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1화. 사자 앞에서 춤을 (1)
-타다닥!
내가 열심히 출력한 신고서를 훑어보고 있을 때 황민우가 지서장실로 들어왔다.
그는 문에서 책상까지 다가오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내가 뭘 보는지 파악했다.
“이러실 줄 알고 최대한 빨리 정리해서 보고드리러 온 건데 그새를 못 참고 뜯어보고 계셨네요.”
“신고서 정도는 누구한테 부탁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미리 봐둬서 나쁠 것도 없구요.”
“첫날부터 너무 열심이신 것 아닙니까. 여긴 인력도 부족해서 예전처럼 빠르게 치고 나가는 체계적인 조사는 어려울 겁니다. 지서장님 혼자 조급하게 앞서나가실 필요가 없어요.”
“알고 있습니다. 굳이 급하게 할 생각은 없어요. 직원들에게 부담을 주면 본말전도니까요.”
“다행입니다. 이제는 아예 혼자 계시니까 평소에 뭘 하시는지 알기가 어려워서요. 혼자 앞서나가실까 봐 걱정했습니다.”
황민우의 표정이 그제야 풀렸다.
그가 부리나케 찾아온 이유도 그래서였나 보다.
그러나 나도 여기가 지서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조사단에서야 이 정도 규모면 그날 바로 1차 보고가 올라올 정도로 쉬운 일이지만 여기는 차원이 다르다.
서른 명의 직원들이 전부 조사에만 신경을 쏟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조사 경력자들도 아니다.
신입도 있었고 지방의 일반 과만 전전하던 사람도 있었다.
중간에서 내 팔다리가 되어줘야 할 팀장들 역시 6급, 아니면 7급이었다.
내가 승진이 빠른 걸 감안하더라도 큰 기대는 할 수 없었다.
조사단에서야 반장에서부터 일반 직원에 이르기까지 다들 척하면 척이었지만 여기서 직원들에게 그 정도 수준을 요구하면 내가 나쁜 놈이다.
“직원들 이력 사항은 이미 오전에 훑어봤습니다. 조사를 한 번도 안 해본 사람도 몇 있더군요. 뭘 봐야 하는지부터 가르쳐 줘야 될 판이에요. 그 상황에서 지휘하려면 남들보다 많이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런 거라면 환영입니다. 좋은 생각이세요. 안 그래도 저 역시 비슷한 말씀 드리려고 갖고 왔거든요.”
황민우는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내밀었다.
기껏해야 한두 장이었지만 거기에 쓰인 글귀를 보자마자 내가 바라던 정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까 주차장에서 싸우셨던 다섯 명의 지역 유지들과 그 협력자들입니다.”
“지역 유착 고리의 일원이요? 이걸 어떻게 파악했어요?”
우리는 외지인이라 누가 그 일원인지 밝혀내는 작업도 쉽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서류상으로 나타나지 않는 관계는 발품을 팔든가 잘 아는 사람에게 물어봐야 하는데, 누가 지역 유지를 조사하는 사람에게 그걸 알려주겠는가.
설령 그들에게 반감을 가진 사람이 있다 해도 입을 열기란 어려운 법이다.
지역 사회에서 가지는 영향력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걸 이렇게 단시간에 알아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운이 좋았습니다. 지서 직원 중에 옆 세무서에서 온 사람이 있었어요.”
“지서 생기기 전에 여기 관할하던 세무서요?”
“네. 아까 오신 분이 거기 서장님이죠? 그분도 여기 적혀 있습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종이에 시선을 내렸다.
정말 세무서장 심정민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순간 이 명단에 대한 신뢰도가 팍 올라갔다.
“점심시간 끝나자마자 제가 각 팀에 연락을 넣었습니다. 지역 유착 관계 아는 사람 있으면 찾아오라고요. 안 오면 직접 돌아보려고 했는데 정말 오더군요. 완전히 글러먹은 곳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지서장님.”
“황 팀장님도 기대는 내려놓고 있었나 봅니다.”
나는 히죽 웃었다.
그가 무슨 생각이었을지 손에 잡히듯 보였다.
건물의 연식이나 거느리는 직원들 숫자보다 중요한 게 있다.
직원들 개개인의 마음가짐.
지서 개시 전부터 선물을 돌리러 찾아오질 않나, 초대하지도 않은 개서식에 쳐들어와 지서장과 대놓고 친분을 쌓으려 들질 않나.
거기에 부리나케 달려온 세무서장까지.
여러모로 험난해 보이긴 했다.
우리의 상식과 꽤 멀었으니까.
“점심시간에 건물 뒤에서 직원들이 모였던 것 말입니다. 혹시 들으셨습니까?”
“몇 마디만 들었습니다. 그때 서장님이랑 대화 중이어서요.”
