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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세청 망나니-457화 (457/500)

457화. 그들만의 짧은 천하

공기업의 사장들이 모인 단체 대화방에 참여한 사람의 숫자는 어느새 20명 가까이 늘어 있었다.

거기에는 일제히 한 가지 대답만이 올라오고 있었다.

-지시했습니다.

-저희도 오후부터 영업 올 스톱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했습니다. 직원들 업무 스톱시켰어요.

담담하게 휴업 참가를 보고하는 사람도 있었고.

-오후부터 맞죠? 수자원도 대업에 동참하겠습니다.

-우리는 이길 수 있다! 대한주택공사 사장님을 중심으로 똘똘 뭉칩시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해냅시다! 까짓거 부딪혀 보자고요!

이게 무슨 독립 운동이라도 되는 것처럼 잔뜩 흥분한 사람도 있었다.

한두 명일 때는 겁먹은 사람도 있었지만 여러 명이 모이자 자신감이 붙은 모양이었다.

몇몇은 과하게 몰입하기도 했다.

-우리 다 함께 살아남아봅시다. 영!

-차!

-영!

-차!

동맹 휴업을 주도한 대한주택공사 사장이 보기에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만큼 멍청한 놈들이었다.

하지만 저런 놈들도 있어줘야 다른 사람들이 분위기에 휩쓸려서 따라온다.

어디에나 있는 소심한 중간층 말이다.

이들은 겁이 많아서 쉽게 움직이려 하지 않았지만, 주위 분위기에 잘 휩쓸리는 특징도 있었다.

이게 다 과한 충성층 덕분이었다.

이럴 땐 참 쓸모 있는 놈들이다.

이제 남은 건 과열된 분위기로도 움직이지 않는 극소심한 계층이었다.

회의 때는 발언하기 싫어서 가만히 있었던 주제에 막상 움직일 때가 되니 요지부동인 얍삽이들.

-근데 정말 이래도 괜찮은 걸까요?

-괜히 긁어 부스럼 같은데…….

-나중에 괘씸죄로 더 때려 맞을 수도 있어요.

사장은 대화방을 보며 혀를 찼다.

반대 의견이 있으면 회의 때 말하던가.

그랬으면 다들 있는 자리에서 묵사발을 내줬을 텐데.

감히 자신에게 반기를 들지 못하게 말이다.

얼굴을 보고 말하는 게 아니라 글로 대화하는 방이라고 쉽게 반대 의견을 내는 것이 고까웠다.

그러나 다행히도, 사장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과하게 몰입한 다른 사장들이 공격적으로 반응했다.

-뭐예요? 그럼 이제 와서 빠지겠다는 겁니까? 한 명이라도 더 힘을 합쳐야 효과가 있다고요. 혼자 죽을 생각이면 그렇게 하시든가.

-나중에 우리 다 살고 혼자 낙오되셔도 우린 안 도와줍니다~ 힘들 때 함께한 사람이 진짜 동료지.

-어디 더 좋은 방법 있으면 말씀해보시든가요.

그런데 이번에는 소심한 쪽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아무래도 자기 자리가 걸려 있기 때문이겠지.

-아무리 그래도 타이밍이 이상하잖아요. 제가 회의 때만 해도 납득을 했어요. 그때는 주택공사 사장님이 이성적이셨거든요. 근데 지금은 눈 씻고 봐도 판단력을 찾아볼 수가 없어요.

상대는 PC로 메신저를 하고 있는지 채팅이 굉장히 빨랐다.

덕분에 나이깨나 먹은 옹호파 사장들은 제때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차라리 전화였다면, 직접 마주 보고 하는 대화였다면 바로 상대 입을 막고 주도권을 쥐었을 것이다.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저들이 전부 자신의 뜻을 따라주길, 그래서 신재현과 싸우는 데 방패가 되어주길 원했기 때문이다.

“내가 나서면 모양새가 빠지는데. 에잉, 이 사람들은 이거 하나 반박을 못 하고…….”

상황이 영 안 좋으면 직접 일갈하려고 지켜보고 있자니 사장들 간에 싸움이 점점 더 심해졌다.

-하려면 우리 모두 세무조사 나왔을 때 했어야죠! 그래야 명분이 생기지!

-그럼 그동안 1차적으로 세무조사 받는 우리들은 다 죽으란 뜻입니까? 늦게 조사받는 당신들만 이득 보게?

-어차피 세무조사는 각오했던 일 아니었어요? 각자 알아서 준비하라면서요. 파업은 우리 모두에 관련된 일이니 이렇게 멋대로 결정하시면 안 되죠!

-원래 하기로 했던 거 조금 당겨서 한다고 뭐 대숩니까?

-당연히 대수죠! 우리는 세무조사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파업이라니 누가 봐도 이상하잖아요! 우리한테 당신들을 위해서 희생해 달라는 소리나 다름없잖습니까!

