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2화. 조사단의 정리 (2)
나는 빼꼼 내밀었던 상체를 원래대로 세우고 문을 활짝 열었다.
“진짜 부단장님이네. 세종에서 여기까지 얼마나 먼데 이러고 오셨어요! 말이라도 미리 해주시지!”
단발머리에 푸근한 인상의 팀장은 만면에 미소를 머금으며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본 것이 그렇게 반가운 듯했다.
특히나 단 한 번도 사무실에 방문하지 않았던 부단장이 직접 왔으니까.
나는 양손의 음료수 상자를 들어 보였다.
“이제 일도 없고 한가하겠다, 우리 팀원들 인사하러 왔죠!”
“우리 팀원들…….”
문 쪽에 앉아 있던 사장이 멍하니 되뇌이고 직원들은 뛸 듯이 기뻐했다.
나는 가까이 다가온 직원 한 명에게 음료수 상자를 건넸다.
직원은 바로 상자를 뜯어 각자 취향별로 음료수를 나눴다.
진정서 당사자인 두 남자의 앞에도 음료수가 하나씩 놓였다.
하지만 남자들은 음료수에 손도 갖다 대지 않았다.
그럴 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한 명은 겁먹은 표정으로, 한 명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눈동자를 데룩 굴리길래 나는 그쪽에 눈짓을 했다.
“어떤 건이에요?”
내가 관심을 가지자 사장이 움찔했다.
그의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보였다.
팀장은 대수롭지 않게, 그러나 누가 들어도 알 수 있도록 간결하게 설명했다.
“업종은 상품 도소매입니다. 통신판매도 겸하고 있죠. 노동자가 4개월간의 급여를 받지 못해 올해 초 진정서를 냈으나 사업주가 급여 지급을 미루었고, 이에 2차 진정서를 낸 상태입니다.”
“과정도 명확하고 결론도 명확하네요. 일반 과에서 안 하고 여기로 넘어온 이유가 있나요?”
여긴 엄밀히 말해 조사단이다.
해체하긴 했지만 원래라면 뒷정리하고 다음 발령을 기다리는 게 수순이었다.
시간이 남으니 타 과의 일을 나눠 받는 게 이상하진 않다.
그러나 아까 언뜻 들은 내용으로 봤을 때 평범한 화해 조정은 아닌 것 같았다.
만약 일이 비어 있다고 떠넘기듯 까다로운 일을 받은 거면 이건 좀 화딱지 나는데.
그래서 왜 이걸 여기서 맡았느냐고 물은 것이다.
줄여서 말했지만 팀장은 알아들었겠지.
과연 팀장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말을 골랐다.
일반인도 있다 보니 내부 사정을 돌려 말하는 것이다.
“원래 우리 모두 노동부 소속이잖아요. 어디든 그렇듯이 일은 많은데 사람은 적죠. 거기다 우리가 조사단 쪽으로 빠졌으니까 일이 또 얼마나 밀리겠어요. 간간이 조정 일도 받아서 하거든요. 아, 업무량은 제가 조율하고 있으니 괜찮습니다. 조사단 업무에는 지장 가는 일 없게 했어요.”
내 눈빛이 날카로워지자 팀장이 덧붙였다.
하지만 내가 궁금한 건 조사단 업무에 지장이 가느냐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일을 여기로 떠넘겼느냐지.
팀장은 날 안심시키듯 웃으며 말했다.
“이 건이 우리 과로 온 특별한 이유가 있긴 해요. 바로 여기 사업주 분이 아주 특별한 연줄이 있으시다네요.”
나는 단박에 흥미가 돋는 것을 느꼈다.
“특별한 연줄이라. 그걸로 직원들을 협박하기라도 했답니까?”
“어휴, 말도 마세요. 너네 다 잘라 버릴 수 있다고 하셔서 조정관도 몇 번이나 바뀌었는지 몰라요. 직원들 울면서 뛰쳐나가서 휴직계 낸 사람도 있고. 지나가다가 소리 듣고 제가 냅다 가져왔죠.”
