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473화 (473/500)

473화. 장밋빛 미래 (1)

“골치 아픈 게 다 끝났군.”

오낙현은 홀가분한 얼굴로 차를 들이켰다.

슬슬 밖은 추워지고 있는 터라 따뜻한 차 향기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오늘은 특별히 아껴두었던 좋은 입차를 내놓았다.

이유는 앞에 있는 한 남자 때문이었다.

말없이 음미하듯 반을 들이켠 오낙현은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차가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눈앞에 앉아 마찬가지로 여유를 부리고 있는 남자 때문이었다.

그는 원래부터 여기가 자신의 사무실인 것처럼 잘 녹아들었다.

이곳은 국세청의 청장실이고, 주인은 오낙현인데도 말이다.

그래서 오낙현은 시비를 걸듯 툭 내뱉었다.

“골치 아픈 게 남았네. 민 청장은 언제 청장 할 겁니까?”

민치호가 부드럽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워낙에 인상이 무서운 사람인지라 미소를 지어도 뭔가 협박하는 것처럼 보였다.

알아서 내려오라고 무언의 압박을 주는 것처럼 보인달까.

당연하게도 민치호는 난감해서 웃었을 뿐이었다.

상사가 ‘너 올라오게 나 내려가?’라고 말하는데 뭐라 하겠는가.

심지어 그게 진심도 아니다.

나 아직 더 해먹을 거라고 면박 주는 거나 다름없다.

그냥 웃어야지.

그런 의미였는데도 오낙현은 그 미소에 움찔했다.

“아, 거참. 사람 헷갈리게 웃지 말아요. 정말 내려오라는 건줄 알았잖아요.”

그래도 이런 말이 나온다는 건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정말 삐졌으면 아예 입을 다물었을 테니까.

하지만 더 놔두면 혼자서 말하다가 이상한 데까지 가버린다.

민치호는 이쯤에서 달래줘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청장님께서 계신데 제가 어떻게 감히 자리를 넘보겠습니까.”

오낙현은 취임 초기부터 그랬다.

스스로의 힘으로 앉은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위태위태했다.

무혈입성.

말은 좋지만 본인의 힘으로 올라가지 않은 자리는 내려올 때도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내려오게 되는 법이다.

더군다나 자신을 이 자리에 올려준 그 유능한 놈이 바로 차기 청장으로 내정되어 있는 상태라면.

그 옛날 왜 왕이 세자의 반란을 두려워했겠는가.

평범한 왕과 유능한 세자.

민치호 본인은 절대 그럴 생각이 없다고 해도 오낙현으로서는 마냥 순진하게 믿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이렇게 떠보기도 하고 자신의 복잡한 의중을 내비치기도 한다.

속된 말로 ‘꼽’을 주면서.

본심은 불안해 미치겠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장난처럼 말하는 것이다.

‘난 이런 얘기도 서슴지 않게 할 수 있다.’

이렇게 시위하듯이.

나쁘게 말하면 쿨한 척하는 건데, 민치호 입장에서는 차라리 고마웠다.

속으로 썩이다가 적대하는 것보단 훨씬 나으니까.

물론 오낙현에게는 미안하게도, 그가 적대한들 대세에 영향을 주진 않는다.

좀 귀찮긴 하겠지만.

오낙현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 이렇게 만나기만 하면 싫은 소리를 하는 건지도 몰랐다.

민치호는 최대한 부드럽게 웃으며 살살 달랬다.

“밑에서 누가 뭘 하든 결국 지금의 임기는 청장님이십니다. 현재 국세청은 역대 최고라고 칭송받고 있고 국민 신뢰도, 청렴도 모두 대한민국 정부 기관 중 1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이게 모두 청장님의 업적입니다.”

“내가 잘났나? 민 청장이랑 신재현이 잘난 거지.”

“사람들은 제가 있는지조차 모를 겁니다. 시간이 지나서 만약 지금의 국세청이 교과서나 문서에 기록된다고 해도 청장님의 성함이 실리게 되겠죠.”

