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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세청 망나니-446화 (446/500)

446화. (남들에겐) 공포의 술래잡기 (3)

나는 지긋이 내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고송철을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왜 도망가냐, 그런다고 될 것 같냐.

사람 힘들게 약 올리냐 등등.

그런데 엎드려 있는 꼴을 보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저 좀 살려주십시오!”

당당하게 국세청에까지 쳐들어올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석고대죄야.

이렇게 될 줄 몰랐나?

인맥으로 다 될 것처럼 굴더니.

아니, 그보다 드는 생각은 ‘뻔뻔하다’였다.

태도가 확 바뀌어서 그런 건 아니다.

이 사람은 회계사다.

누구보다도 재무와 회계에 정통하고 심지어 세법도 아는 사람이다.

중소기업 사장이 ‘모르고 했습니다, 한 번만 봐주세요’라고 해도 화가 나는 판국인데 회계사가 선처를 구하다니.

장부 조작을 저지를 땐 분명히 알고 했을 거다.

걸리면 어떻게 되는지도.

심지어 중간에는 다른 사람에게 덮어씌우려고 하지 않았던가.

악질 중에서도 악질이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괘씸죄를 적용해서 아예 폐인을 만들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미워도 사적인 감정으로 일을 할 수는 없지.

그래서 나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입을 열면 바로 쌍욕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였다.

표정 관리가 필요할 때 가장 좋은 것은 역시 웃는 것이다.

이제는 얼굴에 착 달라붙는 것 같은 익숙한 미소를 띠우며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고송철과 눈을 마주치자 그의 눈에 절박함과 일말의 희망이 서리는 것이 보였다.

희망? 이 상황에서 희망이라고?

어림도 없지.

“제가 언제 죽인다고 했나요?”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알아먹었을 것이다.

사형 내리는 것도 아닌데 우는 소리 하지 말라고.

그러나 불행하게도 고송철은 시야가 많이 좁아져 있는 상태였다.

그는 덥석 내 발을 부여잡았다.

“부단장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근데 저도 힘없는 사람이에요.”

“회계사님이요? 잘나가는 원펌의 대표 회계사시고, 무엇보다 사회적 지위가 있다는 전문직 아니십니까?”

“아니에요, 부단장님도 아시잖아요. 의뢰인이 해달라면 그냥 해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안 그러면 굶어 죽습니다! 저는 피해자예요. 부단장님, 제발 참작을 해주세요.”

이건 또 무슨 논리지?

아무리 급하다지만 공부깨나 했다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공항공사 사장도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바로 옆에 의뢰한 당사자가 있는데 대놓고 ‘쟤가 시켰어요’ 하는 꼴 아닌가.

물론 시켰으니까 했겠지.

그러나 손바닥 한 짝만 가지고는 박수를 칠 수 없다.

사장은 탈세나 횡령의 방법을 물었을 것이고, 회계사는 동조해서 도왔을 것이다.

왜 도왔냐고 확신하냐면, 정말 하기 싫으면 안 하면 되거든.

“제가 아는 세무사들은 그렇지 않던데요.”

당장 내가 공무원 되기 전에 알바했던 사무실도 그랬다.

거기 세무사는 딱 봐도 위험해 보이는 건수가 들어오면 저희는 못한다며 의뢰를 거절했다.

아무리 큰돈을 준다고 꼬여도 그랬다.

백번 양보해서, 준법정신이 투철한 게 아니라 그냥 위험한 다리를 건너기 싫어서 의뢰를 거절했다고 치자.

누가 회계사에게 억지로 불법을 저지르라고 시켰는가?

“굶어 죽는다니요, 회계사님. 제가 재무제표 볼 줄 모른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물론 회사의 이름값을 생각하면 큼직한 회사 맡는 게 좋죠. 그래서 회계사님 말씀대로 정말 공기업 쪽에서 강요를 했다고 칩시다. 탈세를 돕지 않으면 거래를 끊어 버리겠다고 했다고 쳐요. 그 거래 끊겨도 수입에 지장은 없으시잖아요. 회계법인 손익계산서 보니까 매년 성과금 명목으로 몇억씩 가져갈 정도던데요.”

“아니, 그건 부단장님이 업계를 잘 모르셔서 하는 말씀이에요. 눈 밖에 나면 다른 거래처에도 소문을 낸단 말입니다. 거래처가 싹 끊겨요.”

“공기업 사장한테 그런 힘이 있어요?”

까려면 알고 까야지.

내가 되묻자 동시에 두 군데서 대답이 들려왔다.

“네!”

“아니요?”

전자는 고송철이었고 후자는 대한공항공사의 사장이었다.

참다못한 사장이 끼어든 것이다.

