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7화. 시간 있어요? (1)
신재현은 강원도에서 돌아오자마자 많은 사람들이 예견한 대로 차분하게 국세청장으로 향하는 길을 밟았다.
지서장을 마치고 바로 그가 발령받은 곳은 바로 인천지방국세청의 법인세과였다.
과장으로서 첫 부임지였지만 놀게 두지 않겠다는 의도가 느껴졌다.
인천은 항구가 있어 무역회사가 많다.
세무조사를 하다 보면 외국의 세법과 엮이는 일도 많고.
한마디로 관세, 국제조세, 무역에 관해 공부하라는 뜻의 발령이다.
그다음은 대전지방국세청의 송무국이었다.
아예 전국 국세청의 모든 국을 골고룰 돌리려는 듯했다.
그러다 33살의 신재현이 정착한 곳은 바로 서울청의 성실납세지원국이었다.
무려 30대 초반에 국장직에 오른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속도의 승진이었다.
과장까지는 봐줘도 국장은 무리수라는 의견도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신재현은 무언가 사고를 쳤다.
직함이 커지니 벌이는 사고도 스케일이 컸다.
어느 날은 지현석 검사가 찾아와 둘이 한참을 이야기하더니 휘하의 조사관 몇 명을 불렀다.
그리고 그대로 검사를 따라 훌렁 나가 버렸다.
결재를 올리러 간 과장들이 당황한 건 사고 축에도 못 꼈다.
퇴근 시간이 다 되어 돌아온 젊은 국장은 바리바리 무언가를 싸 들고 왔으니까.
과장이 어딜 다녀오셨냐고 물으니 밀수 정황을 발견해서 검사와 함께 현장에 갔다 왔단다.
심지어 국내 최대의 범죄조직이라 밀수 규모도 백억 단위였다.
검찰 측이 발견해 가져간 마약이 킬로그램 단위였다는 것이 기사로 떴으니까.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다.
또 언젠가는 대통령과 독대한다고 청와대에 훌쩍 갔다 왔다.
청장도 아닌 국장이 독대를 한다는 건 여러모로 파격적인 일이었지만 이것도 상대가 신재현이다 보니 그다지 놀랍지도 않았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청와대 근무하는 사람들 있죠? 한번 털어볼까 하는데요. 수석비서관 포함해서.
소문이 퍼지자 다들 신재현 밑에서 일하는 과장들을 안쓰러워했다.
-맨정신으로는 일 못 할 것 같다. 저기 과장하고 팀장들은 서랍 안에 술 한 병씩 숨기고 있는 거 아닐까? 국장님이 자리 비웠다고 할 때마다 한 잔씩 꺼내 마시는 거지.
신재현의 빠른 승진에 ‘아무리 청장님들이 예뻐하고 밀어준다고 해도 천천히 경험 쌓게 하면 되는 걸 너무 급한 것 아니냐’ 하고 안 좋게 보던 사람들도 학을 뗐다.
-저놈은 감당할 수 없는 놈이야. 빨리 위로 보내 버려! 저놈이 내 밑에 있다는 생각만 해도 끔찍해!
정말 그들 말대로 경험 쌓는답시고 오래도록 과장급에 놔뒀다간 자기 밑으로 오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었다.
그리고 전직 청장인 오낙현조차 힘겨워하던 걸 잘 아는 국장들은 질색했다.
자기 밑으로 신재현이 와서 그 사고를 수습하러 끌려 다니느니 차라리 군말 않고 박수나 쳐주는 게 나았다.
원래 사건사고라는 게 멀리서 볼 땐 구경거리지만 내 일이 되면 난감한 법이다.
그다음으로 구설수에 오른 것은 장세훈, 강혜원, 채유림 등의 일명 신재현 직속 팀원들이었다.
지금이야 각각 흩어져 팀장이나 과장으로 일하고 있었지만.
워낙 괴물 같은 속도의 신재현에 묻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 역시 엄청난 속도인 건 틀림없었다.
