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8화. 시간 있어요? (2)
2022년의 추운 겨울날, 가로등의 주황 불빛 아래에서 이렇게 말했다.
“연애할 시간도, 생각도 없어서요.”
나는 눈치 없는 사람이 아니라고.
그렇게 아는 척을 했다.
사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었는데.
“연애라는 건 쌍방통행이잖아요. 받기만 하고 줄 수 없는 건 연애라고 안 하죠.”
그 말 그대로였다.
나는 받기만 했다.
그때는 그걸 거절하는 게 다민과 나 모두를 위한 거라고 생각했다.
다민은 내 거절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때는 다민이 생각보다 날 많이 좋아하지 않는가 보다 했지만, 좀 더 나이를 먹고 주위를 바라볼 여유가 되자 알게 되었다.
다민은 내가 신경 쓰지 않도록, 미안해하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그 뒤에서 어떤 감정의 폭풍이 있었을지 나는 모른다.
나는 항상 몰랐으니까.
다민이 찾아오는 것도 그랬다.
이미 거절했으니까, 마음을 접었다고 생각했으니까 신경 쓰지 않았다.
국세청 홍보 대사니까 국세청에 오는 건 당연하지.
아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지나가는 길에 얼굴 보러 지방청에 들르는 것도 당연하지.
나는 눈치 없는 새끼가 아니다.
이번에도 나는 알면서 모르는 척했다.
한 번 거절했다는 이유로, 다민이 쏟는 마음은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상처받지 않을 것이라고.
내 멋대로 판단했다.
그때 내가 말했듯 다민은 멈추지도 않고 계속 감정을 쏟고 있었는데.
바빴으니까, 여유가 없으니까 외면했다.
전부 핑계였다.
나는 조용한 국장실에 홀로 앉아 가만히 생각했다.
그렇다고 내가 다민이 마음에 없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몇 년이고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을 어떻게 싫어하겠는가.
물론 나도 그 이유만으로 좋다고 생각한 건 아니다.
사실 그 전에는 다민이 예쁘고 착해서 좋았다 치자.
이건 그냥 연예인을 보는 동경의 감정이다.
결정적으로 눈부시다고 느낀 건 그날 제주도에서였다.
가로등 불빛조차 스포트라이트처럼 보였고, 어두운 가운데 별빛이 내려앉은 것 같았다.
다민은 그때 날 이성으로만이 아니라 그 모든 걸 좋아한다고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다민을 차던 순간 나 역시 깨달았다.
날 남자로서, 전도유망한 공무원으로서 좋아할 사람은 많겠지만, 나 자체를 좋아해 줄 사람은 다민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좋은 사람을 만났고 놓쳤구나.
때는 늦었고 어쩔 수 없다.
당시 다민은 연예인이고 나는 좌천으로 실무에서 손을 떼 제주도까지 간 문제아 처지였다.
당시엔 국회나 권력자들도 건재했으니 날 고깝게 보는 사람이 다민에게까지 검은 손을 뻗칠까 봐 두렵기도 했다.
그것까지 전부, 내 이기적인 판단이었다.
아마 그때 사정을 다 말했다 해도 다민은 받아들였을 것이다.
아무 상관없다고 말했을 거다.
그런 사람이었다.
“아으으!”
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뒤늦게 몰려온 부끄러움과 자책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혼자 앉아 있으려니 더더욱 온갖 잡생각이 떠올랐다.
가뜩이나 요즘 커플이 된 장세훈과 강혜원이 눈앞에서 깨를 쏟아내는 바람에 눈꼴시어서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여러 단계 건너뛰자고 한 말이 진짜라는 것처럼, 둘은 몇 년 사귄 사이처럼 굴었다.
생각해 보니 또 빡치네.
근데 그걸 보니 또 마음이 싱숭생숭한 것이다.
저 둘도 일에 지장 있을까 봐 서로 모르는 척하고 지낸 건데, 막상 고백하고 나니 굉장히 잘 지내는 것 아닌가.
그동안의 시간을 보상받으려는 것처럼.
그걸 보고 있으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내가 연애를 너무 어렵게 생각한 건 아닐까?
연애하고 결혼하는 사람들이 다들 여유 있어서 하는 건 아니잖아.
좋으면 어떻게든 해결되는 거 아닐까?
장거리 연애하는 사람들도 멀쩡하게 연애 다 하잖아.
혼자 있으니 안 되겠다.
나는 정처 없이 국장실을 나왔다.
이럴 땐 딴생각이 안 나도록 일을 하는 게 최고였다.
