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441화 (441/500)

441화. 채유림의 싸움 (4)

공무원이란 틀에 박힌 사고방식을 가질 때가 많다.

폐쇄적인 조직 분위기 때문에 다들 그렇게 된다.

거기에 채유림의 경우에는 전문직 출신이었기 때문에 뭘 하든 논리와 합리를 찾으려고 했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전문직으로서는 좋은 덕목이니까.

그러나 여긴 조사단이었다.

‘평소 내가 하던 식으로는 안 돼.’

고송철이 별말도 안 되는 얘기로 우기기 시작했을 때부터, 채유림은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온해 보이지만 그것은 필사적으로 표정 관리를 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여기서 휘말리면 끝이라는 걸 알면서도 고송철의 말을 반박할 증거가 없었다.

증거, 그게 문제다.

‘팀장님도 세법을 적용할 때는 항상 근거를 들어서 상대가 파고들 여지를 완전히 차단하니까.’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반박할 수 없는 근거를 들이밀고 완벽하게 이기고 싶었다.

그러나 고송철은 막무가내로 나오기 시작했다.

게임을 하자고 테이블에 앉았는데 룰에도 없는 말을 멋대로 움직이는 기분이다.

이걸 논리로 어떻게 이긴단 말인가.

그러다 펜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맞다. 팀장님이 계셨지.’

원래 알고 있던 사실인데도 잊고 있었던 기분이 든다.

채유림은 혼자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시야 바깥쪽에 어른거리는 직원들은 고개를 빼들고 이쪽을 보고 있었고, 신재현은 아예 한 손을 반갑게 흔들었다.

재밌는 구경이라도 하는 모양새다.

‘난 머리 아파 죽겠는데 진짜 여유로우시네.’

그랬다.

신재현은 여유만만했다.

남 일이라서 그랬을까?

아니, 신재현에게 있어서는 고송철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새삼 그 차이를 느끼면서도 채유림은 갑자기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어차피 뒤에 팀장님도 있잖아. 정 안 되면 도와주시겠지.’

신재현이 가만히 있는 걸 보면 아직까지는 잘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다른 것이 보였다.

마음이 급했을 때는 시야가 좁아져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다.

예를 들어 고송철이 남에게 뒤집어씌우려 해도 실제 감사보고서에는 담당자가 남는다는 것 말이다.

그걸 짚어내자 고송철은 맞다고 인정했다.

‘말실수했네.’

채유림이 눈을 반짝이며 틈을 파고들려는 순간, 고송철 역시 한 발 옆으로 피했다.

가까이 있는 채유림은 알 수 있었다.

고송철의 눈에 아차 하는 기색이 스쳐 지나간 것을.

그리고 이어지는 ‘내부 고발자’ 운운하는 것에서 채유림은 마음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화를 낼 단계도 지났다.

‘내부 고발자? 당신이?’

고송철이 뭐라고 말을 하든 채유림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고, 들을 가치도 없는 것들이었다.

‘이걸 내가 지금 들어줘야 해? 그냥 확 받아버리면 안 되나?’

고송철의 선량한 고발자 행세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채유림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다 고송철이 신재현을 가리키는 것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신재현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채유림은 조사단에서 겪은 다른 조사 건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를테면 국회의원이나 시장을 신나게 조사했던 일 말이다.

그들 중에도 헛소리하는 사람은 몇 있었다.

사람이라는 게 궁지에 몰리면 다들 이상한 논리를 펴게 마련이니까.

신재현이 그때마다 어떻게 했더라?

‘제가 볼 때, 각을 잘 보는 게 중요해요.’

채유림이 높으신 분들 상대하는 거 두렵지도 않냐고 했을 때, 신재현은 그렇게 말했었다.

‘들이박을까? 중립? 일단 엎드릴까? 그런 각이요. 그 왜 반장님도 그런 적 없으세요? 아, 여기서는 고개를 숙여야겠구나. 아니면 저놈은 여기서 족쳐야겠다, 같은 감이요.’

그 각이라는 걸 어떻게 구분하냐고 묻자 신재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꿀리는 거 없으면 들이받아요.’

거기까지 떠올린 채유림은 눈을 번쩍 떴다.

눈앞에는 여전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는 회계사가 있었다.

채유림은 무릎 위에 올려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신재현이 그랬듯 어깨를 펴고 고개를 살짝 들었다.

약간 위쪽에 위치한 고송철과 시선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입가에는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고 눈에는 경멸을 담았다.

이어서 채유림은 지극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헛소리는 그만하시겠어요?”

고송철의 주절거림이 단번에 멎었다.

할 말을 잊은 듯한 얼굴이었다.

그야 까마득하게 어린 직원에게서 그런 얘길 들으니 자존심이 상할 만도 하다.

고송철은 그간 자신이 했던 말을 전부 까먹어 버렸다.

“뭐, 뭐요? 지금 그건 무슨 말입니까?”

