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8화. 중부지청 제3지서 (3)
황민우는 어린 상사의 옆모습을 보면서 간절하게 기도했다.
‘제발제발제발! 여기서 폭발하시면 안 됩니다!’
지역 유지한테 굽히고 들어가라는 뜻이 아니다.
신재현이 그런 사람이 아닌 건 황민우가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까.
그가 걱정하는 건 신재현의 욱하는 성격이었다.
처음엔 주먹질도 심심찮게 했다.
그걸 말리는 게 황민우였고.
요즘엔 그래도 경험 좀 쌓으면서 다른 방법으로 조졌지만, 가끔 엄청나게 빡칠 때가 있다.
지금처럼.
신재현이 미소를 지은 건 저들을 환영해서도, 기분이 좋아서도 아니었다.
쥐어 패고 싶어서 표정을 감추는 거다.
그런 걸 생각하면 이선균에게 표정관리 하나는 잘 배운 것 같은데.
‘취임 첫날부터 지역 유지랑 드잡이질하면 지역 신문에 뜹니다! 살살 넘어가셔야 해요!’
황민우는 마음을 졸이며 신재현을 지켜보았다.
여차하면 끼어들겠다는 생각과 함께.
“허허, 서장님. 저희 성의입니다. 이 정도는 받으셔도 돼요. 다른 세무서 서장님들도 다 그렇게 하십니다.”
황민우는 머리를 짚었다.
하는 말마다 다 신재현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재현이 화난 걸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다.
잘해보자, 하고 왔더니 지서 들어오자마자 개시도 하기 전에 유지라는 사람이 들어와 약을 주고 있질 않나.
개서식에 딱 맞춰서 접대하겠다고 오질 않나.
신재현이 제일 싫어하는 부류였고 절대 용납하지 않는 상황이기도 했다.
“선생님들.”
신재현이 숨을 고르며 시선을 한차례 위로 올렸다가 내리며 입을 열었다.
공무원들이 국민들에게 흔히 하는 명칭인 ‘선생님들’로 시작하는 걸 보니 말로 해결할 생각인 듯했다.
“제가 방금 우리 직원들에게 뭐라 했는지 아십니까? 딱 세 가지만 지켜달라고 했어요. 절대 외부인이 주는 걸 받지 말라, 외부인과 사적으로 만나지 말라. 제 입으로 한 말입니다. 돌아가 주십시오.”
좋게좋게 타이르는 말에 황민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지역 유지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아까 강 사장한테 나가라고 했다면서요. 서장님이 얼마나 대쪽 같고 청렴한 분인지는 저희가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근데 이건 절대 서장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게 아니에요. 문제 될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 지역에 처음 오신 외지인 아니십니까. 우리가 얼마나 반가우면 환영회를 하겠습니까. 공무원도 지역하고 어우러지면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임목으로 돈을 벌고 이제는 목장을 운영하고 있는 땅 주인, 아까 쫓겨났던 강 사장이 옳다구니 맞장구를 쳤다.
“그럼요! 박 사장님이 아주 말씀을 잘하시네. 역시 배운 사람은 달라.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아까 서장님이 오해하신 것 같은데, 절대 그런 사심 있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 처음 오셨으니 우리 지역 안내도 하고, 자랑도 하고! 서장님도 우리한테 하실 말씀 있으면 하시고. 저희가 서장님 생각해서 일부러 그런 자리 만들어 드리는 겁니다.”
또 빡쳤다.
신재현의 손끝이 움찔거리는 것을 본 황민우가 다시 긴장감을 끌어 올렸다.
‘설마 지금 멱살 잡을까 말까 고민 중인 건 아니겠지.’
황민우의 곤두세운 신경에 주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잡혔다.
그러고 보니 아직 직원들이 주차장에서 덜덜 떨고 있는 상태였다.
다른 팀장들이 ‘들여보낼까요?’라고 입모양으로 물어보는 것이 눈에 보였다.
황민우는 급히 멈춰 세웠다.
