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490화 (490/500)

490화. 선한 영향력 (1)

한울 그룹의 본사 중역 회의.

가장 상석에 앉은 것은 당연히 회장인 한우렬이었고 중요 계열사의 사장 직함을 맡은 직계 가족들이 서열 순으로 앉아 있었다.

그런데 평소와 다른 모습이 있었다.

이 자리에 회장의 막내아들이 앉아 있던 것이다.

두 형이 물어뜯고 싸우는 꼴이 보기 싫다며 뛰쳐나가 연예인 소속사를 차리고, 배우와 결혼한 내놓은 자식 취급받던 한대희였다.

그러나 요즘 들어 두각을 드러내며 중역 회의에도 곧잘 참석하고 있었다.

차기 총수 후보로 암암리에 경쟁하고 있던 장남과 차남이 한울 세무조사 이후로 입지가 확 떨어지면서 사촌 형제들까지 한울의 다음 주인이 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 와중에 신재현의 매형이자 감사인 한대희는 혜성처럼 나타난 후보 취급을 받고 있었다.

경쟁자로 보고 있지도 않던 막내까지 중역 회의에 참가하자 기존의 총수 후보 둘은 그들끼리의 싸움을 멈췄다.

한울의 살을 깎아먹던 미친 암투는 그만두고 각자 회사를 키우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회장이 당초 원하던 대로였다.

‘음, 이제 좀 직함이 어울리는데.’

회장은 서류철을 들여다보고 있는 막내아들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둘째 아들 바로 옆에 앉은 한대희는 중역 회의의 부담감은 전혀 보이지 않는 태도로 서류철을 들추고 있었다.

처음 감사실에 들어갔을 때는 대변이 뭐고 차변이 뭔지도 몰라서 헤매더니, 지금은 제법 능숙하게 숫자를 읽을 줄 알았다.

자고로 회사 일의 기본은 재무를 보는 데서 시작한다.

경영이야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이 정도라면 작은 회사 정도는 맡겨도 문제가 없을 듯싶었다.

물론 한대희는 아직 자기만의 회사인 엔터테인먼트를 갖고 있다.

나름 견실하게 경영하고 있는 대표고.

그게 회장의 눈에는 구멍가게로 보여서 문제지만.

‘뭐 줄 만한 게 없나? 대희가 연예계 쪽 일을 계속 하고 싶은 거면 아예 소속사를 한울에 합병하고 업계 톱급 연예인 데려와서 회사 키우는 것도 나쁘진 않겠는데. 지금 회사는 너무 작아. 그거 갖고 어디 일을 배울 수 있겠나.’

정작 본인이 알면 펄쩍 뛰어오를 계획을 짜고 있었지만 회장의 표정은 근엄하고 진지했다.

그러나 눈동자만은 숨기지 못한 것이, 회장은 계속 막내아들을 흘끔흘끔 관찰하고 있었다.

막내는 지금 막 첫째네 회사인 우리마트24의 분기 보고서를 읽고 있는 참이었다.

“이번 분기 실적 보고서는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큰형, 아니, 한재희 사장님. 세부 항목을 보니까 이번에 전체적으로 기기를 바꾸시던데…….”

막내가 당당하게 회의에 앉아 있는 것을 못마땅한 얼굴로 쳐다보던 첫째가 화들짝 놀랐다.

막내가 무서워서는 아니었다.

일전에 세무조사 때 첫째와 둘째가 맡았던 회사만 가산세가 부과된 걸 보고 회장이 진노했기 때문이다.

승승장구하던 차기 총수의 위치에서 막내에게까지 지적을 당해야 할 정도로 위상이 격하되었기 때문이다.

막내한테 겨우 비품 구입 계약 때문에 잔소리 듣는 건 짜증이 났지만 잘 대응해야 했다.

비자금 만드냐는 의심을 던진 거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막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첫째가 얼른 대답했다.

“전자기기도 소모품입니다. 특히나 우리는 마트라서 어떤 기기든 항상 빠르고 정확하게 작동되도록 유지해야 합니다.”

옳은 말이었지만 막내는 물러서지 않았다.

“보통은 번갈아 가면서 교체하지 않나요? 전 지점을 이렇게 한꺼번에 교체하나요?”

“기기 업체와 특별공급 계약을 맺어서 그렇습니다. 3년 전, 우리마트가 폭발적으로 시장 점유율이 상승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한꺼번에 지점을 열었죠. 때문에 노후된 기기 교체 시기가 거의 동일한 겁니다. 각각 지점마다 교체할 노후 기기를 확인하도록 지시했고, 교체할 필요가 있는 기기만 교체할 겁니다. 특별공급 내용은 뒤에 계약서를 보면 알겠지만 대량 구매 시 20%를 할인한다는 내용입니다. 노후 기기 지점별 실사도 진행하였습니다.”

“그렇군요. 이해했습니다.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회장은 자식들 간의 공방에 끼어들지 않고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딱히 지적할 게 없었다.

막내는 계약에서 비자금 의심을 짚어냈고 첫째는 그 의심을 깔끔하게 털어냈다.

