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485화 (485/500)

485화. 폭로전 (1)

또다시 일주일이 지났다.

그날은 강원도 중부지청 제3지서의 지서가 열린 지 딱 한 달이 되는 날이었다.

산 중턱에 위치한 목장, 그리고 그 목장에 딸린 단독주택에서는 두 중년 남녀가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양옆에 어깨를 나란히 하듯 펼쳐진 웅장한 산세는 높고 깊었다.

원래라면 산은 더 크고 넓었을 것이지만 저택 앞에 있는 크고 작은 동산들은 전부 목초지였다.

때문에 강 사장은 이 풍경을 좋아했다.

불과 100년, 아니,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여기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었다.

나무를 베어내 산을 초지로 만든 것이다.

옛날 사람들이 그토록 경배하던 자연을 한낱 인간이 정복한 증거였다.

강 사장의 인생도 그러했다.

아버지 대에서는 운이 좋아 나무로 떼돈을 벌었다지만 강 사장은 스스로 자수성가한 사업가라 생각했다.

나무를 베어내고 빈 땅에 목장을 꾸릴 생각을 한 것은 신의 한 수였다.

다른 사람들은 고랭지 배추를 키우거나 했지만 강 사장은 양을 키웠다.

소라면 몰라도 양은 일반적이지 않은 시절이었기에 다들 강 사장이 쓸모없이 땅을 썩힌다고 생각했다.

‘농사나 지을 것이지, 땅이 아깝네. 소는 도축하면 고기라도 나오지만 양고기는 팔리지도 않는데.’

그랬던 것이 지금은 상황이 역전되었다.

이제 와서 강 사장의 선택을 비웃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손가락질할 때 다른 길을 개척해 이만한 부를 일궈냈다.

강 사장이 자기애가 강하고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이유였다.

그는 자신의 성공과 부를 사랑했고, 그것은 곧 자만심으로 이어졌다.

사실 강 사장이 이룬 것이라고 해 봤자 대한민국 전체를 놓고 보면 중소기업에 불과했다.

강 사장도 그건 알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TV를 틀면 나오는 대기업이 몇천억짜리 사업을 어쩌구 하는 얘기는 다른 세상의 동화처럼 들렸다.

평생 이 지역에서만 살았고 벗어나본 적이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는 이 일대의 지배자였으니까.

용의 꼬리보다 뱀의 머리가 되라고 했던가.

비록 이 작은 지역의 뱀 머리라 해도, 여기가 우물 안이라는 걸 알아도 강 사장은 우물 밖을 벗어날 생각이 없었다.

이렇게 편안한데 뭐 하러 밖을 동경한단 말인가.

지금까지는 모두 완벽했다.

시장도 여론의 눈치를 봐야 하는 특성상 지역에서 큰 목소리를 가진 자신을 무시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며 노하우가 쌓이자 고위 공무원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여전히 자신의 뱀의 머리였다.

그놈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달그락.

강 사장의 손이 분노로 떨리자 찻잔이 부딪히며 소리를 냈다.

그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시장이 그렇게 모욕을 주며 물러난 이유 말이다.

물론 처음엔 조금 겁을 먹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르자 공포는 희석되었다.

그는 이제 신재현도 별거 없다고 얕잡아보고 있었다.

“처음엔 무슨 일 터지나 싶었는데 참 조용합니다.”

강 사장은 마주 앉은 세무서장 심정민을 보고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

그는 지금의 이 평화가 자신의 승리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심정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게나 말이에요. 시장님도 그렇고 지청장님도 그렇고, 뭐에 그렇게 놀란 건지.”

한 달이라는 시간은 심정민에게도 안정감과 여유를 주었다.

생각할 시간이 많았고 심정민은 고심 끝에 이런 결론을 내렸다.

‘그동안의 칼춤은 신재현이 청장님 눈에 들기 위한 발판이었어. 국회를 친 것도, 전 대통령을 조사한 것도 전부 정치적 쇼라고. 실적을 만들기 위해 억지로 띄운 거야!’

아닌 척해도 자신은 속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원래 사람은 위선적이고 이기적이니까.

신재현이 순수하게 탈세범 꼬라지가 보기 싫어서 나서다 보니 일이 이렇게 됐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난세에 영웅이 나온다는 말이 있듯이 혼란스러우면 승진도 빠르다.

‘신재현을 밀어주고 싶었던 거지. 이건 국세청이 오랫동안 꾸민 일이야. 정치권의 압력에서 벗어나서 힘을 갖고 싶어서 일부러 신재현에게 먹잇감을 몰아준 거라고.’

심정민에게 그 추측은 기정사실이었다.

평생 지방 쪽으로 돌다가 세무서장이 되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녀에게도 우물 안이 전부였으니까.

그러니 어찌 보면 둘은 잘 어울리는 파트너였다.

무덤도 같이 파서 문제였지만.

“그 사람들은 소인배입니다.”

강 사장이 투덜거렸다.

그는 아직도 가장 마지막에 모인 그날 저녁의 일을 잊지 못했다.

아니, 그 기억은 아마 평생 따라다닐 것이다.

