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8화. 폭로전 (4)
“야! 너네 서장 나오라고 해, 너네 서장!”
-부웅!
배추가 날았다.
험하게 다룬 탓에 겉잎이 조금 찢겨져 나갔다 해도, 딱 봐도 알이 꽉 차고 싱싱해 보이는 배추였다.
할머니는 이런 일을 많이 해본 듯 익숙하게 배추를 던졌고, 놀랍게도 멀리 날아갔다.
“야구 선수 출신이야? 왜 이렇게 잘해?”
세무서의 누군가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소문난 진상 할머니잖아요. 맘에 안 드는 거 있으면 일단 가서 던지고 본대요. 읍사무소나 시청에서도 유명해요. 저번엔 옆 동네 제3지서가 배추 테러 당했잖아요.”
“배추가 그렇게 남아도나?”
“올해는 풍년이라 안 팔려 가지고 창고에 쌓였대요.”
“그럼 배추 없을 땐 진상 안 부려? 저분 배추가 잘 팔리길 기도해야 되나?”
“아니요. 다른 농사도 지으시는데 그 해 잘 안 팔린 걸로 와서 던져요. 작년엔 무였고 재작년엔 파였어요.”
“무는 아프겠는데. 파가 그나마 낫다.”
“파는 안 던져요. 와서 파 이파리로 때리지. 그게 쓸리면 되게 기분 나쁘거든요. 싸대기 맞는 기분이라고 할까.”
“맞아봤어?”
“네. 작년에 여기 소득세과에 있다가 맞아봤어요.”
“저런…….”
두 명의 세무서 직원은 로비 벽에 기대어 서서 날아가는 배추를 구경하며 잡담을 나눴다.
둘은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대화하고 있었지만 실은 엄청나게 당황한 상태였다.
그저 이 상황 자체를 포기했을 뿐이다.
민원실의 두 직원이 수습하기에 상황은 너무나도 난장판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세무서, 제3지서가 생기기 전에 이 일대 전부를 관할하던 세무서다.
이런 배추 테러 정도는 익숙하게 여기는 직원이 수두룩했다.
난리치게 놔두면 진상 민원인은 가져온 농산물이 떨어질 때쯤 분이 풀려서 돌아가곤 했다.
그러나 오늘은 아무도 말릴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단순히 배추가 크고 단단해서는 아니었다.
난리를 치는 사람이 한 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서장 나오라고!”
“내가 느이 서장이랑 밥도 먹은 사이야!”
“배추 맛 좀 볼 텨?”
“여기 세무서장이 호로 잡놈 강 사장과 손잡고 지역 주민 등쳐먹었잖아! 너네도 한패냐? 한패야?”
대여섯 명쯤 되어 보이는 지역 주민이 요란스럽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다들 민원실에서 한 번쯤 직원들을 고생시킨 사람들이어서 그쪽 방면으로는 유명했다.
때문에 민원실 직원들은 아무도 그들 앞에 나서려 하지 않았다.
진상 민원인이 5명이라니.
독수리 오형제급의 파괴력을 갖고 있다.
그런 이들 앞에 나서면 멘탈이 뼈도 못 추릴 것은 자명했다.
그나마 이들이 원하는 것은 서장이니, 눈에 띄지만 않으면 일반 직원들은 조용히 넘어갈 수 있겠다 싶었다.
그렇다고 이들이 서장실까지 쳐들어가게 놔두면 위층에서 초상 치를 일이 나올지도 모르기에, 그것만은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직원들이 눈을 질끈 감고 계단을 틀어막은 채, 몸으로 바리게이트를 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미워도 서장이고 식구다.
저 성난 민원인들 손에 머리채가 뽑히는 꼴을 보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배추 테러가 너무 강해지면 못 이기는 척 물러날 생각도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에는 수많은 시위가 있었고, 그걸 몸으로 막는다는 게 얼마나 자살행위인지는 이들도 잘 알았다.
이미 경찰에 신고를 해뒀으니 경찰이 올 때까지만 버티자는 게 이들 목적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게 두 가지 있었다.
“경찰 언제 와요? 경찰서가 코앞인데 왜 이렇게 늦어?”
“그러게요. 저번에는 5분 만에 왔던 것 같은데.”
서울처럼 차가 막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관공서는 대부분 밀집해 있다.
