌을 거다. 온몸이 쑤시고 팔다리가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눈물이 날 것 같은 아픔 속에서 난 간신히 상황을 파악했다.
꽈르으으으응!!
“꺄아아아아아악!”
“뭣?!”
푸른색 번개가 여기사를 관통했다. 여기사는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고통스러워했고 끝내 바닥에 쓰러졌다. 죽은 건가? 설마 날 구하려다가 죽은 거야?
왜 이렇게 아프나 했더니 여기사가 전력을 다해 달려와서 그런 거였다.
그녀는 번개가 떨어지는 찰나에 빛의 속도로 돌진해 나를 구했다. 하지만 그녀 자신까지는 구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번개를 맞고 쓰러진 것이었다.
“도망…… 쳐…… 빨리…….”
“……!”
다행히도 그녀는 아직 죽지 않았다.
다행인가? 온몸이 만신창이가 돼서 죽기 일보 직전이나 다름없다.
번개에 직격 당했는데 멀쩡할 라기 없지. 그럼에도 그녀는 나에게 도망치라 호소했다. 저런 꼴이 됐는데도 자신의 목숨보다 내 안위를 걱정하는 것이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25년 동안 모쏠 아다였다는 사실보다도 더 슬펐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희생정신이란 말인가. 내가 기사도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그녀야 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기사리라. 동시에 그녀를 미끼삼아 도망치려 했던 내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워졌다.
[같잖은 계집년이 마지막까지 귀찮게 하는구나. 가지고 논 다음에 부하들에게 던져주려 했더니 이래서야 노리개로도 못 쓰겠군.]
그런 아름다운 기사도도 아크 데몬에겐 성가신 발버둥에 지나지 않는 듯했다.
놈은 짜증 섞인 어조로 중얼거린 뒤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놈의 눈빛에서 노기가 느껴졌다. 자신의 장난감을 망가뜨린 것에 대한 분노인가? 어찌되었든 날 곱게 보내줄 것 같진 않았다.
[암컷이 아닌 게 흠이지만 네놈으로라도 이 아쉬움을 달래야겠구나. 절대 빨리 죽지마라 벌레 녀석아.]
뭐?
이 미친놈이 뭐라는 거지?
지금 날 가지고 놀겠다는 건가? 설마 이 여기사에게 하려던 짓을 똑같이 하면서?
등골이 서늘해졌다. 어쩌면 난 죽음보다 더 끔찍한 최후를 앞두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내가 25년 동안 모쏠 아다였다지만 첫 경험을 근육마초 호모 악마에게 떼이고 싶지는 않다.
하물며 저놈은 신장만 5미터다. 키가 저렇게 큰데 성기는 또 얼마나 거대하겠는가?
저놈과의 야스한다는 건 생체 오나홀로 전락하는 것과 같다. 남자가 가장 추하고 고통스럽게 죽는 방법의 순위를 매긴다면 TOP 10에는 꼭 들어갈 거란 말이다.
“오, 오지 마…….”
나는 녹부검을 꺼내들며 놈과 맞섰다. 기사의 한손검은 어디 있지? 젠장 오다가 떨어뜨렸나 보다. 어차피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녹부검 보단 나을 텐데……!
그런 불평은 아크 데몬이 내 앞에 도달한 것으로 눈 녹듯이 사라졌다.
이런 놈을 상대론 녹부검이든 기사의 한손검이든 다 똑같다. 결국 난 저항 한 번 못 해보고 죽을 거다.
[거절한다!!]
촤아아아악!
죠죠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를 치며 내게 팔을 휘두르는 아크 데몬.
잡히는 순간 끝장이다. 어쩌면 이미 끝난 걸지도 모른다. 죽음이 가까워져서 그런지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이번에야 말로 내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려나?
그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가 모쏠 아다라는 사실이 다시 한 번 뇌리에 각인되지도 않았다.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그보다 더 간단명료한 것이었다.
오른쪽.
오른쪽으로 휘두르면 튕겨낼 수 있다.
“……!!”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본능적으로 녹부검을 휘둘렀다.
이런 폐품이 중장비 같은 팔을 당해낼 리 없다. 그 사실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나였지만 내 몸은 그렇지 않은 듯했다.
카아아아앙!!
끝내 놈의 팔과 내 검이 격돌했다. 이상하게도 그 사이에서 불꽃이 튀었다.
아니, 불꽃과 비슷한 무언가다. 마치 게임 속에서나 볼 법한 광원 이펙트. 그것이 나와 아크 데몬 사이에서 터졌다.
그리고 더 이상한 건, 내 검이 놈의 팔을 튕겨냈다는 것이다.
[뭣이?!]
아크 데몬의 팔이 뒤로 젖혀졌다. 팔이 튕겨져 나가며 놈은 한순간 균형을 잃었다. 5미터의 거체가 무릎 꿇는다. 놈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든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어처구니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게 무슨…….”
============================ 작품 후기 ============================
오늘 안에 10화까지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