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6화. 익명의 순기능 (5)
신재현이 떠난 후, 사장실에는 싸늘함이 감돌았다.
전에 왔을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 청년이 이런 얼굴을 할 수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사장은 난생처음 공포라는 걸 느껴보았다.
협박은 사실 두렵지 않았다.
그건 맹수의 발톱과 같은 것이다.
숨겨두고 있을 때 가장 효과를 발휘하면서도 겉으로 패를 내보이면 힘을 잃는다.
사장이 생각하기에 협박이란 것은 상대와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쓰는 방법이었다.
나 이런 짓을 할 수 있다, 너는 나와 싸우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싸움에서 기선제압을 하기 위한 수단 말이다.
그러나 방금 신재현이 한 것은 사장이 생각한 종류의 협박이 아니었다.
그는 충분히 실행할 능력이 있었고 빈말이 아니었다.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었고 사장에게 보내는 경고였다.
단조로운 어투였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무게감이 느껴졌다.
힘없는 말은 허세일 뿐이지만, 힘이 뒷받침될 때는 이만큼이나 압박이 느껴지는 것이다.
권력층에 다가가기 위해 정치권에 한쪽 발을 담그고 있던 사장은 바로 알아들었다.
이것이 떠보기이자 경고라는 것을.
하지만 알면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전부를 내보인 것 같았다.
‘사실 다 알고 있는 거 아닐까?’
밑도 끝도 없는 공포가 잠식했다.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사장은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들었다.
그의 손은 단체 대화방을 누르고 있었다.
‘저쪽에서 정말 뒤엎어버리기 전에 내가 먼저 나서야 해.’
사장의 사고방식은 이미 마비되었다.
살고 싶다는 생각 단 하나뿐이었다.
살기 위해 어떻게든 협상 테이블을 만들어서 그 앞으로 신재현을 끌어내야겠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원래라면 적당히 때를 봐서 휴업할 생각이었다.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지금처럼 겨우 여덟 개의 공기업이 조사받는 때가 아니라 서른 개 전부가 대상이 되었을 때.
명분과 타이밍을 잘 따져서 일제히 말이다.
하지만 두려움에 이성이 마비된 사장은 다급하게 채팅을 쳤다.
-오늘 바로 휴업 들어갑니다.
당연하게도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지금요?
=지금은 조금 이르지 않습니까?
=확실하게 피해를 봤을 때 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지금은 명분도 부족하잖아요.
사장의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당장 아래층에서는 신재현이 문서란 문서는 싹 쓸어가고 있다.
사장은 오히려 다른 사장들에게 분노를 느꼈다.
다른 공기업들이야 조사 대상이 아니니 시간에 여유가 있겠지.
그래서 좀 더 두고 보자는 거고.
‘이 얍삽한 놈들! 내가 털리는 거 보고 지들이 행동을 정하겠다 이거지? 이득만 쏙 빼먹겠다니 그건 안 되지. 휴업은 다 함께해야 한다고!’
언제 사장 개인의 비자금과 횡령에 칼을 들이댈지 몰랐다.
당장 내일 또 다른 공문이 날아올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 전에 여론전을 시작해야 했다.
다급한 사장은 답장을 보낸 후 채팅방을 닫았다.
-저는 무조건 오늘 합니다. 그렇게 알고 계세요. 빠질 거면 빠져도 됩니다. 하지만 그 경우 효과가 덜한 건 알고 계시죠? 알아서 결정하세요.
명분이 부족한 동맹 휴업이 결정된 순간이었다.
***
“아, 지사별 전도금 내역 따로 관리하시는 거 있죠? 그것도 챙겨주세요.”
열심히 자료를 상자에 쓸어 담고 트럭에 옮기던 때였다.
나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장세훈]
지금 이 시간이면 한참 다른 공기업 가서 자료 쓸어 넣고 있을 시간이다.
어디 보자, 장세훈이 어디 갔더라.
대한주택보증공사였던 것 같은데.
“여보세요.”
-거기 혹시 그쪽 사장이나 사원이랑 같이 있어? 공기업 임직원이 들으면 안 되는 얘기야.
장세훈답지 않은 낮고 무거운 목소리였다.
핸드폰에 가까이 대고 소곤거리는지 숨소리까지 들려왔다.
그걸 듣자마자 뭔가 심상치 않은 게 터졌구나, 하는 느낌이 왔다.
목소리 크고 두려운 게 없는 장세훈이 이렇게 소곤거린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뇨. 없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다행이네. 우리가 지금 여기 사장을 만났거든?
사장이라는 대목에서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목소리가 낮아졌다.
나는 핸드폰에 귀를 바짝 갖다 대고 심혈을 기울였다.
-혹시 여기 당장 올 수 있어?
“급한 일입니까?”
-응. 엄청 급한 일이야. 아니다, 이걸 판단하는 건 내가 아니라 너지. 사실대로만 전달할게.
장세훈은 잠시 말을 멈추고 뭐라 해야 할지 고르는 듯했다.
그를 이렇게까지 고심하게 만드는 일이라니 뭘까, 더더욱 궁금해졌다.