일이 잘 풀린다고 해도 이전처럼 돈독한 사이가 될 수는 없겠지.

강 사장은 부들거리는 손으로 찻잔을 움켜쥐었다.

“차라리 잘됐습니다. 사람은 어려울 때 누가 정말 자기 편인지 알 수 있다고 했어요. 그들은 돈에만 눈이 멀었지 정말 제 편은 아니었던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서장님께서 좋은 분이라는 걸 알게 됐으니 그것만으로도 큰 이익이라 생각합니다.”

“별말씀을요. 그분들이 그렇게 겁이 많은지는 저도 몰랐습니다만, 저도 사장님과 진심으로 친해질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심정민은 쾌재를 불렀다.

그녀는 멍청하고 눈치도 없었지만 욕심은 많았다.

항상 모임에서는 시장과 지청장의 그늘에 가려 주목을 받지 못했다.

가장 마지막 모임에서는 심정민 역시 겁을 먹고 도망쳤지만, 그 후에 2주 정도 더 지나자 생각이 바뀌었다.

‘지금 지역 유지 모임에서는 공무원 끈이 다 떨어졌잖아. 상황 보니까 신재현도 잠잠하고. 그냥 경고만 한 것 같은데 지금 찾아가면 사장들이 엄청 고마워하지 않을까?’

심정민은 옛 관할서의 세무서장이라는 핑계로 몇 번 지서에 들렀다.

그리고 지서가 조사고 나발이고 착수할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갈 때마다 지서는 항상 진상 민원인에 휩싸여 혼돈의 도가니였다.

지역 주민들 사이에 안 좋은 소문이 퍼져 있어서 뭘 하려고 해도 비협조적이었다.

예를 들어 이상한 점이 있어서 전화를 하면 퉁명스럽게 일관하며 공무원에게 잘못을 돌렸고, 자료를 제출하라고 하면 꼭 하나씩 빼놓고 줘서 일을 두세 번 하게 했다.

시간 낭비는 둘째 치고 공무원들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을지 상상이 갔다.

이게 모두 다섯 사장들의 이간질 덕분이었다.

지역 주민들은 도시에서 굴러들어 온 젊은 청년보다는 수십 년을 함께 부대껴 온 사장들을 믿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호들갑이긴 해요. 세무조사 한다고 공식으로 나온 것도 아니고, 경고만 했을 뿐이잖아요. 그 후에 사장님들은 한 번도 지서에 찾아간 적도 없고 따로 직원들에게 찔러주지도 않았고. 그럼 이제 냉전 상태 아닌가요? 조용히 지내면 아무 문제 없을 것 같은데.”

“그렇죠? 제 생각에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밖에서 얼마나 잘났든 여기서는 외부인일 뿐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겠죠. 지역 사회 전체와 싸울 수야 있겠습니까.”

심정민은 지금이 칭찬할 때라는 걸 느꼈다.

둘의 끈끈한 우정을 위해서.

“저는 이번 일로 사장님께 감탄했습니다. 지역 사회와 대립하게 하시다니. 협조해 주지 않으니 일이 늦어지고, 실적은 안 오르고, 의지도 꺾을 수 있고. 저라면 사장님을 적으로 돌리지 않을 거예요. 이렇게 무서우신 분이니까요.”

그 유명한 지서장과 같은 국세청이면서도 직위는 더 높은 세무서장이 그렇게 말해주니 절로 콧대가 높아졌다.

여기서는 자신이 왕이다, 그놈도 별수 없다.

짜릿함마저 들었다.

첫 2주는 언제 조사 공문이 날아올지 몰라 덜덜 떨었지만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었다.

“거의 한 달을 시달렸으니 이제 깨달은 거겠죠. 다른 데서 하던 버릇을 여기서도 쓰면 얼마나 피곤해지는지. 신재현 지서장이 한 발만 물러나 준다면 좋겠지만, 그 전에 함부로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교훈은 줘야겠습니다. 서장님께 함부로 대한 것도 엄밀히 말하면 하극상 아닙니까.”

강 사장은 심정민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말에는 돈이 들지 않는다.

시장과 지청장이 손을 뗀 이상 세무서장이라도 붙잡아두기 위해서는 이런 말쯤 백 마디라도 할 수 있었다.

과연 심정민은 예상치 못한 얘기를 들었다는 듯 놀란 표정을 했다.

그리고 감동한 얼굴로 웃었다.

“그렇게까지 말씀해 주시니 제가 좀 더 신경을 써야겠네요. 이번 주 중으로 제3지서에 한번 다녀오겠습니다. 강 사장님과 지서장이 화해하는 게 가장 좋은 해결이니까요.”

“그래주시면 감사하죠. 저도 국세청 공무원이 우리 지역에서 안 좋은 소리 듣고 나가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둘은 죽이 맞아서 흐흐 웃었다.

그런 그들의 시야 한구석에 뭔가 검은 점이 보였다.

파란 겨울 하늘 밑에 펼쳐진 푸른 목초지, 그 뒤에 드리운 산은 그것만으로도 완벽한 풍경이었다.