처음으로 고송철이 말을 더듬었다.

감정적이 된 것이다.

그건 곧 흔들린다는 뜻이기도 했다.

채유림은 오만하다고까지 보일 정도로 의연하고 차갑게 말했다.

“회계사님도 아시듯이 저는 바쁜 사람이에요.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무슨 중요한 일이겠거니, 해서 손님으로 맞은 거라고요. 그런데 제가 지금 이런 쓸데없는 말을 듣고 있어야 하나요?”

“아니, 이 사람이 지금 뭐라는 거예요?”

지켜보던 직원들이 눈동자를 데록 굴렸다.

‘저래도 되나? 반장님이 원래 저런 말투를 했나?’

‘어…… 저건 조금 싸가지 없어 보이지 않나?’

들이받는다는 것을 과하게 앞서 나간 채유림의 실수였다.

처음이라 어조를 조절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려하는 직원들과는 달리 신재현은 차라리 이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주눅 들 바에는 차라리 엎어버리는 게 낫지!’

신재현이 흥미롭게 지켜보며 응원하는 가운데, 채유림은 무언가 해방되는 느낌을 받았다.

속이 시원하다고 해야 하나.

할 말, 못할 말 구분하며 항상 논리를 찾던 채유림으로서는 일탈에 가까운 행위였다.

그것은 동시에 또 다른 자신감을 주었다.

“아, 화내시기 전에 제 말을 먼저 들으세요. 화내야 할 건 저니까요.”

아까 고송철이 그랬듯, 아예 그의 말문을 틀어막았다.

그대로 되돌려 준 것이다.

‘어쭈?’

고송철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감사보고서에는 담당 회계사의 이름이 들어갑니다. 그건 곧 저희도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저희가 가장 먼저 보는 게 감사보고서와 신고서니까요. 저희가 조사 결과 이상이 발견되면 당연히 담당 회계사님께 연락을 드릴 겁니다. 그럼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대표님은 대체 왜 오신 건가요? 이미 저희도 아는 담당 회계사 이름을 알려주러?”

“아니, 그건 아까 말했다시피 내부…….”

“아니죠. 그 회계사들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싶었던 겁니다. 내부 고발이라는 그럴듯한 단어를 써서 대표님 자신을 포장하려 한 거예요. 모든 건 부하들 잘못이다, 나는 선의의 피해자다. 보여주고 싶었던 건 그거죠?”

“……조사관님. 억측은 삼가 주십시오. 명예훼손입니다.”

어조를 조절하지 못한 채유림이 조금 세게 말한 탓일까, 고송철은 소송으로 협박해 왔다.

채유림은 잠시 움찔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여기서 주춤하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그리고 신재현이 뒤에 있다는 데서 오는 든든함도 있었다.

“그래요? 다른 식으로 반박하지는 못하시나요? 예를 들어서 대표님은 정말 몰랐다는 증거를 든다거나.”

신재현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격의 흐름이 바뀐 것이다.

아까는 고송철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채유림 쪽에서 증명해야 하는 분위기였는데, 지금은 반대였다.

고송철은 지금 당장 증거를 찾아다 내놓지는 못하더라도 자신이 무죄라는 근거를 내밀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황적으로 꽤 불리해질 것이다.

한마디로 증명의 의무가 고송철에게 넘어간 것이다.

신재현이 흥미진진한 얼굴을 했다.

그는 이제 아예 의자에 등을 편안히 기대고 있었다.

그 모습이 고송철에게는 매우 거슬렸다.

‘저, 저놈 뽄새하고는! 나 정도는 한참 어린 직원 한 명 정도면 충분하다 이거야?’

고송철은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일단 채유림에게 면박당한 게 컸다.

그가 보기에 채유림은 한참 어리고 경험도 부족한 쩌리에 불과했다.

자신쯤 되면 원래 과장급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가지고 하하호호 존중받는 대화를 나눠야 옳았다.

‘조사단이라고 해봤자 신재현 빼면 시체 아냐? 거기다 세무사라 이거지. 어디 필드에서 만났으면 나랑 눈도 못 마주치고 고개나 굽실거렸을 것이…….’

거기에 화룡점정으로 신재현의 태도도 한몫했다.

저 눈빛과 자세는 딱 자신이 재롱떠는 손주들 볼 때의 그것을 떠올리게 했다.

‘아니, 지가 조사단 부단장이면 부단장인 거지. 저건 또 뭐야? 내가 구경거리냐?’

고송철은 조용히 씩씩대기 시작했다.

여기서 흥분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좀처럼 감정이 조절되지 않는 것이다.

‘이 같잖은 새끼들이!’

고송철이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자 채유림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내가 그렇게 정곡을 찔렀나? 사실 나 말싸움에 재능 있는 건 아닐까?’

그러다 고송철이 신재현 쪽을 바라보며 얼굴을 푸들거리는 걸 보고 바로 생각을 접었다.

