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493화 (외전) (493/500)

외전 1화. 도원결의 side.민치호 (1)

2천 년대 초반.

IMF는 너무나도 큰 상처를 남겼다.

언젠가 역사책에는 단 한 장의 서술로 간략화될 수 있겠지만 아직은 온몸으로 그 파괴력을 느끼는 시절이었다.

-재계 순위 23위의 XX그룹 파산.

절대 무너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기업들이 줄도산했다.

심지어 이름만 들어보면 알 만한 기업들, 재계 순위가 매겨지는 대기업마저 무너지고 조각조각 났다.

일부 사업 부문만 남기고 나머지는 ‘처리’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여기서 처리의 과정은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

XX전자, YY컴퓨터, TT자동차 등 대기업 계열사 중에서 꽤 큼직한 것들도 칼질을 피하지 못 했다.

대기업이 줄줄이 무너지는데 중소기업은 어떻게 버티겠는가.

너무 많이 파산해서 뉴스에 일일이 나오지 않을 정도의 숫자가 사라져 갔다.

사람이 죽는 건 일도 아니었다.

뉴스에 그런 소식이 나온다고 해도 주의 깊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당장 내가 힘든데 남이 죽든 말든 마음 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옥이었다.

IMF가 끝나고 나서도 경제가 금방 회복되지는 않았다.

그 여파는 계속되었고 인수&합병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돈이 없는 기업은 사업부를 팔아 자금을 마련하고, 이제 여유가 생긴 기업은 가치가 낮게 평가된 우량 기업을 잡아먹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쌀 때 산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직 전국은 개판이었다.

전산조차 없던 옛날보다는 조금 나았지만 여전히 부정부패는 판을 치고 있다는 뜻이다.

기업들이 줄도산하는 걸 보고 정부는 여러 감시 체제를 만들려 했지만 그게 어디 한 번에 바뀌겠나.

그것은 세무서도 마찬가지였다.

“하하하! 언제고 한번 신경 썼어야 했는데 소홀해서 죄송합니다.”

“아이고, 무슨 말씀을요. 지금이라도 이렇게 불러주셨으니 괜찮습니다.”

“과장님께서는 마음 씀씀이도 참 좋으십니다. 제가 종종 좋은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모르는 척하시면 안 돼요.”

“어허, 본부장님이야말로 일개 과장이라고 모르는 척하시면 안 됩니다.”

“일개 과장이라뇨. 국세대 출신에 앞으로 올라가실 일만 남은 분을 제가 감히 어떻게 함부로 대하겠습니까.”

언뜻 보면 덕담이 오가는 회식 자리였다.

그러나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는 면면을 보면 전혀 어울릴 수 없는 이들이 섞여 앉아 있었다.

한쪽은 세무서 조사관, 한쪽은 인수&합병의 주체인 기업의 전략본부.

한자리에 앉아 술을 마신다는 건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으나 이들은 익숙하게 앉아 있었다.

심지어 조사관들은 거만한 태도로 술을 받았다.

따라주는 이는 합병 기업 전략 본부의 직원들이었다.

그냥 직원도 아니다.

회계사나 변호사 같은 전문직들이 섞여 있었다.

회사에서도 엘리트 취급을 받는 기업의 두뇌였고 국가에서도 고급 인력으로 평가받는 이들이 세무서 조사관에게 술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세무조사를 잘 부탁한다며 아부를 떨면서.

“이쪽은 한 계장이라고, 앞으로 귀사의 일을 맡을 담당자입니다. 일을 잘하는 분이니 무슨 일 있으면 한 계장에게 말하면 될 겁니다.”

“아, 그렇습니까? 계장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챙그랑!

또 한 번, 술잔과 덕담이 오갔다.

조사관과 조사 대상이 만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데도 다들 거부감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당연하다는 얼굴이었다.

아니, 얼굴이 썩어 들어가는 사람들이 몇 명 있긴 했다.

주로 끝자리에 앉은 이들이었는데 다들 공통점이 있다면 젊고 경력이 짧다는 것이었다.

딱 봐도 세무서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풋풋한 청년들이었다.

마주 보고 앉은 기업 본부의 직원들 역시 비슷한 나이대로 배치되었는데 그들도 그다지 얼굴이 좋아 보이진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표정 관리를 잘 하지 못했다.

