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458화 (458/500)

458화. 그들만의 짧은 천하 (2)

대한주택보증공사의 신임 사장은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핸드폰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주먹을 꽉 쥐었다.

천장을 올려다보며 눈을 꾹 감았다.

입이 절로 벌어지며 괴상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끼얏호!”

스스로 놀라서 손으로 입을 단단히 틀어막았다.

그러나 잇새로 흐르는 웃음은 막을 수가 없었다.

“어우, 짜릿해! 이거야!”

사실 방금 그 전화는 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신재현은 정확한 사정을 전부 듣고 떠났고, 그 후는 물어볼 필요도 없다.

신임 사장이 거들지 않더라도 알아서 응분의 대가를 치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재현은 믿을 만했다.

그럼 왜 신임 사장이 일부러 전화를 걸었는가.

2주 동안 가슴 졸인 게 억울해서였다.

가만 놔둬도 알아서 추락하겠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착각에 빠져 허세를 부리고 있을 걸 생각하면 위가 뒤틀렸다.

자신은 그동안 이 회사를 떠나, 아예 블랙리스트에 오를 각오까지 하며 브라인드에 올렸는데.

잠도 제대로 못 자서 먹는 족족 체할 지경이었는데.

파업해서 신재현을 이긴답시고 으쓱하고 있는 꼴을 생각하면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신재현이 앞으로 어떻게 대처할지는 모르지만 조금 도와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같은 공기업의 사장이면서도 주택공사 사장을 열렬히 따르는 추종자들을 분리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에게 전화를 걸기 전에, 신임 사장이 한 일이 한 가지 더 있었다.

-파업 참가한 사장님들, 주택공사 사장님이 여러분을 살려줄 것 같습니까? 축제 분위기시겠지만 이 링크부터 보시죠. http://news…….

자신이 참가했던 사장 회의에서 본 사람들에게는 전부 문자를 돌렸다.

그들만의 단체 대화방이 얼마나 난리가 났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쫓겨나서 대화방을 못 보는 게 정말 아쉬울 정도였다.

솔직히 링크를 보낸 것도, 주택공사 사장에게 전화한 것도 꼭 필요한 일은 아니었다.

신재현을 돕고 싶다는 마음이 있긴 했지만 반쯤은 핑계였다.

애 같은 행동이긴 했지만 그놈이 신나 있을 걸 생각하면 얼른 산통을 깨주고 싶었다.

“너희는 끝이야! 끝이라고! 크하하하하하!”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욕심에 눈이 멀어 파업에 동참한 놈들 모두 지금 짓고 있을 표정을 생각하면 술을 마시지 않아도 취할 것 같았다.

“세상은 착하게 살아야 하는 거야! 올바르게 살면 하늘이 도와준다고! 이 경우엔 신재현인가? 신재현이 지금 대한민국의 자연재해나 다름없으니까 결국 틀린 말은 아니지? 크하하! 자연재해가 내 편이 된다고! 닝기미 시벌 것들아!!!”

신임 사장이 홀로 신나서 난리를 치는 동안, 책상 위에 놓여 있는 핸드폰은 요란하게 울기 시작했다.

한 명의 연락이 아니었다.

-사장님, 잠깐 전화 좀 받아보세요.

-링크 이거 뭐예요? 사장님?

-여기 왜 우리 회사 가구 거래 얘기가 쓰여 있어요? 저기요, 대답 좀 하시죠!

-야! 공개입찰 얘기 이거 뭐야. 당신이 이것까지 얘기했어? 당신 미쳤어?

수십 통의 문자와 전화, 그리고 욕설이 액정 위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개중에는 쌍욕도 섞여 있었지만 그 어떤 것도 신임 사장의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지금 그에게 저들의 문자는 바다 위에 덧없이 떠다니는 포말이나 다름없었다.

우수수 쓸려왔다가 또 한 번 파도가 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들 말이다.

조만간 본격적으로 수사가 시작되면 이런 반응도 뚝 끊길 것이다.

왜냐하면 사장이 신재현에게 말해준 것은 파업에 관한 이야기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공기업의 직원, 그리고 임원으로 일하다 보면 알면서도 입을 다물어야 하는 일이 꽤 있는 법이다.

