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 세상을 당신에게
외모 선택을 마친 나는 캐릭터의 신분과 은혜를 정했다.
신분은 직업과 비슷한 개념이고 은혜는 반영구적으로 지속되는 버프다.
가디스 던전 캐릭터들은 직업의 틀에 구애받지 않는다.
근접 위주로 키우면 전사, 마법 위주로 키우면 마법사라고 여기는 식이며 스탯만 만족한다면 모든 무기와 스킬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신분 선택은 육성의 기초를 잡아주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신중하게 선택할 필요가 있다. 어떤 신분을 고르냐에 따라 해당 직업에게 필요한 장비와 스탯을 주기 때문이다.
[채팅방]
빅젖을 보면 짖는 개: 다키님 어차피 오늘 안에 깰 거니까 은혜는 고행자의 가호로 해요.
넣을게: 초반부 빠르게 넘기려면 그게 좋을 듯.
감다키아다쉑: 신분은 추방자로 고르는 거 알지?
사람이되다만애: ㅊㅂㅈ! ㅊㅂㅈ!
다키의전립선: 에이, 설마 마지막 방송인데 쫄보처럼 다른 신분 고르겠어?
이번에도 시청자들은 이런저런 의견을 제시했다. 그 중 추방자라는 말이 나오자 채팅방에 있는 모두가 입을 모았다.
추방자. 7개의 신분 중 단연 최약체로 꼽히는 신분이다.
다른 캐릭터들은 제대로 된 무기와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는데 이 신분은 방어구가 팬티 한 장뿐인데다가 녹슬고 부러진 검을 무기랍시고 들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약해보이지만 추방자가 약한 이유는 비단 장비 때문만 아니다.
정상적인 신분은 초기 스탯 총합이 80으로 맞춰져 있다. 근력, 민첩, 체력 등을 다 합친 수치가 80이라는 뜻이다.
그에 반해 추방자의 스탯 총합은 타 신분의 절반가량 밖에 안 되는 45다. 가디스 던전의 스탯이 총 9개니까 모든 스탯이 5로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
장비도 열악하고 자체적인 스펙도 현저히 낮은데 이렇다 할 특수 능력도 없다. 그야말로 사람 구실로 못하는 불가촉천민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고통 받는 걸 즐기는 변태가 아니고서야 고를 이유가 없는 신분. 이런 캐릭터를 재밌게 플레이할 수 있는 사람은 가디스 던전에 수 백, 수 천 시간을 쏟아 부은 고인물들 밖에 없다.
요컨대 추방자는 나 같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신분인 거다.
“아 물론이죠, 어떻게 마지막 방송에서 추방자 말고 다른 신분을 고르겠어요? 제가 재미없어서라도 그렇게는 못 해요.”
[채팅방]
블본하다옴: 그래야 우리 창남이지!
감다키따먹고싶다: 감다키 펀치! 감다키 펀치!
스타카토: 웃긴 건 저런 캐릭터 골라놓고서 일방적으로 양학할 거라는 거…….
내 단호한 선택에 사람들이 환호했다. 캐릭터 메이킹이 끝났으니 이제 게임을 시작할 때다. 나는 생성 완료 버튼에 손을 가져갔다.
[산악 영지 자네스에서 시작합니다.]
[추방자 신분을 선택했으므로 튜토리얼이 하드코어 모드로 변경됩니다.]
[하드코어 모드에선 초반 지원이 일절 없으며 게임 시작 직후부터 적에게 공격당할 수 있습니다. 하드코어 모드를 원하지 않는다면 다른 신분을 선택해주십시오.]
생성 완료 버튼에 손을 가져가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추방자 신분으로 시작하면 나타나는 일종의 경고문이다.
추방자 신분을 선택하면 게임 진행에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난다. 튜토리얼 난이도 상승이 가장 대표적인 예시다. 물론 나는 그 어려운 튜토리얼을 수없이 클리어 했기에 주저하지 않고 수락 버튼을 눌렀다.
그렇게 게임을 시작하려 할 때였다.
빰빠밤! 빰빰빠아암!!
경쾌한 효과음이 들려왔다. 나는 잠시 손을 멈추고 화면 상단으로 시선을 옮겼다.
누가 또 거금을 후원한 것이었다.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도네이션을 확인했는데, 믿기지 않는 금액과 함께 익숙한 닉네임이 눈에 들어왔다.
[유다희님이 50만원 후원!!]
“오, 오십……?”
