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7화. 은밀한 다음 타깃 (7)
담기욱은 지현석의 검사실에 앉아 생각했다.
조사단 이름으로 주어진 사무실 중에서도 꽤 안쪽에 있는 방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무려 양손에 수갑을 차고 차에 실려 오는 그 굴욕적인 상황에서도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이 더운 날에 얼굴을 가리기 위해 재킷을 뒤집어쓰고 땀을 비 오듯 뚝뚝 흘리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일이 왜 이렇게 됐는지.
다음에 조용히 출두하겠다, 주차장으로 출석하게 해달라 등의 요구는 통하지 않았다.
바늘구멍 하나 들어갈 틈 없는 벽이 느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법무부의 수장인 장관이 자신 앞에 와서 고개를 조아렸는데.
그뿐인가, 검찰총장과 국세청장도 자신의 허락 없이는 입도 떼지 못했다.
바로 자신이 앉아 있는 이 건물의 어떤 놈도 똑바로 자신의 눈을 바라보지 못했다.
하물며 부부장검사나 6급 공무원 따위가 자신을 끌고 온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천지가 뒤집힌 거나 마찬가지인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과정과 결과는 알겠다.
그러나 도저히 원인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거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았어?’
별관은 일부러 내부를 복잡하게 인테리어 했고, 경호원조차 순찰에서 제외시켰다. 경호원의 순찰 루트에서도 제외시켰다.
CCTV도 별관 로비에만 있어서 자신과 형이 구체적으로 어딜 드나드는지 경호원들도 몰랐다.
안다고 해도 다음 단계가 남아 있다.
거기를 콕 짚어서 비자금이 숨겨져 있다는 걸 알려면 세 가지를 확신해야 했다.
전 대통령인 자신이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것, 그걸 집 안에 숨겼다는 것, 그리고 그 정확한 위치.
이 중 하나라도 확신하지 못하면 정확하게 그 위치를 집어내 뜯어낼 수가 없는 것이다.
겉보기엔 아무것도 없는 창고의 벽이었고, 그걸 뜯기엔 리스크가 너무 크니까.
무려 전 대통령 집을 종횡무진 헤집고 다니다가 멋대로 벽을 뜯었는데 아무것도 없으면?
신재현은 바로 나락이다.
그러니 자신의 위치와 명예를 걸고서도 ‘여길 반드시 파야 한다’는 확신이 있을 때만 가능한 행동이었다.
사저에 처음 와본 신재현이 그걸 어떻게 알겠는가.
애초에 그 복잡한 별관의 복도를 아무 거리낌 없이 다니며 문제의 창고 방까지 온 것도 이상했다.
백 번, 천 번을 생각해도 이 모든 것은 단 하나로 귀결되었다.
‘내부자가 있다!’
분명 신재현은 선반을 지목할 때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미리 듣지 않고서야 그런 확신은 나올 수가 없다!
게다가 나중에 듣고 알긴 했지만 신재현은 금고 안에 든 물건을 굉장히 구체적으로 읊었다고 한다.
서재 깊은 곳에 숨겨둔 비자금 기록 장부가 유출되었나 싶을 정도였다.
내용물을 대략적으로 말했다고는 하지만 그건 안에 뭐가 있는지 알아야 할 수 있는 말이다.
금고에 현금만 있을 수도 있고, 보석류가 있을 수도 있는데 그 목록을 쭉 말했다고 하지 않는가.
누군가가 신재현에게 귀띔해 준 게 분명했다.
그럼 그게 누굴까.
‘경호원들? 아냐, 서재와 침실 쪽엔 CCTV가 없지만 복도엔 있어. 누가 몰래 들어가면 다 보인다고. 경호원 놈들이 모조리 한통속이 아닌 이상 이상한 게 보였으면 바로 보고가 올라왔을 거야. 저택 사용인들은 내가 창고 방에 자주 가는 걸 알지만 금고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알 방법이 없어. 일부러 면접에서 멍청한 놈들만 골라 뽑았는데!’
괜히 머리 돌아가는 놈을 고용했다가 이상함을 눈치채는 것보다 적당히 일만 하는 놈을 써먹는 게 좋다는 생각에서였다.
‘고용인 중에선 없을 거야. 처음부터 비자금 파헤치려고 작정하고 들어온 거면 그게 일반인이야? 첩보원이지.’
다음 후보는 청와대 시절 자신을 도왔던 보좌관과 비서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비자금을 조성한 사실만 알 뿐, 그게 어디에 있는지 구체적으로 얼마인지는 모른다.
사저를 지은 사람, 인테리어를 한 사람, 금고를 설치한 사람, 비자금 조성을 한 사람, 중간에서 지시를 전달한 사람, 돈을 옮긴 사람 모두 달랐다.
원래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할 땐 이렇다.