이왕이면 복잡한 건이 하나 들어오면 좋겠는데.
내가 사무실에 나타나도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국장실에서만 처박혀 있다기보다 현장도 돌아다니는 유형이었기 때문에 익숙해진 거겠지.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놀란 것은 사실 나였다.
업무에 찌든 우리와 다르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관리가 되어 있는, 보여주는 것이 업인 사람답게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탐스러운 검은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액세서리는 과하지 않았고 걸친 옷마저 다 어울렸다.
어디에 있든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나는 사실 문제를 피하는 걸 싫어한다.
차라리 정면으로 부딪혀 깨지고 말지.
그러나 지금은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미 국장실에서 도망치듯 나왔는데 여기에 그 문제의 원인이 와 있었다니.
나를 보며 인사를 하려는 직원들에게 필사적으로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들어 입술 위에 세웠다.
조용히 하라는 뜻이다.
눈치 빠른 직원들이 못 본 척하면서도 눈동자를 굴려 나와 다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나는 입구 근처에 있던 캐비닛 옆에 기대 섰고, 조용해지자 다민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면 별문제 없는 건가요?”
“네. 큰 금액이 빠져나가서 혹시 증여 문제 있을까 해서였거든요. 적격 증빙이 없으니까 확인차 여쭤본 거였습니다.”
“아…… 세금계산서나 신용카드 영수증 말씀이시죠?”
“네. 근데 송금증이랑 의뢰 내역, 그리고 상대방 통장에 입금된 기록도 확인되니까 괜찮습니다. 문제없어요.”
“감사합니다.”
다민이 제출한 자료를 들여다보던 조사관이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근데 진짜 다민 씨가 팬클럽 부회장이셨어요?”
“아, 네.”
다민은 부끄러운 듯 목소리를 죽였다.
“팬카페 들어간 지는 좀 됐어요. 거의 초기 멤버인데…….”
묻지도 않았는데 팬 자부심 가득한 설명이 나왔다.
“그럼 회장님은 누구예요? 저한테만 살짝 알려주세요.”
그러나 조사관은 내 팬카페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야 그렇지.
나도 내 팬카페보다는 회장이 궁금하다.
내 생일에 전국 주요 지하철역에다 큼지막하게 광고를 걸어 버린 사건은 아직도 종종 회자되곤 했다.
특히나 나를 놀릴 때,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는 것이 지하철 광고판이었다.
다민은 소곤거리듯 말했다.
“한울 막내아들인 한대희 씨가 저희 회장님이에요.”
“헉, 정말요? 그래서 그렇게 지하철역에 광고 걸고 그랬던 거구나. 그건 이해가 가는데, 어떻게 자기 처남이 팬카페 회장을 할 수가 있지?”
나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세상에 믿을 놈이 하나도 없다더니 내 바로 옆에 호랑이 둘이 있었네.
사실 다민의 송금증을 보고 설마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확인 사살까지 당한 기분이었다.
“국장님께는 비밀로 해주세요.”
“어차피 보시면 눈치채실 텐데요?”
“일부러 얘기하지 않는 한은 모르는 척하실 거예요. 그런 분이니까요.”
그런 느낌이었구나.
나는 침울해졌다.
다시 도망치고 싶었다.
몰아치는 충격에 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다민이 고개를 돌렸다.
“앗.”
눈이 마주쳐 버렸다.
순간 머릿속에서 모든 생각이 사라졌다.
빨려 들어가듯 그 검은 눈동자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번개가 친 것처럼 머리가 하얗게 변하고, 주변 모든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
내 관심은 오로지 다민에게만 있었다.
다민은 날 발견하고 당황하더니 곧이어 조금 곤란한 얼굴이 되었다.
나에 대한 걱정이 드러나는 표정으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지금 이 순간마저도 그녀는 나를 배려하고 있었다.
내가 자신에게 신경 쓸까 봐.
그게 미안했고, 고마웠고, 사랑스러웠다.
썰물이 빠져나간 자리에 자그마한 생물이 자리를 채우듯, 잡생각이 사라진 내게 온갖 다양한 감정이 휘몰아쳤다.
내가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다민이 다시 곤란해했다.
“음, 들으셨구나. 걱정 마세요, 신경 쓰실 일 없게 할게요. 그동안 일부러 저희 정체 비밀로 활동했거든요. 혹시라도 기부금품법에 걸리거나 구설수 오를까 봐 모든 광고, 행사는 회장님과 제 사비로 진행했고요. 어…… 정 곤란하시면 회장, 부회장 자리 내려놓을게요.”