“저는 사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었습니다. 여기 직원들은 조사단과 달라요. 경력 걸어가며 강한 상대와 싸우길 바라시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네. 제 기준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 아닙니까. 사실 조사단에 온 분들이 이상한 거였죠. 다들 사직서 품에 안고 오셨으니까.”
얼마 전에 헤어진 조사단 직원들을 생각하니 또 흐뭇해졌다.
전국에서 모았다 해도 어떻게 그런 사람들이 모였는지 모르겠다.
전부 잘됐으면 싶은 사람들이었다.
자기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발령처가 정해지도록 나름 신경 써서 평가도 했다.
그들도 지금쯤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겠지.
나만큼 정신없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서장님이 국세청에 미친 영향이 상당하니까요. 보고 있으면 나도 미친놈처럼 들이받아야 할 것 같은 충동이 느껴지거든요.”
“칭찬이죠?”
내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황민우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근데 지서장님도 아시다시피 현실은 또 다른 법이거든요. 들이받는다고 상대가 깨지겠습니까. 보통은 자기가 깨지지. 그런 의미에서 조사단 사람들이 대단하긴 했어요.”
“크흠, 칭찬 맞군요. 이러면 어깨가 또 으쓱한데.”
“칭찬이긴 한데 여기서도 그렇게 하시면 안 된다는 말씀 드리려고 한 겁니다. 직원들이 못 버티고 반발하면 안에서부터 무너질 거예요. 사직서 내고 튀거나 내부 정보를 흘리거나. 그러면 빈자리를 메꾸려 해도 올 사람이 없을 겁니다. 지서장님은 세무서 말아먹는다는 소리 들으실 테고.”
오늘따라 황민우의 말이 살벌했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고마웠다.
나는 가만히 황민우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평소처럼 감정의 굴곡이 없는 얼굴이었지만 나는 그 안에 숨은 걱정을 느낄 수 있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다그치지 않고 화내지 않고 조급하게 굴지 말라는 거죠? 천천히, 직원들과 다함께.”
드물게 황민우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아침부터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인지 황민우가 내게 충고할 정도로 걱정스러웠나 보다.
“정확합니다, 지서장님.”
그러나 곧바로 미소를 지우고 고개를 숙였다.
“주제넘은 말씀 드려 죄송합니다.”
“뭘 그런 걸로. 이런 거 하려고 여기까지 따라온 거였잖아요. 제가 하지 말라고 해도 말할 거면서.”
“맞습니다. 귀찮으셔도 어쩔 수 없어요. 끝까지 따라갈 거니까요.”
저런 얘기를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하니 엄청나게 진지해 보였다.
그러나 대충 표정이 읽혔다.
본인은 지금 부끄러워하는 것 같은데.
나는 웃으며 종이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럼 이 사람들을 어떻게 조사할지 계획을 짜 보죠. 조사단에서처럼 한 명씩 맡기고 보고서 가져오라고 하면 안 될 것 같으니까 구체적으로 지시를 할게요. 어디 보자, 강 사장님은 아들 둘 다 결혼했네. 며느리 쪽도 봐야겠는데. 차명이 있을 수 있으니까 주변인 명단 작성부터 시작합니다. 소득팀장님이 조사과 경험 있으시죠? 이건 소득팀에 맡기고…….”
“이쪽 분은 법인입니다. 이건 저희 팀에서 맡겠습니다.”
“황 팀장님이요? 그럼 세부사항 지시는 생략해도 되겠죠?”
“네.”
우리는 한 명 한 명 짚어가며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정해진 것이 또 하나 있었다.
“첫 회의는 다음 주 월요일로 하죠. 적응할 시간이 일주일이면 충분하겠지.”
금요일에 하려고 했다가 봐준 거다.
직원들이 주말에 잠도 못 자고 일 걱정으로 끙끙댈까 봐.
그 안에 나 역시 사건 파악을 완전하게 끝내둘 생각이었다.
***
지서가 생기고 첫째 주의 주말.
작은 음식점에 사람들이 모였다.
신재현이 만약 이 자리에 있었다면 마침 끼리끼리 잘 모였다며 눈에 불을 켜고 훑었을 것이다.
이들은 바로 신재현이 타깃으로 삼은 지역 유착 고리의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개서식에 왔던 다섯 명의 지역 유지를 포함해 세무서장도 당당하게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세 명이 더 있었는데 이들은 상석에 떡하니 앉아 있었다.
세무서장 심정민이 분통을 터뜨렸다.
“정말 싸가지 없는 놈입니다! 위아래가 없는 놈이에요. 일 잘한다고 얼마나 오냐오냐 키워놨던지 자만심이 하늘을 찌릅니다!”