옛날에 첫째와 둘째끼리 하던 비방보다는 훨씬 건전하고 생산적이었다.

‘짧은 시간에 많이 배웠네.’

회장은 바로 옆에 앉아 있는 CFO에게 따스한 눈길을 보냈다.

돌아온 탕아를 사람 구실 할 만큼 가르쳐 놓기까지 CFO와 감사실 사람들이 얼마나 고생했을지 알 만했다.

‘보너스 넉넉하게 챙겨줘야겠군.’

회장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을 키우는 데도 시간과 돈이 들어간다.

경영을 가르치는 학원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닌 이상, CFO와 감사실의 노고를 모른 척할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어찌 보면 한대희는 낙하산이나 다름없이 갑자기 나타났다.

회장의 막내아들이니 일반 직원처럼 혼내가며 가르칠 수도 없고, 상사를 모시는 기분으로 하나하나 가르쳤겠지.

그 보상은 역시 돈이 최고다.

윗사람은 입보다 직원 통장에 꽂아주는 금액이 무거워야 한다.

“한울면세점의 전년 대비…… 응?”

막힘없이 잘 말하던 막내가 별안간 핸드폰을 들었다.

무슨 연락인지는 몰라도 중역 회의 중에 받은 거면 심상치 않은 일이 분명했다.

막내아들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해가는 것을 본 회장은 따로 CFO에게 눈짓했다.

“긴급히 들어온 소식 있었어요?”

CFO도 핸드폰을 꺼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요?”

회장은 눈을 빛냈다.

긴급 안건이라면 회장과 CFO 쪽에 따로 연락이 들어오게 되어 있다.

그러니 먼저 정보를 손에 넣었다는 것은 보고 라인을 따로 틀어쥐었다는 뜻이다.

자신만의 믿을 수 있는 사람을 구축했다는 뜻이고.

‘이놈이 정말 난놈인가? 그새 자기 사람을 심었어?’

회장이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데 한대희가 벌떡 일어섰다.

꽤 다급하면서도 흥분한 얼굴이었다.

“나머지는 서면으로 각 부서에 전달드리겠습니다. 저는 이만.”

“자, 잠깐! 대희야? 한대희!”

당황한 회장이 불렀지만 한대희는 아랑곳없이 주섬주섬 물건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 정도로 급한 일이라면 회장도 대처에 나서야 했다.

“무슨 일인지 말은 해야지!”

만약 중요한 정보를 회장은 모르고 한대희만 아는 거라면, 회장의 장악력과 경영 능력에 의심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물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도 다급해 보였기 때문이다.

한대희는 매우 진지하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신재현 지서장님이 일을 치셨답니다. 저는 뉴스를 봐야 해서요. 그럼 이만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저 미친놈…….”

후계 구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역 회의를 뉴스 봐야 한다는 이유 하나로 박차고 나가는 행태에 임원들이 입을 떡 벌렸다.

한울의 막내아들이 신재현 팬인 건 이미 회사 내에 퍼져 있었다.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광팬인 줄은 몰랐지만.

경쟁자 입장인 첫째와 둘째는 ‘알아서 나가주네’하며 히죽거렸고 회장은 단숨에 피곤한 얼굴이 되어 이마를 짚었다.

“요즘 들어 진득하니 붙어 있길래 정신 차린 줄 알았더니…… 하긴 원래 저놈은 회사 일에 관심이 없던 놈이었지.”

마음도 없던 아들을 억지로 감사실에 붙여놓은 건 회장 자신이었다.

최근엔 그나마 열심히 한다 싶었더니 그게 다 신재현이 조용해서 그랬던 거였다.

한대희는 정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 버렸다.

말하자면 팬 활동이 본업이고 회사는 부업인 느낌이었다.

“어쩌면 회사 일에 더 중역을 맡기 싫다고 시위하시는 걸 수도 있습니다. 후계 싸움이 싫어서 집 나가신 분 아닙니까.”

계열사 사장 하나가 한대희의 깊은 뜻을 헤아렸다.

물론 과대 해석이었다.

회장은 마이크를 툭툭 두드렸다.

“그런 거 신경 쓸 놈이 아니니 그냥 내버려 두세요. 할 일은 하고 노는 놈이니까. 저놈이 제출한 보고서는 나중에 재무이사가 따로 확인하기로 하고, 회의 속행합시다.”

각 계열사 사장의 보고가 이어지면서 회장은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저놈의 버릇만 고치면 아들놈들 중에서는 가장 나은데.’

여러모로 후계 구도에 고민이 깊어지는 날이었다.

***

신재현이 강원도의 지서로 간 이후 팬카페는 조용했다.

빠가 까를 만든다고, 과도한 찬양은 안티를 부른다.

팬카페 회원들은 별일이 없을 때는 뉴스나 커뮤니티 등지에서 활동하지 않기로 불문율이 정해져 있었다.

신재현의 사진을 돌려보거나 뉴스를 퍼 오는 등의 일명 ‘그들만의 세상’에서 행복하게 지냈다.

그러나 이들은 슬퍼하지 않았다.

‘어차피 우리 갤주님은 곧 사고를 치실 거야.’

