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0화. 그 시간 그들은 (2)
서울지방국세청의 사무실에는 4명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중 하나는 당연히 이 방의 주인인 민치호였다.
오른팔인 이선균은 당연하다는 듯이 찾아와 앉아 있었다.
민치호가 서울청의 청장이 된 후로는 이선균도 자제하는 법이 없었다.
대놓고 청장실을 들락거리며 회의를 하고 방침을 정했다.
이제는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이선균이 없으면 풍경이 어색해 보일 지경이었다.
그리고 청장실에 앉아 있는 나머지 두 명의 구성이 좀 특이했다.
한 명은 올해 신임 조사2국장 자리에 앉은 중년의 남자였고, 나머지 하나는 마찬가지로 올해 조사2국의 팀장이 된 30대 청년이었다.
작년, 서울청에서 신재현이 내부 정보를 유출한 조사2국장을 조사해 쳐낸 일이 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민치호는 서울청장이 된 후 서울청의 이모저모를 조사해 왔다.
부임하자마자 바로 서울청을 정리한 건 아니었다.
새로운 청장의 출현에 긴장했던 직원들이 무색하게 평온한 하반기를 보냈다.
그리고 민치호가 본색을 드러낸 것은 그로부터 몇 달 후였다.
이제 파벌은 무의미했다.
민치호는 남길 사람은 남기고 보낼 사람은 보냈다.
무능력한데 인맥에 기대어 운 좋게 출세한 사람, 이상하게 민원을 많이 받는 사람, 아랫사람의 실적을 가로채는 사람 등.
꽤 많은 수를 도로 세무서로 내려 보냈다.
서울청에서 다른 지방청도 아니고 세무서로 내려 보낸다는 것은 출세길이 끝났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반대로 올라오는 사람도 많았는데, 그중 대표가 청장실에 앉아 있는 둘이었다.
“조사2국 상황은 어떻습니까?”
민치호는 특별히 조사2국을 갈아엎는 데 공을 들였다.
국장과 팀장, 이 둘이 신경을 썼다는 증거였다.
중년의 신임 조사2국장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한가하게 지내다 갑자기 바쁘게 움직이려니 몸이 녹슬어서 몇 달을 고생했는데, 이제 좀 적응이 된 것 같습니다. 현역으로 돌아간 기분이에요.”
“허허, 2국장. 원래부터 현역이었잖아요. 뭘 새삼스럽게.”
“그러니 좋다는 뜻입니다. 몸은 힘들어도 이제 좀 제가 쓸모 있어진 것 같아서요. 갑자기 청장님께서 다른데도 아니고 조사국장으로 보내실 때는 당황했습니다만.”
“나는 적재적소에 인재가 있는 걸 좋아해요. 뭐 하러 1과장 갔다가 납세국장 갔다가 헤매고 다닙니까? 바로 조사국장 가면 될 것을.”
“사람들은 보통 그걸 파격적인 인사라고 부릅니다.”
“제가 보기엔 아주 적절한 인사였던 것 같은데요. 2국장도 그렇고, 거기 팀장도 그렇고. 안 그렇습니까?”
국장은 옆에 뻣뻣하게 굳은 채 앉아 있던 청년을 보더니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친구는 아직 멀었지만 그래도 가르칠 맛이 나는 친구입니다. 착실하고 심성이 굳어서요.”
“당분간은 즐거우시겠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야근해 봤습니다. 모두 청장님 덕분입니다, 하하하!”
신임 2국장이 반쯤 탓하듯 얘기해도, 이게 진심이 아니라는 것은 다들 알고 있었다.
청장 쪽에 넘어가기로 결심한 것도 그였고, 막상 국장이 된 후 신난 것도 그였다.
몸이야 힘들긴 했지만 여기서 가장 만족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이가 바로 신임 국장이었다.
“윤 팀장은 어떻습니까? 청에는 적응 좀 했어요?”