어디 가서 말하고 싶어도 보복이 두려워 숨죽여야 했던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

그 시절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그리고 지금 말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시원함이 이리저리 뒤섞여 기묘한 해방감이 들었다.

예를 들어 수자원공사의 사장.

가장 공정해야 할 공개입찰에서 은근슬쩍 아는 사람에게 귀띔을 해줬다.

최저가가 얼마인지, 최고가가 얼마인지.

설령 그 지인이 최저가로 입찰하지 않더라도 상관없었다.

최저가 입찰 업체에 무슨 문제가 있다고 트집을 잡아 탈락시키면 그만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예 지인은 대범해졌다.

높은 가격으로 입찰하면 사장이 대놓고 낙찰을 해주는 것이다.

거기서 사장이 은근슬쩍 수고비 명목으로 받아 챙긴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또 대한전력공사는 어떠한가.

그곳의 사장은 예술 작품을 응용했다.

회사에서 전시할 미술품을 사들이는 경우가 있다.

특별히 공간을 만들어 전시한다는 게 아니라, 복도나 응접실 같은 곳에 하나둘 걸어두는 것 말이다.

직원을 위한 복지 차원이기도 했는데 문제는 미술품의 가치다.

사장이나 임원의 가족이 그린 것을 전시용 미술품이라는 명분으로 비싼 값을 주고 사들이는 것이다.

당장 현재 사장의 사돈이 쓴 서예 작품을 한 점에 3천만 원 주고 사들인 예도 있었다.

알게 모르게 회삿돈을 빼돌리는 방법 중 하나다.

“내가 아는 건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말했다니까. 너희들은 끝이라고!”

쉴 새 없이 울려대는 핸드폰을 보며 사장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어댔다.

그동안의 시름이 싹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먼저 잡혀간 세 명의 사장처럼 비자금이나 재무제표 조작 같은 거창한 사건은 아니지만, 그가 보고 들은 것은 아무리 자질구레한 것이라도 빼놓지 않고 이야기했다.

어떤 사장은 자신의 아들 결혼식에 강제로 전 직원을 참석하게 해서 축의금을 걷었다는 것도.

그 축의금을 검사해서 10만 원 이상 내지 않은 직원은 대놓고 훈계했다는 것도.

덕분에 기사 소스는 차고 넘쳤다.

신재현이 나학진 기자에게 실시간으로 기삿거리를 전달하고 여론을 바꿀 때까지 걸린 시간은 겨우 1시간 남짓이었다.

파업에 동참한 사장들이 누린 행복의 시간도 겨우 1시간이라는 뜻이다.

그것도 신재현의 여론전은 굉장히 특이하게 흘러갔다.

신임 사장이 말한 것들을 한 번에 푸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가벼운 비리로 시작해서 점점 수위가 높은 비리로 옮겨갔다.

마치 하나씩 던지는 것처럼.

조사단의 과잉 수사 어쩌구 하던 기사는 순식간에 묻혀서 떠내려갔다.

간혹 보이는 비판조의 기사에는 어김없이 이런 댓글이 달려 있었다.

└기레기야, 얼마 받았니? 사장들 횡령하는 데 너도 껴서 한몫했어? 그래서 조사하지 말라는 기사 쓴 거야?

└공기업 사장들 무슨 짓 했는지 다 떴어. 조사가 과하다고? ㅋㅋㅋ더 과해야 될 것 같던데?

└과잉조사는 개뿔, 내가 했으면 아예 문 닫게 해줬을 거다. 컴퓨터에서 종이까지 거기 있는 물건은 싹 다 쓸어갔을 거거든.

└과잉 같은 소리 하넼ㅋㅋㅋㅋ그냥 다 잡아가서 아예 일도 못 하게 해줘라ㅋㅋ

조금 늦은 타이밍으로 동맹 휴업에 관한 기사도 올라왔다.

기자 입장에서는 절대 늦은 게 아니었지만 불행하게도 신재현 쪽의 반박 기사가 더 빨랐다.

덕분에 휴업 기사는 ‘불쌍하다, 신재현 너무해’ 하는 반응 대신에, ‘비리, 횡령, 탈세 주제에 꼴값을 떤다’라는 댓글이 가득했다.

휴업에 동참한 사장들이 원하던 것과 정확히 반대의 결과였다.

