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2화. 김기훈의 싸움
김기훈을 보낸 이후, 대한농어촌공사의 임원들의 분위기는 밝았다.
세무조사를 받는 회사의 임원들이 밝다는 건 언뜻 보면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허허! 정말 하늘이 도왔습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거기서 딱 우리 직원이 아는 사람이 공무원이 되어서 마주칠 건 뭐랍니까. 그것도 담당 조사반 반장이라니요!”
“일이 잘 풀리려니 이런 법도 있네요. 저는 그날 재무부 직원이랑 조사관이 아는 척하는 걸 보고 로또라도 살까 진지하게 고민했단 말입니다.”
“이게 다 열심히 하는 우리 이사님들의 정성을 하늘에서 알아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억울하게 당하지 말라는 뜻이죠.”
“허허허, 세무조사 예고장 받았을 때는 어떻게 되나 싶었는데 이렇게 마음이 편안하다니. 참 다행입니다.”
바로 재무부 직원인 김기훈과 조사단 반장 사이에 친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둘 다 공과 사를 구분 못할 사람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임원들이 보기엔 모든 일이 해결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항상 그렇게 살았다.
문제가 발생하면 굳이 원칙적으로 해결할 필요가 없었다.
허가가 막히면 관할 관청을 찾아가서 밥 한 끼를 먹으면 되었다.
함께 밥 먹을 인맥이 없으면 그 관청의 허가권자와 아는 사람을 수소문했다.
이 좁은 대한민국에서는 한 다리, 두 다리 건너다 보면 다 아는 사람이다.
여기 있는 임원들 역시 각자 분야에서 한가락 하다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으로 이어지는 인맥을 타고 들어가면 관계자가 나오곤 했다.
-대학 후배 중에 시청에서 일하다 나온 친구가 하나 있는데, 그 친구한테 물어보면 될 겁니다. 관련 과에 과장이든 계장이든 연결할 수 있을 거예요.
이런 식으로 웬만한 일은 거의 해결이 됐다.
그러다 보니 이번에도 당연히 그렇게 될 거라 믿었다.
“줄을 따로 안 찾아도 돼서 다행입니다. 국세청 쪽은 요즘 다들 사리는 분위기라고 해서 함께 밥 먹기도 힘들다네요.”
“사람 사는 데가 다 똑같은데 뭘 점잔 빼나 모르겠어요.”
“그 부단장 때문이죠. 지금 눈 밖에 나면 국장이고 과장이고 다 잘 려 나가게 생겼으니 납작 엎드려 있는 거죠.”
“에잉, 젊은 사람이라 그런가 유도리가 없어요. 서로 기름칠 좀 하고 좋은 게 좋다고 넘어갈 줄도 알아야 대성하는 법인데.”
“이사님 말씀이 맞습니다. 곧기만 한 나무는 도끼로 찍어 넘어갈 뿐이죠. 바람이 불면 수그릴 줄도 알아야 꺾이지 않는데 말입니다.”
“나중에 풍파 좀 겪으면 사람이 둥글어지겠죠. 원래 젊을 때는 고생도 사서 한다지 않습니까. 지금이야 대 쪽 같은 게 멋있어 보일 나이지.”
한참 신나게 떠들던 이사 중 하나가 어? 하고 이상하단 표정을 지었다.
“잠시만요. 그러면 설마 회계사님이 문전박대당하고 오는 건 아니겠죠.”
걱정스럽게 말하는 그를 향해 다른 임원들이 손을 내저었다.
“어허,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고송철 회계사 그 사람이니까요.”
“그렇게 믿으십니까? 유능한 사람이에요?”
“아니요. 그 사람한테 우리 일은 남의 일이 아니거든요. 목숨을 걸고 임해야 하니 어떻게든 들어가서 협상을 해올 겁니다. 안 그러면 자기도 죽는 걸.”
임원들은 의미심장은 미소를 지었다.