“이봐요, 제가 잘못한 건 맞는데 제가 무슨 비밀결사 수장쯤 됩니까? 대한민국 정재계를 다 휘어잡은 흑막이에요? 그 회계법인에서 어디랑 거래하는지 제가 어떻게 알고 연락해서 거래 끊으라고 합니까?”

“아는 사람들한테 소문내는 건 흔히 하는 거잖습니까. 일명 블랙리스트라고 하죠.”

고송철은 악에 받쳐서 맞받아쳤다.

솔직히 저 말이 맞는지 틀린지는 모른다.

우리가 모르는 어두운 부분이라는 건 상식이 통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잠시 둘의 말싸움을 구경하기로 했다.

“그것도 대기업과 중소 규모 회계법인 사이면 가능하겠죠. 근데 고송은 10대 회계법인 안에 드는 곳 아닙니까? 이미 잘나가는데 제가 말하면 남들이 듣기나 합니까? 임기 끝나면 별 볼 일 없는 공기업 사장이?”

“저희 회사는 공기업 상담 전문입니다. 공기업 사장님이 말씀하시면 안 좋은 소문이 퍼질 수 있죠.”

“아니, 내가 무슨 뒷세계의 검은 손이냐고요. 왜 말이 그렇게 됩니까. 자꾸 이상한 사람 만드는데, 그게 가능할 것 같았으면 당신 이렇게 서 있지도 못했어! 진작……!”

분노를 터뜨리던 사장이 갑자기 입을 막았다.

그리고 눈동자를 데록 굴려 날 쳐다보았다.

그니까 사장의 논리는 이거다.

자기가 정말 손을 썼으면 블랙리스트 같은 짓거리보다는 아예 확 뭔가 조치를 취했을 거란 뜻이지.

막상 말하려고 보니 국세청 공무원인 나와 검사인 지현석이 걸리는 거고.

말실수 직전에 멈췄지만 이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지 못해서 헛기침만 하는 사장과 그를 쳐다보며 얼굴이 파래진 고송철.

나는 정리에 나섰다.

“대충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 그래서 고송철 회계사님 주장은 어쩔 수 없이 불법을 저지르셨다는 거잖아요.”

“네? 네. 그렇습니다…….”

내가 부드럽게 말하자 고송철이 어색하게 대답했다.

이놈이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나, 하는 불안한 표정이었다.

“근데 다른 법인은 멀쩡하게 법 잘 지켜가면서 하고 있잖아요. 회계사님 논리대로라면 그 회사들은 진작 굶어 죽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 법인들에 탈세나 불법 좀 도와달라는 요청이 안 들어왔을까요? 탈세를 도와주지 않으면 업계에서 퇴출당하게 만들겠다고 협박한다구요? 협박은 뭐 그럴 수 있다고 칩시다.”

“부단장님, 그럴 수 있지는…….”

사장이 뭐라 반박하려다가 내가 한번 쳐다보자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사장님이 나설 때가 아닙니다.

고송철 먼저 해결하느라 그런 거지 대한공항공사 사장도 결코 깨끗하진 않다.

당장 아래층에서는 우리 단원들이 공사를 뒤엎고 있으니까.

지금은 마치 나와 고송철이 싸우고 사장이 억울함을 피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둘 다 피장파장이라는 것이다.

사장이 그걸 떠올렸는지 조용해지자 나는 고송철에게 말을 이었다.

“회계법인 고송에만 콕 집어서 탈세를 도와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는데 그걸 거절하지 못해서 피해자다. 그런 말씀인 거네요? 그럼 둘 중 하나 아닙니까? 다른 회사들은 알아서 불법을 거절했거나, 회계법인 고송이 불법적인 의뢰도 받는다는 걸 알고 아예 고송에만 부탁했거나.”

고송철은 꿇어앉은 채로 눈동자만 데록 굴렸다.

“아닌가요? 대표님 말씀대로라면 모든 회계사들이 다 협박에 못 이겨서 불법을 저질렀어야 맞는 논리인 것 같은데요. 어떤 회계법인이든 거래처 끊기는 건 두려워할 것 아닙니까. 그럼 회계사는 불법 집단인 거고 의뢰하는 기업체들도 다 탈세 기업이겠네요?”

“어…….”

고송철이 머리가 나쁜 사람은 아니니 자신의 논리가 말도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저 지금은 그렇게 해서라도 피해 가고 싶었던 거고.

그래서 오히려 자신의 말 때문에 궁지에 몰린 것이다.

고송철은 더 이상 괴상한 논리를 들이밀지 않았다.

대신에 아주 솔직하게 나왔다.

“부단장님! 한번만 봐주십시오! 제가 정말 개과천선해서 살겠습니다! 앞으론 모든 법 다 지키겠습니다! 불쌍한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기회를 주십시오!”

사무실 안에는 기분 나쁜 침묵만 흘렀다.