-어허,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1차 세무조사 대상 회사가 8곳밖에 안 되는 것이 패착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조금 조급했나 싶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두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직접 보면 저딴 소리를 못 하지. 타이밍 따지다가 늦는 수가 있다고.”

이미 엎지른 물이다.

사장은 애써 자기합리화를 시작했다.

그래, 내 결정은 틀리지 않았어.

지금 파업을 시작해야 나는 살 수 있어, 라고.

-자자, 우리 모두 살자고 하는 짓인데 진정합시다. 마침 기사가 떴어요. 보고 토론합시다.

누군가가 재빠르게 기사 링크를 가져왔다.

조회 수가 10도 되지 않는 걸 보니 따로 아는 기자가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공기업 휴업’이라는 키워드로 계속 뉴스 창 새로 고침을 하고 있었던지.

대한주택공사 사장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사 링크를 눌렀다.

[과한 세무조사, 이대로 괜찮은가?]

제목부터가 기깔 났다.

내용도 딱 그가 원하던 논조였다.

-근 몇 달간 전 국민이 국세청에 열광하고 있다.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다. 고액 체납자가 있어도 손가락만 빨며 지켜보던 국세청이 칼날을 뽑아 들고 상대를 가리지 않고 징세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정의와 공정 그 자체니까. 하지만 정말 그게 정상적인 국가기관의 모습일까?

초반에는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다가 슬쩍 어조를 바꾸어 비판하는 것까지.

무작정 신재현을 까는 것보다 더욱 그럴듯해서 마음에 들었다.

“어느 기자야, 이거? 기름칠 좀 많이 발랐나 보네. 나중에 나도 밥 한 번 먹어야겠구만.”

기자의 이름을 똑똑히 기억해 둔 후 그는 만족스럽게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정치인, 재벌. 이들은 힘 있는 자들이다. 칼날을 휘둘러도 저마다 맞설 방법이 있으니 괜찮다. 그런데 그들은 극소수다. 국세청의 칼날에 덜덜 떠는 대부분의 사람은 평범한 국민들이다. 사업하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한번쯤 세무조사를 받아본 적이 있을 것이다. 받은 적이 없다 해도 주위 사업체의 소문은 들어봤을 것이다.

세무조사는 양날의 칼이다. 그저 옆에서 구경하기에는 정의의 화신인 것 같아도 실제로 당해보면 차원이 다르다. 세무조사가 들어온 사업장은 몇 날 며칠이고 영업을 못 한다. 관련 서류를 전부 가져가기 때문에 업무를 볼 수도 없다.

그것뿐인가, 한꺼번에 때려 맞는 세금에 가산세까지 합치면 등골이 휘청인다. 그들이 모두 악질 탈세범이겠는가? 아니, 국세청의 칼날에 비명횡사하는 사람들은 전부 평범하게 살아가던 국민들이다.

“키야, 명문이다!”

사장은 무릎을 치며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파업 타이밍이 잘못된 건 아닌가 걱정되는 마음도 있었는데, 이 기사를 보니 그 걱정도 사라졌다.

아마 멋모르는 일반인은 기사를 보고 국세청을 욕하지 않을까.

그만큼 은근하게 국세청을 돌려 까고 있었다.

-최근 조사단은 공기업을 타깃으로 잡았다. 공기업을 조사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조사하되, 업무에 지장을 초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특히나 공기업은 국가의 공무를 맡은 기관이다. 잘못한 게 있다면 당연히 세금을 내고 마땅한 벌을 받아야겠지만, 일반 국민의 생활에까지 영향을 줘서는 안 될 것이다. 국회의원까지 손을 댄 조사단에는 이미 많은 힘이 집중되어 있다. 잇따른 성공과 칭찬에 기고만장한 나머지 엉뚱한 곳에 칼을 휘두르는 일이 없길 바란다. 국민이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과잉 조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감시해야 할 것이다.

단숨에 기사를 읽어 내린 사장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박수를 쳤다.

“최고야! 아주 훌륭해! 이런 기사 몇 개면 여론도 순식간에 신재현을 물어뜯겠어!”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신재현도 압박을 이기지 못해 협상에 나서지 않을까.

세금? 당연히 낼 것이다.

공기업의 탈세액이라면 충분히 낼 의향이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안위였다.

“공기업 탈세액만 해도 못해도 수백억은 될 테니까 충분한 실적이 되겠지.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고, 크하하!”

다시 띄운 단체 대화방의 분위기도 확 바뀌어 있었다.

소심파 반대 의견은 어느새 싹 입을 다물고 충성파가 대세를 이뤘다.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역시 현명하십니다!

-저는 사장님께서 우리 모두를 살리실 거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계속 따라가겠습니다!

-신재현도 별것 아니네요. 국회의원들이야 내어놓을 게 없었으니 거래가 불가능했지만 우린 다릅니다. 세금 누가 안 낸댔어요?

-그럼요. 200억? 300억? 때리는 대로 다 낼 건데 거기서 사장까지 잡아 족친다면 당장 여론에 불이 붙을 겁니다.