“잠시만요. 해결되면 들어가시죠.”
“예? 반대 아닌가요?”
“기다리세요.”
팀장들의 뜻은 명백했다.
상사의 이런 모습을 직원들에게 보이면 안 좋으니 들여보내자는 뜻이다.
그들은 신재현이 불청객과 화기애애할 거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외부인과 따로 접촉하지 말라고 한 사람이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지역 유지들과 하하호호 대화하는 모습을 보이면 직원들이 우습게 보겠지.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도 마찬가지다.
어느 쪽이든 화제가 되기 십상이니까.
나름의 배려였는데 황민우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여기까지만 보고 직원들이 들어가 버리면 소문이 이상하게 날 수도 있어.’
이들은 신재현을 잘 모른다.
TV나 국세청 소문으로 보고 들은 건 있겠지만 실제로 보는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본 것을 믿는다.
사실이 어떻든 뉴스의 신재현이 어떻게 표현되든, 지금 이 순간 신재현의 행동이 직원들 머리에 남게 된다는 뜻이다.
오히려 ‘뉴스에서 나온 거 다 거짓말이었다. 똑같은 놈이던데 뭐’라는 이미지가 새겨질 가능성이 있었다.
지금 직원들이 다 가버리면 남은 이들끼리 아무도 없는 데서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헛소문 나는 건 쉽지만 바로잡기는 어렵다.
차라리 다 시원하게 까발리는 게 낫다.
신재현이 조금 구경거리는 될지 모르겠으나 그건 원래 많이 겪었으니까.
‘어차피 딱 잘라 거절하실 거고.’
황민우는 신재현을 믿었다.
화는 났지만 저들을 받아들인다는 선택지 자체는 없었다.
멱살 잡고 패대기치면 모를까.
‘정말 그랬다간 수습이 힘들어지겠지만.’
직원들에게는 깊은 인상을 남길 수는 있겠다.
신재현이 진지하게 지역 유착을 싫어한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고.
직원들이 규칙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계기 정도는 되지 않을까.
때문에 신재현이 해결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직원들이 투명하게 볼 수 있도록.
“흠, 선생님들께서는 이걸 관행이자 관례라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네. 그 말입니다. 관행이에요. 절대 나쁜 게 아니란 뜻이죠.”
신재현은 싸늘하게 웃었다.
“관행은 말이죠, 오래전부터 해왔다는 뜻입니다. 옛날부터 했다고 해서 좋다는 건 아니에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저희가 탈세 정황을 포착하고 어느 국회의원님께 출석요구서를 보냈습니다. 나오셔서 해명을 해달라는 거였죠. 세무조사 하면 거치는 과정이잖습니까. 저희가 현장 나가기도 하지만 일일이 나가려면 몸이 두 개여도 모자라니까요.”
신재현이 썰을 풀기 시작하자 추위에 떨던 직원들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화제의 지서장이 해주는 국회의원 세무조사 실제 예라니 술자리에서도 듣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지역 유지들은 떨떠름했다.
밥 먹으러 가자니까 뭘 뻗대고 말이 길어지나 의아한 표정이었다.
“예? 예에…… 추운데 자세한 이야기는 가시면서 하시죠. 복어 기가 막히게 하는 집 예약해 놨습니다.”
고급 트렌치코트를 입은 남자가 낯짝 좋게 들이밀었지만 신재현은 요지부동이었다.
‘존중해주려고 했는데 젊은 놈 목이 뻣뻣하구만. 그래도 국회까지 날려먹은 놈이니까 친해질 가치는 충분해! 내가 누구냐, 서른 살 아래여도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수 있는 놈이다! 일단 친해지면 본전 뽑는 거야.’
