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3화. 사자 앞에서 춤을 (3)
국세청의 정기 발령이 끝나고 3주가 지났다.
공무원들은 저마다 새로운 직장에 익숙해진 상태였다.
그것은 신재현의 옛 식구이자 직속 부하인 서울청 특수조사팀 출신의 4명도 마찬가지였다.
각자 승진하다시피 하며 이동했지만, 그건 절대 일이 편하다는 뜻이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들에게는 예전보다 훨씬 몸이 편안했다.
오히려 TF팀이나 조사단 시절보다 일을 덜하는 느낌이 들어서 어색할 정도였다.
그만큼 신재현과 함께 해온 3년이 강행군이었다는 소리였다.
“팀장님, 말씀하신 조사 보고서입니다.”
강혜원이 뚜벅뚜벅 걸어 조사과 팀장 책상 앞에 당당하게 내려놓은 것은 바로 며칠 전 팀장이 맡긴 세무조사 결과 보고서였다.
신재현보다는 나이가 훨씬 많고, 강혜원보다는 조금 많은 팀장이 보고서 앞의 몇 장을 대충 열어보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맡긴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겨우 중간보고나 올라올 줄 알았다.
그런데 의외로 책상 위에 있는 것은 제대로 된 마무리까지 끝낸 보고서였다.
팀장은 책상 앞에 서 있는 강혜원과 보고서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멍청하게 물었다.
“벌써요?”
“네.”
팀장의 눈동자에 의구심이 스쳤다.
빠르다고 만능은 아니다.
이 일은 숫자를 다루는 민감한 일이었고, 0 하나 잘못 넣는 실수로 몇억이 오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실제로 시간에 쫓겨 일을 건성건성 처리하다 사고를 치는 사람도 많이 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팀장이 나름대로 정한 시일보다 빨리 올라온 보고서는 미심쩍을 수밖에 없었다.
‘시간보다는 정확도에 신경 써야지!’
마음 같아서는 이렇게 쓴소리하면서 일깨워주고 싶었다.
팀장으로서 위엄도 세울 겸, 가르침도 줄 겸.
그러나 생각한 말을 뱉지 못한 것은 상대가 조사단 출신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신재현과 3년이나 함께 일한 손발과도 같은 부하 말이다.
현재 국세청의 판도를 생각해 보자면 강혜원은 반장이라고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신재현 팀이 그동안 해온 업적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물론 팀장이 이제 겨우 막 7급으로 승진한 햇병아리를 두려워하는 건 아니었다.
강혜원을 혼냈을 때의 후폭풍을 두려워하는 것도 아니었다.
설마 자신이 혼냈다고 쪼르르 신재현에게 달려가 일러바치겠는가.
과거 파벌 다툼이 심했을 때도 저런 짓은 안 했다.
그럼 뭐가 문제인가.
‘뭘 어떻게 배워온 거지?’
지적을 하고 싶긴 한데 강혜원에게 섣불리 손을 댈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 신재현과 함께한 3년 때문이었다.
대체 뭘 보고 배웠는지 귀신같이 빨랐다.
그리고 반장의 위치를 십분 활용했다.
그야 원래 반장들이 2~3명 정도의 직원들을 데리고 일하면서 업무 지시하고 자료 취합하는 거야 당연하다지만, 강혜원은 직원들 한 명 한 명의 업무 진행도를 실시간으로 체크해 가면서 지시했다.
자기 밑의 9급 직원들이 뭘 알고 뭘 모르는지, 어디서 조사가 막혔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세심하게 살폈다.
9급 직원이라는 게 사실 말이 세무공무원이지 세법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그나마 여기는 지방청의 조사국이라 9급이라 해도 완전 햇병아리는 아니었다.
그래도 9급 직원들을 지휘해 움직이는 모습이 꽤 익숙했다.
아니, 굳이 말하자면 거미줄 가운데에 들어앉아 주변을 조종하는 걸 보는 느낌이었다.
보통은 안 저런다.
‘며칠까지 카드 내역 확인해 주세요’라는 식으로 말해두면 알아서 해놓기 때문이다.
직원들도 다 큰 어른인데 세세한 지시가 없더라도 알아서 잘했고.
강혜원처럼 진행 상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하는 건 굳이 필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팀장은 강혜원의 방식에 토를 달고 싶었으나 3주간 생각만으로 그쳤다.
일 처리가 마땅치 않으면 지적하겠는데 그것도 아니고.
속도가 느린 것도 아니고.
강혜원의 지시를 받는 직원들이 불만을 드러내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다른 이들과 다른 독특한 버릇이 있다는 것은 신재현 팀에서 그렇게 물이 들었다는 뜻이기 때문에 함부로 지적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감히 신재현이 틀렸다고 한단 말인가?
그것도 짧은 기간 내에 엄청난 실적을 낸 국세청의 전설을?
“끄응…….”
때문에 팀장은 뭐라 말하지 못하고 끙끙 앓기만 했다.
그리고 팀장에게는 불행하게도 강혜원은 눈치가 빨랐다.
그녀는 팀장이 무언가 못마땅해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혹시 지시 사항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시정하겠습니다.”