힘들게 공부해서 대기업에 들어와 엘리트 취급을 받았는데 공무원에게 술이나 따르는 현실이 탐탁지 않은 것이리라.

그러나 그들은 프로였다.

애써 웃으며 분위기를 맞춰주었다.

이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

지금의 꺼림칙한 기분은 몇 년 안 되어 사라질 거라고.

회식 몇 번 거치다 보면 얻어먹는 것에 익숙해지고, 그러다 보면 2차, 3차도 함께하게 된다.

대기업 직원들은 조사관을 보고, 조사관은 대기업 직원들을 보며 서로 동질감을 느낀다.

거기에서 친밀감이 생기고 나중에는 밥 한 끼가 아니라 다른 것도 주고받게 된다.

그렇게 또 하나의 ‘공생 관계’가 생긴다.

시작은 언제나 작았다.

3천 원짜리 백반, 5천 원짜리 찌개 하나.

오늘 같은 경우는 평소에도 종종 하는 회식의 연장일 뿐이었다.

당장 말단 직원들끼리도 살갑게 대화를 나누는 경우도 보였다.

“조사관님 고생 많이 하시겠네요. 언제부터 야근이세요?”

“아, 저희는 아마 모레부터 들어갈 것 같습니다. 제가 좀 귀찮게 할 수도 있는데 양해 부탁드립니다.”

“조사관님 일하시는데 양해는요. 원하는 자료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하십쇼. 제가 재깍 찾아다 드리겠습니다. 아, 대신에 조금 느려도 봐주세요. 아시다시피 자료 양이 방대하잖습니까.”

“아하하, 그럼요. 서류 찾는 시간은 있어야죠.”

“너그러우신 분이 담당이셔서 다행입니다.”

서로 조금씩 봐달라며 친분을 만들고 있었다.

‘까고 있네.’

중간 즈음에 앉아 있던 7급 공무원 민치호는 옆 테이블을 흘겼다.

말단이 앉은 테이블에서는 눈치 빠르고 출세욕 있는 놈들이 빠릿하게 인맥을 만들고 있었고, 이미 인맥이 형성된 과장의 테이블에서는 눈꼴신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중간에 앉은 민치호에게는 아무도 정답게 말을 붙이지 않았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공무원 연령 제한인 서른 살에 늦깎이로 붙은 민치호는 학연, 지연, 혈연 중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물론 말단 공무원이라도 나중에 어떤 도움을 받을지 모르니 친하게 지내서 나쁠 건 없다.

그래서 매번 그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있었지만, 그때마다 민치호의 험악한 얼굴을 보면 알아서 떨어져 나갔다.

그게 바로 두 번째 이유였다.

너무 험하게 생겼다.

공무원이 아니라 경찰서에서 봐야 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나마 세무서 동료끼리 대화할 때는 민치호가 웃으며 잘 해주려는 노력이라도 했다.

동료들 사이에서도 평가 역시 나쁘지 않았다.

‘무섭게 생겼지만 막상 친하게 지내면 잘해줌. 성격도 좋음. 일 열심히 함.’

그러나 민치호가 작정하고 정색하면 말 붙이기도 힘들었다.

당장 지금만 해도 그랬다.

건너편 자리에 앉은 직원 하나가 괜히 살갑게 굴었다.

“민치호 조사관님이시죠? 일 처리 깔끔하게 하시기로 유명하다면서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이 직원 역시 접대는 꽤 해본 사람이었다.

하다못해 ‘누구한테 들었습니까?’라는 퉁명스러운 대답만 나와도 적당히 받아칠 수 있었다.

그런데 민치호는 잔에 술을 따르느라 고개를 숙인 채로 눈만 치켜떴다.

“흐읍!”

효과는 굉장했다!

대기업 직원은 단 1초도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옆에 앉은 사람들도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자 테이블 전체가 조용해졌다.

다들 떠들썩한 가운데 한 테이블만 분위기가 우중충하자 눈에 띄었나 보다.

과장이 혀를 찼다.

“또 민치호야? 저놈은 저거 별것도 아닌 게 똥폼 잡으면서 있는 척은 다 해. 입맛 딱 떨어지네. 에잉.”