‘아. 팀장님이 동요시키셨나 보다.’

조용히 지켜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도와주고 있을 줄은 몰랐다.

고송철의 눈에 핏발이 곤두섰다.

예전에 신재현과 기 싸움 하려다 진 것에서부터 현장조사,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도 한계에 봉착해 있었다.

참을 수 있는 한계 말이다.

채유림은 의자를 한 발짝 당겨 앉았다.

중간에 껴 있던 김기훈이 주춤거리며 뒤로 의자를 밀었다.

채유림은 그 눈을 보며 재차 물었다.

“대표님. 지금 어딜 보고 계세요? 중요한 얘기 하러 오신 것 아닌가요?”

“거참, 시끄러우시네. 여긴 내부 고발자 대접이 이렇게 박합니까?”

다시 원래 논리로 돌리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채유림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말려 올라가고 눈이 호선을 그렸다.

재미있는 광경을 볼 때처럼, 채유림은 즐겁게 웃었다.

“푸흡. 대표님은 내부 고발자가 아니시잖아요. 왜 내부 고발한 척을 하세요?”

잘 걸렸다, 하는 얼굴로 고송철이 눈을 치켜떴다.

“뭘 근거로 그런 말을 합니까? 조사관님이야말로 근거를 대 보시죠.”

“저희가 모르는 사실을 폭로하러 오셨으면 내부 고발이었겠죠. 근데 아까 말씀드렸듯 감사보고서는 이미 알고 있어요. 그럼 패는 이미 다 까졌잖아요. 대표님은 더 보여주실 게 없나요? 그게 다예요?”

조금 강한 어조였지만 매우 효과적이었다.

약 올리는 것처럼 말하는 채유림에게 고송철이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는 다 사람 무시하는 집단입니까! 사람 깔보는 게 조사단이에요? 그렇게 잘났냐고! 조사관님만 해도 그렇습니다. 저는 진지하게 거래를 하러 온 겁니다. 그걸 당신은 무시하고……! 왜 당신 같은 사람이 일을 맡은 건지 이해가 안 가는군요. 실망입니다!”

고송철이 그나마 반말로 욕설을 내뱉지 않은 것은 최소한의 이성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건 고송철의 입장이었고, 조사단원들이 듣기에는 충분히 무례한 말이었다.

아까 채유림이 과하게 밀어붙인 감이 있어서 누가 뭐라 하진 못했지만 대신에 싸늘한 눈빛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어…….”

고송철은 순간 여기가 국세청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공무원들이 돌변한 순간, 분위기가 한겨울처럼 변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노려보는 것이 아니라 잡아먹을 듯 눈에 살기가 어려 있었다.

‘어, 잘못 건드렸나.’

차가운 정적과 그사이 들리는 빗소리에 이성을 되찾은 고송철이 수습하려는 순간, 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가에 있는 자리에서였다.

“고송철 회계사님.”

누군지 안 봐도 뻔했다.

이미 회계법인에서 2번이나 마주쳤고, 이제는 더 만나고 싶지 않은 인물이었다.

고송철은 마른침을 삼키며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다.

청년은 창문을 등지고 앉아서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그리고 책상 위로 손을 올려 깍지를 꼈다.

순간 뒤에서 번쩍, 하고 번개가 치며 사방을 밝혔다.

청년의 얼굴에 잠시 그림자가 졌다가 원래의 광량을 되찾았다.

그 잠깐 사이에 고송철은 악마를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날씨 때문인지 이 사무실만 외딴 곳에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밖은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비현실적인 풍경 속에서 신재현만이 웃었다.

상큼하게.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 이런 기분이라니.

고송철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되지만 감정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 순간의 마력이라고 할까.

고송철은 단 한순간에 신재현에게 제압당하고 있었다.

“대표님. 그럼 제가 맡을까요? 대표님 입에서 불만 안 나오도록 깔끔하게 처리할 자신 있는데.”

저 환한 웃음과 말뜻이 어울리지 않아서 기괴함마저 느껴졌다.

고송철은 필사적으로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여기 이 조사관님의 현명하신 판단도 마음에 듭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것처럼 말이 꼬였다.

신재현은 깍지를 낀 채 물었다.

“그럼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아닙니다. 용건은 끝났습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축객령을 내리기도 전에 고송철은 서둘러서 일어섰다.

김기훈도 얼떨결에 따라 일어났다.

고송철은 주위를 돌아보지도 않고 헐레벌떡 문으로 향했다.

혹시라도 정말 신재현이 맡겠다고 할까 봐 겁이 나는 것이다.

김기훈은 털레털레 발걸음을 옮기다가 문을 앞에 두고 잠시 뒤를 돌았다.

채유림을 일별한 그가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밖으로 나갔다.

탁, 문이 닫히자 채유림이 의자에 주저앉으며 뒤를 돌았다.

신재현은 1반 반장을 향해 가만히 양손을 들어 보였다.

쌍따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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