신재현이야 다들 납득했으니 그렇다 쳐도, 폐쇄적인 공무원 사회에서 팀원까지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단순히 줄을 잘 잡았다는 이유만으로 승진시킨 거라면 다른 의미로 문제가 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당사자인 팀원들은 물론 유능하긴 했지만 신재현만큼의 임팩트를 주진 못한 상태였다.
여기서 팀원들이 할 수 있는 행동은 하나다.
묵묵하게 실적을 내는 것.
신재현이 그랬듯이 말이다.
느리지만 어떤 꼼수보다 탄탄한 방법이라는 걸 이들은 알고 있었다.
팀원들은 신재현이 예전에 그랬듯 대상을 가리지 않고 조사했다.
이미 신재현이 누구든 조사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긴 했지만 쉽사리 나서는 이들은 적었다.
그 대부분이 바로 조사단 출신의 인원들이었으며 가장 열렬히 나서는 선봉이 원조 팀원들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신재현이 청에만 붙박여 있는 게 아니라 여기저기 쏘다니며 사고를 치자 반쯤 포기하는 의견도 생겨났다.
-저 국장님 밑에서 일할 수 있는 건 쟤네밖에 없어.
-아무리 그래도 쟤들까지 승진은…….
-그럼 반대하는 사람이 국장님 밑에 가서 일해라. 거기 팀장들 죽어나는 거 안 보여? 그렇다고 국장님한테 일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저 괴물 같은 업무량하고 또라이 같은 패기에 손발 맞출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어. 저대로 냅두면 과장, 팀장급이 사직서 쓴다고!
결국 팀원들에 대한 구설수도 유야무야 사그라졌다.
국세청장 오낙현의 후임으로 민치호가 청장 자리를 맡자 이제는 다들 신재현을 그의 후계자로 거론하는 일이 많아졌다.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나이와 승진 속도로 봤을 때 최연소 국세청장은 확정이었고, 이제 남은 건 그가 과연 몇 살에 청장 자리에 앉느냐가 최대의 관심사였다.
세무공무원들 사이에서는 신재현이 언제 국세청장이 될지 내기하는 사람도 생겼다.
그렇게 신재현과 다른 팀원들도 각자의 자리에 적응하고 있을 무렵, 강혜원은 미간을 좁히며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게…… 떴네?”
세무조사 대상자.
선정 방식은 여러 가지다.
일반 과에서 각 담당자들이 검토하던 도중 이상한 걸 발견해서 조사과로 넘길 수도 있고, 업종 특성 때문에 걸리거나 전수조사에 걸릴 수도 있다.
탈세 신고나 제보로 넘어갈 수도 있고, 세무대리인이 거래처의 세금을 고의로 탈세한 게 걸려서 다른 거래처까지 줄줄이 걸릴 수도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정말 순수하게 랜덤으로 걸릴 때도 있었다.
5년에 한 번은 나온다는 게 바로 이것이다.
물론 운이 좋으면 10년 동안 세무조사를 비켜 가는 사람도 있지만 반대로 운 나쁜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아는 사람이 랜덤으로 세무조사를 걸려서, 심지어 그 규모 때문에 세무서에서 감당하기 어렵다고 청으로 보냈다.
청으로 넘어온 목록을 훑어보다 그 이름을 본 순간 강혜원은 눈을 의심했다.
“아니, 다민 씨는 모범납세자 아닌가? 잠깐, 세무조사 면제가 언제까지였지?”
모범납세자 혜택 중에 세무조사 면제가 있다.
그리고 햇수를 세어보던 강혜원은 그 면제 기간이 끝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지금 선정…… 아, 방침 때문이구나.’
탈세하기 쉬운 특정 세액공제를 받으면 세무조사에 선정될 확률이 높아진다.
이건 예전부터 그랬는데 거기에 모범납세자가 추가되었다.
이건 신재현의 의견이기도 했다.
어떤 사람이든 면죄부를 줘서는 안 된다, 모범납세자는 물론 고마운 사람들이지만 면죄부를 주게 되면 변심할 수도 있다는 뜻에서였다.