“아니에요.”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말이 나갔다.
뭐가 아니라는 건지.
나는 서둘러 말을 이으려고 했지만 뭐라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평생 연애 한 번 못 해본 놈이 여자 마음에 드는 말을 어떻게 알겠나.
국장이 된 후로 한 번도 당황한 적이 없었는데.
아니다, 장세훈과 강혜원이 국장실에서 약과를 입으로 나눠먹을 때 빼고는 한 번도 당황한 적이 없었는데.
내가 어쩔 줄 몰라 하자 다민이 조사관에게 양해를 구했다.
“다 끝났으면 일어나도 될까요?”
“네, 그럼요.”
“국장님, 나가서 얘기해요.”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다민을 보자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결국 내가 잡지 못했던 제주도의 추운 날.
그러자 나도 모르게 손이 나갔다.
“국장님?”
“어…….”
나는 다민의 손목을 잡은 상태였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저…….”
입술이 바싹 마르는 것이 느껴졌다.
정말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서, 그 긴 시간 동안 엉킨 것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라서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없다고 했잖아요.”
앞뒤 사정 다 자르고 한 말이었지만 다민은 바로 알아들었다.
“네.”
“지금은 눈 돌릴 수 있거든요. 많이 늦은 건 알지만…… 혹시 아직 안 늦었나요?”
다민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손을 내려다보더니 주위를 둘러보고, 다시 내 눈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배시시 웃기 시작했다.
“그 말을 듣는 날이 오긴 하네요.”
내가 미안해서 고개를 푹 숙이자 다민이 몸을 낮춰 나와 시선을 맞췄다.
다시 나는 고개를 들었다.
다민이 말했다.
“돌아봐 줘서 고마워요. 근데 보통 그런 말은 좋은 데 가서 하지 않나요?”
괜찮다는 건가?
나는 괜히 아차 해서 말했다.
“그건 프로포즈할 때 할게요. 지금은 그냥 도장만 찍어두는 걸로.”
“왜 도장만 찍어요?”
“누가 채갈까 봐서요.”
“참 일찍도 찍는다.”
“그래서 말인데. 언제, 시간 있어요?”
다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몸을 휙 돌리더니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손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뒤에서 경악에 가득 찬 숨소리와 환호가 따갑게 들리고 있었다.
손을 잡고 복도를 가로질러 가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기겁하며 옆으로 비켜섰다.
귀신을 본 듯한 반응이었다.
***
2030년. 36살의 국세청장 신재현은 굉장히 바빴다.
공청회 가랴, 내부 회의하랴, 국회 질문에 대답하러 가랴.
그나마 요즘에는 국회에서 바쁜데 불러서 미안하다며 서면 질의를 주로 보냈다.
그리고 오늘, 신재현은 국무회의에 참석해 있었다.
원래 ‘청장’은 보통 차관급 대우를 받는다.
그러나 국세청장은 그 업무 중요도 특성상 알음알음 장관급 대우를 해주곤 했다.
신재현이 청장이 된 후에는 아예 대놓고 장관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가 되었다.
국무회의에 참석해 의견을 내는 게 그다지 낯설지 않은 광경이었다.
“제가 대전에 있는 산업단지에서 간담회를 했는데, 거기서 어느 사장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원자재값이 오르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구요.”
“그걸 왜 국세청장님께 말씀을…….”
산업통상부 장관이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자신의 분야를 넘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야 일차적으로 사장님들과 접하는 게 우리 국세청 아닙니까. 애로사항 있으면 밀접한 저희 쪽이 먼저 듣는 건 당연하죠.”
“크흠, 원자재값 말씀하셨는데 그런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일일이 들어주면 끝이 없어요. 국제 정세라는 게 하루가 다르게 요동을 치는 법입니다. 주식시장만 해도 미국 증시에 국장이 얼마나 영향을 받습니까. 자고 일어나면 국장은 아무 잘못 없는데 뚝 떨어져 있고 그렇잖습니까. 원자재 가격 요동치는 건 그러려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사장님들이 가격에 민감하신 건 어쩔 수 없지만…….”
“제가 그걸 모르고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물론 장관님이 저보다 훨씬 더 잘 아시는 전문가시겠죠. 그래도 그런 거 확인하려고 그 자리 계신 거 아닙니까. 조사해서 뭐라도 나오면 사전에 알아내 처리할 수 있으니 좋고, 아무것도 없으면 다행이구요. 혹시 행정력 낭비될까 봐 그런 거라면 제가 도와드릴까요? 저 다음 주는 일정 없는데.”