이 거리 끝에 있는 소방서라거나 한 블록 옆에 있는 거리의 경찰서라거나.
진상 5인조가 들어서는 걸 보자마자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끼고 잽싸게 신고했으니 진작 오고도 남았어야 했다.
이게 이상한 일 첫 번째였고.
“그리고 어째 다 피해서 던지는 것 같지 않아요?”
배추 할머니는 정확도로도 이름이 높았다.
고소당할까 봐 얼굴은 피한다지만 살이 많은 허벅지나 티가 안 나는 팔뚝만 노려 맞히기로 유명했다.
그런 사람이 지금까지 계단에 서 있는 직원들에게는 단 한 번도 맞히지 못했다.
“아이고, 저분도 이제 늙으셨구나. 세월이 참 무상해.”
“지금 저분 걱정할 때예요? 급소 가리고 제 옆으로 바짝 붙으세요.”
바리게이트 좀 쳐본 직원이 해탈한 표정을 짓는 동료를 구박했다.
그는 지금 탄환, 아니, 농산물의 잔량을 보고 계산 중이었다.
“저거 다 던지면 물러가실까요? 아니면 육탄 돌격하실까요?”
“얼마나 흥분했느냐에 따라 다르겠죠?”
“조사관님 생각은?”
“음, 많이 흥분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제발 경찰 좀 빨리 와라.”
슬슬 검은 김장 봉지에 든 배추가 다 떨어져 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민원실에서 나와 지켜보던 직원들이 초조해졌다.
평소라면 적당히 화가 풀리면 돌아가는데, 오늘은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쓰레기 같은 서장도 식구라고 팔이 안으로 굽는다 이거지?”
“너네 서장이 무슨 짓거리를 했는지 알기나 해?”
직원들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들도 알고 있다.
비정상적인 지시가 가끔 내려온다는 것을.
그 지시를 받아 일을 처리한 것이 이들 일선 직원이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서장 눈 밖에 나면 1년 내내 민원실 근무만 하게 될 수도 있고, 인사평가 나락으로 다음 근무지는 더 안 좋은 곳으로 가게 될 수도 있다.
권력은 그 아랫사람들에게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다.
그보다 어떻게 이들이 그걸 알게 됐는지 궁금했다.
세무서 직원들은 지역 주민과 그닥 친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무슨 난장판이 벌어진 줄 모르고 있었다.
그냥 운 나쁘게 들켰고 조용히 끝나길 바랄 뿐이었다.
지금 상황을 보니 꽤 어려워 보였지만.
점점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직원들의 원망은 진상 민원인이 아닌 서장에게 쏠렸다.
1층에서 이 소란이 벌어졌으면 위층에도 이미 소문이 퍼졌을 텐데, 서장실에 꼭꼭 틀어박혀 숨어 있는 게 영 마음에 안 들었다.
옆 동네 제3지서는 일 터지면 직원들 고생한다고 무조건 지서장이 내려와서 대응한다는데.
제3지서가 한 달 내내 테러를 받은 건 그쪽 직원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그때는 제3지서가 불쌍했지만, 일이 이렇게 되자 반대로 그쪽이 부러워졌다.
적어도 상사가 모실 만한 분인 건 확실해 보였으니까.
“경찰에 한 번 더 전화해 봐요. 거기 서장님이랑 우리 서장님 친하니까 가만 놔두진 않을 거예요.”
지켜보던 민원실장이 안 되겠다 싶었는지 부하 직원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미 배추는 다 써먹었고 진상 5인조는 으르렁대며 직원들에게 비키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아직 몸싸움은 없지만 폭풍전야다.
말만 하고 밀어붙이지 않는 건 좀 의외였지만 그것도 곧 한계겠지.
민원실장은 말릴 준비를 하며 손목을 풀었다.
그러다 세무서 입구에 낯선 그림자가 생긴 것을 보고 긴장했다.
경찰일까, 새로 합류하는 민원인일까.
그러나 로비로 들어서서 진상 5인조의 뒤에 선 이는 양쪽 다 아니었다.
TV에서 자주 보이던 청년이 정장을 곱게 차려입고 서 있었다.
민원실장은 신재현을 본 게 처음이었지만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은 은연중에 풍기는 분위기가 있다.