질문한 이사 역시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송철은 한배를 탄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상식적으로 감사보고서를 작성하고 결재를 하면서 장부에 이상이 있는 걸 눈치채지 못할 회계사는 없다.
설마 정말 모르고 결재를 했다면 그건 그것대로 대표 회계사를 하고 있을 자격이 없다.
그리고 이들은 고송철이 감사보고서에 관여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하면.
“우리는 운명 공동체입니다. 고송철 대표는 나중에 잘못되면 빠져나갈 심산으로 감사 보고서에 휘하 회계사 이름을 넣은 모양인데, 어림도 없죠. 고송철 대표가 감사에 참여했다는 증거가 우리한테 있는데.”
이들이 바로 고송철과 손잡고 장부를 조작한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말로는 한배를 탔다고 하면서도 고송철을 믿지 못한 이들은 나름의 약점을 쥐고 있었다.
고송철 혼자 배신하고 빠져나갈 때를 대비해서 말이다.
고송철 본인은 임원들에게 생생한 증거가 있다는 것은 모르지만 수상한 낌새가 보이면 바로 ‘설득’하면 된다.
그 과정에서 고운 말은 나오지 않겠지만.
그리고 이사들이 뭘 쥐고 있는지 고송철이 모른다 해도 상관없다.
본인이 한 짓을 생각하면 최선을 다해 국세청을 설득해야 할 테니까.
“대표님이 잘하고 오셔야 할 텐데 말입니다.”
“그 양반이 다른 건 몰라도 인맥 활용하는 거 하나는 끝내줍니다. 많이 해본 사람이니 괜찮을 거예요.”
“걱정 안 해도 됩니다. 당장 우리 공사에 김기훈이 소식 듣자마자 바로 와서 데리고 간 걸 봐요. 그런 감각 하나는 뛰어난 사람이라니까.”
임원들이 이사 한 명의 사무실에 모여 하하호호 웃고 있을 때 조심스럽게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비서였다.
“이사님들 여기 모여계셨군요. 한참 찾았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혹시 신재현이가 직접 쳐들어왔어요?”
“아니요. 국세청으로 외근 나갔던 재무부의 김기훈 씨가 돌아왔길래 보고드리러 찾아뵈었습니다.”
김기훈이 돌아오면 바로 알려 달라고 지시했던 건 이사들이었다.
그들은 다급하게 손짓했다.
“가서 김기훈이 데려와요. 보고를 들어야겠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비서가 문을 닫고 나가자 이사들은 히죽 웃었다.
하나하나 단계를 잘 밟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김기훈 씨가 외모도 반반하니 괜찮은데 잘 구워삶고 왔겠죠?”
“그럼요. 부단장이 일일이 모든 일을 챙기지는 않을 테고. 기껏해야 결재 올라온 거 검토하고 도장 찍는 정도 아니겠어요? 그러면 결국 담당자가 중요하단 소린데 여기서는 담당 책임자인 그 반장이 관건이죠.”
“그러니 김기훈이랑 고송철 회계사가 얘기만 잘 하고 왔으면 세무조사는 아주 편안하게 넘어갈 수 있다 이거죠?”
“김기훈이 아주 중요한 임무를 띠고 갔네요. 그 친구 이번 일만 끝나면 과장급 달아주는 건 어떻습니까.”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이사님들이 이렇게 열린 사고를 통해 경영하시니 일이 잘 풀리는 거 아니겠습니까.”
자화자찬이 이어지는 가운데, 노크 소리가 들리고 기다리던 사람이 들어왔다.
재무부의 김기훈이었다.
그는 잔뜩 피로에 찌든 얼굴로 대충 인사를 했다.
이사들을 앞에 두고 고개만 까딱하는 모양새가 마음에 안 들긴 했지만 이사들은 너그럽게 이해하기로 했다.
‘비 오는데 먼 길 다녀와서 힘든가 보구만. 국세청에서 심력 소모도 많이 했을 테니 고생했다고 말이라도 해줘야겠네.’