남자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재현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의원님이 그러시더군요. 원래 이런 얘기는 저녁 식사 하면서 저희 국세청이 상황 설명을 하고, 어떻게 처리하겠다 보고해야 한다고. 전화 끊고 나서 제가 뭘 잘못 들었나 싶어 20년차 과장님한테 여쭤봤습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는 그랬다더군요. 정치인이 탈세로 뉴스 타는 건 모양새가 안 좋으니, 저녁에 술 한잔하면서 우리가 경과 보고를 하고 처리 과정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잘 처리하라고 기름칠 명목으로 상자 하나 받고, 또 처리 잘 끝내고 나면 수고비로 상자 하나가 실린 차를 받는다고요.”
직원들이 기겁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부에서 얘기하는 것도 쉬쉬하는데 대놓고 외부인에게 국세청의 치부를 말하지 않는가.
공무원이 부패했던 거야 예전엔 흔한 일이었고 지금은 쇄신과 개혁의 이름으로 다 묻은지 오래다.
굳이 들춰낼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저는 이게 한 30년 전 얘기인 줄 알았습니다.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뇌물 받는 공무원 얘긴 줄 알았어요. 근데 이게 불과 몇 년 전 얘기랍니다. 재밌지 않으세요? 심지어 과장님이 그러더군요. 지방에서는 알게 모르게 아직도 이런 일이 있을 거라구요. 제가 그 얘기 듣고 호언장담을 했습니다.”
신재현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낮아졌다.
안 그래도 추운 주차장에 찬바람이 휭 불었다.
지역 유지들은 옷깃을 여몄다.
“제 눈에 띄면 가만 안 놔둘 거라구요. 아까 그 의원님을 어떻게 했는지 이제 이해가 가시죠? 하핫, 제가 가긴 왜 갑니까. 바로 과세 예고 통지서 때렸죠. 놀라서 바로 다음 날 세무사 데리고 국세청 출석하시던데요? 아직도 과거 시대를 살고 계시는 것 같아서 과세 최대한으로 쫙 뽑아서 고지서 드렸습니다.”
“예? 예…….”
지역 유지들은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지금 신재현이 좋은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는 건 피부로 느껴졌다.
신재현이 아까부터 실실 웃고 있는 것이 결코 환영의 뜻이 아니라는 것도 지금 와서는 느낄 수 있었다.
사람 좋게 웃던 유지들이 엉거주춤 한 발짝씩 뒤로 물러났다.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스멀스멀 들었다.
“아시겠죠? 제가 어떻게 할지. 아까 관행이고 이 정도는 괜찮다고 말씀하셨죠? 괜찮을지 아닐지는 제가 결정합니다. 관행? 그동안 누구한테 어떤 식으로 그런 관행을 베푸셨죠?”
“그,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습니다. 서장님, 다음에 다시 뵙죠.”
지역 유지들이 발을 빼며 물러나려고 했다.
그러나 신재현이 한발 더 빨랐다.
“제3지서의 첫 번째 공동 업무지시입니다! 여기 있는 다섯 분의 조사를 시작합니다. 각 과는 이 다섯 사장님들의 성함, 그간의 신고 내역을 뽑아서 제게 갖고 오세요.”
“예?”
“지, 지서장님!”
“허억!”
직원들이 생각지도 못한 사태에 입을 틀어막고, 팀장들은 눈을 부릅떴다.
도망가려던 유지들은 발목이 잡힌 것처럼 우뚝 멈춰 서더니 뒤를 돌았다.
“뭐, 뭐라고요?”
“다섯 분께서는 가시던 길 그냥 가시면 됩니다. 업무 지시는 우리 지서 얘기니까요. 곧 해명 요청 날아갈 테니 자택 대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송달 서류는 받아주셔야 하니까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인사하러 왔다가 졸지에 날벼락을 맞은 지역 유지들이 억울한 얼굴로 따졌다.
“호의 좀 베풀러 왔더니 사람을 뭘로 보는 거예요! 거 도시에서 왔다고 사람 무시하는 건가?”
“아니, 애초에 이런 작은 세무서에서 세무조사 그거 할 수 있는 거예요? 내가 아는 서장한테 들었는데 조사과에서 조사를 한다면서요. 공무원이면 절차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텐데. 이렇게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핍박해도 되는 겁니까?”
