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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세청 망나니-464화 (464/500)

464화. 은밀한 다음 타깃 (4)

전 대통령 담기욱은 사저에서 조용히 TV를 보았다.

화면에는 형의 침울하고 의기소침한 표정이 줌되어 있었다.

연신 ‘죄송합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대한주택개발공사의 사장은 누가 봐도 침통해 보였다.

그러나 담기욱은 무미건조하게 이렇게 생각했을 뿐이다.

‘연기 잘하네.’

말 그대로 사장의 지금 모든 말과 행동이 연기였다.

동생인 전 대통령이 시키는 대로 혼자 뒤집어쓰고 이쯤에서 꼬리를 자르기 위해서였다.

-모든 것이 제 불찰입니다.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전부 제 잇속을 채워보려는 알량한 욕심 때문에 시작된 일입니다. 저를 믿고 따라주셨던 우리 공사 임직원분들, 그리고 부당한 밀어주기 계약으로 피해를 보신 업주분들께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저는 제 잘못을 모두 인정하고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언가를 숨기려거든 들킨 척하며 조금만 보여줘라.

그의 형은 조언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다.

이제 시간이 좀 지나면 상황을 봐서 은근슬쩍 여론전도 시작할 것이다.

‘그래도 가장 먼저 자기 잘못 인정했네.’

‘솔직한 모습 보기 좋다.’

‘전 대통령은 아무 상관없을걸. 너네는 형제끼리 모든 걸 다 터놓고 사냐?’

‘동생 이름에 먹칠될까 봐 빨리 인정한 듯.’

‘끝까지 발뺌한 놈들보다 백배 낫다.’

이런 식의 댓글이 점점 늘어날 것이다.

당연히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낫긴 뭐가 나아. 똑같이 잘못한 놈인데’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여론이 우세한 건 초반뿐이다.

관심이 식고 기억에서 잊힐 무렵엔 오히려 전 대통령에게 좋은 여론이 형성되어 있을 테니까.

그리고 조사단에서 연락이 온 것은 그때쯤이었다.

담기욱은 대번에 자신이 훨씬 유리함을 파악했다.

‘뭔가 증거가 있으면 쳐들어왔겠지. 아니면 출석요구서가 날아오거나. 공적인 액션이 오가기 전에 사적으로 전화가 먼저 온다라.’

만약 조사단 쪽에서 뭔가 꾸미고 있었다 해도, 그쪽에서는 선제타를 맞은 느낌일 것이다.

친혈육인 형까지 꼬리 자르기로 내어놓을 줄은 몰랐을 테니까.

사장은 공기업에서 저지른 모든 비리를 인정했다.

수사기관에서 알아내지 못한 것까지 전부 다.

그 상황에서 과하게 추궁하긴 힘들 것이다.

워낙에 협조적이고 자수한 거나 다름없는데.

그러니 이렇게 전화를 걸어온 것 자체가 눈에 보이지 않는 기 싸움에서 지고 들어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적어도 정치의 세계에서는 그러했다.

흔히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아쉬운 사람이 먼저 손을 내밀게 되는 법이다.

“네. 담기욱입니다만.”

전 대통령 사저에 걸려온 조사단 부단장의 전화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안녕하십니까, 조사단 부단장이자 국세청 6급 팀장인 신재현이라고 합니다.

상대의 정체를 듣고 난 후엔 그야말로 쾌재를 불렀다.

전 대통령이다 보니 격에 맞는 공무원이 전화해야 하는 건 당연하다.

그래서 차장검사나 지검장이 전화할 거라 생각했는데 아예 신재현이 직접 전화할 줄이야.

단순 급수로 따지자면 지검장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대화의 가치로 따지자면 지금 신재현의 전화가 훨씬 높았다.

애초에 전 대통령은 공무원이 아니라 정치인이다.

오로지 정치적 가치만 두고 보는 것이다.

정치권에도 가끔 괴물 같은 신인이 나와서 기함을 하곤 한다.

어디선가 정치계 입문조차 하지 않은 놈이 나타나 국회의원도 아니면서 대선 지지율 30%를 찍는 비상사태 말이다.

그런 놈들을 얕보다간 정말 잘 차려놓은 대선과 총선이라는 밥상을 신인에게 턱 주는 꼴이 되고 만다.

전 대통령에게는 신재현이 그랬다.

급수나 나이가 아닌, 그 자체로 봐야 할 놈.

지금 자신과 대화를 나누기에 가장 적절한 위치의 적.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어쩐 일로 공사다망하신 부단장님께서 직접 전화를 다 주셨습니까?”