-우리가 대한주택보증공사 와서 지금 2시간째거든? 1시간쯤 되었을 때 직원들이 잠깐 자리 비웠단 말이야. 근데 사장이 인사하러 왔더라? 그런가 보다 했지. 상황 보러 임원진 오는 것도 흔히 있는 일이고. 근데 사장이 널 찾는 거야. 부단장님 안 오시냐고. 이쪽에는 안 오신다고 그랬더니 같이 온 직원들 다 물리고 안절부절못한 얼굴로 그러더라. 공기업들 뭔가 꾸미고 있다고. 그래서 우리가 일 다 멈추고 문 잠그고 물어봤어.
평소라면 사견이 들어가고도 남았을 텐데, 오늘은 건조하게 사실 관계만 나열하고 있었다.
하다못해 ‘사장이 들어오자마자 너 찾길래 눈도장 찍으려는 줄 알았다? 그 왜 잘 봐달라고 하는 거 있잖아!’ 같은 장난스러운 의견조차도 덧붙이지 않았다.
나는 그가 말을 고르는 동안 선수를 쳤다.
“혹시 내부 고발자예요?”
-어떻게 알았어? 설마 그쪽에 따로 연락이 간 거야?
“아니요. 말씀하시는 거 들어보니까 그래요. 안 그래도 현장 조사에서 저한테 접선 오는 거 아닐까 했거든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지금이 좋은 기회긴 하다.
국세청까지 오면 눈에 띄기 쉽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 팀 직원들이 현장에 나가 있으니 접근하기가 좋지.
브라인드에서는 겁먹어서 못할 말도 지금이 적기라는 뜻이다.
그런데 좀 의외였다.
나는 내부 고발자가 사장단과 가까운 비서나 임원일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장님 분위기 어땠습니까?”
-좀 불안해 보이긴 했어. 들킨 것 같다고 하더라고. 원래 공기업 사장단끼리 따로 정보 공유하는 대화방이 있었는데 며칠 전에 쫓겨났대. 다른 공기업 사장들한테도 연락했는데 아예 전화를 안 받는다나?
나름 사장이라는 사람들이 하는 짓이 어린아이들 하는 것만큼이나 유치하다.
들킨 게 맞긴 하네.
“제가 바로 가겠습니다.”
-직접 오려고?
“네. 위험해 보이네요. 벌써부터 저러는데 보복이 있을 수도 있구요. 지금 갈 테니까 하던 대로 현장 조사 하고 계세요.”
-그래. 전달해 놓을게.
나는 전화를 끊고는 함께 사무실을 뒤엎고 있는 직원들에게 말했다.
“급히 가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이 자리는 맡겨도 될까요?”
“넵. 물론입니다. 찾으시는 자료 바로바로 대령 가능하도록 싹 훑어서 갖고 들어가겠습니다. 트럭 하나 정도는 너끈히 채울 수 있어요.”
“감사합니다. 그럼 제 연락 기다리지 마시고, 먼저 돌고서 국세청 들어가세요.”
나는 서둘러 주택개발공사를 나왔다.
다행히 가려는 곳은 그리 멀지 않았다.
급한 대로 택시를 잡아탄 나는 기사에게 외쳤다.
“대한주택보증공사요! 신호 위반 안 하는 선에서 밟아주세요! 따블 드립니다!”
뭐 하는 놈인가 하고 뒤를 돌아보던 택시 기사가 흠칫하더니 오케이를 외쳤다.
“이거 뭐 작전 그런 거예요? 꽉 잡으세요, 내 별명이 청계천 총알 익스프레스야!”
무언가 단단히 오해한 기사님이 엑셀을 밟기 시작했다.
***
대한주택보증공사.
주 업무는 말 그대로 보증이었다.
다만 대상이 기업이 아니라 개인이다.
가장 대표적인 상품이 바로 전세보증금반환보증과 전세금보증이었다.
예를 들어 전세계약이 끝났는데 집주인이 세입자의 돈을 먹고 나른다면?
공사가 대신 세입자에게 전세금을 물어주고 악덕 집주인을 쫓아다닌다.
이곳의 사장은 취임한 지 3개월도 안 된 신입이었다.
때문에 공기업 사장들 중에서도 가장 발언권이 작았고 무시당하기도 했다.
그나마 사장들끼리의 회의에 낄 수 있었던 건 전대 사장의 소개가 있었기 때문이다.
흔치 않다는 내부 승진 사장.
전대 사장이 이리저리 치일 그를 안타깝게 생각해 줄이라도 대주려 했던 것이다.
그는 젊을 적에 공기업으로 들어와 여러 기업체를 전전했다.
그리고 지금 있는 보증공사에 정착한 것이 10년 전, 임원을 거쳐 사장까지 되었으니 자수성가라고도 볼 수 있었다.
때문에 그는 다른 사장들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미친놈들. 파업? 하,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지들이 뭐 잘났다고 파업이야?”