사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고 지현석도 쳐다보기도 싫다는 것처럼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한참이나 어린 내 앞에서 주저 없이 고개를 숙이는 고송철을 보며 씁쓸해졌다.

그렇게 잃기가 싫은가?

그동안 이룩한 모든 것들이 그렇게 아까운가?

마치 다들 그렇게 산다는 것처럼 말하는데, 멀쩡하게 법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은 다 바보라서 그렇게 사나?

이 사람도 자신이 잘못했다는 걸 알면서 했을 것이다.

걸리지 않을 거라 자신했던지, 만약 걸리더라도 이런저런 방법으로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대표님, 잘 아시는 분이 그랬을 때는 책임질 자신이 있으셨던 거 아니었어요? 모르고 한 것도 아니잖아요. 그리고 회계사님, 저는 정말 이해가 안 되는데요. 웬만한 사건으로는 회계사 자격증 박탈이 안 되거든요? 근데 이렇게 나오신다는 건 본인이 어떻게 되실지 알고 계신 거 맞죠? 그럼 그게 봐주고 말고로 해결이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아실 텐데요.”

고송철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내가 절대 봐줄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는 많이 늦은 것 같지만.

“아니까 이러지, 내가 병신이라서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한테 무릎을 꿇겠냐고! 그냥 세금만 내고 끝날 일이었으면 집을 팔든 대출을 받든 더럽고 치사해서 돈 내고 끝냈다! 한번만 살려달라는데 꼭 그렇게 사람을 죽여야 속이 시원하겠냐!”

고송철이 숨겨왔던 격노를 토해냈다.

사장실이 쩌렁쩌렁 울렸다.

제풀에 지친다고 딱 그 짝이다.

뭐가 그리 분한지 고송철은 씩씩거리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목소리도 참 크네.

나는 고송철을 일으켜 세웠다.

“예예. 이러신다고 해결되는 거 하나도 없구요. 저희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대표님이 하신 거에 대해서만 조사할 거니까, 죽이네 살리네 이런 말씀은 안 하셔도 됩니다. 그냥 감옥 좀 가고 그동안 안 냈던 세금 좀 내시면 될 거예요.”

“야, 이 새끼야! 그게 죽으라는 거랑 뭐가 달라!”

“진짜로 사형 선고 받은 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 해보실래요? 아마 머잖아 만나게 되실 것 같은데. 여쭤보고 어떤 반응인지 좀 알려주세요.”

내 말이 그의 현실감을 일깨웠나 보다.

정말 빼도 박도 못 하고 감옥 가게 생겼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아니야. 아니라고! 제발, 제발 자격증만 좀……!”

“네. 이만하면 되셨죠? 이제 가십시다.”

나는 진상을 대하듯 그의 불만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억지로 고송철을 일으켜 세웠다.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있어서인지 제대로 서지도 못했다.

다리가 저려 후들거리는 고송철을 어떻게 1층까지 데려가나 고민하고 있는데, 마침 2명의 검찰 수사관이 들어왔다.

내가 지현석에게 고개를 돌리자 그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고송철과 이리저리 실랑이하는 동안 지현석이 수사관을 부른 것이다.

하긴, 얌전히 끌려갈 분위기가 아니긴 했지.

지현석의 재빠른 일 처리 덕에 근심을 덜었다.

“어어, 아니야! 잠깐만!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닌지.

제대로 반박은 못하고 의미 없는 말만 늘어놓으며 저항했지만 수사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수사관들이 다리가 후들거리는 고송철을 가볍게 데리고 나간 후 문이 닫히자, 사장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안도의 한숨은 아니겠지.

“사장님. 혹시 고송철 대표님처럼 뭐 준비하신 거 있으세요? 그럼 빨리 보여주시고 끝내죠.”

사장이 무릎을 꿇을 거란 생각은 안 했지만, 그래도 뭔가 반박할 근거는 준비하지 않을까 했다.

원래라면 사장에게도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틈을 끌어냈겠지만, 생각지도 못한 고송철의 무릎 꿇기를 보며 조금 지친 상황이었다.

그건 사장도 마찬가지였는지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냥 탈세한 거 내려고요.”

사장은 순순히 인정했다.

내가 2번째로 방문한 이상 빠져나가긴 글렀다고 생각했겠지.

“다른 혐의도요?”

“그건 그냥 제가 변호사 사서 법원 가겠습니다. 부단장님하고 여기서 싸우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손해인 것 같아서요. 조용히 협조하겠습니다.”

사장은 체념한 듯 한 발짝 옆으로 비켜섰다.

사장실을 뒤지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는 표시다.

오호라, 지금 나랑 싸우기는 싫으니까 나중에 비싼 변호사를 고용하시겠다?

나는 지현석과 시선을 교환했다.

지현석은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이 어떻게 빠져나갈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런 생각을 했던 사람들 모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재판에서 울상을 지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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