“밥 한 끼 먹자는 게 그렇게 잘못된 거예요? 이거 민원 넣을 겁니다. 청와대, 국세청, 기재부 다 민원 넣고 공론화할 거라고!”
급기야 씩씩거리며 삿대질까지 하자 신재현이 오히려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이야, 익숙한 광경을 보니 마음이 다 편해지네요. 이렇게 나오셔야죠. 처음부터 밥 먹자는 건 핑계였고 저랑 유착하고 싶으셨던 거 아닙니까. 사장님들이 뭐라 하든 제 결정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당신 혼자서 뭘 할 수 있는데! 경찰도 검찰도 당신 편 안 들어줄걸?”
신재현의 표정은 더욱 밝아졌다.
“이야, 경찰에 검찰까지요? 칠 데가 너무 많은데. 불과 몇 달 전까지 바쁘게 일하다 와서 여기서는 맛있는 거 먹고 좀 놀까 했더니, 벌써부터 일이 몰려오는 게 느껴집니다. 역시 이래야 일하는 맛이 나죠. 우리 국세 식구 여러분 다 들으셨죠? 이 다섯 분 조사한 후에는 인근 경찰과 검찰도 조사하시면 됩니다.”
이야기가 흘러갈수록 스케일이 커지자 다들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지역 유지뿐 아니라, 직원들까지도.
늘어나는 일 때문이 아니었다.
어째 점점 수습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일이 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황민우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아는 서장이라는 분도 파보셔야 합니다. 특성상 지서가 생기기 전의 관할 세무서와도 유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신재현이 옳다구나 맞장구를 쳤다.
“아, 그게 있었죠. 같은 식구라고 봐주면 안 되지. 털면 얼마나 나올지 궁금합니다. 이야, 일할 게 넘쳐나네. 의욕이 솟구칩니다. 우리 청장님, 이래서 녹슬 일은 없을 거라고 쉬엄쉬엄하라며 당부하신 건가?”
신재현에서 청장이라는 말이 나오자 직원들이 기절할 것처럼 비틀거렸다.
아까 유지들이 민원으로 협박하지 않았는가.
국세청에 읍소하는 건 아무런 효과가 없다고 말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애초에 국세청장 사무실에서 비싼 차를 나눠 먹는 사이다.
민원이나 외압으로 겁먹을 것 같았으면 이미 국회를 날릴 때 끝장났어야 했다.
“민원 말씀하셨죠? 한번 해보세요. 청장님이 이번에도 고생 좀 하시겠네. 전화 받으면서 또 사고 쳤다고 제 욕을 시원하게 하시겠지만, 그뿐입니다. 정당한 세무조사에 한해서는 제가 무슨 짓을 하든 제지하지 않을 분이시거든요. 국민청원, 청와대 민원, 신문고 다 넣어보세요. 제가 어디 민원을 한 번도 안 받아봤을 것 같습니까? 지금까지 받은 민원만 해도 다 뽑으면 트럭을 가득 채울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신재현이 히죽 웃었다.
재미있는 걸 발견한 것처럼 신나하는 모습이었다.
그것이 더더욱 공포스러웠다.
세무조사 한다면서 대체 왜 신나한단 말인가.
“미쳤어, 미친놈이라고! 국세청이 사람 잡는다!”
두려움에 아무 말이나 소리치던 유지에게 신재현이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지역 유지들을 포함해서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충분히 들을 수 있는 목소리였다.
“네. 잡을 겁니다. 제가 제일 잘 하는 게 탈세범 잡는 거거든요. 검찰이든 경찰이든 세무서장이든 다 끌고 와 보세요. 뒤에서 얼마나 얽혔든 싹 조져 버릴 테니까.”
“히익!”
그게 끝이었다.
유지들은 더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았다.
부리나케 도망치는 그들을 보며 신재현이 손을 흔들었다.
“곧 뵙겠습니다!”
이웃을 배웅하는 듯한 정겨운 인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