사장실에 혼자 앉아 있던 그는 홀로 욕설을 퍼부으면서도 이내 덜컥 겁이 나서 고개를 푹 숙였다.
사장이 된 지 겨우 3개월이다.
회사를 오래 다니다 보면 싫어도 애정과 소속감이 생기게 마련이다.
거기에 스스로의 힘까지 사장까지 올라갔다.
애사심과 의욕이 최고조인 상태였다.
그렇기에 덜컥 자리를 박차고 나와 브라인드에 직원인 척하고 글을 썼다.
퇴사할 각오까지 했기에 ‘곧 퇴사할 거라 상관없다’는 문구도 썼다.
그러나 막상 일이 커지자 덜컥 겁이 났다.
솔직히 하루에도 몇십 번 후회했다.
특히나 다른 사장들과 연락이 끊긴 후로는 술 없이 잠들 수가 없었다.
언젠가 들킬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신재현이 세무조사를 끝내고, 사장들의 비리도 밝혀지고, 여론도 그들을 때릴 때.
그때는 밝혀져도 상관없다.
이미 힘을 잃은 후일 테니까.
지금은?
주택공사 사장이 어떻게 보복을 할지 너무나 두려웠다.
그 역시 사람인지라 캐면 나올 게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장들처럼 횡령이나 비자금은 없다 치더라도 자질구레한 걸 털어서 부풀리면 흠집 내는 것쯤이야 쉽다.
아니면 상상외의 방법으로 공격이 들어올지도 모르고.
평범하게 살아온 그에게 있어 전 대통령의 형은 무서운 존재였다.
“후우…… 역대 최단 임기 사장이 되겠구만.”
사장은 서랍을 열고 생수병 하나를 꺼냈다.
뚜껑을 열자 진한 알코올 냄새가 물씬 났다.
요즘엔 업무 시간에도 술이 필요했다.
그가 한입 마시려던 순간, 누군가가 사장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쿨럭쿨럭! 크흡! 잠시만요!”
누가 문만 두들겨도 심장이 덜컹했다.
혹시나 비서가 ‘고소장이 날아왔는데요?’ 하며 우편물을 들고 오는 건 아닐까, 항상 마음을 졸였다.
이번에는 제발 별일 아니길 기도하며, 서둘러 물병을 숨기고 소리쳤다.
“네, 들어오세요!”
그러나 들어온 것은 비서가 아니었다.
고소장보다 더한 큰일이다, 싶을 정도로 입이 떡 벌어졌다.
“어, 신재현이다.”
“네. 신재현입니다. 저 찾으셨다구요?”
더없이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들어오는 청년을 보자 저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사장은 버선발로 뛰어나가 신재현의 두 손을 덜컥 잡았다.
“잘 오셨습니다. 잘 오셨어요.”
막상 그가 온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는 게 아닌데도, 청년의 얼굴을 보자마자 갑자기 후회가 싹 사라졌다.
모든 게 다 해결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브라인드에 올리신 분이 사장님이라는 소식 듣고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마음고생 많으셨죠?”
제가 잘 압니다, 이젠 괜찮습니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사장은 다리에 힘이 쭉 빠지는 걸 느꼈다.
그동안의 근심 걱정이 깡그리 사라지고, 회의장을 박차고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다못해 브라인드에 글을 올린 것도 어쩌면 인생 최대의 결정이 아닐까 싶었다.
“제가 드릴 말씀이 있어요.”
사장은 용기를 냈다.
이제 와서 두려울 것은 하나도 없었다.
“편히 말씀하세요. 내부 고발 때문에 부당한 일을 당하는 일은 절대 없게 할 겁니다. 사장님이 내부 고발 했다는 걸 대한민국 모두가 알아도 절대 손가락질하지 못할 거예요.”
“정말 감사합니다…….”
사장은 자신보다 한참 어린 청년의 두 손을 꼭 붙잡고 주저리주저리 정돈되지 않은 이야기를 꺼냈다.
자신이 직원으로 출발해 사장까지 왔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사장들의 회의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거기서 나온 이야기 전부.
기억나는 건 모조리 신재현에게 이야기했다.
신재현은 단 한 번도 끼어들지 않았다.
두서없이 늘어놓은 긴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나서 한마디 했을 뿐이다.
“다들 곱게 내려가기 싫어서 환장하셨나 보네요. 국가기반시설을 담당하는 공기업에서 자기들 살겠다고 파업? 직업윤리는 개나 줘버렸나?”
“동감입니다. 정말 미친놈들이에요.”
사장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술을 먹지 않았는데도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신재현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사장님께서 해주신 어려운 결정, 절대 후회하지 않게 하겠습니다. 사장님의 정보가 절대 헛되이 쓰이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 말만 들어도 그동안의 모든 가슴앓이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단체 대화방에서 들었던 그 어떤 협박과 회의보다 청년의 말 한마디가 더 무겁게 다가왔다.
“그럼 어디 상대가 다음 수를 두기 전에 제가 한 발 더 먼저 가볼까요?”
신재현은 핸드폰을 들었다.
그가 찾은 전화번호에는 ‘나학진 기자님’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