“팀장님이 직접 받아 오신 건이었군요.”
나는 표정을 부드럽게 풀었다.
누가 떠넘긴 게 아니라 팀장이 가져온 거라면야 어떤 일이든 환영이다.
나는 사업주를 내려다보았다.
한마디로 진상이구만.
“특별한 연줄이라면 대체 어떤 연줄일까요? 여기서도 큰소리치시는 걸 보니 한가락 하시는 분 같은데. 제가 다 궁금해지네요.”
나는 아예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디 좀 알려주시겠어요? 제가 아는 분인지 보게.”
“그, 그게 말입니다.”
사장은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보통 공공기관에서 잘났다고 소리 지르고 언어 폭행하는 사람 중 진짜 잘난 놈은 별로 못 봤다.
물론 정말 억울해서 달려오신 분도 계시겠지만, 그런 케이스였으면 팀장이 빡쳐서 가져오지도 않았겠지.
일반 과에서 곱게 처리하지 못한 걸 보면 실제로 어느 정도 끗발 날리는 사람일 확률이 높았다.
그런 의미에서 팀장이 큰 결정을 했다 싶었다.
아니, 이제는 이런 놈들 정도로는 외압이라고 느끼지도 않는 건가.
봐줘야 할 대상이 아닌 철저하게 조사해서 원칙대로 해야 할 대상.
그렇게 생각하는 공무원이 늘어난 것만 해도 뿌듯하다.
팀장은 자신이 고른 사과 주스를 시원하게 들이켜며 말했다.
“글쎄 말이에요. 전 장관님의 친구라고 하지 뭡니까. 현직 장관님 아드님이 오셔도 어림없는 판국에 전 장관님의 친구님이래요. 참 대단하신 분이죠?”
“그렇네요. 어느 장관님이실까 굉장히 궁금해지는데. 혹시 사업 하시면서 전 장관님이 이런저런 도움 주신 건 아니죠? 예를 들어 대신 공무원들 혼내주신다거나 누구랑 아는 사이라고 귀띔을 해주신다거나.”
나와 팀장이 주거니 받거니 할 때마다 사장이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었다.
대놓고 앞담을 까는 거였지만 사장은 뭐라 입을 열지 못했다.
“어느 장관님이신지 성함 좀 알려주실래요?”
내가 은근하게 묻자 사장이 경기를 일으키듯 몸을 움찔했다.
그것이 신호가 된 것처럼 사장은 알 수 없는 비명을 뱉었다.
“끄악! 아닙니다, 아니에요. 장관이라뇨. 잘못 들으셨습니다. 아까 뭐라고 했죠? 월급, 그래 월급이요. 그 제가 돌아가 가지고 바로 넣겠습니다. 아, 아니다. 지금 넣겠습니다.”
우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장은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열더니 은행 앱을 켰다.
그리고 냅다 진정서에 쓰여 있는 금액을 눌렀다.
잠시 후 청년이 부웅, 울리는 핸드폰을 들었다.
문자를 확인한 청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들어왔다! 감사합니다!”
“확인했지? 다 끝난 거죠? 저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사장은 대답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쌩하니 사무실을 나가 버렸다.
5분도 안 돼서 벌어진 일이었다.
과정이고 뭐고 없이 순식간에 상황이 정리되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멍하니 지켜보던 고용노동관이 팀장에게 물었다.
“그냥 보내도 돼요? 세부조사 들어가야 하는 것 아닐까요? 현장 가보면 근로기준법 위반인 거 좀 많을 것 같은데.”
“그건 다른 과에 넘기죠. 이제 공무원 간다고 쌍욕할 것 같진 않으니까요.”
갑작스러운 상황 정리에 우리는 가만히 서로를 지켜보았다.