후원금 액수를 본 나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게임 시작만 기다리던 시청자들도 도네이션을 확인하곤 빠르게 채팅을 쳤다.
[채팅방]
헤베겨드랑이: 헐
감다키아다쉑: 와, 50만……;;;
오우야: ㅗㅜㅑ
응깃왕 김응깃: ㅗㅜㅑㅗㅜㅑ
스타카토: 세상에;;;
블본하다옴: 이거 다키 방송 역사상 최고액수 아님?
블본하다옴의 말이 맞다. 50만원이면 내가 받아본 후원금 중 가장 높은 액수다. 10만원도 손에 꼽을 정도로 받아본 나에게 50만원은 너무나 큰돈이었다.
이는 어지간한 스트리머들도 마찬가지리라. 아무리 인터넷 방송을 좋아한다고 해도 저렇게 큰돈을 냉큼 넘길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으니까. 그런 이유로 다들 놀라움을 금치 못했지만 후원자의 닉네임을 보고 금세 납득했다.
[채팅방]
단백질도둑: 아 누군가 했더니 대주주님이셨네요.
가던붐은온다: 대주주님이면 그럴 만하지.
다키의전립선: 아이고 대주주님 오셨습니까.
빅젖을 보면 짖는 개: 역시 대주주님은 달라.
사람이되다만애: 진짜 대주주 아니랄까봐 마지막 도네도 화끈하게 쏘시네.
유다희. 통칭 대주주님. 내 방송에서 도네이션을 가장 많이 보내온 시청자로 비주류 스트리머인 나를 사실상 먹여 살렸다고 해도 좋은 열성팬이다.
‘유다희님…… 이 분이 아니었으면 방송 같은 건 진즉에 접었겠지.’
다시 말하지만 나는 구독자 수에 비해서 조회수가 한없이 낮은 스트리머다. 당연히 뉴튜브 광고만으론 안정적인 수입을 벌기 힘들며 트위츠에서 버는 돈까지 합치면 100만원을 간신히 넘길 정도다.
유다희는 그런 나에게 틈만 나면 미션을 걸면서 후원을 해줬다. 노 데미지로 보스 클리어하면 3만원, 오늘 하루 종일 방송하면 5만원 같은 식으로 말이다.
한두 번 그러는 것도 아니고 내가 방송을 킬 때마다 미션을 걸어줘서 내 수익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황혼기를 맞이했음에도 몇 십만 원씩이나마 벌 수 있었던 것도 유다희의 열성적인 후원 덕분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도네이션 메시지가 떠올랐다.
[안 가면 안 돼……?]
미련으로 가득한 메시지였다. 내용은 짧았지만 날 놓아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를 가장 많이 후원해온 만큼 유다희의 마음은 누구보다 애절할 것이다. 그런 사람이 붙잡으려 하니 내 마음도 약해졌다.
하지만 나는 이미 결정을 내렸다. 유다희에겐 미안하지만 내 스트리머 생활은 오늘로서 끝이다. 괜히 미련을 남기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결연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유다희님, 50만원 정말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후원해주신 것도요. 유다희님의 후원이 아니었으면 저는 훨씬 더 일찍 그만뒀을 거예요. 제가 스트리머 활동을 이어올 수 있었던 건 유다희님 덕분이기도 합니다.”
캠을 향해 고개까지 숙이며 내 진심을 전했다. 한 차례 숨을 가다듬은 나는 이내 단언했다.
“하지만 방송은 계속하지 않을 겁니다. 제 방송은 오늘이 마지막이고 앞으론 취업 활동에 열중할 생각입니다. 지금까지 많이 좋아해주셨는데 멋대로 가버려서 죄송합니다.”
유다희는 날 원망할지도 모른다. 그 사람이 내게 쏟아 부은 돈을 생각하면 욕설을 퍼부어도 이상하지 않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달게 받아주자. 저 사람은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그리 다짐하고 있을 때 채팅방이 시끄러워졌다.
[채팅방]
가던붐은온다: 미안하면 팬티라도 보여줘라!
감다키아다쉑: 그래 솔직히 50만원인데 그 정도 리액션은 해줘야지!
아다단 선봉장: 어차피 오늘로 방송 접을 건데 무서울 게 뭐 있어!
오우야: 벗어라! 벗어라! 벗어라!
감다키따먹고싶다: 빨리 바지 벗고 그랜절 박으세욧!
넣을게: 트위츠 이 새끼들 일도 제대로 안 하는데 그냥 잠깐만 벗어줘!
