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1화. 조사단의 정리 (1)
“어으, 더워.”
아침에 추워서 두꺼운 재킷을 꺼내 입었는데 낮이 되니 등짝에 땀이 주륵 났다.
나는 재킷을 벗어 팔목에 걸쳤다.
아침과 낮의 온도 차이가 10도를 넘어가는 가을이었다.
이 날씨에 잘못하면 감기 걸리기 십상이다.
오늘 아침 집을 나올 때 어머니는 아예 따뜻하게 입으라며 목도리까지 챙겨 주었는데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서 거절했다.
낮에 이렇게 더운데.
근데 또 모른다.
저녁에는 귀신같이 추워져서 엄마 말 들을걸, 하고 후회하고 있을지도.
“건물이 어디냐…… 왜 이렇게 복잡해.”
양손에 음료수 상자를 가득 들고 나는 골목을 헤맸다.
오늘은 들를 곳이 많았다.
며칠 전 기자회견에서 조사단 해체를 정식으로 발표했기 때문이다.
담기욱의 첫 공판 역시 예상에서 그닥 벗어나지 않는 흐름이었다.
그야 증거가 명확하니까.
상대는 옛날식 재판을 생각하고 전관예우 멤버로 변호사를 도배해서 온 것 같은데, 지금 재판을 얕보면 큰코다친다.
그의 상대, 그러니까 검사 측에는 우리가 있으니까.
힘없는 검사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면 판사도 외압을 못 이기고 잘못된 판단을 할지도 모르지만, 증인석과 검사석에 앉아 있는 게 우리인 이상 나름 공명정대한 판단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담기욱이 갑자기 아프다며 법정을 떠나겠다고 할 때, 판사가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법정을 모독하지 말라고.
아픈 기색도 하나 없는데 멀쩡하니 일어나서 걸어 나가니까 그렇지.
적어도 쓰러지는 시늉이라도 해야 될 것 아닌가.
마음에 안 드는 얼굴로 법정에서 당당하게 걸어 나가려다가 판사의 제지를 받고 멈춰선 그의 표정이 참 볼만했다.
그런고로 조사단의 중요한 일은 다 끝났다.
국세청 사무실에서는 자료 정리해서 보관실로 보내는 작업이 한창일 것이다.
그 후에는 사무실을 비울 준비를 할 테고.
바로 사무실을 비우는 건 아니라서 정리가 끝난 후에도 자질구레한 조사를 하긴 할 거다.
조사단, 그러니까 다른 기관과 힘을 합쳐 공적 자원을 아낌없이 끌어다 쓰던 그 체제를 그만한다는 것뿐이니까.
조사단이 해체되어도 우리는 국세청 공무원이다.
국세청 조사팀 중 하나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면 쉽다.
대신에 그리 큰 건은 맡지 않을 생각이었다.
조사단을 여기서 멈추는 이유가 과한 어그로 때문이었는데, 국세청의 힘만으로 또 큰 사건을 맡기에는 부담스러웠다.
조금 열기가 식은 후라면 몰라도 지금은 전국이 너무 과열되어 있다.
국세청에 항의 방문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으니까.
나도 이제 무작정 뚫고 나가지는 않는다.
민치호의 조언대로 부딪혀 봐야 할 때가 있는 반면, 몸을 사려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나 혼자만이 아니라 팀원들도 딸려 있으니까.
백 명에 달하는 팀원들은 나와 지현석만 믿고 1년 가까이 따라왔다.
처음 들어올 때 무슨 생각이었겠는가.
부단장이 나고, 주 업무는 그동안 손대지 못한 거물들 친다고 했을 때.
국회에서 외압이 들어와 실제로 피해를 입었을 때.
공무원 생활 끝장날 수도 있겠다는 각오를 했겠지.
그런데도 이탈 없이 끝까지 따라와 준 사람들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하다못해 사기업에서 프로젝트가 하나 끝나도 회식하고 상여금을 주는데.
그동안 야근하고 주말 근무하고 고생 많으셨다고 인사라도 해야지.
그래서 이렇게 지도를 보며 길을 헤매고 있는 것이다.
“아이고, 죽겠네.”
공공기관이 왜 이렇게 골목 구석지에 있는지.
나는 건물을 발견하고 만세를 부를 뻔했다.
실제로 만세를 하지 못한 건 양손에 든 음료수 상자가 무거웠기 때문이기도 하고 건물이 두 개라 그런 것이기도 했다.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등지고 서 있는 건물을 보고 나는 고민에 빠졌다.
“아니, 미쳤나? 건물 하나 빌려서 부서 다 몰아넣으면 되지 왜 두 개에 나눠서 해놨대?”
보아하니 건물에 지청만 있는 것도 아니다.
노무법인, 은행, 카페, 일반 사무실 등등 다 함께 세 들어 사는 처지였다.
나는 투덜거리며 건물 안내 문구를 읽었다.
자세히 보니 한쪽은 고용센터, 한쪽은 지청이다.
고용센터라면 실업급여 주고 취업지원해 주는 곳이다.