민치호보다 과장이 어렸는데도 반말을 서슴지 않고 했다.

그도 그럴 게, 과장은 국세대 출신으로 장차 앞길이 훤히 열려 있었고 민치호는 뒤에 아무것도 없는 평범한 공무원이었기 때문이다.

험악한 인상 때문인지 건달이었다는 소문도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게다가 요즘 들어 민치호는 미묘하게 과장과 대립각을 세웠다.

대놓고 반항하는 것은 아니지만 과장이 일을 시키면 못마땅한 표정을 짓곤 했다.

아니면 지시사항을 못 들은 척 뭉개기도 했고.

민치호라고 무조건적으로 반기를 든 건 아니었다.

해야 할 일은 당연히 했다.

가끔 과장이 넌지시 내려 보내는 이상한 지시를 뭉갤 뿐이었다.

예를 들어 기한이 이미 지났는데 신고서를 은근슬쩍 끼워 넣으라는 것 말이다.

그렇다 해도 공무원 사회, 아니, 일반 회사에서도 이런 항명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과장은 민치호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다.

민치호가 고개를 돌리자 과장이 움찔했다.

기 싸움에서 밀린 게 분했는지 과장은 술기운을 빌려 큰소리를 쳤다.

“저놈 저거 꼬라보는 거 보소. 뭐 어쩌라고. 넌 날 과장이라고 생각하긴 하냐?”

“허허, 과장님. 진정하시죠. 민 조사관도 그러지 말아요. 오늘같이 좋은 날에.”

과장과 같은 테이블에 앉은 계장과 기업 본부장이 그를 달래며 술을 퍼 먹였다.

계장도 민치호에게는 함부로 말하지 못했다.

그저 앞길이 창창한 과장만이 직위를 믿고 날뛸 뿐이었다.

이 자리에서 과장과 민치호가 부딪치면 남 보기에도 좋지 않다.

계장은 ‘과장님 술이 과하셔서 조금 말씀이 지나치신 듯합니다’라며 얼버무렸고 본부장 역시 적당히 맞장구쳤다.

어느 정도 술이 들어가고 취한 사람들이 속출했을 때, 본격적으로 본부장은 작업을 시작했다.

“오늘 특별 상여가 있다고 합니다! 과장님께서 위에 말씀 잘 하셔서 내려온 거니까 다들 감사히 생각하고 열심히 일하세요. 다른 과에서 질투하니까 비밀로 하는 거 잊지 말고. 새어나가면 앞으로는 금일봉 없습니다.”

“와아!”

“과장님 감사합니다!”

그런데 흰 봉투를 나눠주는 사람이 이상하게도 대기업 직원들이었다.

말로는 특별 상여라고는 했지만 이 돈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공무원도 상여금이 나오긴 하지만 그걸 왜 기업 직원들이 준단 말인가.

눈 가리고 아웅이나 다름없었고, 사실상 대놓고 알려주는 거나 다름없었다.

자신의 앞에 내민 흰 봉투를 본 순간 민치호는 욕지기를 느꼈다.

“저는 속이 안 좋아서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과장이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찼지만 붙잡지는 않았다.

민치호가 비틀거리며 식당을 나섰다.

계산은 하지 않았다.

항상 그랬으니까.

민치호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이젠 어색하지도 않구나. 나도 똑같은 놈이야. 뭘 깨끗한 척을 하겠다고.’

밖으로 나오자 찬바람이 불었다.

조금 쌀쌀했지만 오히려 나았다.

착잡한 얼굴로 가게 밖에 서서 담배를 물고 있으려니 20대쯤 되어 보이는 말단 공무원 하나가 튀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얼마나 술을 먹었는지 하늘을 쳐다보며 욕설을 날리고 있었다.

“이 나라는 망했어! IMF가 뭐야, 그냥 폭삭 망해야 돼! 이딴 식인데 뭔 개혁이고 경제 부흥이야! 그냥 망해라! 망하라고 십새끼들아! 금 모으기 한다길래 부모님 혼수까지 싹싹 긁어서 냈는데! 퉤! 다 뒈져 버려!”

거리를 걷던 사람들이 슬금슬금 피해 갔다.

