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448화 (448/500)

448화. 최후의 발악 (2)

직장인들이 이용하는 익명의 앱이 있다.

브라인드.

이용자의 정보는 가입 인증이 끝나자마자 파기되어 앱 관리자조차 알지 못한다는 앱이었다.

때문에 직장인 중에서 대나무숲처럼 이용하는 사람이 많았다.

인증하고 가입해야 하기 때문에 익명이라 해도 서로의 글은 믿을 수 있었다.

회사원이 아닌데도 숨어들어 ‘회사원인 척’ 이상한 글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뜻이다.

덕분에 직장인들의 속마음을 적나라하게 들을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브라인드는 여느 때보다 뜨거웠다.

[공기업 털린 거 실화냐?]

-아침에 출근하다 뉴스 보고 어이없어서 웃었다.

대한공항공사 481억, 대한농어촌공사 370억, 대한철도공사 275억 때려 맞은 거 대체 뭐냐?

무슨 대기업이야? 뭘 이렇게 많이 해 처먹었어? 그 와중에 사장들도 나란히 잡혀갔더라. 뭐 하는 놈들이냐?

뉴스에 나온 최종 탈세 고지액은 신재현이 눈으로 본 금액보다 조금 달랐다.

신재현이 본 금액은 각각 490억, 379억, 281억이었다.

이 정도 규모가 되면 까다로운 과세 근거가 있어야 한다.

조사단으로서는 온갖 서류를 이 잡듯 뒤져 근거를 마련한 결과였다.

나머지 몇억은 신재현으로서도 찾기 힘들었다.

근거가 한두 가지면 몰라도, 이렇게 큰 회사에서 뭘 과세했고 뭘 안 했는지 찾는 것도 힘들다.

그래도 각각 못 찾아낸 금액이 10억을 넘지 않는 걸 봐서는, 계정별원장의 자질구레한 계정과목이나 카드사용내역 같은 극히 국지적인 부분에서 발생한 것 같았다.

저 몇억을 찾겠다고 몇 박스나 되는 서류를 처음부터 끝까지 뒤엎어도, 찾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결국 조금 모자란 상태로 고지서가 나갔지만, 최선의 결과였다.

신재현이 본 금액 중 거의 대부분을 찾아내 과세한 거나 다름없으니까.

공기업 3군데를 털어 도합 천백억이 넘는 탈세를 잡아냈다는 소식은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고, 브라인드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나 브라인드에는 대기업이나 공기업에 다니는 직장인들이 꽤 많이 가입해 있었다.

[공기업 다니는 애들아, 나와봐라.]

-내부 분위기 어때? 거기 막 뒤집히고 난리 났어?

└안 그래도 공기업 직원들 위에서 까이고 기사로 욕 처먹느라 힘들 텐데 괴롭히지 마라. 해 처먹은 새끼들은 따로 있잖아.

└알았어ㅠ 미안해ㅠ

그리고 이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자신에게 불똥이 튀지 않으니 내부인만이 전해줄 수 있는 사정이 궁금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전에는 공기업 직원들이 보이지 않았다.

[공기업 애들 안 보이네. 긴급회의 들어갔나?]

-근데 3사만 걸리지 않았어? 다른 공기업도 안 보이는 건 이상한데. 아, 혹시 공기업 전수조사 들어올까 봐 비상회의 열렸나?

└분위기 안 좋으니까 커뮤나 SNS하지 말라고 입 막는 걸 수도 있음.

└하긴 내부 정보 떠들면 또 퍼가서 뉴스 타는데 윗분들 입장에서는 난감하지.

└괜히 회사 실드 치는 얘기 하다가 뉴스 타도 난감하지. 근데 회사에서 하지 말란다고 말 안 할까? 한두 명쯤 머리 빈 애들이 나올 법 한데.

그때 흘러가는 잡담 속에 하나의 글이 올라왔다.

[회계사도 하나 잡혀감]

-공기업 애들 눈팅하는지 안 하는지 모르겠는데 걔네 튀어나올 때까지 내가 썰 하나 풀어줌.

조사단한테 철퇴 후려 맞은 공기업 세 개 있지? 공항, 철도, 농어촌.

이 세 군데를 맡아서 감사하던 회계사가 있었는데 재무팀 다니는 사람들은 알 거임. 감사받는 회사면 회계를 기업 맘대로 못하잖아. 국제회계기준 따라서 하지.

그래서 탈세고 뭐고 일단 장부에 이상한 거 있으면 회계사가 제일 먼저 의심받거든? 근데 이번에는 그냥 탈세만 얽힌 게 아니고, 회계 부정도 있었나 봄. 국내 10대 원펌에 들어가는 유명 회계법인에 맡겼는데 거기 대표 회계사가 지금 검찰 조사 받고 있음.

자격증 박탈당하고 징역 1~2년쯤 살지 않을까, 하는 게 업계 중론임.

