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452화 (452/500)

452화. 익명의 순기능 (1)

일주일 만에 나온 사무실은 어쩐지 어색했다.

방학이 끝나고 처음 교실에 들어선 학생이 된 느낌이라고 할까.

몇 달간 숙식을 함께한 내 집 같은 공간인데도 낯설었다.

비스듬하게 비쳐 들어오는 햇빛이 딱 교실 분위기였다.

나는 일부러 입 밖으로 목소리를 내 보았다.

“아싸, 내가 1빠다.”

절대 무서워서 그런 건 아니다.

아무도 없으니까 해본 거다.

거기에 형광등 불을 켜니 단숨에 낯선 느낌이 사라졌다.

오랜만에 본 친구라 서먹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예전의 얼굴이 남아 있어서 반가움이 드는 느낌이다.

아침에 새벽 공기 맡으며 나올 땐 출근하기 싫어서 굉장히 기분이 안 좋았는데 또 막상 나오니 괜찮네.

나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 복! 합니다~.”

화이트보드에 업무 진행 상황이 간략하게 표로 그려져 있었다.

일주일 전, 마지막 업무로 했던 것이다.

3개와 33개는 숫자만 다른 게 아니다.

1+1은 2지만 여기서는 3이 될 수도 있고, 1.5가 될 수도 있다.

얼마나 효율적으로 지휘를 해내느냐.

나와 반장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도 할 수 있었다.

그를 위해서는 나부터가 진행도를 머릿속에 잘 집어넣고 있어야 했다.

자세한 건 나만 알고 있더라도 팀원들 역시 한눈에 알 수 있도록 정리해 둔 것이다.

-아, 이쪽 업체 거는 한 번에 이거랑 이걸 요청해야겠구나.

-방금 받은 건 이쪽 거 옆에 둬야겠구나.

이런 식으로 즉석에서 팀원들도 판단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더불어서 중복으로 자료를 요청하는 일을 막기 위해서기도 했다.

“1등이라 행복합니다~ 일이 많아 행복합니다~.”

마저 노래를 부르며 내 자리에 앉았다.

일주일이나 비워뒀다고 책상 위에 눈에 띄도록 먼지가 쌓여 있었다.

원래는 책상 위가 어떻든 잘 신경 쓰지 않는데 오늘따라 눈에 거슬렸다.

블라인드를 걷어둔 탓에 햇빛이 비쳐서 더 잘 보이기도 했다.

채유림은 이럴 때 물티슈로 한 번 닦던데, 나도 해볼까.

그러나 내가 책상에 물티슈 같은 걸 키울 리가 없다.

저번에 누가 빵 사 먹고 받은 일회용 물티슈를 던져둔 걸 봤는데.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두리번거렸다.

작은 테이블 위에 있나, 미니 냉장고 위에 있나.

구석구석 훑던 나는 구석 자리의 무언가와 눈이 마주쳤다.

“……?”

있을 리 없는 한 쌍의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쪽도 놀랐는지 동그란 눈동자에서 흰자위가 보였다.

“으아악!”

나는 귀신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지금 소리를 지른 것은 절대 무서워서가 아니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사람이 있어서 그런 것이다!

“으악!”

상대 역시 나를 따라 소리를 질렀다.

굵고 우렁찬 두 사람분의 비명이 조사단 사무실을 울렸다.

이렇게 아침부터 나와 있었다고?

대체 왜 불도 안 켜고 있었던 거야?!

나는 휘몰아치는 온갖 생각을 억누르고 간신히 입을 뗐다.

“권새호 조사관님…… 뭐 하고 계셨던 거예요?”

“어,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게…….”

그러고 보니, 내가 아무리 구석 자리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해도 들어오면서 사람을 못 봤을 리가 없다.

파티션으로 나뉜 책상에 엎드려 담요를 머리끝까지 올리고 있으니 그를 보지 못한 것이다.

가뜩이나 나는 들어오자마자 화이트보드부터 확인했고.

“대체 몇 시부터 나와 계셨던 거예요? 대체 왜?”

“그, 그렇게 일찍은 아니에요. 7시 좀 넘어서 도착했습니다. 제가 조사과에 있었던 게 굉장히 오래전 일이기도 하고 국세청에서는 조사국에서 일해본 적이 없어서요. 좀 미리 공부를 해볼까 해서…….”

어떤 사정인지는 이해가 갔다.

나도 정리도 할 겸 일부러 일찍 나온 거니까.

법령해석과에서 세법 해석 일을 하다 넘어온 사람이니 덜컥 걱정이 들었겠지.

게다가 일주일이나 쉬었으니 더 불안해졌을지도.

회계법인 고송에 날 따라간 이후, 우리 조사단은 다른 조사과와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도 깨달았을 것이다.

자신이 그동안 해왔던 식은 안 된다는 것도.

그럼 답은 하나다.

시간을 더 투자하는 것.

공부를 하든, 전에 조사한 자료를 들춰보고 방식을 유추하든, 결국 직접 눈으로 보고 알아낼 수밖에 없다.

열심히 하는 사람의 특징이다.

