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4화. 익명의 순기능 (3)
“흐억…….”
나는 숨을 몰아쉬며 로비에 서 있었다.
자리에 주저앉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젊은 사람이 그렇게 금방 지쳐서 쓰나.”
바로 옆에 서 있던 오낙현이 트집을 잡았다.
정말 혼내려는 거라기보다는 골탕 먹이고 놀리는 것에 가까웠다.
갑자기 대통령을 부른 것 때문에 아직도 삐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도 할 말은 있었다.
“국장님들이 놔주질 않으셔서요. 방금 전까지 발에 불나게 뛰어다녔는데요.”
국세청에 국장이라고 해봤자 11명밖에 안 된다.
나는 ‘대통령님 오신대요!’라고 공지만 하고 나올 생각이었기 때문에 1시간도 안 되어 끝날 줄 알았다.
내가 국장을 얕본 거였지.
-어허, 어딜 도망가요! 들어와서 앉아보세요.
국장들이 하나같이 짠 것처럼 날 붙잡고 늘어지는 게 아닌가.
-예? 죄송합니다만 국장님, 제가 일하다 왔습니다.
-어제까지 놀고 오늘부터 시작이잖아요. 아직 급한 일 없는 거 다 알아요. 일단 와서 앉아봐요. 내가 할 말이 있으니까.
국장이 부르는데 팀장이 어떻게 무시하겠는가.
얌전히 앉아서 차를 마시다 보니 한 명당 20분은 훌쩍 지나갔다.
대화 내용도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마치 ‘잘됐다, 이번 기회에 얘기나 해보자’라는 느낌 같았다고 할까.
-조사 대상 선정 기준은 어때요? 뭘 보고 정하나요? 국세청 다닐 만해요? 어머니 아프신 건 좀 어때요? 혼자 계시니까 심심하실 텐데 동네 친구들 좀 사귀셨나?
나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것이 조금 의외였는데 생각해 보니 당연했다.
가족 관계는 기사로 몇 번이나 나왔었지.
그러나 가십으로만 다뤄졌지 이렇게 걱정해 주는 말을 들은 건 굉장히 오랜만이라 어색했다.
내가 머뭇거리자 나를 혼내기도 했다.
-그러면 안 되지! 주말에는 어머니 모시고 동네 산책이라도 하세요. 그 연세에 얼마나 외로우시겠어!
그 외에는 나지막하게 언질을 주었다.
-청장님 너무 괴롭히지 마세요. 안 그래도 엄청 치이시는데.
이런 걱정 어린 충고도 있었다.
제3자가 보기에 청장이 많이 시달리는 것처럼 보이나?
국장들이야 청에서 족히 20년은 일한 사람들이니 여러 청장을 봤을 것이다.
그런 국장 입에서 청장 좀 봐주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면 요즘 오낙현이 많이 힘들긴 한 모양이다.
나는 솔직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고의로 청장님을 괴롭히려고 작정한 적은 없습니다. 저는 항상 일 때문에, 필요에 의해 청장님께 요청드리는 겁니다. 그것도 청장님께서 유능하시니까 자꾸 말씀드리게 되네요. 요청드리면 혼내시면서도 다 처리해 주시거든요.
국장은 허허 웃었다.
-그렇게 말하니까 할 말이 없네. 신 팀장이 혹시라도 위계질서 다 무시하고 막 나가는 거 아닐까 걱정했거든요. 당연히 유능한 사람한테 권한이 가는 건 당연하지만 우리도 각자 일이 있는 사람들이거든. 오늘 같은 일이 신 팀장의 힘겨루기가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 됐어요.
굳이 바쁘다는 나를 붙잡고 앉힌 이유가 이거 때문이었다.
다들 앞뒤가 꽉 막힌 권위적인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내가 대통령을 당일에 불렀다고 하니 덜컥 겁이 난 것이다.
국세청의 질서가 무너질 수도 있는 일이니까.
아니면 내가 허튼 마음을 품었나 의심했을 수도 있고.
-앞으로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확답을 못 드리겠지만 제 마음은 변치 않습니다. 항상 탈세 잡고, 세법과 원칙대로 일하는 게 제 목표예요.
-네. 믿습니다. 그럼 나도 준비할 테니 신 팀장도 다른 국장님한테 가봐요. 청장님 고생길이 훤하지만 어쩔 수 없지.