누가 봐도 고송철 이야기.

이 글을 올린 사람의 업종에는 ‘회계사’가 떡하니 박혀 있었다.

회사 메일이 있어야 브라인드 인증과 가입이 가능하니, 이 사람은 적어도 유명 회계법인의 회계사라는 뜻이다.

순식간에 댓글이 우르르 달렸다.

└회계사 형, 벌써 그쪽엔 소문 퍼진 거임?

└장부 조작했다는 소문이 사실이에요?

└와, 공기업에서 분식회계 하다 걸린 거야? 진짜 어질어질하다. 국가기반산업 도맡아서 한다고 적자나도 봐주고 세금으로 메꿔주니까 국민을 호구로 아는 거 아냐? 아, 공기업 직원들 욕하는 건 아닙니다.

└공기업 직원들이 과연 몰랐을까?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재무팀이나 중간 관리직부터는 백 퍼 알고 있었을걸? 근데도 다들 입 싹 닫고 모르는 척한 거잖아. 같이 욕먹어도 할 말 없을 텐데.

└내부 고발 터졌으면 좋았겠지만 솔직히 우리 다 알잖아. 내부 고발한 사람들 어떻게 되는지. 힘들게 공부해서 공기업 가놓고 그 연봉이랑 커리어 포기하면서 내부 고발하면, 돌아오는 건 손가락질이랑 해고 아냐? 이건 고발자 보호 안 해주는 우리나라가 잘못한 거 같은데.

└회계사님, 그쪽 업계 반응은 어때요? 얘기 들어보니까 상세한 내용까지 다 퍼졌나 본데.

지켜보고 있었던지 글을 올렸던 회계사가 금방 댓글에 나타났다.

└징계 가야 된다고 난리 났죠. 10대 회계법인에서 대표가 그런 짓을 했으니. 기재부에서 수위를 어떻게 할지는 모르겠는데 업계 퇴출해야 된다고 말이 많습니다. 이거 뉴스 타면 파장도 클 텐데 아마 협회장이 직접 인터뷰나 기자회견을 하지 않을까 싶네요.

└형 말하는 거 들어보면 꽤 자세히 아는 것 같은데 아예 내용이 싹 퍼진 거야, 아니면 형이 그 사정을 아는 관계자야?

└뭐야, 너 스파이임? 작성자 신원을 왜 궁금해함. 이러니까 내부 고발자 보호가 안 된다는 소리가 나오지.

댓글에서 작성자의 정체를 추론했기 때문인지 회계사는 귀신같이 사라졌다.

보고 있을지는 몰라도 그 후로 댓글에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오후가 되자 닉네임 옆에 ‘~공사’라는 글자를 단 사람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혹시나 해서 왔는데 브라인드 역시 뜨겁네]

-욕해도 할 말 없다. 나도 우리 회사 이런지 몰랐어. 하, 진짜 현타 온다…… 이러려고 공부했나 싶기도 하고. 지금 자괴감 엄청 든다.

└관련 부서임?

└아니, 작성자 회사명 봐봐. 세무조사 받은 3사가 아니라 다른 공기업임.

└어, 맞네. 얘는 해외자원개발공사네. 근데 왜 네가 자괴감 들어? 뭔 일 있어?

브라인드에 하나둘 올라오는 글이 심상치 않았다.

공기업 직원들은 하나같이 쉽사리 입을 열려 하지 않았고, ‘하, 너네는 알려고 하지 마라’는 식으로 얼버무렸다.

안 그래도 불타는 집에 기름을 뿌리는 꼴이었다.

결국 게임 개발 업종의 누군가가 화를 냈다.

[말 안 할 거면 하지 말고 꺼져!]

-하려면 하고 말라면 말든가 왜 할 듯 말 듯 간을 보고 있어? 내부 고발자 어려운 거 알고, 내부 사정 함부로 말 못하는 거 아니까 강제로 말하란 소리 안 하잖아. 그럼 그냥 아무 말 하지 말고 좀 가! 사람 궁금하게 하지 말고!

└이분 밤 새우셔서 날카로우시다. 공기업 선생님들은 잘 새겨들으셔서 말할지 말지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쟤들 걍 말할 때까지 기다려. 어쩔 수 없어. 브라인드라고 해도 만능은 아니잖아.

그렇게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용기를 낸 누군가가 게시글을 하나 올렸다.

[나 곧 퇴사할 거라 말해줌]

정보에 갈증을 느끼던 브라인드 이용자들이 순식간에 몰려들었다.

게시글 조회 수는 새로고침을 할 때마다 수십 단위로 뛰었다.

내용도 심상치 않았다.

-조사받은 세 군데 말고도 다른 공기업도 세무조사 받을 거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공식적으로 조사단에서 공문이 날아오진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조사 준비를 하고 있는 분위기고요.