내가 가만히 있자 권새호가 멋쩍어하며 덧붙였다.

“일찍 나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8시쯤 되니까 너무 졸리더라고요. 이러다 정작 낮에 졸면 본말전도니까요.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게 그…….”

권새호는 말끝을 흐리며 내 눈치를 보았다.

왜 눈치를…… 아!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네.”

“들으셨…….”

“네.”

“그거 때문에 깨신…….”

“네, 맞습니다.”

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무리 나라고 매일 일찍 오는 건 아니고, 일찍 올 때마다 신나서 노래하는 건 아니다.

일주일 만에 나오니 뭔가 반가웠고, 이른 아침 불 꺼진 사무실에 햇살이 비친 걸 보니 의욕이 들었을 뿐이다.

어차피 아무도 없겠다, 조금 흥얼거린 것뿐인데.

왜 하필 오늘이야!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이 들었다.

“춤까지 췄으면 큰일 날 뻔했다.”

“그, 저는 괜찮습니다. 신경 안 쓰셔도 돼요. 팀장님 노래 잘하신다고 이미 소문이 나서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소문이요? 대체 무슨 소문? 아니, 제가 노래하는 건 어떻게 알고?”

“단합대회에서 노래하셨다면서요. 그리고 노래방 가서 부르신…….”

권새호는 말하다 말고 입을 틀어막았다.

딱 보아하니 누군가가 내 노래를 녹음했고 그걸 들었는데, 내게는 비밀로 해달라고 한 모양새다.

내 추리는 완벽하다.

범인은 이 안에 있어.

용의자는 4명이다.

“권새호 조사관님, 이동하자마자 일이 많아서 힘드시죠? 오늘 일찍 와서 보실 정도면 뭔가 궁금한 게 있으신 것 같은데. 제가 알려 드릴게요. 저한테 물어보세요.”

지금까지 조사단에서 해온 모든 조사 건은 내가 지휘했다.

결재도 내가 했으니 당연히 다 꼼꼼하게 훑어봤다.

혼자서 자료 뒤지고 용쓰는 것보다 팀장한테 물어보는 게 당연히 편하지.

권새호는 금방 미끼를 물었다.

“정말 그래도 됩니까? 팀장님 바쁘신데…….”

“아뇨, 괜찮습니다. 대신에 누가 노래방에서 녹음했는지 알려주세요.”

“예? 그건 좀…… 저도 약속을 했는데요.”

“제보자의 신원은 지켜 드리겠습니다. 저 아시죠? 내부 고발자 출신이에요. 절대 제 입에서 새어 나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권새호가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거의 다 넘어왔군.

“범인이 누군지는 몰라도 권새호 조사관님한테만 보여주진 않았을 테고. 절대 권 조사관님이 말했다는 사실은 모를 겁니다. 완벽한 비밀 유지 조약. 어때요?”

“코, 콜.”

권새호는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그는 먼저 신뢰의 증표로 거래의 대가를 제시했다.

“강혜원 조사관님입니다.”

“역시 그랬어!”

“제가 알려 드렸다고 절대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그럼요. 티 안 나게 잘 처리하겠습니다.”

“처, 처리요?”

권새호가 화들짝 놀랐다.

왜 이렇게 새가슴이야?

아, 설마 전 2반 반장처럼 내쫓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상황 봐서 몰래 핸드폰에서 제 노래 지우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아, 그런 뜻이었구나…… 근데 이미 늦은 것 같긴 해요. 이 사무실 사람들은 거의 다 봤거든요.”

“아, 미치겠네. 강혜원!”

나는 다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럼 그렇지, 함께 노래방 간 게 한참 전인데 이미 써먹을 만큼 써먹었겠지.

……하지만 아직 국세청의 모든 사람들한테 전파된 게 아니잖아?

희망은 있다.

설마 외부로 유출하진 않겠지만 팬카페, 하다못해 국세청 다른 과 직원들에게까지 퍼지는 건 아직 막을 수 있다.

강혜원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이미 연수원에서 쓴 실무서만으로 흑역사는 충분하다.

나는 침착하게 권새호를 불렀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은 수습 가능한 수준이에요.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입니다. 자, 얼른 오세요. 다른 직원들 오기 전에 궁금한 거 다 물어보세요.”

“넵,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저번 공기업 조사 때 팀장님께서 박 조사관님 결재서 빠꾸하셨던 이유부터 알고 싶습니다.”

“아, 그건 말입니다…….”

우리는 도란도란 자료를 꺼내가며 대화를 나눴다.

역시 세법 관련 애기를 하면 시간이 빨리 간다.

어느새 일찍 출근하는 무리들이 사무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들은 들어오자마자 우리가 세법 토론을 하고 있는 걸 보고 움찔하더니 애써 모르는 척 자리에 앉아 고개를 숙였다.

일주일 만에 보는데 인사도 하지 않길래 뚫어져라 쳐다봤는데도 다들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이 정도면 일부러 시선을 돌리는 거다.

마치 눈이 마주치면 끌려 들어가는 공포영화 취급하는 느낌이다.

어느덧 9시가 다가오고, 빈자리가 가득 찼다.