팀장은 하늘 같은 청장이 직접 말을 걸자 딱딱하게 긴장한 채 허리를 바로 세웠다.
“옙! 국장님께서도 많이 가르쳐 주고 계시고, 직원들도 다들 열심이어서 저도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허허, 그래요. 세무서에서 바로 서울청 조사국으로 와서 좀 힘들겠지만 열심히 해봐요.”
“넵! 감사합니다!”
팀장은 우렁차게 대답해 놓고는 뭔가 할 말이 있는지 우물쭈물했다.
청장이 말만 걸어도 바짝 긴장하던 것과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이선균이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괜찮아요. 편하게 말해봐요.”
팀장은 상사들의 눈치를 보더니 에라, 모르겠다 하는 얼굴로 말했다.
“저만 뒤처질 순 없으니까요. 빨리 쫓아가고 싶습니다!”
신임 2국장이 놀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아는 팀장은 절대 이런 성격이 아니었다.
차분하고, 먼저 말을 잘 걸지 않고, 묵묵한 직원이었다.
일반 직원일 때야 그런 성격을 상사들이 좋게 봤을지 몰라도, 이제 팀장이 되었으니 조금 고쳤으면 하는 욕심이 들던 차였다.
그런 그가 청장이 있는 자리에서 향상심과 경쟁심을 내보인다는 것은 좋은 전조였다.
경쟁심은 때론 질투의 원인이 되지만 잘하면 원동력이 된다.
세무서에서 바로 조사국 팀장으로 와서 힘들었을 텐데도 우는 소리 한 번 않고 묵묵히 일을 해낸 것은 그의 성격 때문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국장은 부하 직원이 보여준 의외의 모습에 크게 기꺼워했다.
“윤 팀장한테 이런 면이 있는지 몰랐네요. 신재현이 그렇게 동기 부여가 되나?”
그랬다.
신임 2국장과 팀장, 이 둘은 모두 신재현과 연관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만약 이 자리에 신재현이 있었다면 무척 반가워했을 것이다.
그가 삼성 세무서에 있던 시절, 서장이었던 한대윤.
그리고 신재현이 처음 삼성 세무서에 왔을 때 재산세과 바로 옆자리에 앉았던 직원이었다.
신재현이 신설된 체납징세과의 체납추적1팀으로 발령되었을 때, 윤지성 역시 그 옆 팀인 징세팀으로 발령받았다.
팀은 달라도 관련 있는 업무다 보니 함께 힘을 합쳐 징세하러 다닌 적도 있었다.
아직 능력을 증명하느라 애를 쓰던 시절의 신재현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직원이다.
신재현과 그의 팀원들이 통째로 서울청 특수조사2팀으로 옮겨가면서 자연스레 헤어졌지만.
그 역시 세무공무원으로서 나름 부당함을 들이받은 전적이 있었다.
그가 싸운 상대는 당시 세무서에서 진상으로 소문난 여직원이었는데, 아버지가 국세청의 고위 공무원인지라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
나중에 그 아버지를 상사로 모시게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런 뒷배도 없던 윤지성은 슬프게도 그 싸움에서는 졌지만,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서울청 팀에 따라가지 못했어도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따라가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그러니 삼성 세무서장이었던 한대윤의 눈에 띈 것도 당연했다.
그는 당시 민치호의 세력이 되기로 결심한 이후 함께 올라갈 쓸 만한 인재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한대윤의 추천이 있었다고 해도, 2년 만에 서울청 조사국 팀장이 된 것은 윤지성이 노력한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민치호는 절대 무능한 자를 앉히지 않으니까.
“흐음…….”
험악한 인상의 민치호가 콧김을 내뿜었다.
윤지성은 움츠러들었지만 이선균은 알 수 있었다.
저건 괜찮은 놈을 보았을 때의 흥분한 얼굴이다.
민치호가 나직하게 물었다.
“점점 거리가 벌어진다고 느낀 적은 없어요? 열심히 따라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고개를 들어 보니 상대는 더 멀리 가 있다고 느낀 적은?”