맡은 자리에 따라 몸에 밴 태도와 느낌 말이다.
얼굴만 아니었으면 어디 청장이 시찰 나왔다 생각했을 것이다.
어리다는 게 약점이 되지 않을 정도로, 청년은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아우라를 두르고 있었다.
민원실장은 이유 모를 안도감을 느꼈다.
그의 이름 뒤에 따라오는 수많은 실적이 증명하듯이, 이 난장판도 해결해 줄 것 같았다.
자신의 서장이 1층으로 내려와 민원인을 달래는 것보다, 차라리 이 청년이 더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막 로비에 들어선 청년은 진중하게 주위를 바라보더니 빠르게 상황 파악을 끝냈다.
그리고 앞에 서 있는 진상 5인조에게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진상 5인조는 놀랍게도 돌아보자마자 흠칫하더니 단숨에 조용해졌다.
지켜보던 직원들의 눈이 큼지막해졌다.
누가 말려도 듣지 않던 이들을 말 한마디 거는 것만으로 진정시키다니.
마법이라도 부린 것 같았다.
심지어 불과 2주 전까지만 해도 제3지서에는 이것과 비슷한 난장판이 벌어지지 않았는가.
물론 이들은 모르는 사정이 있었다.
신재현은 일주일간 동네를 열심히 돌아다녔고, 제3지서 직원들이 함구한 덕에 여기까지 그 소식이 퍼지지는 않았다.
지역 주민들은 신재현을 더 이상 적으로 여기지 않았고.
오히려 악조건 속에서도 꿋꿋하게 비리를 밝혀낸 열사 취급이었다.
신재현이 알았다면 오글거린다며 기겁했겠지만, 적어도 주민들에게 신재현의 이미지는 그랬다.
“선생님들. 여기 와서 배추 던지고 계셨어요?”
신재현이 웃으며 묻자 민원인들이 손사래를 쳤다.
한마디씩만 해도 5명인지라 신재현을 둘러싸고 장내가 또다시 시끄러워졌다.
“서장이 나쁜 놈이라며. 그럼 사람 무섭다는 걸 보여줘야지. 그래야 앞으로 그런 짓을 안 해먹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등쳐먹었으면 자기 등도 뜯길 생각을 해야지! 배운 놈이 배운 걸로 추잡스러운 짓 하는 게 제일 나쁜 거여!”
“그래도 지서장 양반이 한 말이 생각나서 저 사람들 다치게는 안 했어. 너무 화내지 마.”
오히려 진상 5인조가 청년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신재현은 사실인지 확인하려는 듯 직원들을 세심하게 훑었다.
언뜻 봤을 때 다친 사람은 없었고, 배추도 직원들에게서 한참 떨어진 바닥에서 구르고 있었다.
신재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셨습니다. 여기서도 직원들 괴롭히셨으면 정말 화내려고 했거든요.”
“거참, 우리를 뭘로 보고. 쟤네가 나쁜 게 아니라 서장이 나쁜 거라면서요.”
“네, 그럼요. 여러분이 나쁜 게 아니라 강 사장 일행이 나쁜 것처럼요.”
민원실장은 어떻게 된 상황인지 빠르게 파악했다.
신재현과 지역 주민 사이에 모종의 화해가 있었으며, 이들은 서장을 공공의 적으로 삼기로 결심했다는 것 말이다.
그러자 조금 배신감도 들었다.
‘그래도 서장님이면 지서장님과 같은 청의 한식구인데. 지역 주민들한테 소문을 낸 거였어?’
민원실장이 제멋대로 실망하거나 말거나 신재현은 진상 5인조를 달래기 시작했다.
“제가 처리할 거니까 오늘은 이만 돌아가세요. 이러시면 직원들이 일을 못 하잖습니까.”
“어허, 내가 지서장 양반은 좋게 봐도 이건 안 되지. 서장 머리끄댕이를 잡아봐야 속이 풀리겠어!”
기세가 등등했다.
신재현이 말려도 소용없을 수도 있겠다는 걸 눈치챈 민원실장이 부하직원을 닦달했다.
“경찰서 전화해 봤어? 아직이래?”
그런데 핸드폰을 붙잡은 부하 직원의 표정이 이상했다.
“그게…….”