-이렇게 유선상으로 말씀드릴 일이 아닌데 부득이하게 전화를 통하게 되어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움직이면 기자가 따라붙게 마련이고, 특히나 제가 전임 대통령의 사저에 들어가게 되면 얼마나 큰 화제가 될지는 뻔한 일이라서요. 그건 서로 원치 않는 일 아닙니까. 때문에 제가 실례를 무릅쓰고 전화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선전포고라도 들을 줄 알았던 담기욱은 깜짝 놀랐다.

생각보다 공손하고 지극했기 때문이다.

그가 그동안 보고 들은 신재현은 한쪽에는 정계, 한쪽에는 재계를 휘저으며 그 콧대 높은 양반들을 벌벌 떨게 만드는 괴물이었다.

돈 있고 권력 있는 그 잘난 놈들이 오라면 오고 세금 내라면 세금 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신재현이 안하무인이라는 게 아니다.

정말 그런 단순하게 경우 없고 예의 없는 놈이었으면 자신의 선까지 오기 전에 국회의원들이 아작을 냈을 테니까.

이건 있는 자만이 부릴 수 있는 여유였다.

상대에게 요구하면 당연히 들어줄 거라는 기대감, 아니, 반드시 들어줄 거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요구할 위치와 힘이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름 정의를 우선 가치로 두는 놈들의 특징이 있다.

상대가 누구든 주눅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직접 대화를 나누거나 조사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담기욱이 판단한 신재현은 이렇게 정중하고 저자세로 나올 놈이 아니었다.

이럴 때는 말을 아끼는 것이 상책이다.

담기욱은 입을 꾹 다물었다.

신재현은 담기욱의 대답을 바라지는 않았는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어떻게 표현하든 좋은 이야기는 아닌지라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조사망에 따님께서 포착되셨습니다.

이건 좀 나쁜 소식이었다.

담기욱에게는 아들 하나와 딸 둘이 있었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고 제 갈 길 찾아 알아서 독립한 장녀, 장남과 달리 막내딸은 개판이었다.

그런 자식이 있잖은가.

부모 휘광만 믿고 멋대로 행동하는 놈들.

재벌가나 정치계에서 흔히 보이는 케이스다.

그나마 담기욱은 막내딸의 사고가 눈에 덜 띄도록 갖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중 하나가 함께 사는 것이었다.

막내딸은 독립하고 싶어 했지만 그렇게 놔뒀다간 어느 날 9시 뉴스에 ‘마약 투여 혐의로 체포’라고 대문짝만 하게 나올지도 모른다.

이제껏 돈을 벌어본 적도 없는 막내딸은 아버지의 지원 없이 살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사저에서 함께 살며 묶어두다시피 했는데도 간혹 사고를 치곤 했다.

대표적으로 음주운전 단속에 걸려서 들어온다거나, 뺑소니로 면허를 박탈당한다거나.

심한 경우엔 강남의 모 클럽에서 약에 얽혀 경찰서까지 다녀왔었는데, 신재현이 전화를 준 걸 보니 그런 종류는 아닌 것 같았다.

범죄 혐의였다면 또 다른 부단장인 검사가 연락했을 테니까.

-정확히는 따님의 증여세와, 소득세 관련 탈세 혐의입니다.

겨우 그런 걸로 조사를 한다고?

지금껏 뭘 하고 다니든 조사 한 번 받아본 적이 없는 집이다.

딸내미가 상해 사고를 냈으면 모를까, 단 한 번도 사람은 치지 않았기 때문에 적당히 돈으로 무마하고 기소 없이 경찰 내부 종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금도 마찬가지였다.

딸에게 주는 돈이야 당연히 일반인의 상식을 뛰어넘는 금액이지만, 그걸로 증여세니 뭐니 시비가 걸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왜 그런 걸로 조사를 하느냐,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담기욱은 참아냈다.

그리고 신재현은 여전히 담담한 어조로 설명을 계속했다.

-알고 계시겠지만 저희는 소득과 소비 수준을 봅니다. 따님께서는 자그마한 쇼핑몰 사업체 하나를 갖고 계신데 그걸로 현재 소비를 감당한다는 건 턱도 없고요. 게다가 사업체 자체에서도 문제가 좀 많습니다. 법인인데도 법인카드로 온갖 유흥비를 쓰셨더군요. 거래처에 세금계산서를 발급하지 않아서 매입자 측에서 탈세 신고를 한 적도 있습니다.

담기욱을 혀를 찼다.

딸내미가 남들처럼 사업 하나 해보고 싶다길래 지원해 준 것이 쇼핑몰인가 뭔가 하는 거였다.

그게 잘되는지 안 되는지는 잘 모른다.

딸은 쇼핑몰에서 이득이 나도 오픈하려 하지 않으니까.