이런 생각이 왜 안 들겠는가.
한대윤으로서는 민치호의 갑작스러운 질문이 조금 무례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윤지성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쓸데없이 약 올리려는 목적으로 질문을 던질 사람은 아니다.
한대윤은 가만히 정면을 보았다.
이선균이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슬프게도 민치호와 이선균, 둘 다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종류의 사람들이었지만 민치호가 과하게 나설 때 막아주는 이가 이선균이다.
그런 이선균이 고개를 끄덕였다면 이것은 윤지성에게 해가 될 자리는 아니었다.
그럼 굳이 윤지성의 자존심을 건드릴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시험이구나!’
한대윤은 조용히 마른침을 삼켰다.
청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7급 직원에게 시선을 주는 경우는 많지 않다.
신재현의 경우가 있긴 했지만 그건 특별했고.
아마 이 시험에 통과한다 해도 신재현처럼 되지는 못할 것이다.
윤지성이 신재현과 비교해서 한참 못 미치는 건 알고 있으니까.
그래도 평범한 사람에게는 평범한 사람의 길이 있는 법이다.
지금 윤지성이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최대의 기회를 얻은 것이다.
윤지성은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항상 느낍니다. 제가 열심히 뛰면 뛸수록 신재현 조사관님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게 됩니다.”
아, 하고 한대윤이 탄식할 뻔했다.
절대 그런 일 없다는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융통성 있게 넘어갈 줄 알았다.
그러나 그의 부하 직원은 솔직하고 곧이곧대로인 사람이었다.
한대윤이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민치호와 이선균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민치호는 여전히 표정을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이선균은 아직 무언가 기대하는 얼굴로 윤지성을 보고 있었다.
다행히도, 윤지성의 대답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게 뭔가? 싶습니다. 신재현 조사관님과 저는 달라요.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걸 할 겁니다. 신재현 조사관님의 길을 똑같이 따라갈 생각도 없습니다. 그분의 길은 저만이 아니라 수많은 세무공무원들의 희망이 되고 있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딱 하나입니다. 몇 년이 지나든 나중에 재회했을 때, 부끄러움 없이 그 앞에 서서 인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제가 시간을 헛되게 쓰지 않았다는 걸 당당히 말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한대윤은 멍하니 윤지성을 쳐다보았다.
그가 이렇게 길게 얘기하는 건 처음 보았다.
이선균은 진한 미소를 지었고 민치호도 남들이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히죽 웃고 있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민치호의 어투에서 존대가 사라졌다.
까마득한 아래 급수라 해도 민치호에게는 스쳐 지나가는 손님과 같았다.
그렇게 세워두었던 마음의 벽이 지금 반쯤 뚫린 것이다.
민치호는 한대윤에게 고개를 휙 돌렸다.
“국장님 얘기가 맞네요. 괜찮은 친구입니다. 키울 맛 좀 나겠습니다. 좋은 공무원으로 키워주세요.”
민치호는 거기서 말을 끊었지만 한대윤은 그 뒤에 이어지는 환청을 들은 것만 같았다.
나중에 일을 맡길 수 있도록, 이라는 환청 말이다.
“네, 청장님. 한번 해보겠습니다. 저에게도 큰 성장이 될 것 같군요.”
“내가 이래서 국장님을 좋아합니다. 윤 팀장, 국장님을 잘 본받도록 하세요. 우리는 항상 공부하고 향상심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넵.”
윤지성이 딱딱한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부하 직원이 칭찬을 들었는데 기분 나쁠 사람은 없다.
한대윤 역시 흐뭇한 표정을 하고 있을 때였다.
“참 아쉽게 됐네요. 저도 그걸 직접 보고 싶었는데.”
“네……?”
심상치 않은 말투였다.
그러고 보니 청장은 아직 둘을 부른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할 만하냐는 질문으로 운을 떼었을 뿐이다.