민치호는 실력을 평가하는 데는 냉정했다.

오낙현이 무능한 사람은 아니라지만 유능하다고 입바른 칭찬을 해줄 생각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꾸만 현실적인 얘기가 나왔다.

오낙현이 듣고 싶은 방향은 아니었다.

“남의 공을 내 공으로 하면 양심에 찔려서 오래 못 앉아 있는데 말입니다.”

“청장님이 그냥 앉아만 계시는 분은 아니잖습니까.”

한번 이상한 곳으로 삐딱선을 타긴 했지만 사람이라는 게 욕심이 생길 수도 있는 법이니 이해했다.

어찌 보면 오낙현을 불안하게 만든 민치호 자신에게도 원인은 있으니까.

당시 화가 났던 건 신재현을 이용하려 했기 때문이다.

오낙현도 은퇴 후 자신의 미래에 대해 많이 고민을 했겠지.

그래서 정치로 나가야겠다 생각을 한 거고.

국세청장의 이름값을 가장 많이 받을 수 있도록 신재현을 판 것도 이해한다.

용서는 못 했지만.

민치호가 당시에 보기 드물게 오낙현에게 대든 것도 그래서다.

하극상이라고 할 만큼, 정말 수틀리면 오낙현을 갈아엎으려고 했을 만큼.

‘분수를 지켜라.’

절대 아랫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말을 했다.

그 후로 오낙현은 당분간 민치호와 얼굴조차 보지 않았다.

당시 느꼈을 비참함은 짐작도 가지 않는다.

오낙현이 이렇듯 예전처럼 얼굴을 마주하고 농담이라도 할 수 있게 된 건 신재현의 활약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신재현이 실적을 하도 많이 올려줘서 기분이 풀린 건 절대 아니다.

영향이야 조금 있었겠지만 결정적으로 다시 대화를 나누게 된 계기는 전 대통령 담기욱 사건이었다.

공동의 적이 생기면 뭉치는 법이라고 하던가.

국회의원, 공기업 때도 좀 귀찮았을 뿐 어려운 일은 없었는데, 담기욱 때는 등골이 서늘했다.

세상에 설마설마했는데 전 대통령까지 건드리다니.

오낙현은 솔직한 심정으로 조사단 해체 타이밍이 너무나 고마웠다.

시간 여유만 있었다면 분명히 역대 대통령을 순서대로 훑었을 것이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놈이었다.

신재현이야 일하느라 바빠서 전혀 몰랐겠지만, 청장급 정도 되면 난리였다.

전직 청장 중에서도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가 오질 않나, 이젠 은퇴하고 자문 세무사로 활동하는 국세청 고위 세무공무원들이 찾아오질 않나.

알게 모르게 전국의 국장급 공무원들도 많이 시달렸을 것이다.

그 비상사태인 와중에 민치호에게서 전화가 온 것이다.

공공의 적을 상대하는 데는 유능한 부하처럼 든든한 게 없다.

자존심 때문에 오낙현이 먼저 전화하지 못했지만, 그걸 잘 아는 민치호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

과거에 적이었어도 입을 싹 닫고 아닌 척할 줄 아는 게 바로 정치인데, 그런 의미에서 오낙현은 정치인의 자질이 있었다.

애초에 파벌 싸움 좀 해본 사람이니 정치질도 어느 정도 할 줄 알았지만.

“청장님께서 든든하게 지켜주셨으니 저놈도 좋다고 날뛸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청장님께서 얼마나 그 자리에서 고생하고 계신지 압니다. 또 청장님이기에 하실 수 있는 게 있습니다. 제가 아무리 뛰어다녀 봤자 지방청장입니다. 청장님께서 가장 큰 지붕이 되어주고 계신 걸 제가 모르겠습니까.”

민치호가 작정하고 달래기 시작하자 오낙현의 표정이 풀어졌다.

다소 노골적인 말인데도 아부처럼 들리지 않는 건 상대가 민치호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빈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청장님은 좀 더 그 자리에 계셔 주셔야 합니다.”