반면 지청은 근로감독관이 있는 곳이다.
흔히 ‘회사에서 월급을 안 줘요’나 ‘최저임금을 안 줘요’ 같은 노사분쟁이 일어나면 진정서를 내러 가는 곳 말이다.
말하자면 국세청 본청 밑에 각 지역의 대장격인 지방청이 있고 그 밑에 각 관할 세무서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노동부도 본청은 세종시에 있고 각 지역에 지방청이 있다.
고용센터는 아예 고용, 취직과 관련된 업무를 따로 빼놓은 것이고.
조사단 사무실인데 왜 본청이 아니라 지청에 있는가 하면, 저쪽 사정이라 나도 정확히 알지는 못 한다.
조사단 지부라고 무조건 본청에다 사무실을 내주는 건 아니다.
지현석이 서울중앙지검의 검사라서 조사단 검찰 지부가 거기에 세워진 것도 그렇고.
각각 기관마다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노동부 쪽에서는 일단 팀장을 먼저 선정한 후, 팀장의 소속에 따라서 사무실을 만들었다고 들었다.
그러니까 그 단발머리의 팀장이 서부지청 소속이라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내가 갈 곳은 센터가 아니라 지청이겠지?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건물로 들어섰다.
서울서부지청은 3층과 5층에 세 들어 살고 있었는데 그 외의 층에는 노무법인이 많았다.
세무서 앞 골목에 가면 세무사 사무실에 수십 개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산지직송이라고 할까.
조사단 사무실은 건물 입주자 안내판에도 없었다.
뭐, 이건 국세청도 마찬가지라 물어물어 가는 수밖에.
진정서를 낼 생각이면 3층으로, 의뢰할 생각이면 다른 층의 노무법인으로.
나는 회의실이 모여 있는 5층으로!
국세청에서 우리 사무실 만들 때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고 느낀 건데, 소회의실로 남아 있던 방을 통째로 주는 게 가장 편하다.
기존에 있는 과를 공사할 수는 없으니까.
원래 있던 과는 필요하니까 놔두고 보통은 비는 방을 빼준다.
그러고도 정 안 되면 디스크 조각모음 하듯이 사무실을 파티션으로 쪼개고 빈자리를 만들곤 하지.
그러니 일단 필수 과가 있는 3층은 놔두고, 상대적으로 빈 공간이 있어 보이는 5층으로 향했다.
역시나 회의실로 쓸 법한 작은 공간 하나에 ‘조사단 고용노동부 사무실’이라고 붙어 있었다.
불투명 유리라 안은 보이지 않아서 단기적으로 쓰는 사무실치고는 적당했다.
일부러 예고도 안 하고 왔는데 놀라겠지.
그렇다고 너무 오래 머물면 부담스러워할 테니까 적당히 인사만 하고 가야겠다.
다른 곳도 돌아야 하니까.
그런 생각으로 문에 손을 가져갔을 때였다.
“아, 글쎄.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잖아! 돈이 말만 한다고 하늘에서 뚝 떨어지나!”
안에서 웬 남자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나는 문손잡이를 잡은 채로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애초에 사무실이 아니라 회의실 용도로 만든 것이다 보니 방음이 썩 좋지는 않았다.
안에서 여자가 달래는 듯한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들리고, 보다 젊은 남자의 억울해하는 소리도 들렸다.
그래도 벽의 기능은 있어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맨 처음 소리를 지른 남자의 흥분한 목소리는 아주 잘 들렸다.
문을 뚫고 목소리가 나오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한 번에 주냐! 회사 사정이 어려우니까 나눠서라도 주겠다고 했잖아! 그새를 못 참고 쪼르르 달려와서 노동부에 꼰질러? 야, 진정서를 두 번이나 넣는 새끼가 어디 있냐!”
보아하니 2차 진정서까지 넣은 것 같았다.
보통 노동자와 회사 간에 다툼이 생기면 담당할 고용노동관이 배정되고 둘 사이를 조정하게 된다.
둘을 불러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해결점을 찾는 것이다.
그런데 1차에서 해결이 안 되고 2차까지 왔으면 사장이 어지간하다는 건데.
나는 참지 못하고 손잡이에 힘을 주어 살짝 밀었다.
잠겨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문이 열렸다.
조사단 일 하는 동안은 우리가 다루는 사안이 독특하다 보니 보안에 신경 쓰라고 각 팀장들에게 신신당부를 했었으니, 조사단 해체 통보하고 나서 열어둔 거겠지.
아니면 손님 때문이던가.
열린 문틈으로 풍채 좋은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목소리나 체격으로 봐서는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데.
건너편에 앉은 이는 나보다도 어려 보이는 청년이었고, 꼭짓점에 앉은 것은 고용노동부의 직원이다.
저번에 현장 뛸 때 얼핏 본 기억이 난다.
눈동자를 굴려 더 안쪽을 보니 반가운 얼굴들이 보였다.
다들 정확한 이름은 몰라도 얼굴만은 기억하고 있다.
회의실에 책상이나 집기를 넣고 사무실처럼 꾸민 가운데, 맨 안쪽에는 역시나 단발머리의 팀장이 있었다.
