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0화. 채유림의 싸움 (3)
일단 듣는 귀가 이렇게 많은 데서 대놓고 저런 말을 하는 배짱은 인정한다.
어차피 안 될 거라고 생각하고 그냥 던져본 건지, 진지하게 고민한 결과인지는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어이가 없어서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고송철이 저런 말을 했다면 뭔가 노림수가 있다는 생각에 경계했을 텐데, 상대가 김기훈이다 보니 그다지 위험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내 생각은 이랬다.
김기훈은 딱히 용건이 있어서라기보다 고송철의 가교 역할로 온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의 직함 때문이었다.
세무사는 물론 재무 책임을 맡을 자격이 있는 자격증이었지만 대한농어촌공사에서는 일반 직원에 불과했다.
내부적으로는 팀장이라고 하는 것 같긴 한데, 그건 책임자라는 뜻이 아니었다.
재무부의 어느 한 부문을 맡고 있다는 거지.
조사를 시작하면서 대한농어촌공사의 조직도 파악은 이미 끝냈다.
고송철이 말한 대로 책임자라고 이름을 댈 거면 자산재무처장이나 재무부장이 왔어야 했다.
대한농어촌공사의 본사에는 기획관리이사 밑에 자산재무처가 있고, 또 그 안에 재무부가 있기 때문이다.
김기훈은 재무부의 직원이고.
공사에서 정말 책임을 지고 협상해오길 원했다면 결정권이 있는 윗사람을 보냈을 것이다.
김기훈이 아니라.
그러니 실질적으로 국세청에 용건이 있는 것은 고송철일 것이다.
-270억 내고 끝냅시다.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해도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일부러 예고도 없이 찾아와 협상 테이블을 깔았다.
그 상황에서 270억을 내겠다면, 그게 정말 탈세액 전부일까.
협상이란 자신의 패를 다 보이지 않는 법이다.
270억을 제안했다면 그들이 계산한 탈세액은 훨씬 더 많이 나온다는 뜻이 된다.
270억을 계산해서 그걸 진짜 전부 다 낼 사람들 같았으면 진작 탈세는 안 했겠지.
전체 계산한 금액 중에 ‘우리 이것만 내자’고 결정한 금액 선이 270억이었을 것이다.
그걸 채유림은 파악했을까.
나는 일부러 끼어들지 않았다.
여기서 채유림이 270억이라는 금액에 홀릴 만한 사람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내막은 파악하지 못했더라도, 딱 봐도 뒤가 구린 제안을 받아들일 리가 없다.
역시나 채유림은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조기 결정이라는 말은 그렇게 쓰는 단어가 아닌데요.”
아, 그게 문제였구나.
나는 손님이 온 이후, 처음으로 괴고 있던 왼팔을 떼어 머리를 긁적였다.
올바른 단어의 사용은 물론 중요하긴 하지.
게다가 조기 결정이란 말은 세법 용어니까.
“저희가 결정 통지서 보내 드린 후에 납세자분이 ‘불복하지 않겠다, 대신 빨리 결정해서 고지서를 달라’고 하는 게 조기 결정이에요. 결정 통지서와 고지서가 나가는 그 사이, 약 한 달 동안 가산세가 추가로 붙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요. 납부불성실 가산세는 하루에 얼마씩 이자처럼 붙으니까.”
채유림은 책망하듯 설명했다.
세무사인 김기훈이 더욱 잘 알고 있을 텐데도.
“일반인도 아니고 세무사잖아요. 그러면 용어를 정확히 구분해서 써야죠. 그 중요성을 잘 아시는 분이.”
채유림은 조금 감정적이 된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랜만에 만난 동기가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면 한마디 하고 싶어질 만하다.
김기훈이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단어를 잘못 썼군요.”
그래도 잘못을 인정할 줄은 아는 사람이었다.
여기서 ‘대충 뜻 알아들었으면 된 거 아닙니까’라고 했으면 채유림은 아예 등을 돌렸을 것이다.
하지만 김기훈이 사과했기 때문인지 채유림은 짧게 한숨을 쉬더니 그를 향해 돌아앉았다.
“270억이라고 하셨죠? 안 될 걸 알면서 한 번 찔러본 거라 생각할게요. 안 그러면 말이 안 되니까.”
채유림의 말은 날카로웠다.
한마디 할 때마다 김기훈은 보이지 않는 바늘에 찔리는 것처럼 움찔 떨었다.
고개를 들지 못하는 걸 보니 본인이 던진 말이 얼마나 헛소리인지도 자각하고 있는 듯했다.
“첫째로, 다른 세무서에서는 그런 방법이 통하셨는지는 몰라도 조사단에서 그런 협상은 없습니다. 무조건 세법에 맞게 할 거예요. 거기에는 조금의 여지도 없어요.”
“네. 이해합니다.”
간혹 지방청이나 세무서의 조사과에서 저런 협상을 하는 경우가 있긴 하다.