조사한 건은 많고 세법은 깊다.

그걸 얘기하기에 한 시간은 짧은 시간이었다.

권새호는 아쉬움을 달래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제야 직원들이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나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잘 쉬다 오셨습니까!”

“네!”

“출근하기 싫었던 건 아니구요?”

뭘 묻냐는 듯 뾰족한 눈빛이 날아오길래 얼른 화제를 돌렸다.

“많이 쉬셨으니 이제 진짜 일해야 해요. 자, 그럼 예고한 대로 빡세게 갑니다. 우리가 해야 되는 조사가 33개거든요. 이걸 한꺼번에 하긴 무리가 있고, 비슷한 성격끼리 묶어서 1차, 2차, 3차 이런 식으로 나누어 진행합니다. 첫 번째는 자원개발 쪽 공기업부터 합시다.”

해외자원개발공사, 대한토지개발공사, 대한주택개발공사, 대한수자원개발공사 등 개발 관련 공사도 많았다.

이쪽을 1차 조사권역으로 고른 이유는 역시 하나다.

탈세액이 많다.

아마 본인들도 각오하고 있지 않을까?

그럼 얼른 털어드려야지.

“우선 자료 수집부터 출발하겠습니다. 1반은…….”

내가 팀을 나누려는데 문득 채유림이 손을 번쩍 들었다.

“팀장님! 세부사항 나누기 전에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어요!”

“네. 뭔가요?”

“브라인드 아시죠?”

내 등 뒤 창문에 달려 있는 블라인드를 말하는 건 아닐 테고, 그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고유명사라면 생각나는 게 하나밖에 없다.

“직장인들이 가입한다는 익명의 앱 말씀이신가요? 대나무숲 비슷한 거.”

“네. 가입하셨어요?”

“아니요. 저는 커뮤니티 안 합니다.”

내 팬카페도 안 하는데 뭘.

가끔 큼직한 건 끝나고 나서 뉴스 좀 보는 게 전부다.

일하고 공부하고 쉬느라 사실 할 시간도 없다.

“그럼 이거 한번 보실래요?”

채유림은 자신의 핸드폰을 내게 건넸다.

브라인드에 로그인이 되어 있고 어떤 글 하나가 올라와 있었다.

채유림이 브라인드를 한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해당 글을 본 순간 나는 바로 빠져들고 말았다.

댓글 숫자만 해도 500개가 넘었다.

이런 걸 흔히 ‘불탄다’라고 하지 않던가.

나는 천천히 한 글자 한 글자 뜯어내듯이 글을 읽어 내려갔다.

내부인이면 알 수 없는 정보가 쓰여 있었다.

“외부에도 꽤 많이 퍼진 글이에요. 우리 팀에도 본 사람 있을 거예요.”

채유림이 설명하자 아, 하고 뭔지 눈치챈 사람도 나왔다.

나는 눈썹을 모았다.

“근데 아직 안 지웠네요?”

“네. 작정하신 것 같더라고요. 퇴사한다고 했고.”

이건 꽤 위험한데.

내부 고발해 본 경험자가 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찾아낼 수 있다.

공기업이래 봤자 지금 남은 건 33개밖에 안 되고, 그중에서 조만간 퇴사할 사람을 추리면 범위는 훅 줄어든다.

거기에 말은 하지 않았지만 분명 다른 정보도 있는 듯했다.

정보량의 차이를 갖고도 사람을 추릴 수 있다.

나는 심각하게 물었다.

“이분하고 따로 연락을 못 하죠?”

“네. 근데 댓글 여기 보시면 아시겠지만, 팀장님 귀에 들어가길 바란 것 같아요.”

“공기업들이 뭔가를 꾸미고 있다 이거군요. 지금 와서 조사단을 이겨먹긴 쉽지 않을 텐데. 그럼 남은 건 여론 반전이나 남한테 누명 씌우는 것뿐이거든요. 권력은 먹히지 않으니까 제외고, 인맥도 물론 제외입니다. 어느 쪽일까…….”

요즘엔 일이 좀 쉽게 풀린다 했더니 이분들이 또 뭔가를 꾸며주시네.

나는 잠시 고민하고서 판단을 내렸다.

“남에게 누명 씌운 경우에는 검찰에서 조사 결과 밝혀낼 수 있을 겁니다. 횡령이나 비리, 비자금 조성은 우리가 추적할 수 있으니까 진범 찾는데 도움을 줄 수 있구요. 문제는 여론인데, 이게 좀 어렵거든요.”

정치인들이 유권자의 표 하나를 얻기 위해 선거철에 몸을 비틀듯이, 국민 여론이란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저쪽에서 뭔가를 꾸미면 방비를 해둘 필요는 있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우리 단장님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그리고 팀원들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우리 대통령님 한 번 더 볼래요?”

“예?”

채유림이 멍하니 되물었고, 동시에 핸드폰 너머에서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부단장님~ 바쁘신데 어쩌다 나한테 전화까지 주셨습니까.

연결음 2번 만에 받은 경제수석 임현승이 더없이 반가운 목소리로 나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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