무언가 의구심이 드는 게 있으면 최대한 빨리 푸는 게 좋다.
강혜원은 눈치가 빨랐고, 솔직하게 가르침을 구하는 것이 낫다는 걸 알아차렸다.
팀장이 강혜원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신재현 팀에 있다 와서 건방진 직원’이라고 여기는 사태까지 가기 전에 대화로 풀어야 했다.
다행히 팀장은 그렇게까지 강혜원을 고까워하진 않았나 보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기회라는 듯이 입을 열었다.
팀장으로서도 차라리 이렇게 말해주는 게 나았다.
장차 청장이 될 거라 자자한 신재현의 사람을 무작정 박대할 수는 없고, 없는 사람 취급하며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강혜원의 눈치 빠른 질문이 반가웠다.
“일하는 방식을 봤습니다. 그렇게 하면 힘들지 않나요?”
“이미 익숙해져서 괜찮습니다.”
팀장의 눈빛이 흐려지자 강혜원은 그가 원하던 대답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녀는 급히 설명을 덧붙였다.
“신재현 팀장님은 조사단에 있을 적 100명에 달하는 인원을 현장에서 지휘하셨습니다. 물론 몸이 하나니 부단장이 아무리 둘이라 해도 곳곳까지 실시간으로 지휘할 수는 없었죠. 그래서 저희는 지휘하시는 팀장님이 언제 물어보시든 즉시 모든 현황을 파악하실 수 있도록, 같은 회사를 조사하는 반원끼리는 업무 진행 상황을 실시간으로 알아두고 있었습니다.”
“보통은 반장에게 물어보지 않나요?”
강혜원은 당시 반장이 아니었는데 왜 파악하고 있었냐는 뜻이다.
“당시 반장님이 두 분이셨는데 팀장님이 자주 자리를 비워서 실질적으로 사무실 현장 지휘는 반장님이 맡을 때가 많았습니다. 한 반에 15명씩이니까 반장님도 업무가 많았거든요. 저희 나름대로 보고 체계를 잡은 겁니다. 근데 이건 사실 팀장님을 보고 배운 거기도 해요.”
“신재현 지서장이요?”
“네. 출장 안 나가시고 사무실에 계실 땐 그야말로 지휘부셨어요. 사건 상황 다 파악하고 부족한 부분을 조사하라고 저희에게 지시하는 방식이셨죠. 뭐랄까, 답안지를 이미 알고 적확한 지시를 내리는 느낌이었달까요. 근데 저는 그렇게 못하니까 그때그때 직원들 진행 상황 파악하고 필요한 걸 요청하는 식으로 바꿔봤습니다.”
팀장은 눈썹을 모았다.
설명을 들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다르게 질문했다.
“제가 걱정하는 건 강 반장이 무리하는 게 아닌가입니다. 왜 사람들이 다들 그런 방식을 안 쓰겠어요? 보고해야 하는 직원들도 피곤하고 지휘하는 사람도 지치는 일입니다. 어떤 일을 맡기고 소요 시간을 계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팀장이 어렵사리 말을 골랐다.
“음, 거기선 어땠을지 몰라도 직원들이나 일에 지장을 줘서는 안 됩니다.”
강혜원은 이해했다는 듯 웃었다.
“그런 점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젠 아예 몸에 익었거든요. 하지만 팀장님 말씀대로 감당하기 어려우면 바로 조절하겠습니다.”
“그럼 됐습니다.”
“네. 말씀 감사합니다.”
강혜원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다른 반에도 똑같이 일거리를 줬건만, 강혜원의 반만 일찌감치 끝낸지라 상대적으로 한가해 보였다.
주위의 다른 직원들은 바쁘게 계산기를 두드리고 엑셀을 돌리고 있는데, 강혜원 반은 간식거리를 나눠 먹으며 서로의 노고를 달래고 있었다.
팀장은 책상 위에 놓인 보고서를 세심하게 읽기 시작했다.
숫자가 나오면 직접 계산기를 들어 검산을 해보았고, 내부 자료망에 올린 데이터와도 일일이 확인해 보았다.
공들여 한 장 한 장 꼼꼼히 읽고 난 후 확신했다.
‘신재현 미친놈, 대체 조사단은 어떤 마굴이야?’
어떻게 가르쳤길래 일개 직원이 반을 맡자마자 이런 결과를 내다니.
초반엔 좀 헤매는가 했더니 3주가 지난 지금은 완전히 적응한 듯 일 처리에 막힘이 없었다.
뭘 주든 그 결과는 정확했고 거리낌이 없었으며 무엇보다 빨랐다.
강혜원은 3년 내내 신재현과 붙어 있었다.
결국 도출되는 답은 하나였다.
신재현이다.
그가 직원들을 그렇게 단련시킨 것이다.
‘미친 괴물 같은 놈.’
팀장은 보고서에 결재인을 찍고 강혜원이 올린 전자문서를 확인한 후에 아껴두었던 건 하나를 꺼냈다.
아껴두었다기보다는 조금 미뤄둔 것이었다.
복잡하기도 했고 결재 기한도 꽤 남았기 때문이다.