모범납세자를 괜히 의심하고 귀찮게 세무조사 하는 것은 미안한 일이었지만 신재현은 이런 면에서 냉정한 사람이었다.
거기에 전직 모범납세자인 다민이 딱 걸린 것이다.
예명이 아니라 아직 청 내에서도 별 관심은 없는 것 같은데 강혜원은 잘 알았다.
다민과 개인적으로 대화를 자주 나눠본 건 아니었지만 많이 익숙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도 자주 보니 이젠 보이면 반갑다.
내적 친밀감이라고 할까.
초반에는 홍보 대사라는 이유로 종종 찾아왔고, 요즘에는 이유도 없이 놀러오곤 했다.
‘이유가 있긴 하구나. 우리 국장님.’
다민은 그냥 국세청만 찾아온 게 아니었다.
초반엔 홍보 대사 핑계를 대고 본청으로 자주 가서 다른 청장과 국장들에게 얼굴 도장을 찍었다.
어떻게 보면 밑작업이라고 볼 수 있었다.
또 놀러 와도 이상하지 않게.
그러다 신재현이 돌아와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자 이번에는 그쪽으로 얼굴을 비추기 시작했다.
신재현이 인천청으로 가면 그곳으로, 대전청으로 가면 또 그곳으로.
그렇다고 신재현에게 뭔가를 바라는 것 같지는 않았다.
놀러 온다 해도 다들 공무원이다 보니 손에 그 흔한 과자나 차를 사 오는 일도 없었다.
다민은 항상 빈손이었으며 대신 놀러올 때마다 사람들에게 밝은 얼굴로 인사하며 신재현을 구경하고 돌아갔다.
다민은 연기까지 진출하고 주연을 맡으면서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근처에 지나갈 일이 있으면 단 5분이라도 들렀다.
국세청의 또 다른 명물이었다.
홍보대사 기간이 끝나도 이제 찾아오는 게 어색하지 않았다.
다민이 신재현을 좋아한다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 국장님 본인만 빼곤 다 알겠지.’
강혜원을 혀를 찼다.
고백이라도 하지, 그렇게 쫓아다니기만 하는 건 강혜원의 성격상 너무 답답했다.
그렇다고 남의 감정에 이래라저래라 할 수도 없고.
이미 제주도에서 신재현과 다민 사이에 어떤 대화가 있었다는 걸 모르는 강혜원으로서는 둘이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다.
특히, 신재현에 대해서는 더더욱.
‘우리 국장님이지만 참 나쁜 놈이야. 왜 그걸 몰라? 그 정도 숙맥이면 욕먹어야지.’
그리고 비슷하게 눈치 없는 다른 한 명의 공무원이 떠올라서 묶어서 욕하기로 했다.
‘장세훈, 그 인간도 비슷해.’
다민의 세무조사에 관심이 생겨 중간보고서 겸 조사 과정을 보아하니 통장에서 뭔가 큰돈이 빠져나간 정황이 체크되어 있었다.
세무서에서 확인해서 넘긴 내용이다.
자세한 건 서울청에서 봐달라고 말이다.
강혜원의 표정이 대번에 심각해졌다.
‘뭐지? 좋은 징조는 아닌데.’
잠시 생각하던 강혜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는 사람이라고 봐주거나 혜택을 줄 생각은 없었지만 한번 얘기는 해봐야 할 것 같았다.
‘혹시 또 없는 건 아니겠지?’
불안한 마음에 문을 두드렸더니 다행히 국장실 안에 자리 주인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신재현만 있는 게 아니라 한 명이 더 있었다.
방금 전까지 강혜원이 속으로 욕했던 과장, 장세훈이었다.
“장 과장님은 일 안 하고 뭐 하세요?”
장세훈은 소파에 앉아 약과를 까먹다가 강혜원을 발견하고 손을 들었다.
“왔냐?”
“왔냐 같은 소리 하네! 약과 그거 손님용으로 둔 건데 장 과장님이 먹으면 어떡해요!”