세무 공무원이라고 납세자의 돈을 쪽쪽 빨아내는 게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납세자는 적이 아니다.
따라서 죽을 때까지 과세하기보다는 어느 정도 선에서 멈추는 공무원도 꽤 있었다.
자산 현황과 납부 능력을 고려한 후에 감당할 수 없는 수준까지 가면 더 파고들지 않는다.
예를 들어서 ‘접대비는 여기까지만 보겠습니다’라거나 ‘지급수수료는 건들지 않겠습니다’ 하고 물러나는 식이다.
세무조사 결과 대출 받아서 세금 내거나 집 팔아서 세금 내는 사람도 있는 상황이다 보니, 과하게 잡았다간 정말 사람이 죽을 수도 있어서다.
어떻게 보면 공무원도 몸을 사리는 것이기도 했고, 반대로 보면 자상한 배려였다.
그러나 조사단은 다르다.
기본 몇십억 단위에, 다른 조사과가 손대지 못하는 거물만 잡는데 거기에 무슨 배려가 필요하단 말인가.
안 낸 놈이 나쁜 거지.
“둘째로, 김기훈 세무사님께 그만한 전권이 있는지 의문이네요. 만약 여기서 대한농어촌공사의 납세액을 조정할 수 있다 치면 김기훈 세무사님이 그 금액을 협상할 수 있나요? 제가 270억은 적으니 300억을 내시라고 하면, 세무사님이 결정을 내릴 수 있나요?”
채유림의 말은 날카로웠다.
아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렇다고 분노라거나 경멸 같은 사적인 감정이 들어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공적으로 ‘세무사’를 질타하고 있었다.
김기훈이 입술을 깨물었다.
“셋째로, 이 얘기를 하려고 왔다기엔 이해가 안 가는 점이 있습니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 몇 시간을 달려 공사에서 국세청까지 왔잖아요. 그것도 약속도 없이 갑자기 오더니 한다는 말이 270억만 내겠다? 혹시 아직 내밀지 않은 또 다른 협상 카드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쓰시는 게 낫겠어요. 잘못하면 테이블 자체가 엎어질 테니까요.”
오, 방금 그건 꽤 괜찮았다.
가만히 지켜보길 잘했다.
채유림은 흔들림 하나 없이 쏘아붙이고 있었다.
반면 김기훈은 완전히 바보 취급당했다.
모든 것이 채유림의 승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김기훈은 정곡을 찔린 것처럼 이를 악문 채 듣기만 할 뿐이었다.
그의 얼굴에 분노와 부끄러움이 뒤섞였다.
그리고 그 방향을 고송철에게 돌렸다.
“용건이 있던 건 회계사님 아니었습니까? 하실 말씀 없으시면 저한테는 왜 오자고 했습니까?”
내 짐작일 뿐이었는데 그게 맞았네.
김기훈은 그저 가교 역할로 선택돼서 고송철에게 끌려 온 것뿐이고.
그래서 갑작스럽게 질문을 받자 딱히 준비되어 있지 않은 김기훈이 다급하게 떠올린 것이 270억이었나.
“책임자는 김기훈 씨 아닙니까. 저는 그저 대리인일 뿐인데요.”
고송철은 가늘게 웃었다.
먹잇감을 발견한 뱀이 떠오르는 미소였다.
이 상황에서 웃어?
나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이제 제 차례인가 보군요. 저는 대리인인 회계법인 고송의 대표로서 책임을 지기 위해 왔습니다.”
책임이라.
그와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정말 책임을 지기 위해 왔다면 고송철은 회계사 자격증부터 박탈당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서 피어나는 미소를 봤을 때, 그런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다른 속셈이 있다는 건데.
“저희 회계법인에서 근무하던 두 명의 회계사가 돈과 명예에 눈이 멀어 전문가로서 해서는 안 될 일에 손대고 말았습니다. 저는 대표로서 깊게 그 책임을 통감하고 조사 협조를 하러 왔습니다. 저희 직원이라 해서 감싸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잘못은 잘못이니까요.”
나는 가만히 고송철을 보았다.
이게 무슨 소리야.
나뿐만이 아니었다.
채유림과 김기훈도, 각자 일하던 직원들도 고개를 들고 고송철을 보았다.
이해를 못한 건 아니었다.
고송철의 말이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잠시 생각을 멈춘 것이다.
“그러니까.”
채유림이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 직원들이 했다는 말씀이신 거죠? 대표님은 모르는 일이고?”
채유림은 돌려 말하는 것도 잊은 듯했다.
아니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돌려 말할 생각이 안 드는 건지도 모른다.
“네. 이 모든 게 다 제대로 관리 감독하지 못한 제 불찰입니다.”
자기는 몰랐다며 부하 회계사에게 다 덮어씌우고 빠져나가겠다고?