그녀는 문가의 테이블에서 벌어지는 일을 지켜보며 살짝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팀원이 하는 일이니 개입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좌시하지는 않겠다는 느낌이다.
언제든 끼어들려고 타이밍을 재는 것 같았다.
사업주로 보이는 남자가 청년을 윽박질렀다.
“야, 대답해 봐. 내가 뭘 못해줬냐.”
“돈을 안 주셨잖아요.”
“이놈이 꼬박꼬박 말대답하는 거 보소. 야, 인마. 말했잖아. 회사가 어려우니까 서로서로 돕고 살아야 된다고. 너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 데려다가 일 가르쳐 준 것만 해도 오히려 내가 교육료를 받아야 돼. 내가 언제 안 준댔어? 천천히 준다고! 너 아예 우리 회사 망하게 하려고 작정했냐? 네가 일 못하니까 악의를 품고 일부러 이러는 거 아냐, 지금!”
청년이 억울해하며 쏘아붙였다.
“처음에 월급 네 달이나 밀렸고, 다음 달에 준다 하셔서 두 달이나 또 기다렸어요. 조금씩 주신다면서 지금까지 한 푼도 안 주셨잖아요! 벌써 여덟 달이나 됐는데!”
노동부 직원이 중재를 시도했다.
“근로자가 신입이라 가르쳐야 하는 건 면접 때부터 이미 알고서 뽑으신 거잖아요. 감수하고 계셨던 거니 그게 월급을 안 줘도 되는 이유는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저번 조정 때 조금씩 준다고 약속을 하셨지요? 한 달에 10만 원이든 20만 원이든 조금씩이라도 넣어 주셨으면 이분도 이해를 하셨겠…….”
“아, 사업이나 해봤어요? 말해봐요, 사업 해봤냐고. 요즘 얼마나 힘든지 거래처 대금도 못 주고 있는데. 사업이 뭔지도 모르면서 끼어들지나 마쇼. 나는 지금 내 직원한테 말하고 있으니까.”
사장이 말을 딱 자르자 직원은 대충 봐도 폭발 직전인 게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오래 일한 공무원답게 화를 삭이고 표정을 다스렸다.
다른 팀원들도 슬금슬금 시동을 거는 것이 보였다.
나도 못마땅했다.
물론 양쪽 사정은 다 들어봐야 하는 게 맞고, 여기가 내 관할도 아니라지만 가만히 보내기에는 뱃속에서 열불이 솟구쳤다.
내가 막 문을 밀고 들어가려 할 때였다.
“그러니까 어쩌시겠다는 건가요?”
“뭐요?”
“1차 조정을 제가 담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양쪽 분의 말씀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들었습니다. 사장님께서는 지금 일을 해결할 의지가 없으신 것 같아서요.”
“해결할 생각이야 당연히 있는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이놈이……!”
“그건 사장님 개인 감정이고요.”
“뭐……?”
직원의 침착하고도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해결할지 말지, 할 거면 어떻게 할지. 그것만 말씀하세요. 감정싸움에는 관심이 없거든요. 정 싸우고 싶으면 재판까지 가게 해드릴까요?”
“공무원이 이렇게 나와도 되나? 노동자랍시고 편드는 거야? 당신 몇 급이야? 내가 누군지나 알아?”
“제가 몇 급이면 해결에 영향이 가나요? 사장님이 누구시든 여기서는 노사 분쟁 조정 대상일 뿐입니다. 아니면 뭐, 대통령 사돈의 팔촌 정도 되시나요? 저희가 며칠 전까지 대통령의 팔촌 사업체를 엎고 왔거든요.”
오, 세게 나가는데.
다른 공무원이라면 저런 말 함부로 못 한다.
역시 이래야 조사단이지!
나는 흐뭇하게 웃다가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청년과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아차, 문을 잡은 손에 힘이 너무 들어갔구나.
“어어어! 어! 어엇!”
제대로 말은 못하고 소리만 지르는 청년을 보며 사업주가 면박을 주려고 했다.
“이거 봐, 내가 이런 놈을 데리고 일을 가르쳤다니까?”
“아니, 뒤를 보라고요! 뒤를!”
청년이 내 쪽을 가리켰다.
이미 들킨 것, 나는 문을 좀 더 열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무슨 개소리으아아아악!!!”
사장이 벌에 쏘인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부단장님! 여기까지 어쩐 일이세요!”
“우와! 부단장님이다!”
팀원들이 반갑게 맞아주는 가운데, 나는 뒤를 돌아본 채로 굳은 사장을 향해 눈을 찡긋했다.
“우리 조사단 팀원분들한테 인사하려고 왔죠.”
“여기가…… 신재현 조사단이라고?”
“네. 떡하니 사무실 문패에 붙어 있는데 그걸 모르고 왔어요?”
“아니, 나는 그냥…… 조정기일에 출석하라는 문자 받아서. 그 조사가 이 조사인 줄 알고…… 미친.”
사장이 주위를 한차례 둘러보더니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제야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깨달은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