그렇게 국장들을 이해시키느라 시간이 촉박했다.
혹시 기다릴까 싶어서 급하게 사무실로 돌아와 직원들에게 알려주고, 다시 돌아와 국장 여러 명에게 붙잡혀 점심을 먹고.
그 몇 시간이 며칠은 된 것 같았다.
결과는 이것이다.
국세청 1층에는 족히 40명은 넘는 직원들이 서 있었다.
가장 선두에 있는 것이 당연히 청장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나와 국세청 차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뒤로 11명의 국장, 그리고 우리 조사단원 30명이 자리했다.
대통령 환영단치고는 조촐했지만 현재 핵심 인사가 모두 나와 있다고 장담할 수 있다.
한마디로 우리는 지금 국세청의 힘을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자업자득이야.”
오낙현이 중얼거렸다.
내가 지친 모습을 보면서 오낙현은 히죽 웃고 있었다.
그 옆에는 차장이 안타까운 얼굴을 하며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청장님, 저 국장님들한테 가기 전에 미리 다 공지로 보내두셨죠? 대통령 올 건데, 그거 다 신재현 탓이니까 좀 괴롭히라고.”
오낙현은 나를 흘끔 보더니 히죽 웃었다.
“신 팀장은 잔소리를 좀 들을 필요가 있어.”
역시 그랬군.
왠지 국장들이 내가 오는 걸 알고 있던 것처럼 행동하긴 했다.
대통령 온다고 공지했을 때 그리 놀라지 않고 날 붙잡기도 했고.
그러니까 나 혼자 미처 전달 못할까 봐 안달복달했다는 거지?
이미 다 알고 있었으면서.
따질까 하다가 청장의 옆모습을 보고는 그만두었다.
국장들의 걱정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니까.
그 걱정이라는 게, 국세청 위계질서 붕괴에 대한 지분이 약 40%에 청장 괴롭히지 말라는 당부가 60%쯤 되는 것 같긴 했지만.
“저 멀리 차 보입니다. 다들 긴장합시다.”
차장의 나직한 목소리에 사방에서 침 삼키는 소리가 났다.
***
국장들은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로 비틀거렸다.
오전에 신재현을 놀리던 사람들과 동일인물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국세청에 있다 보면 다양한 사람을 보게 된다.
대한민국 국민인 이상 누구든 납세의 의무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는 그런 ‘다양한 사람’으로 치부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신재현이 뒤돌아봤다면 고개를 갸웃했을지도 모르겠다.
조금 여유 있는 태도로 서 있던 조사단 팀원들마저도 이제는 긴장으로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행렬이 너무 길었다.
본청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자동차만 5대였다.
자동차가 제대로 멈춰 서기도 전에 경호원들이 내리고 뒷차에서 비서관들이 내렸다.
이어서 경제수석 임현승과 대통령이 차 안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임현승은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미리 자리를 비워둔 주차장은 꽤 넓었다.
로비의 문은 이미 활짝 열어둔 상태였고 안에 정장 차림의 한 무리가 보였다.
청장은 지금이라도 뛰쳐나올까 말까 갈등하는 참이었다.
임현승이 가만히 손바닥을 내밀어 멈추라는 표시를 했다.
청장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움직이려던 걸 멈췄고, 신재현은 팔을 아래로 내린 채 손만 흔들어 보였다.
반갑다는 인사다.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데 혼자만 신나서 희희낙락한 걸 보니 신기하면서도 짠했다.
신기하다는 건 신재현에 대한 감상이다.
훨씬 나이가 많고 직위가 높은 국장들마저 저렇게 굳어 있는데 당당한 모습이라니.
그리고 짠하다는 것은 국장들에 대한 감상이다.
자신도 엄연히 중간 관리직을 거쳐서 이 자리에 온 것이고, 지금도 이리저리 치이는 상황이니까.
당장 이번 일만 해도 그랬다.
이번 일은 돌발 사고나 다름없었다.
임현승이 전화를 받을 때까지만 해도 드디어 단장으로서 조사단에 도움을 줄 수 있겠구나, 생각하며 신나서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다.
단장이지만 정치적 개입 소리를 들을까 봐 첫날 이후로 단 한 번도 조사단 사무실에 출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뒤에서 이런저런 조력만 가능한 상황에서, 대통령의 이름값이 필요하다면야 충분히 알선해 줄 수 있었다.