주택공사 사장이 놓은 수가 전부 막힌 것이다.

“역시 대처가 빠르구만! 이제 시작이지. 조사하면 더한 게 나올 테니까. 내가 모르는 게 얼마나 많겠어~ 저놈들은 그런 놈들인데. 절대 못 빠져나갈걸.”

신임 사장의 생각을 대변하듯, 댓글은 모두 한마음으로 공기업 사장들을 비난하고 있었다.

└휴업? 얘들아, 일하기 싫으시댄다~ 아예 영원히 일 못 하게 만들어줘라~

└조사단 아주 든-든해요! 국밥 한 그릇 먹은 기분이야. 과잉수사라고 하는 놈들도 뇌물 먹었나 조사해봐야 한다.

└사장 비리 옹호하는 기사 뜬 거 보니까 조사단이 잘하고 있다는 증거네요.

└대통령 저번에 국세청 일부러 왔다 간 거 봤지? 국가원수가 괜히 세종시까지 왔겠냐? 공기업 싹 쓸어버리라는 뜻이야~

거기에 지난 대통령 방문까지 더해지면서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차기 내각에 신재현이 요직 앉을 거라 미리 힘 실어주고 점수 따는 거임.

└우리나라는 대통령 단임제인데요. 여당도 싹 갈려 나갔는데 대통령 온 거랑은 관련 없지. 오히려 전 국세청장이 대표로 있는 야당이 더 가능성 높지 않냐?

└멍청아. 신재현이 실적 올리면 올릴수록 현재 대통령의 지지율도 올라가는 거야. 당장 여론조사 안 봄? 임기 마지막 해인데 지지율 45%인 거? 내가 대통령이면 신재현 예뻐 죽는다. 집도 사 주고 국세청도 사 주고 싶을걸.

└국세청을 왜 사 줘. 원래 신재현 건데.

└아무튼 대통령이 왜 직접 방문했겠냐. 대세를 아는 거지. 겨우 5년 임기인 대통령이랑 앞으로 30년은 더 일할 신재현이랑 누가 더 쎔? ㅋㅋ신재현이 이김ㅋㅋ 대통령이 와야 함ㅋㅋㅋㅋㅋ

└내 생각엔 공기업 사장들 저따위인 거 이미 알고 메시지 보낸 거 같음. 알아서 기라고ㅇㅇ 안 그래도 벌써부터 옹호 기사 나오고 난리 났잖아.

간혹 과한 음모론도 끼어 있긴 했지만 대체로 반응은 국세청 쪽에 우호적이었다.

주택공사 사장이 보고서, 땅을 치고 통곡할 정도로 말이다.

***

청와대의 대통령 집무실.

널찍한 책상 앞에 앉아 있던 대통령은 보좌관이 가져온 신문을 꼼꼼히 읽었다.

회의용 테이블에는 약속 시간에 맞춰 진작 과기부 장관이 찾아와 있었지만 그는 뒷전이었다.

과기부 장관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꼿꼿이 정면을 바라보며 대기하고 있을 뿐이었다.

며칠 전 환경부 장관이 약속까지 밀려가며 퇴짜를 맞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에 비하면 지금 기다리는 건 양반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니 재촉하지도 않았다.

대통령에서 내려오게 되면 필연적으로 그 행정부의 성과를 채점받게 된다.

그리고 그닥 큰 특징과 굴곡이 없었던 현 대통령의 가장 큰 성과는 바로 조사단이었다.

실제로 조사단은 힘을 실어준 것 이상의 실적을 내고 있었다.

대통령이 목매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무작정 기다리고 있자니 처량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던 과기부 장관은 문득 환경부 장관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그의 침울한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책상 바로 앞에 부동자세로 서 있던 경제수석이 슬쩍 귓속말을 했다.

“대통령님. 장관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 미안합니다. 금방 가겠습니다.”

장관은 즉각 대답했다.

“아닙니다! 업무 보실 때까지 편히 기다리겠습니다.”

“정말 금방 갑니다.”

장관을 달랜 대통령은 바로 임현승에게 물었다.

“이번에 제가 직접 간 게 별로 효과가 없는 것 같지 않아요? 혼자서도 알아서 잘 처리했을 것 같은데. 전화해서 안부라도 물을까요? 어떻게 생각합니까.”