격려라도 해줄 겸 이사는 말을 꺼냈다.
“고생 참 많았습니다. 세무서의 그 아가씨와는 좋은 얘기 나누고 왔나요?”
가볍게 운을 띄운 것뿐이었다.
그런데 김기훈의 얼굴이 죽상이 되었다.
‘어? 뭔가 이상한데.’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좀 불편한 기색은 보였지만 고분고분했던 김기훈이다.
지금은 대놓고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고생했으니까 인센이라도 달라고 시위하는 건가? 거참,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챙겨줄 것을 꼭 이렇게 나서서 초 치는 사람이 있어요.’
이사들도 덩달아 불쾌한 기색을 띠었지만 일단은 김기훈을 달래기 시작했다.
어찌 되었건 중요한 일을 하고 온 사람 아닌가.
“회사를 위해 이렇게 발 벗고 나서주니 왜 전문직이라고 불리는지 잘 알겠습니다. 김기훈 씨의 노고는 절대 잊지 않을 겁니다.”
여전히 김기훈의 표정은 뾰루퉁했다.
어린애도 아니고, 겨우 외근 좀 다녀온 것 가지고 뭘 삐졌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한 성질 급한 이사 하나가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어땠습니까? 고송철 대표와 함께 갔으니 그리 어려울 건 없었지요? 그 사람이 능력은 출중하니 배울 게 많을 겁니다. 김기훈 씨만 괜찮으면 나중에 거기 회계법인에 소개해 줄 수도 있어요.”
회계법인에 회계사만 있는 건 아니다.
세무사도 뽑는다.
그러니 지금 말한 이사는 최대한의 편의를 봐준 것이었다.
정작 본인은 원치 않았지만.
“……출중이요?”
김기훈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것은 상사 앞에서 보이기엔 어울리지 않는 비웃음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 아가씨라고 하셨습니까? 이사님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일찌감치 눈치채긴 했는데. 그날 바로 얘기할 걸 그랬네요. 그랬으면 이런 헛된 꿈은 꾸지도 않으셨을 텐데.”
“뭐요?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이사들이 지나가면 고개를 숙이고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던 김기훈이었건만, 지금은 그 반대였다.
거리낌 없이 본인의 속마음을 다 털어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이사님들은 채유림 반장님과 제가 뭐 그렇고 그런 사이라도 될 거라 생각하십니까?”
“그야 둘이 잘되면 좋은 거 아닙니까.”
“누구한테 좋은데요.”
“두 분한테도 좋고, 우리한테도 좋죠.”
“그래요. 그겁니다!”
김기훈은 냅다 목소리를 높였다.
“저하고 반장님이 친해져서 세무조사나 무사히 넘어가길 바랐던 거 아닙니까! 둘이 잘되면 우리가 좋은 게 아니라 회사에나 좋은 거겠죠.”
“아니, 이 무슨 경우없는 소리를 하나…….”
김기훈이 따지고 들자 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이사가 궁시렁거렸다.
그러나 이미 막 지르기 시작한 김기훈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애초에 이사님들이 왜 제 사생활에 왈가왈부합니까? 저와 반장님의 개인적인 의견은 물어보셨습니까? 그리고 정말 만의 하나 저희 둘 사이에 뭔가 있다고 칩시다. 그런다고 공과 사를 혼동해서 세무조사에 영향을 줄 것 같습니까? 저는 세무사고, 저쪽은 국세청의 조사단 반장인데?”
“크흠. 우리는 그저 좋은 뜻으로 말한 것뿐입니다. 김기훈 씨가 좀 삐딱하게 들은 것 같은데.”
“아니요. 삐딱한 건 이사님들입니다.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장부는 은근슬쩍 손을 대놔서 빼도 박도 못하게 생겼는데, 그걸 저더러 조사단 반장을 꼬여서 적당히 무마하라 이거 아닙니까!”
말하다 보니 감정이 북받쳤는지 김기훈이 울컥했다.