다만, 그는 전화를 받아 대통령에게 보고하면서도 빨라야 다음 주에 방문할 거란 생각을 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의외로 쉽게 대답했다.
-오후 일정 뭐 있었죠? 환경부 장관 보고인가? 그거 내일로 미루죠. 급한 거 아니니까.
임현승은 환경부 장관에게 애도를 표했다.
하지만 대통령의 결정을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대통령에게 가장 관심사는 조사단이었으니까.
어느 정도냐 하면.
-다른 사람이 불렀으면 건방지다고 했을 텐데, 그 친구가 부르니까 마음이 확 바뀌네요. 오라고 했으면 당연히 가야죠. 오늘 당장!
대통령은 누구와 만나고, 밥을 먹고, 걸어 다니는 것 자체가 일정이다.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가 부여되고 외교적 수사가 붙으니까.
그런 대통령이 부랴부랴 오전 일정을 마무리하고 세종시로 날아왔다.
청와대가 발칵 뒤집힌 것은 당연하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지금쯤 상상력을 발휘하여 온갖 지라시를 양산해 내고 있을 것이다.
지금 조사단이 공기업을 타깃으로 잡고 있다는 건 다들 알고 있으니, 공기업과 엮은 얘기가 나오는 건 당연하다.
이걸로 얻을 수 있는 건 여론의 주목이다.
그간 조용했던 언론에 힌트를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앞으로 뭔가를 할 거라고.
때문에 주목을 한 번에 쭉 당겨오면서 조사단이 뭘 하든 바로바로 기사화가 된다.
국회의원 때처럼 말이다.
지금은 여론이 호의적이니 기사 또한 조사단에 좋은 방향으로 나올 것이다.
여기서 누군가 여론에 작업을 하면 바로 알 수도 있다.
호의적이던 기사 논조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면 어디선가 손을 대고 있다는 뜻이니까.
즉,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현 상황에서 신재현은 다음 턴에 어디로든 움직일 수 있도록 첫 수를 둔 것이다.
체스로 따지자면 퀸을 앞으로 보낸 것과 같다고 할까.
그리고 그 결과는 최종적으로 신재현에게 힘을 실어주는 방향으로 흘러가겠지.
그걸 위한 방문이었다.
“기자들 느리네요. 이제야 옵니다.”
임현승이 귓속말을 했다.
둘은 저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경호원에 막혀 국세청 주차장까지는 들어오지 못했지만 냄새를 맡은 기자들이 청 앞의 도로에 늘어섰다.
그냥 신재현만 엮여도 특종은 따놓은 당상인데 거기에 대통령까지?
게다가 일정에도 없던 깜짝 방문 아닌가.
이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달려와야 할 사건이다.
그리고 임현승이 의도한 바이기도 했다.
기자실에 슬쩍 얘기를 흘린 게 바로 임현승이었으니까.
미리 잡혀 있던 일정이라면 몰라도 갑작스러운 방문이다 보니 혹시라도 기자들이 따라붙지 못할까 걱정한 것이다.
“기자들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슬슬 들어가셔도 되겠습니다.”
“갑시다.”
임현승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대통령은 성큼성큼 유리문을 통과했다.
함박웃음을 활짝 지으면서.
대통령이 밖에서 서성이며 들어오지 않자 불안해하던 직원들의 걱정을 한 방에 날려줄 만큼 커다란 웃음소리였다.
“우리 오 청장! 또 만나네요. 일하느라 고생이 많죠?”
“아닙니다, 방문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의례적인 인사가 오고 갔다.
대통령과 오낙현이 악수하는 동안 기자들이 밖으로 우르르 몰려들어 플래시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기다렸다는 듯 대통령은 바로 신재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덥석 손을 맞잡는 게 아닌가!
“아이고, 부단장님! 정말 보고 싶었습니다. 청와대에 언제 놀러올 겁니까? 저 임기 끝나기 전에는 와야 해요. 안 그러면 업무상 방문이 아니라 사적인 일이 되어 버린단 말입니다.”
대통령이 마치 10년 된 지기처럼 신재현의 양손을 꼭 붙잡고 친근하게 대하자 로비에 혼란이 휘몰아쳤다.