대통령의 현재 걱정은 ‘신재현이 공기업을 잘 상대할 수 있을까’ 따위가 아니었다.

요청해서 가긴 했는데 자신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은 것 같아서 걱정이었다.

대통령이 공무원에게 전화를 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

그래서 다음 수순으로 전화 얘기가 나온 것이다.

“공적인 라인으로 국세청에 전화를 걸어서 바꿔달라고 하는 게 나을까요, 아니면 임 수석이 사적으로 전화해서 연결해 줄래요? 어느 게 덜 부담 가면서 확실하게 힘을 팍팍 실어줄 수 있을까요.”

정치인으로서 웬만큼 중대한 판단은 다 해봤을 대통령이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모습이라서 자리에 앉아 있던 장관은 실례라는 걸 알면서도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그야 대통령에게도 사적인 모습은 있겠지만, 국정을 논하는 자리에서 저런 태도를 보니 평소와 너무 괴리감이 느껴져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뭐라고 할까, 팔불출을 보는 느낌이었다.

호들갑을 떠는 대통령에게 임현승이 나직하면서도 부드럽게 말했다.

“이미 하실 수 있는 만큼은 하셨습니다. 전화까지 하시면 국세청장 당장 심장마비로 실려 갈지도 모릅니다.”

“아, 그래요? 아쉽네…… 좀 확실하게 도와주고 싶었는데.”

입맛을 다시는 대통령을 보며 의아해하던 장관은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신재현한테 영향력 넓히고 싶어서 도움 주려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정치인은 절대 공짜로 남을 돕지 않는다.

사소한 배려 하나에도 거래를 넣고 나중에 얻을 이득을 계산한다.

그러나 어쩐지 지금 대통령의 표정에서는 그런 욕망이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눈이 이상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돕고 싶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장관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안 대통령이 뭔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더니 책상을 탕, 쳤다.

“뭘 할지 생각났습니다. 사장들 임명한 관련 부처 장관들 소환 좀 하죠. 문책 한 번 하면 기사도 타고 조사단 수사에도 순항할 것 같은데.”

각각의 공기업은 관할하는 주무 기관이 있다.

그리고 사장은 추천을 받거나 공모를 받아 장관이 제청하고, 최종적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

지금 그 주무부처 장관들을 불러 문책하겠다는 거다.

과기부 장관이 입을 떡 벌렸고 임현승이 말렸다.

“임명하신 건 대통령님이십니다. 막판 지지율에 영향이 갈 수도 있어요.”

대통령의 뜻은 굳건했다.

“그야 그런 놈들을 걸러내지 못하고 임명한 나도 잘못이 있는 건 당연하죠. 공기업이 전체적으로 털리게 생겼는데 주무 부처가 모른 척 내빼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다 같이 욕 한번 먹어봅시다! 행정부 쪽에서 빠르게 인정하고 문책하면 조사단 쪽에서도 일하기 편하겠지.”

시원하게 결정을 내린 대통령은 볼일이 끝났다는 듯 회의용 테이블로 다가왔다.

임현승이 안절부절못하며 따라왔지만 그는 차마 대통령을 말리지 못했다.

과기부 장관도 정신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장관직이야 원래 바람 앞의 등불이라지만, 이건 임기 말년에 다 함께 문책당하게 생겼다.

머리가 어지러워진 장관이 휘청하자 대통령이 사과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나 봅니다. 미안해요. 용건이 뭐였더라, 항공우주원이랑 핵융합연구원 예산 얘기였죠? 좋습니다, 과학기술 중요하지. 이번 추경 때 포함해서 제출합시다.”

“예, 예? 괜찮으신 겁니까?”

“그럼요. 이런 건 임기 끝나가는 사람이 해야 돼. 차기 대통령은 국회 무서워서 추경 내기 힘들거든. 내가 대신 매 맞아줘야지.”

공기업 세무조사 때문에 대국민 사과를 눈앞에 두고도 대통령은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물론 기분으로 이 중요한 예산안을 결정하지는 않겠지만.

대규모 문책과 추경 편성.

‘병 주고 약 주고네…….’

장관은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그만 속마음을 꺼내고 말았다.

“저 임기까지는 일할 수 있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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