요즘 세상에도 이런 놈들이 있나?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이 쓰인 방법은 성공 확률이 높기 때문에 많이 쓰이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당장 고송철의 주장을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온 겁니다. 갑작스럽게 찾아뵌 것은 저도 고민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결심이 선 순간, 더 시간을 들였다간 마음이 바뀔 것 같아서 무작정 국세청으로 온 겁니다. 저는 회계사로서 아무리 같은 회사 사람이라고 해도 법에 따라 심판을 받도록 말씀을 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송철은 매우 당당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어떤지 뻔히 알 텐데.
오히려 이렇게 나오니 뭐라 당황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처음으로 채유림이 흔들렸다.
채유림이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아니다.
충분히 잘해줬다.
하지만 그녀는 저런 종류의 인간을 많이 만나본 경험이 없었을 것이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 박박 우기는 인간 말이다.
고송철은 모순투성이인데, 오히려 바늘 하나 들어갈 틈새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 괴리감에 당황하게 되는 것이고.
저런 놈을 상대할 때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는 게 최선이다.
그리고 똑같은 놈이 되어서 박박 우겨줘야 하는데.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판단을 앞세우는 채유림에게는 천적이었다.
“아니, 뭐 이런…….”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끄집어 올린 것 같은 말투였다.
그 뒤에 무슨 단어가 붙을지는 뻔했다.
채유림은 문장을 마저 뱉는 대신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흘렀다.
이제는 사무실의 직원들 모두 못 들은 척할 생각도 않고 있었다.
우리는 노골적으로 고송철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침묵은 채유림이 아까 기선제압을 하기 위해 일부러 무시했던 것과 명백히 달랐다.
말문이 막힌 것이다.
그걸 눈치챈 고송철의 입가에 아까와는 다른 종류의 미소가 서렸다.
나설까?
찰나의 고민이 스쳤다.
-우뚝.
나는 형광펜을 돌리던 손을 멈췄다.
펜이 중력을 따라 흘러내렸다.
나는 일부러 펜을 잡지 않았기 때문에 펜은 손을 벗어나 바닥으로 떨어졌다.
-똑, 또르르.
조용한 가운데 펜은 요란하게 바닥을 굴렀다.
파편이 튀는 걸로 봐서는 뚜껑 부분이 깨졌는지도 모르겠다.
펜 하나의 희생은 효과적이었다.
채유림은 정신을 차린 듯 물었다.
다행히 고송철이 주도권을 완전히 가져가기 직전의, 아직 늦지 않은 타이밍이었다.
“제가 알기로 감사 보고서에는 입회한 회계사의 이름이 들어가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잘 아시는군요. 거기에 이름이 올라간 회계사들입니다.”
여기를 잡아야 해.
나는 텔레파시를 보내는 기분으로 채유림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보았다.
실제로 내 마음을 읽은 건 아니겠지만 채유림은 기세가 되살아났다.
“그럼 또 말이 안 되는데요.”
“무슨 말씀이신지.”
주도권을 놓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고송철은 승부수를 던지는 사람처럼 채유림이 말할 시간도 주지 않고 몰아붙였다.
“조사관님 말씀도 그렇고 태도도 그렇고 정말 이상하네요. 너무 적대적으로 대하시는 거 아닙니까? 저는 팔다리가 끊어져 나가는 심정으로 동료 회계사들의 잘못을 고백하러 온 겁니다. 내부 고발자란 말이에요. 저기 있는 그쪽 팀장님처럼 말이죠.”
논점 흐리는 실력이 아주 훌륭하다.
고송철이 내 쪽을 가리키기에 나는 손을 흔들며 웃어주었다.
고송철이 잠시 미친놈 보듯 하더니 헛기침으로 다시 주의를 자신에게 돌렸다.
“그러니까 그런 눈으로 보는 건 그만하시죠. 저는 어디까지나 선의로, 내부 고발자로서 온 겁니다.”
말싸움을 할 때는 단어 선정도 중요한 법이다.
고송철이 ‘내부 고발자’라는 단어를 선택한 순간부터 그는 자신이 선의의 피해자인 것처럼 프레임을 짜고 있었다.
그 논리가 완성되기 전에 깨야 하는데, 아마 논리로 접근해서는 힘들 것이다.
나였다면 이렇게 말했을 텐데.
“헛소리는 그만하시겠어요?”
개소리 하지 말…… 어?
나는 순간 내가 소리 내어 말한 줄 알았다.
하지만 들린 목소리는 여자의 것이었다.
완성되어 가는 고송철의 프레임을 헛소리로 일축한 것은 채유림이었다.
“오…….”
나는 고송철이 방문한 이후 처음으로 목소리를 냈다.
전형적인 공무원 같던 채유림이 저런 방법을 쓸 줄이야.
문득 나는 아까 채유림이 김기훈을 질타할 때 쓰던 말투를 떠올렸다.
첫째, 둘째, 셋째.
숫자를 세며 근거를 드는 것, 그리고 방금처럼 상대의 논리를 틀 밖에서 깨버리는 것.
내 싸움법과 꽤 닮아 있었다.