너무 진지하게 얘기해서 분위기를 깨뜨리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렇지는 않은 듯했다.
지금만큼은 시청자들의 변태 같은 요구도 반갑게 들렸다.
나는 저도 모르게 웃으면서 시청자들에게 화답하기로 했다.
그렇게 내 팬티가 보고 싶다면 오늘 하루 정도는 보여주마. 분명 나중에 후회하겠지만 유다희를 위해서라도 흥을 돋궈주기로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갑작스레 올라온 도네이션이 희희낙락한 분위기를 나락으로 내리꽂았다.
빰빠밤! 빰빰빠아암!!
[유다희 님이 100만원 후원!!]
안돼제발가지마부탁이야나다키가없으면안돼다키ㄱㅏ방송ㅇ그만두ㅁ녀나도죽을거야나다키정말로좋아한단말이야이세상누구보다좋아하는다키랑떨어지는건생각하기도싫어그러니까제발방송계속해줘내가이렇게빌테니까제발제발제발제발제발ㅈㅔ발제발ㅈ ㅔ발제발제발.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후원금을 보며 나는 아연실색했다.
100만원이라니, 50만원을 보낸 것만으로 역대급 도네이션이었는데 바로 두 배를 보낸다고?
금액도 금액이었지만 이어지는 메시지가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다급하게 친 메시지에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유다희의 메시지는 광기어린 집착으로 점철되어 있었던 것이다.
당황스러워하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팬티 색깔 맞추기로 소란스러웠던 채팅방은 유다희의 도네이션으로 인해 분위기가 싸해졌다.
문제는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내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또 다시 요란한 효과음이 들려왔다. 당연히 도네이션 효과음이었다.
[유다희 님이 150만원 후원!!]
돈이 부족해서 그래? 걱정 마, 내가 계속 후원해줄게. 미션 같은 거 안 해도 돼. 100만원이든 200만원이든 매일 다키가 원하는 대로 줄 테니까 다키는 돈 걱정 할 거 없이 매일 방송만 해주면 돼……!
“다, 다희님…… 많이 흥분하신 거 같은데 일단 진정 좀 하시는 게…….”
어떻게든 침착함을 유지하면서 유다희와 대화를 시도했다.
거액의 후원. 스트리머라면 누구나 바라는 일이다. 허나 지금 유다희의 모습을 보면 어딘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든다.
단순히 열성팬으로서 집착하는 수준이 아니다. 그녀는 후원금을 사용해서 나를 소유하려 하고 있다. 이렇게 돈을 번들 전혀 기쁘지 않다. 아무리 미련이 많아도 그렇지 이런 식으로 붙잡는 건 아니다.
[유다희 님이 200만원 후원!!]
나 진심이야. 다키가 없는 세상에선 살 수 없어. 다키를 위해서 선물도 준비했단 말이야. 앞으로 3개월만, 아니 한달 만 더 방송해주면 돼. 그러니까 방송 그만두겠단 말 당장 취소해. 내일도,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의 다음날도 계속 방송해달란 말이야!!
“다희님 제발 진정 좀……!”
[유다희 님이 300만원 후원!!]
내가 널 그렇게 좋아해줬는데 이제 와서 도망치겠단 거야? 진짜 너무해, 이대로 가버리면 절대 용서 안 할 거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다키야. 방송 계속하겠다고만 말해주면 돼. 그러면 내가 앞으로 더 많이 사랑해줄게. 사랑해 다키야, 정말로 사랑해.
[유다희님이 350만원 후원!!]
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
계속해서 다그쳐봤지만 유다희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흥분하여 소름끼치는 글들로 메시지를 도배했다. 나는 슬슬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시청자들 역시 하나둘 씩 불쾌함을 호소했다.
[채팅방]
헤베겨드랑이: 다희님 아쉬운 건 알겠는데 정도가 지나치시네요;
아다단 선봉장: 아 진짜 도네 좀 작작 보내 시작을 못 하잖아.
감다키아다쉑: 애새끼임??? 다키도 좋아서 그러는 거 아닌데 왜 자꾸 그래??
넣을게: 잼민이 새끼가 부모 카드 긁고 있나 보네. 개념 없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블본하다옴: 쟤 그냥 차단하면 안 돼? 팬이어도 그렇지 이건 좀 선 넘은 거 같은데.
빅젖을 보면 짖는 개: 솔직히 이렇게 생떼 부리면서 방송 방해하는 건 아니라고 봄;;
급기야 유다희를 차단해달라는 말까지 나왔다.