적당히 직원들이 안정된 것 같으면 주려 했는데 고심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팀장은 담당자 이름에 강혜원을 넣고 따로 메신저를 보냈다.
강혜원은 음료수를 마시며 쉬는 시간을 만끽하다가 컴퓨터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뒤를 돌아 팀장을 보았다.
팀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강혜원이 파일을 열어보았다.
조금 놀란 기색을 하더니 다시 강혜원이 고개를 돌려 팀장에게 이게 맞느냐는 눈빛을 보냈다.
팀장은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조사 대상은 재계 서열로 치면 말석이지만 예전 정권과 사돈 관계를 맺은 터라 조금 껄끄러운 사람이었다.
때문에 적당히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을 물색 중이었다.
처음부터 강혜원에게 맡기지 않은 것은 지시사항만 따랐던 9급 직원이 뭘 알겠냐 싶어서였다.
‘애초부터 적임자가 떡하니 있었는데 내가 헤매고 있었구만.’
강혜원은 세부사항을 읽었음에도 표정 변화가 없었다.
자신도 처음 내용을 읽었을 땐 심장이 두근거렸는데 말이다.
신고서를 뽑고, 관련 자료를 열어 모니터에 띄우고 간단하게 계산기를 두드려 어떻게 접근할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몸에 익은 듯 굉장히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담당자를 제대로 찾아갔네.’
팀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조사단이라는 조직이 궁금해졌다.
거기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대충 알지만 이들이 일하는 모습까지 본 건 아니었으니까.
대중의 관심은 신재현에게 집중되어 있지, 그 밑에서 일한 그림자 같은 일반 직원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스포트라이트가 덜 간 게 사실이었다.
심지어 업무를 잘 아는 국세청 직원들조차 그랬다.
팀장 역시 강혜원에게 흥미를 가졌지만 그닥 기대는 하지 않던 실정이었다.
그랬던 생각을 팀장은 지금 전면 수정하고 있었다.
조사단에는 신재현만 있었던 게 아니다.
일반 직원들조차 갈고닦인 느낌이 났다.
신재현이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전국 곳곳에 흩어진 조사단 출신 직원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두각을 드러내고 있을 것이다.
‘국세청의 복이군.’
조직에서는 특출한 괴물 하나보다 두루두루 일 잘하는 여러 명이 나은 법이다.
팀장은 업무를 나누고서 핸드폰을 두드리는 강혜원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신재현이 그러했듯 거기서 나온 조사단원들이 다른 직원들에게 좋은 영향을 준다면?
국세청은 자연스레 더 나은 쪽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 눈빛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혜원은 뭔가 신난 얼굴로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강혜원 : 나 큰 거 하나 맡았다~
-장세훈 : 뭔데.
-강혜원 : 재벌 아들내미 소득세~ 한 20년 전 국회의장의 사위~
-장세훈 : 개빡치네. 개부럽네.
-안길진 : 우와, 축하드립니다!
-장세훈 : 나는 팀장인데 왜 난 그런 건 안 들어와! 나도!!!
-안길진 : 음, 저도 뭔가 하나 하고 싶긴 하네요. 일이 하나같이 금방금방 끝나 버려서.
눈이 높아질 대로 높아진 이들에게 자질구레한 사건이 성에 찰 리가 없었다.
뭔가 큰 걸 터뜨리고 싶어서 안달이 난 이들의 대화를 본다면 아마 팀장은 기겁했을 것이다.
지금 여기는 서울청 TF팀 출신 5명만 모인 작은 대화방이었지만, 사실 다른 조사단 직원들의 경우도 다르지는 않았다.
전국 곳곳에서 뭔가 해보고 싶어 몸이 근질거리는 조사단 출신 직원들이 수두룩했다.
-강혜원 : 후후, 3주 만에 드디어 뭔가 인정받은 느낌이 나네요.
-장세훈 : 딱 기다려라. 내가 겁나 큰 거 맡아가지고 해치울 테니까.
-강혜원 : 안 기다릴 건데요?
-장세훈 : 크아악!
-안길진 : 우리 팀
-안길진 : 아니, 지서장님은 잘 지내시는지 모르겠네요. 3주 지났는데 이제 자리 잡혔겠죠?
-장세훈 : 걔 성격 몰라? 벌써 뒤엎었을 것 같은데.
-강혜원 : 요즘 조용하신 걸 보니 뭔가 있긴 한 것 같네요. 잡담도 안 하고.
-장세훈 : @황민우 소 환!
-황민우 : ?
-안길진 : 오…… 진짜 오셨다.
-강혜원 : 오, 이게 되네. 민우 씨, 요즘 거기 무슨 일 없어요? 왜 이렇게 조용해요?
대답 없이 잠시 시간이 흐르고, 하나의 사진이 대화방에 올라왔다.
바닥에 배추 수십 포기가 내동댕이쳐져 있는 모습이었다.
-강혜원 : ?
-안길진 : ?????
-장세훈 : 뭐임???
물음표의 향연 속에서 황민우가 담백하게 말했다.
-황민우 : 지금 저희 민원실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