그 서두가 이렇게 길어졌고.
뭔가 일이 있는 게 분명하다.
한대윤은 덩달아 긴장했다.
“별거 아닙니다. 두 분이 급하게 이동해야 할 것 같아서요. 조사국 업무를 좀 더 익히셨으면 좋았겠지만, 저쪽에 빈자리가 생겨서 어쩔 수 없군요. 저쪽 일부터 익히시고 추후 다시 조사국을 맡으시면 될 것 같습니다.”
“혹시 다른 지방청으로 갑니까?”
서장이었다가 국장 일을 처음 맡아본 한대윤이나, 아예 청을 처음 와본 윤지성이나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긴 마찬가지였다.
경험을 쌓으라며 다른 지방청에 보내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고, 어딘가 사고가 터져서 막으라고 보내는 경우의 수도 있었다.
그러나 민치호는 더욱 파격적인 근무지를 내밀었다.
“세종시 본청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었다.
한대윤의 등골이 쭈뼛 섰다.
“원래는 국장님만 보내 드리려 했는데 상황을 보니 윤 팀장도 함께 이동하는 게 맞는 것 같네요. 이제 겨우 키우기 시작하신 거 아닙니까. 제 원래 계획으로는 여기 조사국에서 1~2년 계시다가 본청 보내 드리는 거였는데, 급하게 사람을 좀 보내달라고 하네요. 이러면 제가 보낼 사람이 한정되어 있거든요.”
한대윤은 입술에 마른침을 발랐다.
“어느 과입니까?”
“명색이 여기서 국장이신데 거기도 국장으로 가셔야죠. 다만 조사국은 아닙니다. 징세법무국이에요.”
서울청의 조사국장과 본청의 징세법무국장.
업무 특성에 따른 발언권을 생각해본다면 당연히 조사국장이 더 낫다.
커리어를 생각한다면 반반이었다.
하지만 한대윤은 망설이지도 않고 승낙했다.
“알겠습니다.”
고민은 필요 없었다.
이유도 묻지 않았다.
민치호가 보낼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그는 절대 자신의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그게 다른 두 청장 후보들과 다른 점이었다.
한대윤이 그를 선택한 이유기도 했고.
“조사2국은 연달아 국장 자리가 비는군요. 마가 낀 자리인가 봅니다.”
이선균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예상치 못한 사태라고는 하지만 결국 고생하는 건 조사2국의 직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민치호가 의뭉스럽게 물었다.
“그럼 이 과장이 갈 거야?”
이선균이 팔짝 뛰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과장에서 무슨 조사2국장이에요!”
“흐음, 시키면 잘할 것 같은데.”
“아이고, 청장님. 아직은 안 됩니다. 저 야근하다 죽어요.”
“이 과장은 그거 습관 좀 고쳐야 하는데. 너무 몸을 축내. 슬슬 그럴 나이가 아니지 않나?”
“말도 마십쇼. 퇴근하면 씻지도 않고 기절할 때도 있습니다.”
“그 정도까진 아닌 거 같은데 엄살은.”
“진짜라니까요!”
여기서 확실히 해두지 않으면 민치호가 정말 자신을 국장으로 올릴지도 모른다.
민치호가 청장이 되었으니 자신도 언젠가는 국장 자리에 가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아직은 무리였다.
표정 관리도 잊고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민치호가 아쉬운 듯이 입맛을 다시며 한대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럼 이동 일정 잡히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정리할 것도 많으실 테고, 나도 후임 국장을 물색해야 해서 말입니다. 2주에서 3주는 걸리지 않을까 싶네요.”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오랜만에 그리운 얼굴을 만나게 생겼다.
한대윤과 윤지성은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둘이 갑작스러운 발령 예고를 들은 것은 신재현이 3개의 공기업 조사에 막 착수했을 때였다.
그리고 신재현이 일주일간의 휴가를 위해 조기 퇴근한 날, 드디어 둘의 이동 준비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