알아보려면 알아볼 수 있었지만 내버려 뒀다.

그저 사회 경험이 되겠거니, 용돈에 보태 쓸 정도는 되겠거니 했는데, 이 정도면 충분히 국세청에 걸릴 만했다.

그게 운이 없는 것이었다.

차라리 세무서나 지방청의 전수조사에서 걸렸다면 적당히 무마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필 걸린 상대가 신재현이다.

적당히 과세하고 덮자는 말이 통할 사람이 아닌 것이다.

담기욱이 침음을 흘렸다.

슬금슬금 기분이 나빠지기도 했다.

주로 그 원망의 내용은 ‘내가 왜 이런 말이나 듣고 있어야 하는 거지’였다.

물론 티는 내지 않았다.

이걸 어떻게 넘어가야 할지가 관건이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형에게 그랬던 것처럼 딸을 검찰과 국세청에 출두시키고 대국민 사과 시키는 것인데 과연 철부지 딸이 그대로 해줄까.

말실수나 안 하면 다행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은 굉장히 의외였다.

-그러니 제가 조용히, 저희 또 다른 부단장님과 단둘이 들르겠습니다.

오늘은 계속 예상외 사태의 연속이었다.

신재현이 직접 전화한 것도 모자라서 먼저 손을 내밀다니.

당장에라도 팀원과 기자를 줄줄이 이끌고 쳐들어와도 모자랄 사람 아닌가.

담기욱은 참을 수 없는 충동을 느꼈다.

‘너희는 정말 날 건드릴 증거가 하나도 없나 보구나.’

이렇게 묻고 싶었다.

천하의 신재현마저 저자세로 나오지 않는가.

세상의 어느 누가 이런 취급을 받아보겠는가.

현직 대통령마저 신재현의 부름에 재깍 달려간 건 다들 아는 사실인데.

당장에라도 웃음을 터뜨리며 승리를 선언하고 싶었다.

역시 너희는 나를 건드릴 수 없다고.

만약 전 대통령이 아니라 일반인이었다면 일단 쳐들어와서 뒤집어엎었을 것이다.

신재현은 지금 그런 게 가능한 위치에 있으니까.

그러나 하필 담기욱은 전 대통령이었으며 저들 손에 제대로 된 증거도 없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 자신은 내버려 두고 딸만 잡기로 마음먹은 거겠지.

‘아니, 잡는 게 아닌가? 잘하면 딸내미도 살아나갈 것 같은데.’

세금이야 얼마든지 물어줄 수 있다.

딸내미가 집행유예를 받는 것도, 기분은 좀 나쁘지만 그 정도면 선방이다.

몸통인 자신만 살아 있으면 되니까.

이제 궁금한 게 하나 남았다.

딸을 핑계로 자신을 떠보려 오는 건지, 아니면 정말 협상을 하러 오는 건지 말이다.

“직접, 오신다고 하셨습니까?”

-예. 담기욱 전 대통령님이나 따님께서 직접 국세청이나 검찰청으로 출두하기엔 부담이 되실 것 아닙니까. 따님을 조사할 때는 정식으로 공문을 보내겠지만 그 전에 대화를 나눠야 할 것 같습니다.

됐다!

담기욱은 쾌재를 불렀다.

누가 들어도 협상하자는 뜻 아닌가.

지금은 본성은 숨기는 걸 수도 있지만 담기욱은 자신 있었다.

어차피 2명만 온다면 직접 얼굴을 보고 대화해도 얻어갈 게 없을 것이다.

거기에 실제로 신재현을 보고 싶다는 마음도 들었다.

과연 어떤 놈이길래 국회를 풍비박산 내고 현 대통령까지 오라 가라 하는지.

자신의 형을 잘라내게 만든 게 어떤 놈인지.

그들이 사저로 와서 따로 만남을 가진다 해도, 영장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는데 뭘 가져가겠는가.

사무실이라면 사방에 보이는 게 서류라고 치자.

이 넓은 저택에서 제대로 뒤지지도 못하고 증거가 될 만한 걸 찾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말조심만 하면 되는 건데, 그거야말로 자신 있는 분야였다.

그리고 오히려 이 사실이 밝혀지면 타격을 입을 사람은 신재현이다.

정직하고 청렴하기로 알려진 그가 사전 공모를 위해 전 대통령 사저를 방문한다라.

그것도 막내딸의 탈세를 제대로 조사하기 전에.

누가 봐도 이상한 구도 아닌가.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맛있는 떡밥이었다.

“그러시죠. 두 분만 오신다면 언제든 환영합니다. 날짜를 말씀해 주세요.”

담기욱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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