가장 일선의 말단은 자신이 뭘 하는지조차 모르게 한정된 정보만 주는 것이다.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각자 가진 정보를 맞춰보지 않는 이상 ‘담기욱 사저 창고 방 금고에 비자금이 있다’는 사실은 모른다.
가족조차 금고의 존재는 몰랐다.
그리고 유일하게 이 모든 정보를 아는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다.
아까부터 설마 아니겠지, 하며 부인했던 그 이름.
정보가 새어나갔다고 치면 가장 먼저 의심을 받을 사람이지만, 믿고 싶어서 억지로 떠올리지 않았던 이름 말이다.
바로 담기욱의 형이었다.
‘형이 왜? 밀고해 봤자 자기 손해인데.’
애써 머릿속으로 형을 두둔해 보려 했지만 그를 반박하는 논리가 수없이 떠올랐다.
정치인이었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 사람이 배신하는지는 잘 안다.
이번에 담기욱은 형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멍청하고 욕심 많은 형은 거기에 앙심을 품었을 수도 있다.
보통 버림말이 뒤통수치는 경우가 그거다.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다고 느꼈을 때.
그래도 재산은 모조리 금고 안에 있으니까 그게 갖고 싶어서라도 배신은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검사 놈들한테 훼까닥 넘어갔구만.’
취조실에서 검사와 수사관들이 달달 볶아 구워삶았겠지.
정말 징역 살고 오면 호화롭고 여유로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담보로 뭐라도 하나 들고 있느냐, 몸통이 당신을 모른 척하면 어쩔 거냐, 지금도 당신을 잘라내지 않았느냐 등등.
담기욱으로서는 조사단이 어디까지 파악하고 있는지 모르니 최악의 경우를 가정해야 했다.
조사단 쪽에서 물적 증거만 없을 뿐 모든 정황과 심증을 파악한 후라고 말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형이 수상했다.
검찰 출두한 이후 형을 한 번도 못 본 것이 마음에 걸렸다.
검찰의 주목을 받게 될 테니 일부러 거리를 둔 것인데도 그것조차 의심스러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비밀 금고를 말할 만한 내부자는 형밖에 없었다.
-으득.
가만히만 있으면 몇 년 후에 조용히 호화로운 생활을 즐길 수 있을 텐데.
다 같이 죽자는 결정을 내린 이유가 뭔지 담기욱은 궁금해졌다.
그는 이제 내부 고발자를 완전히 형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덜컥.
때문에 문이 열리고 지현석과 신재현이 들어왔을 때, 뭐라 질문을 하기도 전에 담기욱이 먼저 퍼부었다.
“내부 정보, 맞지?”
담기욱의 눈은 시뻘게져 있었다.
흰자위의 핏줄이 터지면서 금방이라도 피눈물이 흘러내릴 듯했다.
그야 소중히 모아온 비자금 수백억을 압수당하게 생겼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 새끼야, 내부 고발자 맞냐고!”
신재현은 대수롭지 않게 듣고 흘렸다.
지현석 역시 능숙하게 표정을 감췄다.
그러나 정치판에서 이십 년 가까이 구른 담기욱은 지현석의 얼굴에 스쳐 간 그 미세한 흔들림을 알아차렸다.
‘맞구나! 내부 고발자가 맞아!’
신재현은 탈세액이 보이는 걸 숨기기 위해 조사단에 내부 고발자 핑계를 댔다.
내부자 신원은 보호해야 하니 팀원들끼리도 웬만하면 묻지 않는 것이 태반이었다.
지현석 역시 신재현에게 자세한 사정을 묻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금고를 찾아냈고, 신재현이 내부자라고 하면 내부자인 것이다.
그게 화근이었다.
지현석이 찰나간 보여준 표정은 연기가 아니었고 그게 담기욱에게 확신을 준 것이다.
“담기욱 씨, 67세 맞으시죠? 현재 사후영장 들어갔습니다. 저희가 압수한 금괴와…….”
“다 집어치우고 누구야? 누구냐고!”
핏발 선 눈동자로 노려보는 담기욱의 얼굴은 흉신악살 같았다.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수십 번 찔러 죽일 수 있을 듯했다.
그가 최소한의 이성만 남아 있었어도 여기서 이렇게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변호사가 올 때까지 입을 꾹 다물고 살아날 방법을 찾았겠지.
그러나 갑작스러운 기습 방문 한 방에 가장 소중한 금고까지 털리고 형이 뒤통수를 때렸다는 것에, 담기욱은 눈이 뒤집힌 상태였다.
하다못해 담기욱을 조사한다는 어떤 은근한 신호라도 있었으면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을 것이다.
중간에 티라도 냈으면 모를까, 쿠션도 없이 훅 들어온 급전개에 정신을 차릴 기회도 없었다.
신재현이 한심한 표정으로 차갑게 말했다.
“지금 질문하는 건 접니다. 담기욱 씨.”
전 대통령님도 아니고 이름에 씨를 붙여 부르자 담기욱이 폭발했다.
