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447화 (447/500)

447화. 최후의 발악 (1)

정말 오랜만에 공기업 사장들이 모였다.

개중에는 조만간 정치권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도는 사람도 있었고, 어쩌다 보니 사장 자리에 앉은 사람도 있었다.

어느 업계나 다 그렇듯 힘깨나 쓰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남의 의견을 따라가는 거수기 역할의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공기업 사장들이 모인 자리는 겉으로는 정보 교류의 장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비상 대책회의나 다름없었다.

“공항공사 사장님은 오늘 참석을 안 하셨네요?”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여자 하나가 말했다.

옆에 앉은 남자는 지친 얼굴로 의자에 늘어진 채 말했다.

“사장 자리 사퇴하신답니다.”

“그래요? 아쉽게 됐네요. 세무조사 과정이랑 결과 들어보고 싶었는데.”

여자는 공항공사 사장을 걱정하기보다는 정보를 얻지 못하게 된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옆자리에 축 늘어져 있던 남자가 상체를 들어 올렸다.

“지금 사장 셋 모가지가 날아갔는데 그런 말씀이 나옵니까? 그래도 나름 안면 있던 사람들이 한 방에 털렸는데?”

남자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면박을 줬지만 여자는 오히려 당당했다.

“그게 어때서요? 솔직히 여기 나오신 분들 전부 그런 정보 얻으려고 온 거 아니에요? 정말 죄송한 말씀인데, 아니 솔직히 죄송하지도 않아요. 사장 자리 내놓으신 사장님들이 어떻게 되셨든지 간에 지금 제 코가 석 자라서요. 우리 회사도 세무조사 받을까 봐 밤에 무서워서 제대로 잠을 못 자거든요? 제 앞가림하기 바쁜데 이미 탈세로 사장 자리 내려오신 분들을 걱정하게 생겼습니까? 사장님, 지금 우리는 우리를 걱정해야 해요.”

여자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주르르 쏟아냈다.

남자는 처음에 뭐라 반박하려다가 점점 뒤로 갈수록 입을 꾹 다물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사회적인 위치와 이미지를 생각해서 걱정하는 척했을 뿐이다.

여기 모인 공기업 사장들이 하는 걱정은 오로지 자신의 안위와 회사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장 3명의 모가지가 날아가지 않았는가.

“그래도 물러나신 사장님들과 친분 있던 분들도 여기 계시니 너무 그렇게 대놓고 말하진 맙시다. 거참, 괜히 서로 얼굴 붉힐 필요는 없잖아요.”

안 그래도 건너편 자리에 앉은 몇 명의 사장들이 눈에 불을 켜고 노려보고 있었다.

조사받은 사장들과 그나마 교류가 있던 사람들이다.

“물러나신 사장님도 그래요. 사퇴하면 해결이 된답니까? 이미 조사할 건 다 했고 압수수색까지 했다면서요? 검찰이 와서 뒤엎고 간 마당에 사장 자리 사퇴한 거는 그냥 욕 덜 먹겠다, 이거 아니에요? 세무조사 나온 마당에 갑자기 사장까지 사라졌으니 회사는 개판일 테고, 그럼 후임으로 온 사장님만 죽어나겠네요. 자기는 도망치면 다인가? 그런 욕은 안 먹어요?”

여자가 신랄하게 까기 시작하자 점점 건너편에서 노려보는 눈길이 강렬해졌다.

이러다가는 대책 회의를 하기도 전에 엎어지게 생겼다.

“그 얘기는 그만합시다. 싸우게 생겼네. 지금 중요한 건 이미 가신 분들이 아니잖아요.”

가장 상석에 앉은 대한주택개발공사의 사장이 상황을 정리했다.

건너편에 앉은 친분 있는 사장들이 또다시 죽을 듯이 노려보았다.

그나마 말로 반박하지 않고 가만히 노려보기만 하는 것은 상대가 꽤 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대한주택개발공사 사장.