오랜만에 만난 동기에게는 부끄러운 모습만 보이고, 세무사로서의 자존심마저 꺾였다.
아무리 회사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지만 부정한 회계 공작을 덮으려 학원 동기까지 팔았다는 것이 치명타였다.
차라리 스스로 원해서 그런 거면 반성할 여지라도 있지.
등 떠밀려 간 곳에서 개망신도 그런 개망신이 없다.
“제일 글러먹은 건 이사님들 아닙니까!”
“어허, 김기훈 씨!”
이사들이 덩달아 소리를 질렀지만 김기훈은 멈추지 않았다.
“그 회계사요? 이사님들이 그 사람을 얼마나 믿는지는 모르겠는데, 오늘 가서 개망신당한 건 저만이 아닙니다. 고송철 회계사, 그 사람은 앞으로 부끄러워서 고개도 못 들고 다닐 거예요. 까마득하게 어린 공무원이라고 무시할 땐 언제고 정작 그 공무원한테 겁먹어서 벌벌 떠는 꼬락서니라니. 이사님들이 직접 보셔야 하는데 참 안타깝습니다.”
“잠깐,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고송철 대표가 뭘 어쨌다고요?”
“저 혼자 온 걸 보면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연락도 안 왔죠? 고송철은 가자마자 공사를 버리려고 했습니다. 자기는 아무 잘못도 없고, 공사와 부하 직원들이 알아서 한 일이라고요. 내부 고발자 자격으로 왔대요. 그 양반이. 퍽이나, 내부 고발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이사님들도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고송철 회계사님이 언제 내부 고발이랍시고 뒤통수칠지 몰라요. 혼자만 살아남으려고 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의뢰인이 개판이어도 그렇지, 의뢰인을 팔아먹는 전문직이 어디 있나. 그 인간이 가장 쓰레기예요.”
“고송철 그 사람이…… 내부 고발을 하려고 했다고요?”
이제 김기훈이 난리치는 것은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고송철이었다.
설마 싶다가도 김기훈이 분노로 길길이 날뛰는 것을 보자 그럴 수도 있다는 쪽에 생각이 기울었다.
그렇다면 김기훈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틈이 없었다.
“아, 알겠습니다. 김기훈 씨의 고생은 우리가 잘 들었으니 일단 돌아가 있으세요.”
“돌아가 있긴요.”
김기훈은 정장 안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흰 봉투였다.
“이게 뭐 하자는 겁니까?”
김기훈은 심호흡을 했다.
그의 머릿속에 세무사 합격 후 일해온 지난날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채유림 씨 공무원 시험 본대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공무원 연금도 옛말이지 지금은 돈도 못 벌고 고생만 죽어라 하는데. 차라리 필드 뛰면서 경력 쌓고 몸값 올리는 게 낫지.
몇 년 전 채유림의 소식을 듣고 비웃었던 것도.
-와, 조사단 됐구나…….
오랜만에 만난 동기가 그 유명한 조사단의 일원이 되어 당당하게 공사로 들어왔을 때 느낀 그 부러움도.
그리고 국세청에서의 부끄러움도.
김기훈은 이사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까 들어올 때도 하지 않았던 인사였고, 작별의 뜻으로 하는 인사였다.
“사직서입니다. 재무제표에 손대는 데다 그 수습 방법까지 아주 기상천외하셔서 세무사로서의 제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네요. 이상의 이유로 사직을 청합니다.”
“어! 김기훈 씨, 잠깐만!”
당황한 이사들이 고송철에게 전화를 하려다 말고 김기훈을 붙잡았다.
그러나 그는 돌아보는 법이 없었다.
이사의 사무실을 박차고 나오는 김기훈의 얼굴은 한결 개운해 보였다.
이미 해가 저물어 어둑어둑한 복도를 걷던 김기훈이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날이 개어 구름 사이로 달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김기훈은 가만히 중얼거렸다.
“나도 7급 공무원 시험이나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