“좀 더 방패가 되어달라 이 말인가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청장님만 한 분이 국세청에 없습니다. 인재도 볼 줄 아시고 해야 할 일은 하시고. 몇 년 전이었죠? 한 5번 전의 청장님이셨나. 외압 들어오니까 바로 모르쇠로 일관하셔서 지청장님들이 고생하셨잖습니까. 그때 대전지청장이셨죠?”

“아. 그때.”

오낙현이 치를 떨었다.

“아주 그냥 정치인 세무조사 하나 잘못 댔다가 된통 난리가 났지요. 청와대에서 직접 전화가 오고. 그때 대통령이 담기욱이었구나. 담기욱 이놈 아주 이번에 잘 걸려 들어갔어.”

“지금 국세청에서 청장님보다 더 이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후임자가 걱정인걸요.”

“민 청장이 앉을 거잖아요. 청장 자리.”

“아니요. 그 이후를 말하는 겁니다. 파벌이 없어진 것까진 좋았는데 이 자리는 사실 정치적 감각도 필요하잖습니까. 공무원으로서는 괜찮은 사람이 많지만 청장으로 보자면 글쎄요…….”

이전까지의 청장들은 있는 듯 없는 듯, 뉴스를 타는 일이 적었다.

외부와 얽히는 일이 없고 국세청 내부의 내정만 신경 썼다.

그러나 앞으로는 내정만으론 안 된다.

때론 정치권과 싸우는 일도 생길 테고, 정부의 방침과 맞지 않아 청와대와 투덕거리게 될 수도 있다.

현재 국세청의 방향성은 청장이 아니라 신재현이 쥐고 있으니까.

좋은 공무원은 많다.

하지만 그들이 청장 자리에 앉을 경우 국세청이 휘청거리지 않을 수 있을까.

제때 외압을 막고 국세청을 지켜낼 수 있을까.

민치호가 고민스러운 얼굴을 하자 오낙현이 툭 던져보았다.

“정 안 되면 손경진 다시 부르든가요. 정치적 감각은 뛰어난 사람이니.”

민치호가 기겁하며 학을 뗐다.

“그분이 청장 앉으시면 어떻게 될지 눈에 너무 뻔합니다. 신재현이야 살아남는다 쳐도 어중간한 재능 있는 놈들은 다 갈려 나갈 텐데요. 그분은 지금 마음 접으셨으니 괜히 건드리지 않는 게 좋습니다. 국세청에 피바람 불어요.”

“그건 그렇지요.”

생각도 없으면서 던져놓고 생각한 답변이 나오자 오낙현이 좋아했다.

‘역시 당신밖에 없다’는 투의 말에 오낙현의 기분은 이미 다 풀린 지 오래였다.

그는 아예 한 술 더 뜨기로 했다.

“그럼 신재현 올리죠.”

“예?”

안 될 걸 알면서도 그냥 한 말이었다.

그런데 민치호는 의외로 진지했다.

“어? 그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오히려 당황한 것은 오낙현이었다.

“……나야 임기 끝나면 나갈 거라 직급 체제든 위계질서든 신경 안 쓰고 해본 말인데 정말 가능하긴 해요?”

“중간에 누구 한 명은 더 있어야겠죠. 청장 임기가 2년에서 길어야 3년이니. 역대 청장님들 중에는 2년도 못 채우고 나가신 분들도 계셨고요.”

“잠깐, 생각해 보니까 청장 임기 짧은 건 대통령이 바꿔서 그런 거잖아요. 임명직이니까.”

“2년씩 하는 건 관례죠. 적당히 하고 후배들에게 길이나 터주라는.”

“근데 지금 국세청 위기 상황에 적임자가 없다면서요.”

“음…….”

장난으로 시작된 말에 둘의 진지한 고민이 이어졌다.

민치호는 어려운 얼굴을 했다.

“솔직히 청장님께서 3년 채워주시고 제가 3년 채우면 어떻게 될 것 같기도 합니다. 재현이가 지금 지서장 가잖아요. 중간에 다른 데 한눈 안 팔고 일직선으로 과장 국장 지청장 쭉 달린다 치면…….”