그러다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푸흐흡. 왜 백이 좋다 하는지 알 것 같네요. 살다 살다 이런 날도 다 오네.”
“와, 이래서 사람들이 아는 누구누구 이름 빌려오는 거구나. 아, 선생님께서는 돌아가셔도 됩니다. 나머지 서류 정리는 저희가 할게요.”
헤벌쭉 웃으며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청년이 엉거주춤 일어났다.
“아, 넵.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복 받으세요!”
어지간히 신났나 보다.
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연신 고개를 숙인 청년이 달려 나갔다.
사무실 문이 닫히고 이제 정말 우리끼리 남게 되자, 나는 대놓고 물어보았다.
“팀장님, 벌써 사무실 정리 다 끝나신 거예요? 저희는 지금 자료 보내고 정리하느라 난리도 아니거든요.”
이제는 빈 테이블에 팀장과 팀원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저희는 원래부터 그때그때 자료 정리해서 보냈잖아요. 딱히 정리할 게 없어요. 남은 몇 달간 흩어져서 일반 과로 돌아갈지, 아니면 정식 발령 전까지 이 구조 그대로 갈지는 모르겠어요. 상황 봐서 다른 과 업무 할당받아다 해야죠.”
“혹시 조사단 일 하시면서도 다른 과 일도 종종 하셨어요?
“그럼요. 원래 우리는 노동부 사람들인데. 사실 어디든 그렇잖아요. 일은 많은데 사람이 모자라지. 거기다 우리가 조사단 쪽으로 빠졌으니까 일이 또 얼마나 밀리겠어요. 근데 또 우리가 조사단이긴 해도 중간중간 쉬는 틈이 많아서 그때마다 지청 일 갖다가 하긴 했어요.”
“제가 할당한 일도 꽤 적지는 않으셨을 텐데…….”
바쁠 때는 진짜 이러다 죽겠다 싶을 정도로 바쁜 게 공무원 생활이라지만 내가 준 일도 만만치 않다.
거기서 지청 일까지 거들 여유가 있나?
내가 의아해하자 팀장이 소리 내어 웃었다.
“부단장님이 주는 일은 어디를 어떻게 파야 할지 지시가 명확해서요. 상대는 지저분한데 우리 일은 깔끔하게 딱 떨어지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리고 웬만하면 우리는 밑조사니까. 자료를 국세청하고 검찰청에다 보내잖아요. 물론 부단장님이 주시는 일이 몰아치는 특성이 있긴 해요. 급한 건이 대부분이라 지시 딱 내려오면 며칠간은 거의 밤새우다시피 하는데, 오히려 그렇다 보니 평소엔 널널하거든요. 당장 대통령 건도 저희는 일찌감치 조사해서 다 보냈잖아요.”
일이 다 끝난 시기라 그런지 팀장은 담담했다.
부담감 없이 잡담하듯 팀장과 일 얘기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봐도 금방 사건 개요 파악할 수 있도록 깔끔하게 보내주셔서 편했습니다.”
역시 경력자들이라고 할까.
이들은 항상 자신이 아닌 ‘남’이 볼 것을 전제로 해서 자료를 보냈다.
그야 그들이 만드는 건 백 데이터고 그 자료를 볼 사람은 나나 지현석이긴 하지만, 일 못하는 사람은 그런 생각도 없이 중구난방으로 하게 마련이다.
적어도 조사단에서 일하면서 다른 팀에서 온 자료 때문에 일에 지장이 생긴 적은 없었다.
그게 언뜻 보기엔 별거 아닌 것 같아 보여도 이들이 정리를 잘 해줘서 보내줬기에 가능한 일이다.
진심으로 고마웠다.
“솔직히 저 같으면 어리고 혈기만 앞서는 부단장 때문에 욕 많이 했을 것 같은데, 우리 팀원분들은 제가 요청하는 대로 정확히 해서 주셨거든요. 제가 사람 복이 많은 것 같아요.”