당장 기사가 원하는 대로 나오다 보니 희망찬 미래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

첫 타자를 잘 끊었기 때문일까.

처음 나온 기사와 비슷한 논조의 기사가 우수수 올라오기 시작했다.

공기업을 옹호한다기보다는 조사단의 과잉 조사를 비판하는 기사였다.

아예 똑같이 베껴서 올리는 기자도 있었다.

덕분에 ‘조사단’이나 ‘신재현’, ‘공기업’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하면 가장 먼저 비판 기사가 우수수 떴다.

딱 사장이 원하던 구도였다.

-이대로 며칠만 가면 제아무리 신재현도 등쌀에 못 이겨 협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조금 더 휴업해 주시고 여론에 신경 써주세요. 아는 기자 있으면 아끼지 말고 지원해 주십시오. 지금 이 분위기를 끝까지 끌고 가야 합니다. 방심하지 말고 애써주세요.

-넵!

-네, 알겠습니다!

속속 올라오는 대답을 보며 사장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 누구도 꺾을 수 없었던 신재현을 처음으로 굴복시키는 대기록을 세우는 것이다.

조금 이르지만 축배를 들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크흠, 저녁에 한잔할까.”

단체방에서 과잉 충성을 보여준 몇 명의 사장을 부를 생각이었다.

전화번호를 꾹꾹 누르던 그는 갑자기 핸드폰이 울리는 것을 보고 미간을 모았다.

모르는 번호였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받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냄새를 맡은 기자가 인터뷰차 연락이 올 수도 있다.

그렇다면 유리한 기사를 하나라도 더 늘리기 위해 기꺼이 받아줘야지.

조금의 귀찮음은 감수할 수 있었다.

“크흠, 여보세요.”

-한참 기분 좋으신가 봅니다.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전화를 받은 사장은 전화 너머에서 들려오는 기묘한 목소리에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어 들여다보았다.

역시나 기억에 없는 번호였다.

그러나 목소리는 어쩐지 귀에 익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누굽니까? 별 볼 일 아니면 끊겠습니다.”

괜히 좋은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기에 적당히 전화를 끊으려 했지만,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가 자꾸만 발목을 잡았다.

-찬물을 끼얹게 되어 죄송하게 됐습니다.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당신 누구예요?”

-당신을 유일하게 반대한 사람, 내부 고발자요.

이름이나 직위를 말한 게 아니어서 잠시 생각을 해야 했다.

하지만 ‘대한주택보증공사의 사장입니다’라고 말했어도 몰랐을 것이다.

왜냐하면 공기업 사장 회의에서도 말석에 있는 신임 사장의 이름 따위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잠깐 기억을 더듬어본 후에 목소리의 주인공을 기억해 냈다.

“아하, 그 멍청한 작자였군. 기사 나간 거 보고 겁나서 전화한 모양인데 이미 늦었습니다. 무릎을 꿇는 데도 타이밍이 있는 법이에요. 회의 끝나고 바로 그다음 날 와서 사과해도 받아줄까 말까인데 뭐, 내부 고발? 브라인드에 올린 거 당신이지? 이젠 숨기지도 않고 아주 당당하구만. 왜, 세무조사 들어간다고 하니까 살길이 생긴 것 같아요? 어림도 없는 소리, 당신은 끝…….”

-하하, 끝난 게 누구인지는 대봐야 알죠.

“이 사람이 지금 뭐라는 거야. 정신이 나갔나?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신재현은 못 이겨도 내부 정보 흘린 사장 하나쯤은 무너뜨릴 수 있다고.”

의기양양하게 승리 선언을 하려던 사장의 입을 막은 것은 전화기 너머 신임 사장의 목소리였다.

이상하게도 밀리는 구석 하나 없이 당당한 어조로, 그가 말했다.

-착하게 사니까 살길이 생기긴 하더라고요. 그 잘난 기사가 어떻게 났는지 한번 보세요. 그거 알려 드리려고 전화했습니다. 행복한 시간 조금이라도 빨리 깨드리려고.

뒷끝이 가득 담긴 말투였다.

할 말만 하고 대뜸 전화가 끊겼고, 사장은 당황하며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뭐야, 뒤질 것 같으니까 정신이 훼까닥했나? 기사가 뭐 어쨌다는 거야.”

방금 전까지 분명 계획대로 잘 흘러가는 걸 확인했다.

그사이에 바뀌면 뭐가 바뀌었겠는가.

사장은 무심코 단체 대화방을 켰다.

그 몇 분 사이에 대화방은 난리가 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올린 수십 개의 기사 제목들을 본 사장은 그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이게 뭐야! 왜 갑자기 공기업 사장 비리 기사가 나와!”

기다렸다는 듯이 기사의 방향이 일제히 바뀌어 있었다.

※안내 말씀

작중 공사명은 '대한공항공사, 대한농어촌공사, 대한철도공사'로 모두 픽션이며, 현실의 공사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또한 작중에 나오는 모든 사건은 창작입니다.

작품 감상에 참고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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