“야, 하찮은 공무원 나부랭이가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이 새끼 겨우 6급 주제에 어딜 기어올라? 너 윗대가리가 그렇게 하라고 가르쳤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어디서 앉을 자리 설 자리 구분도 못 하고 날뛰어? 너 인마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야! 당장 지검장 데려와!”
담기욱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신재현은 더 이상 대화가 통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현석이 흘끔 신재현을 보더니 따라 일어났다.
시간을 좀 주고 내버려 두면 자기 처지를 자각하겠지, 하는 마음이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사람은 취조실에 혼자 놔두면 어느 순간 ‘어, 진짜 엿 되는 거 아닌가’ 하며 이성을 되찾게 된다.
지금은 대화도 통하지 않지만.
“당장 지검장 내려오라고 해. 그리고 당장 검찰총장한테 전화해서 튀어오라고 해! 이것들이 당장 와서 머리를 조아려도 시원찮을 판국에 정신머리가 썩어 빠졌어!”
비록 수갑은 찼어도 담기욱 자신은 이런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직 영장도 안 나왔고 금고 안의 자산이 불법 수익이라고 확정된 것도 아니다.
사전에 어떤 조사를 했든 지금 확실한 건 ‘금고 안에 현금성 자산이 있었다’라는 것 하나뿐이다.
설령 잘못이 있다 해도 극진히 대접해도 부족할 판에 취조실에 덩그러니 남겨두다니.
원래라면 일이 이렇게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어떤 혐의가 있든 일단 여론의 눈치가 보이니 잡아오되, 지검장실이나 부장검사실의 소파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게 정석적인 전개였다.
적어도 자신이 대통령일 때 권력자가 재수 없게 걸려 잡혀 오면 그렇게 해주었다.
그게 예의고 관습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총장이든 지검장이 버선발로 달려 와서 ‘일이 이렇게 되어 죄송합니다, 적당히 시간 죽이시다 돌아가시면 됩니다’라고 양해를 구했어야 했다.
저런 일개 공무원과 검사 따위가 콧대를 세울 게 아니라!
“좀 오래 걸릴 것 같네요. 그럼 담기욱 씨는 천천히 하는 거로 하고 다른 분 먼저 하죠. 관련자도 조사해야죠.”
“그래야겠네요. 영장 떨어지면 시간이야 많으니까. 수사관님! 좀 들어와 보세요!”
살기 어린 담기욱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두 청년은 차분히 조사 계획을 세웠다.
수사관이 들어와 씩씩대는 담기욱을 끌어냈다.
영장이 나오고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될 때까지 대기할 장소로 보내는 것이다.
“놔, 이 새끼들아! 너희들 내가 누군지 몰라? 너희 몇 급이야!”
쩌렁쩌렁 소리를 지르던 담기욱이 양팔을 붙잡혀 복도로 나갔을 때, 그가 돌연 뻣뻣하게 굳었다.
복도 맞은편에서는 담기욱 말대로 자수하고 성실하게 조사를 받는 중이던 그의 형이 걸어오고 있었다.
신재현과 지현석이 말한 관련자 조사라는 게 바로 주택공사 사장이었던 것이다.
그는 조사단 사무실 앞에 서 있는 담기욱을 발견하더니 눈을 크게 떴다.
“아, 아니. 기욱아, 네가 왜…….”
일이 잘못 돌아간다는 걸 느낀 사장이 주춤했다.
그러나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담기욱의 발광이었다.
“이, 이 배은망덕한 놈! 능력도 안 되는 걸 형이랍시고 좋은 자리 앉혀주고 일에 끼워줬더니 이렇게 갚아?”
옆에서 붙잡기도 전에 뛰쳐나간 담기욱은 형의 멱살을 휘어잡았다.
67세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괴력이었다.
“켁켁, 이거 왜 이러는 거야. 크흡, 담기욱!”
“왜? 몰라서 물어? 네가 내 뒤통수를 치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았어?”
조사단 사무실에서 수사관들이 뛰어나와 둘을 말렸다.
장정 서너 명이 붙어서야 겨우 떼어낼 수 있었다.
문가에 서서 복도의 광경을 바라보던 신재현이 중얼거렸다.
“와, 이거 둘이 한통속으로 짜고 친 거 맞는 거 같죠?”
지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형제간에 뭔가 거래가 있겠거니 싶어서 일부러 마주치게 판을 짠 것인데 이렇게나 격한 반응이 나올 줄은 몰랐다.
담기욱이 단단히 오해를 한 거라는 걸 아는 사람은 이 안에서 신재현 하나뿐이었다.
사장은 억울해하고 담기욱은 허공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둘이 서로 배신당했다고 생각하는 거군. 일이 생각보다 잘 풀리겠는데.’
담기욱에게 얻어맞은 뺨을 부여잡고 울상을 지으며 사무실로 들어가는 사장을 본 신재현이 서늘하게 웃었다.
양쪽 모두 요리하기에 딱 좋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