이런 얘기는 술 한잔 기울이면서 해야 제맛인데.
내가 머쓱하게 말하며 웃자 직원들이 꺄르륵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욕하긴 했죠! 마감이 살인적이라. 근데 부단장님이 어리고 혈기만 앞선 분은 아니잖아요. 사실 조사단에서 제일 일 많이 하기로 소문난 분 아닌가요? 세금 분야가 아니라 그 외에서도 그냥 날아 다니신다는데.”
“사람 복, 하면 우리도 할 말이 많지! 어디 가서 부단장님 같은 분하고 일해보겠어요. 저도 현장 뛰면서 재밌었어요. 살다 살다 국회의원 가족 사업 근로자들 조사해 본 건 처음이라니까요.”
“이제 저희도 웬만한 진상에는 눈도 깜빡 안 해요. 뭐랄까, 이젠 짠해 보여요. 오죽 못났으면 친구에 친척 이름까지 빌려서 잘난 척을 할까 싶어서.”
“실제로는 별로 친하지도 않으면서 아는 사이라고 위세 부리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저희도 대수롭지 않게 대하는데, 가끔 진짜 거물이 걸리는 경우가 있거든요? 예전에는 이러면 진짜 난감했는데, 요즘엔 그분들도 매너 있게 행동하십니다.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그래요. 괜히 공공기관 와서 난리 치는 사람은 하수, 조용히 낼 거 내고 조사받고 가는 사람이 고수라고요.”
직원들이 꺄르륵 웃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지금 시점에 공공기관 와서 나 누구니까 알아 모셔라 하는 사람은 없어요. 다들 조심하는 분위기거든요.”
누군가가 자신의 책상에서 아껴둔 과자를 한 봉지 가져왔다.
누구는 조용히 커스타드 파이를 뜯었다.
어느새 테이블 위는 과자 파티였다.
여직원 비율이 높은 탓인지 업무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수다로 넘어갔다.
일에 방해될까 봐 인사만 하고 나오려던 나도 엉겁결에 그 자리에 낀 꼴이 되었다.
급한 일도 없겠다, 직원들의 수다에 눌러앉은 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그동안 내가 들을 수 없었던 현장의 이야기였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오늘 또 한 군데를 갈 예정이었지만 그 일정은 진작 포기했다.
얘기에 빠져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동안 고생하셨다고 감사 인사를 할 겸 들른 거였는데, 어느샌가 그들의 가족 구성원 얘기까지 듣게 되었다.
나중에 지청을 나서고 나니 해가 기울고 있었다.
이게 노동부만 이런 건지 아니면 다들 비슷한지 궁금했는데, 막상 다른 기관을 가니 사정은 비슷했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평소에는 바빠서 일만 하느라 전화기 너머로만 봤던 사람들을 이제야 비로소 사람 대 사람으로 대하는 기분이었다.
그 후에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각 기관에 설치된 조사단 팀에 들렀다.
하루에 1군데만 갈 때도 있고, 2~3군데를 들를 때도 있었다.
그렇게 모든 팀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난 후, 내가 가장 고맙게 생각하는 우리 팀으로 돌아왔을 때.
서울로 출장 가기 전보다 훨씬 휑하고 텅 빈 느낌이 드는 사무실이 나를 맞이했다.
상자가 쌓여 있어서 좁고 북적거리던 사무실의 분위기가 확 바뀌어서 순간 잘못 들어온 줄 알았다.
팀원들이 여전히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게 이렇게 안심이 될 줄이야.
그런데 팀원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흥분되어 있었다.
나 없는 사이에 또 뭔가 일어났나 보다.
“이번엔 무슨 일이에요?”
침착하게 묻자 너 나 할 것 없이 이구동성으로 사방에서 외쳤다.
“축하드립니다, 팀장님! 지서장이 되셨어요!”
아.
발령 공고가 좀 늦다 했더니 이런 뒷사정이 있었구나.
청장이 또 일을 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