전 대통령의 형으로 지금 이 사태의 해결책을 제시할 희망이었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그런 상대를 노려본다는 것 자체가 역린을 건드렸다는 뜻이기도 했다.

정작 당사자인 주택공사 사장은 어디서 모기가 무나, 하는 얼굴로 무시하고 있었지만.

“다들 걱정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사장님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뾰족한 수가 있으세요?”

자기 앞가림도 힘들다며 대놓고 속마음을 드러냈던 여자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정보를 얻기 위해 나온 것도 있지만 사실 주택공사 사장의 대처가 궁금해서 나온 것도 있었다.

그나마 사장 중에서 가장 정치와 가깝다는 그가 깨끗할 리 없었기 때문이다.

“글쎄요. 지금으로서는 딱히…….”

“사장님이 모르시면 이 안에서 아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 이 많은 사람 살린다고 생각하시고 좋은 수가 있으면 귀띔이라도 해주세요.”

지금이야 이렇게 띄워주지만 다들 속으로는 주택공사 사장을 방패로 삼으려는 생각도 있었다.

전 대통령의 형이라는 것은 힘이 있다는 것도 되지만, 언론의 관심을 받았을 때 가장 집중포화를 맞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에게 시선이 쏠린다면 다른 사장들은 은근슬쩍 탈세액만 내고 끝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정말 좋은 수가 있다면 더더욱 금상첨화다.

이번 일을 무사히 넘어갈 수 있는데 아부 정도야 아깝지 않았다.

물론 주택공사 사장은 여기 모인 사장들의 속내를 진작 알아챘다.

‘날 앞세워서라도 살아남겠다는 위인들만 가득 찼군.’

지금이야 입바른 소리만 늘어놓지만 나중에 막상 조사가 들이닥치면 모르쇠하고도 남을 놈들이다.

이미 회계사 고송철에게도 그렇게 했으니까.

주택공사 사장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가만히 쳐다보기만 하자, 말석에 앉아 있던 이름 모를 공사의 사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왜 다들 그렇게 걱정을 하시는 겁니까? 신재현이 조사를 하러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요? 이제 겨우 3군데 조사한 거고, 그것도 사실 공기업 치려고 작정한 게 아니라 회계법인에서 이상한 걸 발견해서 줄줄이 타고 들어간 거 아니었습니까? 저는 그렇게 들었는데요. 아직 조사한다는 공문 받으신 분들 계시나요? 안 계시죠? 그럼 너무 섣부른 걱정 아닌가요?”

사장들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설명하기도 귀찮다는 얼굴이었다.

어리둥절해하는 그에게 주택공사 사장이 부드럽게 말했다.

“공기업을 털었더니 탈세액이 나왔습니다. 그럼 신재현이 과연 가만있을까요? 다른 공기업도 손대고 싶어지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그는 한 두 명만 끝나는 것보다는 아예 끝장을 보는 걸 선호했습니다. 국회의원 그 많은 숫자를 싹 쳐낸 것 보세요. 그때 우리 모두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절대 못한다, 국세청 전부가 달라붙어도 현실적으로 무리다. 국회의원 그 양반들이 어떤 놈들인데 눈뜨고 당하겠냐, 그랬죠?”

분위기가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가장 좋은 선례가 눈앞에 있다 보니 이들이 느끼는 두려움도 상당했다.

“그럼 조사단이 공기업 전체를 전수조사 할 수도 있다는 말씀이군요. 그 근거는 납득했습니다. 듣고 나니 또 한 가지 질문이 생기네요. 탈세했으면 어쩔 수 없는 거 아닙니까? 여기서 대책이 나와요? 이미 장부고 뭐고 다 마감되어서 손댈 수도 없잖아요.”

이어지는 팩트에 합죽이처럼 입을 다물고 있던 사장들이 일제히 눈길을 보냈다.

그 눈빛은 결코 곱지 않았다.

‘우리가 그걸 몰라서 여기 모였나?’

‘저 인간은 대체 왜 부른 거야? 내부 승진으로 사장 된 인간 아닌가? 여기에 낄 사람이 아닌데 누가 불렀어?’