술자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심정민은 이미 반쯤 취한 상태였다.
필터를 거치지 않은 말이 날것 그대로 튀어나왔다.
“청장도 미친놈이에요. 어쩌자고 그런 놈에게 힘을 쥐여 줘서. 그놈은 질서를 무너뜨리고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 놈입니다.”
“아이고, 서장님. 오늘 벌써부터 달리시면 어떡합니까. 제가 2차도 괜찮은 곳으로 잡아뒀는데.”
“지금 그게 문제예요? 신재현이, 신재현 그놈이! 내가 얼마나 수모를 겪었는지 알아요? 재수 없는 놈! 신입들은 저놈이 어떤 놈인지도 모르고 무작정 추종하고 있지, 총애도 두텁지! 절대 공무원에 어울리는 놈이 아닌데. 나라꼴이 미쳐 돌아가고 있어요! 언제부터 이 나라 공무원 조직이 지 잘났다고 직급 체계 무시하는 개판이 되었습니까?”
그간 심정민은 몇 차례 모임을 요청해 왔다.
그러나 가장 상석에 앉아 있는 사람의 일정이 맞지 않아 겨우 주말에 모인 참이었다.
그러다 보니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술부터 들이켠 심정민은 기다렸던 것처럼 쌓였던 말을 토해냈다.
무려 일주일이나 묵힌 분노였다.
“우리가 절대 가만히 있으면 안 돼요. 저런 놈이 설치니까 나라가 뒤숭숭한 거 아니에요!”
“대체 얼마나 험한 말을 들으신 겁니까?”
“글쎄, 여기 사장님들이 금세 일렀냐고, 그거 듣고 부랴부랴 달려온 거냐고 하잖아요! 사람을 얕봐도 유분수지, 내가 무슨 똥개인 줄 아나!”
“아, 그건 좀 심했네요.”
다섯 명의 사장들은 듣고 납득했다.
그들은 신재현과 직접 대면하고 직접 겪어본 사람들이었다.
신재현이 얼마나 퍼부어댔을지 예상이 갔다.
목소리가 귓가에서 자동 재생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다른 세 명의 참석자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세 명 중 대표로, 검찰의 지청장이 서장의 말을 끊었다.
“잠깐, 잠깐만요. 아무리 신재현이 싹퉁머리 없다고 해도 다짜고짜 상사한테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실제로 멀쩡하게 국세청 다녔는데. 아무리 실력이 좋다고 해도 이유 없이 상사한테 욕 박는 놈을 국세청장이 밀어줬겠어요?”
“뭐예요, 그럼 제가 거짓말했다는 겁니까?”
“아뇨, 서장님 말씀 믿습니다. 거짓말을 하셨다는 게 아니라 신재현이 뭔가 알고 그런 것 아니냐는 거죠.”
“초면이고 서장이 근처 새로 생긴 지서 찾아가는 건 이상할 것도 없어요.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고요.”
“인사차 가신 겁니까?”
“아뇨, 경고하러 갔죠. 여기 사장님들한테 버릇없이 굴었다길래.”
검찰청 지청장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사장님들도 가신 겁니까?”
질문의 방향이 바뀌자 사장들이 어물거렸다.
“어, 그게 말입니다. 인사할 겸 갔었죠.”
“인사, 요?”
“원래 새로 서장님이나 청장님 오시면 하잖습니까. 친해지면 얼마나 든든하겠어요. 인사하는데 문제 될 것 없겠다 싶어서 갔더니 글쎄, 그 젊은이가 떽떽거리고 달려들지 뭡니까.”
“뭐라고요?”
-탁!
가장 상석에 앉아 있던 지역시장, 곽치황이 젓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그는 입가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새를 못 참고 거길 갔단 말이에요?”
“시장님, 인사만 하러 간 겁니다.”
“인사만 했으면 이런 사달이 났겠습니까? 구체적으로 뭐라 했습니까. 숨기지 말고 말해요. 빨리!”
시장의 얼굴은 방금 먹은 해물탕 색처럼 빨갛게 변해 있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시장님이 왜 역정을 내고 그러실까…… 그냥 평범한 인사였습니다. 식사 한 끼 같이하자고 했을 뿐인데…….”
“이, 이 미친 사람들이……!”
시장은 더 참지 않았다.
물컵을 들고 찬물을 벌컥벌컥 마시더니 잔이 비자 컵을 바닥에 던져 버렸다.
단단한 컵이 바닥에 움푹 파인 자국을 내며 저 멀리 날아갔다.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왜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뽑아서 이 사단을 만들어!”
단전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묵직한 고함에 사장들이 기겁했다.
심정민 역시 화들짝 놀라 눈을 깜빡였다.
술기운이 한 번에 날아간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