신재현이야 ‘왜 이렇게 친하게 굴지?’ 하며 곤란할 표정을 지을 뿐이었지만,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떡 벌리고 딱딱하게 굳었다.
‘뭐야? 이 분위기 뭐야?’
‘잃어버린 아들인가? 그거 말고는 설명이 안 되는데.’
‘신재현이 그동안 한 일 보면 저럴만하긴 한데…… 그렇다고 다 보는데서 이렇게 예뻐한다고? 바로 옆에 청장님도 계신데?’
직원들은 오낙현을 걱정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다행이다 생각하는 중이었다.
어차피 대통령을 부른 건 신재현이다.
오낙현으로서는 대통령을 봐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용건이 없기 때문이었다.
실없는 인사와 악수 정도가 한계였다.
지금 신재현이 그 모든 관심을 가져가준 것이 다행스러웠다.
-번쩍!
어느새 밖에 모여든 기자들이 신나게 플래시를 터뜨렸다.
경호원의 제지도 있고 해서 가까이 다가오지는 못했지만, 열린 문 사이로 안이 보이기에는 충분했다.
대통령은 노골적으로 사진이 잘 찍히는 각도로 섰다.
그리고 신재현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근데 또 생각해 보면 그래요. 우리 강직한 부단장님은 절대 사적으로 만나줄 분이 아니니, 제가 공적인 업무라는 핑계를 대서라도 부단장님을 만나려는 겁니다. 근데 또 부단장님이 얼마나 바쁜 사람인지 아는데 어떻게 부르겠어요. 제가 와야지.”
이제 국장들은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대통령이 동네 아저씨인가?’
국장들은 휘청거리는 발에 억지로 힘을 주고 섰다.
그들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여기서 쓰러지면 끝이다. 버텨야 한다.
대통령은 기자들이 충분히 사진을 찍을 시간을 준 후 이제 국장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이미 다들 상태가 많이 안 좋았다.
신재현이 머리를 긁적이고는 한 명씩 소개를 했다.
이제 남은 건 뒤쪽에 서 있던 조사단원들이었다.
그나마 앞에서 국장들이 벽 역할을 해준 덕에 시간을 번 그들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이쪽이 함께 일하는 조사단분들입니까?”
“네. 조사단의 국세청 식구들입니다.”
대통령은 덥석 채유림과 정청두의 손을 잡았다.
반장이라 맨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항상 열심히 일해줘서 고맙습니다.”
평범한 의례용 인사였지만 둘은 이미 반쯤 유체이탈 상태였다.
“네, 네에.”
“감사합니다!”
넋이 나간 두 반장의 반응에 대통령이 희미하게 웃고는 신재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정도면 됐나요?’
신재현은 슬쩍 엄지를 들었다.
‘최고입니다.’
이제 보여줄 것은 다 보여줬다.
그렇다고 곧바로 청와대로 돌아가는 것도 모양이 좋지 않으니 대통령은 청장실로 가기로 했다.
먼저 청장과 차장, 대통령이 경호원들과 함께 떠나가자 겨우 남은 직원들이 해산을 할 수 있게 됐다.
그들이 기자들의 눈을 피해 가장 먼저 한 것은 신재현의 등을 때리는 것이었다.
“신 팀장! 제발 이런 일은 한 번으로만 끝내줘요. 알았죠?”
“진짜 기절하는 줄 알았네. 신 팀장, 내가 정말 무릎 꿇고 부탁합니다. 대통령님 막 이렇게 부르고 그러지 마요. 제발. 응?”
국장과 팀원들이 간절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신재현은 어느새 얻어맞은 팔뚝을 문지르며 멋쩍게 말했다.
“그래도 대통령님이 국세청에 관심 가지고 힘을 실어준다는 뜻이 되니까 앞으로 일이 좀 수월해지지 않겠어요?”
“아이고!”
단숨에 한탄이 흘러나왔다.
“판에 유리하게 이용해 먹겠다고 대통령 부르는 놈은 처음이다…….”
“그냥 조기 은퇴해야 할까 봐. 더 다니다간 심장마비로 먼저 실려 갈 것 같아.”
딱 한 명, 신재현만 만족한 대통령의 국세청 방문이 끝나가고 있었다.
직원들에게는 절대 잊지 못할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