‘강원도에 갔다고 해서 조용히 있을 사람이 아니지. 곧 우리가 날뛸 뉴스가 온다고!’

이들의 예상은 들어맞았다.

문제가 있다면 강원도로 간 지 한 달 만에 뉴스를 타서 그렇지.

[기사] 신재현이 또 해냈다, 강원도 제3지서 조사 착수

[기사] 지역사회 카르텔 파헤치기

[사설] 어째서 관민유착이 생기는가

[사진] 신재현 강원도 외근 사진(코트)

[기사] 국세청장 기자회견 : 우리는 뛰어난 자정 능력을 갖추고 있다.

팬카페는 오랜만에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새로고침 할 때마다 곳곳에서 퍼온 기사가 올라왔다.

그중 조회 수가 가장 많은 것은 신재현의 외근 사진이었다.

강원도로 가버리니 사진을 구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신재현의 팬은 어디에나 있었다.

당장 올라온 사진만 해도 신재현이 한창 지역 유지들을 만나러 혼자 돌아다닐 때의 모습이었다.

폰카로 찍은 거라 화질은 그닥 좋지 않았지만 이것도 귀했다.

-호오? 작년 겨울 조사단 발족 때부터 입기 시작한 코트로군요?

-평소엔 잘 안 입다가 어디 중요한 자리 갈 때만 입던 그거네

-아! 행복하다! 올려주신 분 너무 감사합니다.

-나도 강원도 갈까? 가서 찍어올까?

└하지 마세요. 일하는 데 방해하면 안 됨. 들키면 바로 카페 회장님이 탈퇴시켜 버림

-사진도 중요한데 뉴스 좀 보세요! 여기만 조회 수 만 단위인 거 실화입니까

-기사 퍼 온 거 말고 네이버 뉴스에서 직접 보고 와서 그래요.

└그럼 카페에 뉴스 탭은 왜 있는 거임?

└뒤늦게 온 사람들 찾아보기 쉬우라고

└아하!

팬카페는 축제 분위기였다.

그리고 의외로 팬카페가 아닌 일반 뉴스 탭이나 커뮤니티도 상황은 비슷했다.

-다른 기관에서 자정작용 얘기 꺼내면 저놈들 또 자화자찬하고 개지랄을 하네 염병, 했을 텐데 국세청이 말하니까 갑자기 신뢰도 확 오른다.

-신재현 강원도 가자마자 싹 쓸어버리는 거 실화냐

-한 달이면 지역 유착 뽀개 버리고도 남는 시간이지. 발령장의 잉크가 식기 전에 모가지를 따고 돌아오겠소.

-저기만 저러는 거 아닐 텐데. 그냥 신재현이 전국 순회 한 번 해줘라.

-안 돼!!! 그럼 십 년은 돌아야 된단 말이야!

간간이 시장에 대한 이야기도 보였다.

-증거 없는데도 시장이 지 알아서 술술 불었다면서?

-나 같아도 불겠다. 저승사자가 떡하니 칼 들고 버티는데 나중에 증거 나와 가지고 참수당하느니 그냥 알아서 부는 게 낫지. 그럼 정상참작은 될 거 아냐.

-시장이 다른 것도 불었음! 지역 사장 중에서 예전에 다단계해서 동네 사람들 등쳐먹은 것도 있다던데? 보강조사 들어간다고 기사 떴음.

-와ㅋㅋㅋ진짜 다 부네.

-사장들 지금쯤 기절했을 듯. 아니, 왜 그런 것까지 다 불지? 하면서ㅋㅋㅋㅋㅋ

시장이 혼자 죽지 않겠다며 벼르고 벼른 효과가 나타나는 중이었다.

눈에 띄는 증거가 없어서 신재현과 검찰이 놓친 것들은 시장의 증언으로 다시 조사에 들어갔다.

시장은 주워들은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심지어 어떤 사장이 술자리에서 지나가듯 말한 부부싸움까지도 남김없이 말이다.

실제로 사장들은 실시간으로 밝혀지는 흑역사에 게거품을 무는 중이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자, 국세청에서는 또다시 기자회견을 열었다.

[국세청, 대대적인 전국 세무서 감사 계획 발표]

이때다, 하고 기회를 잡은 오낙현과 민치호의 합작이었다.

-국세청이 저렇게 솔선수범하는데 경찰이랑 검찰은 가만있냐?

-쟤네는 대대적으로 개혁한다 해도 못 미더워.

-국세청이 검경 감사하면 되잖아.

-국세청 직원들 과로사로 죽일 일 있냐?

여론의 성화에 검찰과 경찰 역시 직접 총장과 청장이 나서서 대대적인 개혁을 발표했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국세청 때와 달리 그다지 믿음을 주지 않았지만, 조사 끝에 몇 명인가 뇌물을 받은 공무원들이 파면되었다.

보여주기 식이라도 뭔가 성과는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무도 모르는데 용돈 좀 받아볼까 했던 공무원들은 알아서 몸을 사렸다.

각자 다른 꿍꿍이를 갖고 있더라도, 확실히 정부기관의 청렴도는 착착 올라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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