괜히 얄미웠다.
강혜원이 구박하자 장세훈이 움찔하더니 테이블 위에 올려둔 약과를 슬그머니 아래로 내렸다.
테이블 밑에는 수납공간이 있었는데 사탕이나 약과 같은 주전부리가 몇 종류 있었다.
“나 놀러 온 거 아냐. 조사 얘기 하러 왔단 말이야.”
장세훈은 아직도 미련이 남았는지 입술을 핥더니 강혜원이 잠시 시선을 돌린 사이에 얼른 약과 하나를 까서 통째로 입에 넣었다.
다시 장세훈에게 시선을 준 강혜원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 큰 걸 넣고 티가 안 날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오으은 헉 해어.”
모르는 척 해달라는 뜻인가 보다.
강혜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이제는 국장 자리가 잘 어울리는 청년에게 입을 열었다.
“세무조사 대상에 다민 씨가 있어요. 혹시 아시나요?”
이들 사이에서 서론은 필요 없었다.
어차피 서로 바쁜 사람들이고 쓸데없는 미사여구로 시간 낭비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곧바로 용건으로 들어갔지만 신재현은 딱 한 번 검지 손톱으로 책상을 두드린 후 자신의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처음 들은 게 분명했다.
확인하는 동안 잠시 기다리면서 강혜원은 장세훈을 타박했다.
“정말 남자들은 나이를 어디로 먹는 거예요? 왜 이렇게 애 같아.”
“나 억울하다니까! 보고하러 온 거라고! 그리고 쟤는 남자 아니냐? 쟤도 애 같아?”
“그럼 장 과장님만 애 같다고 해둘게요.”
“왜 나한테만 그래!”
강혜원은 눈을 흘겼다.
이놈의 남자들은 정말 드럽게 눈치가 없었다.
그리고 눈앞에 또 다른 눈치 없는 놈 하나가 떡하니 앉아서 국장실 약과나 축내고 있으니 얄미운 것이다.
몇 번이고 직접적으로 말할까 하다가 ‘정작 저 인간은 마음이 없으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에 삼키길 일쑤였다.
직장 동료 사이로 지내자, 라는 말을 듣고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
지금 이런 식으로 별생각 없이 장난을 칠 수 있을까?
여러 복잡한 생각 끝에 강혜원의 화살은 신재현에게도 향했다.
그 역시 답답하게 굴긴 마찬가지였으니까.
“국장님. 말 나온 김에 여쭙는 건데요. 다민이 국장님 좋아하는 건 알고 계시죠?”
“네~ 그럼요~”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멜로디를 붙여 대답하는 신재현이었다.
“그럼 그렇지, 알 리가 없…… 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다민 씨한테 고백받을 뻔한 적도 있는데.”
강혜원은 잠시 멍하니 쳐다보다가 이내 씩씩거렸다.
“이 인간아! 알면서 모르는 척한 거였어? 이거 진짜 나쁜 새끼잖아!”
“어어, 여기 국장실인데…….”
“국장실에 우리밖에 없으니까 반말하지! 너는 좀 맞아야 해!”
강혜원이 옆으로 오더니 신재현의 등짝을 철썩철썩 때렸다.
약과에 손을 뻗던 장세훈이 놀라서 쳐다보았고 신재현은 의자에 앉은 채 몸을 비틀어 강혜원의 손을 피했다.
“악! 아악! 그만 때려요! 아니, 그런 분위기까지 간 건 맞는데 그때가 진짜 제가 바쁜 때였거든요? 제가 제주도 연수원으로 갔을 때 여러모로 윗분들 건드리기도 했고, 그 상황에서 다민 씨하고 사귄다고 들키기라도 해봐요. 다민 씨한테 얼마나 안 좋은 소문이…… 악! 누나, 진짜 아퍼!”
강혜원은 제풀에 지쳐 숨을 몰아쉬더니 신재현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못 사귈 것 같으면 아예 끊어내던지! 왜 자꾸 다민 씨가 찾아오게 만들어! 여지를 주지 말았어야지!”