‘저저저, 말하는 뽄새 보소. 자기는 상관없다, 이거지? 우리만 다급하다 이거지?’

그야 사장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안 된 그는 딱히 꿀리는 게 없었다.

문제는 다른 사장들이었지만.

“크흠. 상황을 모르시면 일단 질문은 나중에 하십시다. 처음부터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회의는 다시 원래 주제로 돌아갔다.

이름 모를 공사의 사장은 눈치가 없는 건지 일부러 그러는 건지 멈추지 않았다.

“탈세했으면 탈세액 내는 게 당연하지 않나요? 거기에 대책을 세우고 말고 할 여지가 있습니까? 대체 뭐에 대한 대책을 회의하는 겁니까?”

사장들이 일제히 얼굴을 와락 찡그렸다.

“거, 회의 방해할 거면 나가시죠.”

결국 이름 모를 공사의 사장은 입을 다물어야 했다.

강제나 다름없었다.

“이제 조용해졌으니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상석에 앉은 주택공사 사장이 입을 열었다.

“여러분이 제게 뭘 원하는지는 알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만 말씀드릴게요. 저 역시 이번 사태에 손쓸 방도가 없습니다. 신재현이 회사만 털고 끝나겠습니까? 분명히 사장과 임원진도 손을 댈 겁니다.”

탈세한 걸 내면 끝나지 않냐고 물었던 신임 사장은 그제야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이해했다.

‘내가 윗대가리들 이럴 줄 알았지. 드러운 새끼들이 뒷주머니 하나씩 찼구만. 그래서 겁이 난다 이거지?’

내부 승진으로 사장 자리에 앉았다 보니, 보통 사장들이 어떤 식으로 횡령과 비리를 저질러 왔는지 짐작만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는 경멸의 눈초리를 숨기지 못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께 제안드릴 게 하나 있습니다. 우리 모두 뭉치는 거죠.”

“어떻게 뭉칩니까? 시위라도 할까요?”

“바로 그거예요.”

사장들이 미친놈 보듯 했다.

신재현이 그런다고 포기할 놈이 아니라는 건 이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들어보세요. 우리가 운영하는 회사는 일반적인 기업이 아닙니다. 국가기반산업을 책임지고 있죠. 수익이 나지 않아도 나라를 위해 운영하는 곳입니다. 그런 특성을 살려서…….”

주택공사 사장은 짐짓 비장한 투로 말했다.

“……파업을 합시다.”

“허억!”

“흡!”

“……!”

회의장 내에 당혹과 충격이 내려앉았다.

내부 승진으로 올라온 신임 사장이 벌컥 화를 내며 일어섰다.

“이거 미친 사람 아니야! 일반 회사도 아니고 지하철이랑 철도에 국토공사와 개발공사, 이런 데서 다 파업을 하겠다고요? 일제히?”

“아직도 계셨습니까? 안 하실 거면 나가시죠.”

“예! 나갈 겁니다! 내 참, 더러워서 같이 못 있겠습니다. 여길 내가 왜 왔는지 후회스러워요. 파업? 조사받기 싫어서 그 대책으로 파업? 어디 할 테면 해보시죠. 내가 다 까발릴 테니까!”

신임 사장이 불같이 화를 내자 반대로 주택공사 사장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으로 응시했다.

“까발린다라. 어디 해보시죠. 하지만 그 전에 여기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한 번씩 보고 가시기 바랍니다.”

“뭡니까. 얼굴을 보면 뭐가 나옵니까? 알아듣게 말씀을 하세요.”

주택공사 사장은 아주 친절하게 눈높이 설명을 해줬다.

“이쪽은 전 국회의장의 사돈이시고 이쪽은 전 차관님이십니다. 여기는 전직 대법원장님의 사촌이시고 여기는 전직 대통령 캠프 정책실장이었습니다.”

“그런 대단한 분들이 앉아서 내놓은 대책이 파업이라니 기가 찹니다. 그렇게 대단하시면 가서 신재현하고 직접 싸우시죠. 국민들 인질로 잡지 마시고.”