그 풍경에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존재가 저 멀리서부터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비싼 그림에 먹물 한 방울이 떨어진 것 같아서 강 사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검은 점은 사람이었다.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정장을 입은 듯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를 사람은 천천히 풍경을 감상하듯이 길을 따라 강 사장의 주택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강 사장은 괜히 화가 났다.

이곳은 그의 성공의 상징이자 우물이었다.

그런데 침입자는 한 명이 아니었다.

선두에 선 검은 점 말고도 각양각색의 옷을 입은 서른 명 정도의 사람들이 길을 따라 걸어오고 있었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목초지 아래에 있는 마을 주민들인 것 같았다.

그들은 앞서 걷는 검은 점과 거리를 두면서도 착실하게 따라오고 있었다.

뭔가 구경거리라도 난 것처럼.

거리가 가까워지자 강 사장도 이제 맨 앞에 있는 것이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이 한겨울에 검은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고 위에는 까만 코트 하나만 걸친 채 산 중턱을 걸어 올라오고 있는 사람은 바로 신재현이었다.

지금까지 둘이 신나게 물고 뜯었던 사람 말이다.

눈살을 찌푸리는 강 사장과 달리 심정민은 얼른 그 주위를 살폈다.

저 뒤에 따라오는 사람 중에 혹시라도 지서 직원들이 껴 있지는 않은지 날카로운 눈으로 훑고 또 훑었다.

그러나 뒤따라오는 사람들은 전부 형형색색의 사복을 입은 마을 주민뿐이었다.

개중에는 지팡이를 짚은 노인도 있었다.

‘혼자 왔다고?’

심정민은 복잡한 심경을 그대로 드러냈다.

갑작스레 나타난 국세청의 저승사자는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신재현의 시커먼 차림새도 불길하게만 보였다.

명색이 지서장이라 정장을 입은 것뿐이었는데 말이다.

2층짜리 단독주택 앞에 다가온 신재현이 테라스를 올려다보며 손을 흔들자 까마귀 수백 마리가 까악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강 사장은 표정이 좋았다.

“혼자 온 걸 보니 뭔가 느낌이 좋은데요.”

“아니, 아니에요. 긴장하셔야 합니다.”

“서장님도 겁이 많은 것 아닙니까. 괜찮아요. 뭔가 일을 벌일 예정이었으면 혼자 오진 않았겠죠. 세무조사인가 그것도 TV 보니까 열 명은 몰려오던데요.”

강 사장은 자신만만하게 집 밖으로 나갔다.

심정민이 허둥지둥 뒤쫓아나가자 신재현의 찌를 듯한 눈빛이 꽂히는 것이 느껴졌다.

‘역시, 좋은 뜻으로 온 게 아니야!’

혼자 왔으니 선전포고쯤 되겠지만 보는 눈이 많았다.

적당히 화해 분위기를 조성해 보려고 심정민이 입을 열었을 때였다.

“서장님, 업무시간 아니세요?”

신재현이 한발 빨랐다.

시비를 걸어도 다른 건이었다면 요령 좋게 빠져나갔겠지만, 업무시간에 지역 유지 집에 와 있는 건 어떻게 봐도 이상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변명하려고 머리를 굴리는 동안, 신재현은 강 사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심정민의 입을 효과적으로 막은 것이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제가 원래 이런 화려한 퍼포먼스 같은 건 안 좋아하는데 어쩔 수 없이 찾아오게 됐네요.”

강 사장은 신재현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뭔가 할 말이 있어서 왔다고만 생각했다.

그리고 강 사장이 생각하기에 혼자 왔다면 이유는 하나였다.

휴전!

“어서 오십시오. 환영합니다. 꼭 모시고 싶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닿는군요. 동네 어르신들도 오셨네요. 들어와서 간식 잡수시고 가시지요.”

강 사장이 가끔 마을 잔치를 열어주는 건 익히 있는 일이었다.

지나가는 동네 주민을 초대해 주전부리를 먹고 담소를 나누는 것도 동네의 일상 중 하나였다.

더군다나 오늘은 신재현까지 왔으니 친해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신재현에게 ‘나는 이만큼의 영향력이 있다’는 걸 과시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러나 주민들이 익숙하게 집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심정민이 급하게 소리쳤다.

“안 돼요! 뭔가 이상해!”

심정민의 뾰족한 외침에 신재현이 씨익 웃었다.

숨겨 온 무기라도 드러내듯이, 신재현의 분위기가 살벌하게 바뀌었다.

“관객도 다 모인 것 같으니 시작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이 자리에 혹시 최덕팔 씨 계십니까, 최덕팔 씨!”

“으잉? 최덕팔은 난데.”

뒤쪽에서 구경하던 60대 남자가 느닷없이 이름이 불리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1년 전에 최덕팔 씨가 갖고 계시던 땅을 강 사장님한테 총 2,500만원에 팔았죠? 그거 원래 시가 2억짜립니다.”

“엥? 뭔 소리여?”

“여기 감정평가서입니다. 국세청에서는 양도세나 상속세, 증여세를 조사할 때 이상하다 싶으면 전문가한테 땅값 평가를 맡기거든요. 한마디로, 사기당하셨어요.”

폭로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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