“그때는 정말 딱 잘라 말했는데 다민 씨가 마음을 못 접은 것 같아서…… 그 상황에서 그것마저 하지 말라고 하면 되게 비참할 것 같아서요.”
“눈치는 있네.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신재현은 괜히 얻어맞았다고 생각했는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저보다는 장세훈 과장님이 문제죠. 정말로 눈치가 없으니까.”
“그건 그렇네요.”
흥미진진하게 싸움을 구경하던 장세훈이 화들짝 놀라서 손가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나? 내가 눈치 없다고?”
“네.”
“예. 정말로요.”
원조 팀원들은 함께 지낸 지 오래됐다.
서로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도 파악하고 있었고, 쉬는 날에는 만나서 친구처럼 논 적도 많았다.
직장에서는 깍듯하게 하더라도 사적인 자리에서는 말을 놓기도 했다.
당연히 강혜원과 장세훈 사이에서 기묘한 분위기가 흐른다는 건 다들 알고 있었다.
다혈질인 장세훈이 성질을 내다가도 강혜원의 말 한 방에 조용해지는 것도 일상다반사였고.
한마디로 예전부터 장세훈을 가장 잘 다루는 것이 강혜원이었다.
“내가 뭘 모른다는 건데?”
강혜원은 눈을 반개하며 장세훈을 찌릿 노려보았다.
그리고 신재현에게 물었다.
“저거 정말 모르는 걸까요, 모르는 척을 하는 걸까요?”
“저는 장 과장님이 정말 모를 수도 있다고 봅니다. 저 사람은 단순하거든요.”
“그건 그렇네.”
둘이 숙덕거리자 장세훈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둘이서만 아는 척하지 말고 나도 좀 알려줘!”
강혜원은 신재현과 눈을 마주쳤다.
신재현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강혜원은 잠시 고민하더니 진지한 얼굴로 뚜벅뚜벅 걸어가 소파 건너편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다짜고짜 물었다.
“저 좋아요, 싫어요?”
“으, 응? 어?”
평소엔 할 말 다 하던 장세훈이 보기 드물게 당황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처음인 것 같았다.
그가 눈동자를 피하자 강혜원이 재차 물었다.
“눈 돌리지 말고! 저는 장 과장님 좋아해요. 과장님은, 아니, 오빠는 어때요?”
장세훈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 아니. 싫은 건 아니고.”
“확실하게 말해줘요. 저기 나쁜 놈, 아니, 국장님처럼 여자 마음 태우지 말고. 싫으면 내가 알아서 마음 접을 테니까. 뒤끝도 없을 거예요. 오빠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만 말해줘요.”
장세훈은 뭐라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괜히 둘 데 없는 손을 꿈지럭거리던 장세훈이 문득 밑에서 약과를 주섬주섬 꺼내 강혜원의 손에 쥐여 주었다.
“너랑 같이 먹으면 뭘 먹어도 맛있을 것 같고, 나는 굶더라도 네가 먹는 모습을 보면 행복할 것 같아.”
장세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 나도 너 좋아해.”
강혜원은 흐뭇하게 웃더니 난데없이 테이블 위로 상체를 뻗었다.
그리고 약과 하나를 뜯더니 입으로 물어 장세훈의 입을 막았다.
입이 막힌 장세훈의 눈이 동그래졌다.
“미, 미친!”
그러니 기겁하며 소리친 건 신재현이었다.
“왜 여기서 해! 아니, 둘이 키스하려면 하지 간접키스는 또 뭐야! 약 올리나?”
입술을 떼고 반으로 쪼개진 약과를 우적우적 먹던 강혜원이 손끝으로 입술을 닦았다.
“키스는 우리 둘만 있을 때 할 거니까요. 왜요? 보고 싶어요?”
“아니, 절대 아닙니다.”
장세훈은 멍하니 영혼이 나간 얼굴이었고 강혜원은 의기양양하게 허리에 양손을 얹었다.