신재현의 말에 산업통상부 장관이 기겁하며 자세를 바로 했다.
“아, 아닙니다! 무슨 말씀을요! 그런 거 전담하는 직원들 있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잘 알아보겠습니다.”
장관이 냅다 고개를 숙였다.
대통령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요즘 장관들이 일을 미룬다거나 어영부영 처리할 때면 가장 좋은 해결법이 있었다.
‘이번 국무회의에 국세청장 신재현 자리 비워놔요. 오랜만에 청장님 모시고 국정 얘기나 하게.’
신재현이 옆에 있는데 일하기 싫은 티를 내는 간 큰 장관은 없었다.
다들 일이 없어도 만들어내고 정 일이 없으면 바쁜 척이라도 했다.
일을 안 한다고 신재현이 세무조사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그랬다.
그에게 안 좋은 쪽으로 눈도장 찍히고 싶지 않은 것이다.
평소보다 기합이 잔뜩 들어간 장관들이 빠릿하게 보고하는 걸 보며 대통령은 내심 흡족했다.
‘내 임기에 청장 달아서 참 다행이네. 오래오래 했으면…….’
***
나는 목을 돌려 근육을 풀며 청장실을 나왔다.
청장 자리에 앉으면 한가할 줄 알았는데 여전하다는 게 신기했다.
예전과 별다를 게 없어서 오히려 친숙함이 든다고 해야 할까.
그래도 실무 뛸 때처럼 살인적인 야근에 주말 근무는 없어서 다행이다.
지금은 그 정도로 시간을 갈아 넣을 필요까진 없었을뿐더러, 내가 그렇게 일하면 전국의 세무공무원은 과로사할지도 모른다.
상사가 늦게까지 일하면 밑에서 그 배로 구를 수밖에 없으니까.
오늘은 서울 국무회의까지 갔다 와서 몸이 피곤했다.
얼른 집에 들어가고 싶었다.
예전 같으면 밤새도 멀쩡했는데.
확실히 나이를 먹으니 몸이 생각만큼 안 따라준다.
“청장님, 안녕히 가세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중간중간 만난 직원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1층으로 내려왔다.
터덜터덜 걸어 나가던 나는 로비에 서 있던 사람의 뒷모습을 보자마자 발걸음이 빨라졌다.
뛰는 듯 달려 나간 나는 웨이브 진 머리카락을 가진 그녀가 돌아보기 전에 뒤에서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누나! 언제 왔어? 많이 기다렸어?”
“나 내일부터 촬영이라서 며칠 집에 못 들어오거든.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얼굴 보려고 왔지.”
다민, 아니, 이제는 내 반쪽이자 전부인 누나가 내 머리로 손을 뻗어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잠시 끌어안고 온기를 느끼던 우리는 약속한 것처럼 동시에 떨어져 서로를 마주 보았다.
손을 겹쳐 잡아 깍지를 끼고 건물 밖으로 나섰다.
누나가 소곤거리듯 내 귓가에 대고 말했다.
귀에 숨결이 닿으며 간지러웠다.
그냥 말해도 들리는 것을 누나는 일부러 까치발을 들어가며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이다.
“어머님이 오늘은 친구분들이랑 놀고 내일 들어오신대. 일부러 비켜주신 것 같아.”
“엄마도 참, 그럴 줄 알았으면 용돈 좀 줄 걸 그랬다.”
“걱정 마, 이미 내가 드렸지.”
“아, 진짜? 역시 누나밖에 없어.”
나는 누나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살짝 입을 맞췄다.
훅, 하고 아찔한 향기가 끼쳐 왔다.
나와 만날 때는 딱히 향수를 뿌리지 않는데도 언제나 향기로웠다.
아니, 누나가 향기 그 자체였다.
“얼른 가자, 저녁이라 춥다.”
누나의 손을 내 주머니에 넣어주고 우리는 함께 걸었다.
출근하면 믿고 일할 수 있는 동료가 있고.
나의 직장은 누구나 입을 모아 일 잘한다고 말해주는 국세청이며.
탈세와 체납은 나날이 줄었고 우리 앞에 조사 못 할 성역은 없었다.
그리고 누군가와 함께 걷고 별것 아닌 얘기에 웃으며 퇴근한다.
아마 앞으로도 이 행복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조금 골치 아픈 사건이 일어나 국세청이 발칵 뒤집혀도, 시간이 흘러 내가 청장 자리에서 내려온다 해도.
이제는 이것이 나, 신재현의 평범한 일상이니까.
지금까지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국세청 망나니』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