“아니요, 우리들도 신재현은 못 건드립니다. 그런 괴물은 이 나라 누구든 상대를 못할 거예요. 대통령이 아니라 대통령 할아버지가 와도 끽소리 못하지 않을까요?”

“그럼 잘나신 분들 소개는 왜 하신 겁니까?”

대한주택개발공사의 사장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그는 대놓고 협박하는 투로 차갑게 말했다.

“신재현은 못 건드려도 사장님은 건드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나가서 말할 수 있으면 어디 한 번 해보시죠. 우리는 지금 다들 벼랑 끝에 서 있어서요. 마음이 좀 다급하거든요. 뭘 할 수 있는지 몸소 체험하게 되실 겁니다.”

신임 사장은 순간 아득해지는 정신을 부여잡았다.

처음 느껴보는 진득한 악의에 두려움마저 느껴졌다.

저놈들은 한다면 한다, 그런 위기감이 들었다.

“대체 무슨…….”

주택공사의 사장은 반박을 차단하듯 가만히 손을 들어 문을 가리켰다.

“나가세요. 시간 뺏지 말고.”

신임 사장은 억울했지만 입도 뻥끗할 수 없었다.

치욕과 분노를 참으며 그는 터덜터덜 걸어 나갔다.

문이 덜컥 닫히자마자 참아왔던 다른 사장들의 반박이 터져 나왔다.

“잠시만요, 파업은 명분입니다. 우리가 일제히 파업한다고 여론이 반전될까요?”

“당연히 처음엔 우리가 욕을 먹겠죠. 미친 짓 한다고. 그런데 며칠이고 직접 국민들이 불편을 느끼면 그 원인에게 불만이 쏠리게 될 겁니다. 국민은 단순하니까요.”

“파업하란다고 직원들이 말을 듣겠습니까? 파업은 노조가 주축이 되어서 했던 건데요.”

“동맹 휴업 형식으로 가야죠. 처음엔 우리를 욕하던 사람도 불편함이 길어지면 ‘저 둘은 언제까지 싸우는 거야, 적당히 하지’라는 의견이 많아질 겁니다. 명분은 이렇게 합시다. 과한 세무조사로 거기에 대응하느라 정상적인 업무를 못하고 있다. 협조하느라 업무에 소홀해졌다는데 어쩌겠습니까.”

“신재현에게 통할까요? 그게 제일 걱정인데.”

“안 통하겠죠. 하지만 국민 여론이 분열되고 들끓어 오를 때 ‘탈세액만 물리고 끝내자’라고 하면, 협상의 여지가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목적은 그겁니다. 아예 신재현을 이겨 먹자는 게 아니에요. 그냥 우리 살길 조금만 도모하자는 겁니다.”

긴 토론이 오고 갔지만, 방금 나간 신임 사장과는 달리 이들이 걱정하는 것은 국민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안위였다.

“그럼 이거 말고 다른 방법 있으십니까? 있으면 의견을 내보시죠. 아니면 가만히 앉아서 감옥 가시겠습니까?”

끄응, 하고 곳곳에서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도 문다고 했다.

평소라면 시도도 하지 못할 미친 짓을 지금 이들은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뿐이니 뭐라도 해봅시다.”

이건 아닌데, 싶으면서도 사장들은 홀린 듯이 동조했다.

그래야 할 것만 같은 분위기와 자신의 안위에 대한 공포심의 힘이었다.

그만큼 이들이 신재현에게 느끼는 공포는 컸다.

안 하던 짓을 할 만큼.

“좋습니다. 잘 생각하셨어요. 그럼 구체적으로 계획을 짜 보지요. 일단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다가 신재현이 조사한다고 공문을 보내면 공론화부터 시키는 겁니다. 그다음에…….”

결국 열댓 명 남짓한 공기업 사장들은 마지막 발악을 택했다.

물론 그것이 성공할지 더욱 나락으로 처박힐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