“아 참, 국장님. 국장님도 더 기다리게 하지 마세요. 확실하게 해요. 알았죠? 안 그럼 진짜로 화낼 겁니다.”
장난스럽게 말하던 강혜원의 얼굴이 무섭게 변하는 걸 본 신재현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그래도 다민 씨 세무조사 들어가면 국장님하고 따로 만나는 게 좀 부적절해 보일 수 있으니까 조사 끝날 때까진 봐드릴게요.”
“아, 그건 걱정 없어요. 다민 씨 탈세 하나도 없거든요. 금방 끝날 겁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결론을 내는 신재현을 보며 강혜원이 잠시 어리둥절했다가 이내 납득했다.
예전부터 그랬다.
어린 상사는 자료를 살펴보면 바로 답이 나오는 능력자이자 그들의 자랑이었다.
“그럼 더 잘됐네. 근데 통장에서 빠져나간 건 뭐지? 금액이 꽤 크던데요.”
“어디 보자, 적격증빙은 없는데 송금명세서 제출한 게 스캔되어 있네요. (주)지하철광고? 아니, 회사 이름이 지하철광고야?”
“왜요, 이름 잘 지었네. 말 그대로 지하철 광고 전문으로 수주하는 회사인…… 어?”
말을 하던 강혜원이 멈칫했다.
옛 팀원들은 신재현을 놀리기 위해 그의 팬카페에 가입한 상태였다.
신재현은 부끄럽다며 아직도 가입하지 않았지만.
때문에 그의 앞에서 팬카페 글을 읽거나 그의 차림새를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놀리기 일쑤였다.
그런데 가끔, 일반인이라면 찍을 수 없는 사진이 올라올 때가 있었다.
주변의 사무실이나 사람들은 모자이크 처리를 해서 잘 가렸지만 딱 봐도 청 내부에서 찍었겠다 싶은 사진들.
어느 공무원인가 했는데.
생각해 보니 공무원이 아무리 개인적인 팬이라고 해도 청 내부의 사진을 찍을 리가 없지 않은가.
실수로 내부 자료라도 찍었다가 들키면 징계감인데.
다민이 온 날 신재현이 조금 화려한 넥타이를 하고 왔는데 하필 그게 팬카페 사진첩에 올라간 것도 기억났다.
이쯤 되면 우연이 아니라 합리적 의심이다.
거기에 다민의 통장에서 돈이 빠져나간 날짜가 신경 쓰였다.
“저기요, 국장님 생일이 11월 4일이죠?”
“네. 아직 한참 남았는데요.”
“아니, 그게 아니라…….”
강혜원은 뭔가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신재현의 지난 생일에는 팬카페에서 전국 주요 지하철역에 큼지막한 생일 축하 광고를 걸었다.
회원들에게서 돈은 하나도 안 걷고 오로지 회장과 부회장만의 사비로 진행했다는데 대체 정체가 뭔지 궁금할 정도의 돈지랄이었다.
강혜원은 최소한 둘 중 한 명이 누구인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민의 통장에서 거금이 나간 날짜가 딱 11월 4일이었기 때문이다.
“국장님, 진짜로 다민 씨하고 진지하게 얘기해 보셔야 해요.”
쓸데없는 말 대신에 당부를 남긴 강혜원은 아직도 얼이 빠져 있는 장세훈을 잡아끌었다.
“갑시다! 내 남자!”
“응? 그래, 가자! 근데 자기라고 불러도 돼?”
“단계는 천천히 밟죠?”
“우리 나이가 몇인데 천천히 밟아. 몇 개쯤은 뛰어넘어도 되지 않냐?”
“그럼 일단 저녁에 라면부터 먹고 생각해 봅시다.”
“내가 봐도 좋은 생각인 것 같아.”
뒷모습만 봐도 신나 보이는 두 남녀가 국장실을 나가자 시끌벅적하던 사무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신재현은 갑자기 적막함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잔인한 짓을 했는지 깨닫고 천천히 얼굴을 감쌌다.
“미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