“아니지요, 민 청장. 과장 때는 조사국 2과장이나 3과장 이런 거 한 번만 해보면 된다 쳐도, 국장은 여러 군데 해보는 게 좋아요.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잖아요. 조사국은 당연히 무조건 해봐야 하고, 그 전에 개인이랑 법인 납세국도 필수로 돌아봐야 하고요. 자산과세국도 빼놓을 수 없죠. 상증세는 중대 사항인데.”

“각 1년씩 하면 우리 둘만으로 버티긴 좀 힘들겠네요. 아무리 사람이 없다 해도 몇 년 지나면 안정화될 테고. 너무 오래 청장 자리 버티는 것도 후배들에게 못할 짓입니다.”

둘은 어느샌가 진지하게 신재현의 진로를 고민하고 있었다.

오낙현이 고개를 기울이더니 박수를 딱 쳤다.

“그럼 지금부터 1명 키웁시다. 나 2년 더 하고 민 청장이 3년 하고. 그 담에 한 2~3년 할 사람 한 명 있으면 딱 맞겠는데. 어때요?”

“그 정도면 재현이도 경험할 건 다 경험해 볼 수 있겠네요.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때쯤이면 신재현이 몇 살이지? 30대 후반인가? 어 뭐야, 그래도 너무 어린데 괜찮은가?”

“20대 국회의원도 있고 30대 당 대표도 있는데 뭐 어떻습니까. 청문회 정도는 수월하게 통과할 것 같고.”

“청문회가 뭐야, 국회의원들이 신재현한테 타박이나 안 당하면 다행이지. 청문회 한답시고 불러다 앉혔더니 세금 좀 깔끔하게 내라고 잔소리하는 게 딱 그려지는데요. 국회의원 양반들 쩔쩔매는 모습이 참 재밌겠구만.”

오낙현이 무릎을 치며 히죽 웃었다.

그러다 갑자기 표정이 심각해졌다.

“근데 청장 하면 관례적으로 은퇴하는데, 너무 어린 나이에 청장 되면 문제 아니에요? 바로 은퇴해야 되나?”

민치호는 뭐가 문제냐는 듯 가볍게 받았다.

“종신 청장을 하든 몇 년 하고 내려와서 다시 조사국으로 가든, 아니면 지금의 조사단처럼 새로 뭔가 단체를 만들든. 그건 재현이가 선택하고 헤쳐 나갈 일이죠. 일단 길이나 깔아줍시다.”

“민 청장이 확실히 맞는 말을 잘해. 5년, 8년 후 얘기는 남은 놈들이 알아서 하겠지. 그럼 그런 방향으로 합시다. 지서장하고 오면 어디로 보낼지 또 생각해 봐야겠구만.”

“즐거운 고민 아닙니까.”

“그야 이런 고민이라면 100번도 더 하지요. 청장실 전화통에 불나면 뭐라고 둘러대고 끊어 버릴까 고민하는 것보단 훨씬 낫지.”

오낙현이 재밌어하며 히죽거릴 때였다.

밖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누군가 우당탕 소리를 내며 복도와 비서실이 연결된 문을 여는 것 같았다.

이 국세청에서 청장실 문을 저렇게 다룰 사람은 많지 않은지라 둘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올 것이 왔다, 라고.

“청장님! 청장님! 저 방금 출근했는데 대체 무슨…… 아, 안녕하십니까. 민치호 청장님도 와 계셨네요.”

아니나 다를까, 신재현이 대충 노크하는 시늉만 두어 번 하더니 바로 청장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함께 앉아 있던 민치호를 보고 주춤했다.

출근하자마자 청장실로 온 이유는 뻔했다.

오낙현은 귀를 문지르며 민치호를 가리켰다.

“지서장? 그거는 내가 아니고 이쪽 민 청장 의견이니까 따지려면 여기다 따져.”

신재현의 항의 방문에서 잽싸게 몸을 빼내는 오낙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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