선빵 맞은 세 군데 사장은 탈세 외에도 비리, 횡령, 비자금 조성 등의 명목으로 검찰 조사 중이 맞습니다.

그리고 여타 공기업이 조사단 공문도 없는데 벌써부터 지레 겁먹고 벌벌 떠는 이유는 다른 사장들도 그닥 깨끗하지 않아서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세무조사 받으면 그야 불편하겠지만 법을 어긴 건 사실이니까 내자, 이런 식이잖아요. 그런데 다른 공기업들도 이미 털린 데랑 사정이 비슷했던 겁니다.

실제로, 지난 주말에 공기업 사장들끼리 몰래 모였대요. 대책 회의를 한 거죠.

글은 길면서도 남들이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확실히 내부자만이 알 수 있는 정보였다.

그리고 ‘지난 주말에 몰래 모였다’는 문구가 눈길을 끌었다.

이건 내부자 중에서도 중간 관리직이나 임원 정도는 되어야 알 수 있는 정보다.

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오늘 오전에 전 직원들 싹 모아서 방침이 하나 내려왔습니다. SNS 금지. 내부 정보 발설하지 말 것. 만일 정보 유출 시 전 직원 핸드폰 수거 후 검사. 이런 내용이라 다른 직원들이 말을 못 하는 거예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제가 봐도 어메이징한 소식이 하나 있는데, 이건 발설했다간 정말 제가 위험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여기에 적지 않겠습니다. 퇴사해서까지 소송당하긴 싫거든요. 질문이 있어도 답변은 하지 않겠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게시글이 끝나자 기다렸던 것처럼 댓글이 우수수 달리기 시작했다.

└이분 일반 직원은 아닌 것 같은데 이런 거 올려도 되나요? 선생님, 걱정되는데 지금이라도 지우시는 편이…….

└어메이징한 소식이 대체 뭔지 궁금한데 무작정 물어볼 수도 없고.

└폰 검사까지 한다는 거 보면 뭔가 있나 봐. 근데 세무조사 받으면 국세청에서 원하는 자료 주고 좀 기다리면 고지서 날아오고 그런 거 아니었어? 대체 무슨 사건이 벌어지려고 하는 거지.

└다른 공기업 사장들도 비리가 있다고 했잖아요. 그분들이 뭔가 빠져나갈 한 수를 갖고 있는 거 아닐까요?

└저도 공기업 직원인데요, 폰 검사한다는 경고는 저도 들었어요. 근데 나머진 다 처음 듣는 얘기예요. 글 쓴 분 누군지 금방 특정될 것 같아서 걱정되네요.

이런저런 의견이 오고 갔지만 예고했던 대로 작성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댓글이 50개를 넘어섰을 무렵, 한 개의 댓글이 다른 모든 사람들의 손을 멈추게 했다.

└저 근데, 여기 브라인드에 공기업이나 다른 업종 분들만이 아니라 공무원도 있다는 거 알고 계신 거죠?

댓글을 단 사람의 닉네임 옆에는 ‘국세청’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순간 브라인드에 상주해 있던 모든 사람들은 등골이 싸해지는 걸 느꼈다.

공기업에 뭔가 있고 그걸 누군가 폭로했다.

‘어떤 소식’에 대해 말할 순 없다 했지만 대비해야 한다는 힌트도 줬다.

그리고 공기업을 조사하려고 벼르고 있는 국세청의 직원이 그걸 봤다.

이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짐작이 갔다.

그래서 더욱 무서워졌다.

새로고침만 하면 몇 개씩 늘어나 있던 댓글이 잠시 뚝 끊겼다.

이윽고 하나의 댓글이 달렸다.

작성자였다.

└괜찮습니다. 국세청 직원분 계신 거 알고 글 쓴 거예요.

브라인드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다들 당혹감에 휩싸였다.

국세청이 봐도 상관없다기보다는 이건 마치…….

└일부러 국세청에 전달하고 싶었던 느낌인데.

└쉿.

그 후로 작성자는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워낙 크고 일반 국민에게도 화제가 되는 이슈였기 때문에 브라인드의 관련 글은 다른 커뮤니티에도 복사되어 퍼져 나갔다.

그중에는 폭로 글도 끼어 있었다.

인터넷 구석구석까지 퍼진 폭로 글을 보았는지, 아니면 국세청 조사관에게서 브라인드 글을 직접 전달받았는지는 모른다.

어찌 되었건 그 글은 신재현에게도 흘러 들어갔고, 온 뉴스가 세 공기업과 회계사의 처우로 관심이 집중되어 있을 때.

조사단의 국세청 지부는 침묵을 깨고, 나머지 공기업에 대한 세무조사 공문을 보냈다.

공문은 총 36개의 공기업 중, 이미 조사가 끝난 3개를 제외한 ‘33개 전부’에 빠짐없이 전달되었다.

올 것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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