딱 봐도 미친놈이었다.

민치호가 멍하니 고개를 말단 공무원을 쳐다보았다.

같은 과였지만 얘기는 별로 나눠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생긴 건 멀쩡해 가지고…….”

“뭐?”

말단 공무원이 풀린 눈으로 민치호를 보았다.

제정신이라면 같은 과의 공무원 선배라는 걸 알아봤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뭘 꼬라봐. 꺼져!”

민치호는 당황했다.

살면서 이런 욕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험한 인상 때문이었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말단 공무원은 양팔을 휘적거리더니 차도로 다가갔다.

민치호가 어어, 하는 사이에 욱!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쏟아졌다.

“우웨엑!”

“저런…….”

민치호는 천천히 말단 청년에게 다가가 등을 두드려 주었다.

술 취해서 눈에 뵈는 게 없는 청년에게 욕까지 들은지라 섬세함은 없었다.

-퍽! 퍽! 퍽!

민치호의 주먹이 등짝을 내리치자 청년이 침을 뱉고는 소리쳤다.

“아파, 새끼야!”

“어쭈.”

욕을 먹었는데도 민치호는 왠지 웃음이 나왔다.

청년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차례 토하고 나서 그런지 술이 좀 깬 모습이었다.

자신이 방금 무슨 짓을 했는지, 누구에게 욕을 했는지 눈치챈 듯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렸다.

어떻게 하나 보자, 하고 청년을 지켜봤더니 그는 이내 다시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못 알아본 척을 한 것이다.

“너 인마, 눈동자 굴러가는 거 다 봤어. 일루 와.”

“어, 어어! 조사관님! 아악!”

민치호는 청년의 뒷덜미를 잡고 질질 끌었다.

청년이 발버둥 쳤지만 쉽사리 벗어날 수가 없었다.

정신은 돌아왔지만 뿌리칠 수 있을 정도로 술이 깬 건 아니었다.

“아, 잠시만요! 살려주세요!”

“내가 너 죽인다고 했냐? 얘기나 좀 하자고. 그냥 가긴 그렇고, 저기나 들어가자.”

민치호가 가리킨 곳은 치킨집이었다.

졸지에 욕한 선배와 2차를 하게 생긴 청년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내가 미쳤지. 어떻게 술만 들어가면 개가 되냐. 그런 말은 하지 말아야 했는데~”

“자, 헛소리 그만하고 앉아 봐.”

구석에 자리를 잡은 민치호는 노래를 부르는 청년을 끌어 앉혔다.

민치호가 바깥쪽에, 청년은 안쪽에 앉아 있었기에 도망칠 수도 없었다.

청년은 포기하고 궁시렁거리며 메뉴판을 들었다.

“비싼 거 시킬 겁니다. 저기서 얼마 못 먹었단 말이에요.”

“치킨보다 고기가 비싼데 고기를 먹었어야지 왜 술이나 처먹어? 너 바보야?”

“……정말로 비싼 거 시키겠습니다. 골뱅이랑 마늘치킨이요. 술은 소주로.”

“또 술 먹고 욕하게?”

“……치사하게.”

“알았다, 인마. 이미 배부르게 욕먹었는데 뭔 헛소리를 해도 다 들어줄게. 시켜라, 시켜. 근데 치킨엔 맥주 아냐?”

“아까 술 먹은 거 다 토해서 위장에 하나도 안 남았어요. 소주 먹을 겁니다.”

“그, 그래…….”

주문을 마친 후 민치호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너 이름이 뭐냐?”

청년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같은 팀은 아니어도 보통 같은 과 이름은 다 외우지 않나요? 전 민치호 조사관님 잘 아는데.”

“……남한테 관심이 없어서.”

청년은 투덜거리며 미리 나와 있던 과자를 씹었다.

“이선균입니다. 7급이고 작년에 공무원 붙었어요.”

“그래, 이선균. 이제 기억나네.”

“거짓말하지 마세요! 딱 봐도 처음 듣는 표정이었는데!”

이선균은 표정이 풍부한 얼굴로 타박했고 민치호는 소리 내어 껄껄 웃었다.

아까는 맛있는 고기를 먹으면서도 답답했는데, 이제야 속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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