유다희에게 이런저런 정이 붙어 있는 나였지만 이쯤 되니 그들의 요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이래서야 올 보스 클리어는커녕 게임 시작도 못 하게 생겼다.
결국 난 차단 버튼에 커서를 가져갔다. 시청자들끼리 싸우는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유다희가 내게 해준 걸 생각하면 절로 망설여졌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도네이션은 계속해서 올라왔다.
[유다희 님이 500만원 후원!!]
“미친…….”
연이어 갱신되는 후원액수에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이 사람은 내가 원하는 대답을 주기 전까진 계속 이 짓을 반복할 거다. 역시 차단 외엔 답이 없는 듯 했다.
결국 차단 버튼을 눌렀으나 유다희가 보낸 도네이션은 이미 방송 화면에 떠 있었다.
이번에는 메시지가 아닌 영상 도네이션이었다. 화면에 웬 기이한 문양이 떠오르더니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ㅡ&%*%*(0 )() @#*@*&&(&- @)_#@*%@#@(_&_-*%((*%]
굉장히 미려한 목소리였다. 허나 그것이 구성하는 언어는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했으며 얼핏 들어보면 사악한 주문 같기도 했다.
[채팅방]
넣을게: 아 씨발 수준 실화냐? 중2병 걸린 애새끼도 아니고 이딴 좆같은 영상으로 테러를 해?
헤베겨드랑이: 다키님 너무 기분 나쁜데 도네 좀 빨리 꺼주시면 안 될까요……?
블본하다옴: 아니 진짜 뭐하잔 거야;;
빅젖을 보면 짖는 개: 이건 잼민이 정도가 아니라 그냥 미친 새끼 아님?
아다단 선봉장: 유다희년 존나 실망이다. 열성팬이라는 새끼가 스트리머에 대한 배려가 1도 없네.
기분 나쁜 영상 때문에 시청자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어느새 채팅방의 절반 이상이 유다희를 향한 욕설과 비난으로 가득 찼다.
나도 이 기괴한 주문을 더 듣고 싶지 않았다. 나는 시청자들에게 사과하며 서둘러 도네이션 종료 버튼을 찾았다.
“아 죄송해요 여러분……. 제가 빨리 꺼드릴 테니까 다들 너무 욕하진 마시고…….”
그렇게 도네이션을 끄려던 나는 문득 의아함을 느꼈다.
방금 전까지 손에 쥐고 있던 마우스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었다.
“어?”
당황한 나머지 반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라진 마우스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마우스뿐만 아니었다.
책상도, 컴퓨터도, 내 방마저도 없어졌다. 유다희가 보낸 영상처럼 시커먼 공간 안에 나랑 내 의자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뭐야…….”
의자에서 일어나 몇 걸음인가 걸어갔다. 그러자 의자까지 모습을 감추었고 허공에 웬 문양이 떠올랐다.
악마 숭배를 연상케 붉은색 오망성. 순식간에 고층 건물만큼이나 커진 그것은 환하게 빛나 어두운 공간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크으윽?!”
너무나 강렬한 빛에 반사적으로 눈을 가렸다. 직후 발밑이 허전해졌다. 한순간의 부유감 뒤에 찾아온 것은 급격한 추락이었다.
내 몸은 아래를 향해서 빠르게 떨어졌고 나는 비명을 지르며 허공으로 손을 휘저었다.
“으, 으아아아아아악!!”
발버둥 쳐봤자 잡히는 건 없었다. 붉은색 오망성이 점점 멀어져갔으며 공포 때문인지 내 의식 또한 흐릿해져 갔다.
그렇게 기절하려던 순간 멀어져 나는 오망성 한 가운데에서 웬 여자아이를 보았다.
노란색 망토로 몸을 가리고 있는 금발의 소녀였다.
그녀의 등 뒤에는 연체동물의 것과 같은 무수히 많은 촉수들이 있었는데 그 크기가 실로 어마어마했다. 나 같은 인간 따위는 그저 벌레로 보일 정도로 거대한 존재였다.
그것을 본 순간 나는 끝내 의식을 잃고 말았다. 이 이상 보면 안 된다. 그렇게 판단한 뇌가 의식을 강제로 끊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이…… 신에게…….]
정신을 잃기 직전, 누군가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영상에서 나왔던 그 목소리였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던 목소리는 점차 가까워지더니 머지않아 뚜렷하게 들려왔다.
[이 세상을…… 당신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