“무슨 일인데 그래? 경찰서장님이 여기 놔두라고 했대? 그럴 리가 없는데.”
이유를 설명해 준 이는 신재현이었다.
“경찰은 안 올 겁니다. 아니, 못 올 거예요. 거기도 이 난리거든요.”
“아…….”
진상 5인조가 여기로 왔길래 세무서만 북새통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나 보다.
경찰서로도 지역 주민들이 몰려갔다면 일손이 모자랄 것이다.
세무서에는 상대적으로 신경이 덜 쓰일 수 있지.
“하필 이럴 때…….”
다시 한번 민원실장의 원망이 커졌다.
지역 주민에게 이런 소문을 퍼뜨린 게 신재현인 건 확실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법에 대해 문외한인 사람들이 세무서와 경찰서에 쳐들어갔겠는가.
“너무하시네요, 지서장님도.”
그래서 그만 서운함을 입 밖으로 내고 말았다.
말해놓고도 아차 했지만 이미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신재현은 의외로 머리를 긁적이며 미안한 표정을 했다.
“그러게요. 직원분들이 당분간 고생 좀 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제 눈에 띈 이상 그냥 넘어갈 수는 없거든요.”
신재현이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의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건물 밖에 사람 그림자가 많이 보였다.
지금까지는 구경 온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보니 다들 정장 차림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 어어?”
하나둘, 정장 입은 남녀들이 로비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로비가 좁아서 자연히 민원인들도, 세무서 직원들도 옆으로 비켜서게 되었다.
민원인들은 눈을 끔뻑거리며 자신들이 나설 자리를 잃었다.
“이, 이게 뭐여? 어디서 나온 사람들이여?”
“춘천지방검찰청 사람들입니다. 일을 마무리하려고 불렀습니다.”
신재현은 가볍게 말했지만 내용은 절대 무시할 수가 없었다.
민원실장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지서장님! 설마……!”
“네. 서장님은 지역 유지들과 유착한 혐의를 받고 계십니다. 사안의 중요성을 생각했을 때 지검에서 직접 압수수색을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죠. 물론 영장도 있습니다.”
검찰 측 수사관의 대표로 보이는 사람이 아무 말 없이 종이를 펼쳐 보였다.
영장이 나올 정도면 혐의도 명확하고 정황증거도 명백하다는 뜻이었다.
그제야 직원들은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신재현은 못을 박듯 또박또박 말했다.
“서장님은 공무원이 해선 안 될 짓을 하셨어요. 단순히 직원들에게 ‘묻어라’라고 한 수준이 아닙니다. 지역 유착, 여러분은 이게 무슨 뜻인지 잘 아시겠죠?”
신재현의 분위기가 대번에 매서워졌다.
민원실장은 포기하듯 고개를 푹 숙였다.
단순히 밥이나 얻어먹고 직원들 압박이나 준 건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신재현을 향한 원망은 어느새 서장을 향하고 있었다.
‘멍청한 서장이 서를 폭파시키려고 안달났구만! 얼마나 받아 처먹은 거야?’
직원들은 침울한 표정으로 조용히 신재현의 처분을 기다렸다.
“당연하지만 서 자체도 내부 감사가 있을 겁니다. 물론 서장님의 압박을 이길 수 있는 직원은 없으니 지역 유착 고리에 포함되었는지 아닌지가 주 조사가 될 거구요. 뒷돈 받은 것만 아니라면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순간 몇 명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윗물이 더러우니 아랫물도 자연히 썩어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민원실장은 그들을 흘기며 혀를 찼다.
그리고 계단을 막아선 직원들에게 손짓했다.
자업자득을 옹호할 생각은 없었다.
“올라가시죠, 지서장님.”
“네, 감사합니다.”
신재현과 검찰 수사관들이 저벅저벅 열을 맞추어 계단을 올랐다.
그들을 보며 민원실장은 직원들을 다독였다.
“들어가서 일합시다. 각자 감사 준비하고. 한바탕 피바람 불 것 같으니까 알아서 자중해요.”
그러나 민원실장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세무서장은 나름 한식구라 예우 차원에서 신재현이 직접 왔을 뿐, 경찰서장과 검찰의 지청장도 마찬가지로 이곳과 똑같은 손님을 맞고 있었다는 것을.
피바람은 한 군데서만 부는 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